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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한국적인 것이란 무엇인가

 

2009.10.16.금요일
나나

 

도널드 후테라를 만난 건 극단 모시는 사람들의 연극 강아지 똥 공연이 끝난 뒤였다. 내가 한국인이라는 걸 밝히자 그는 작년 서울국제무용제(SIDance)의 초청을 받아 서울에 다녀온 경험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마지막 공연이었고, 사람들로 극장 앞은 부산했다. 아버지의 손을 잡고 온 꼬마는 연극 포스터 앞에서 사진을 찍고 싶어했고 도널드와 일행인 콜린은 극장을 떠나기가 아쉬운 눈치였다.

 

다음날, 도널드의 초대로 그의 아파트에서 인터뷰를 가졌다. 2주가 좀 넘는 시간동안 에딘버러에서 82개의 공연을 보고 마감을 마친 그는 많이 지쳐보였다. 

 

 

 


 

 

 

강아지 똥을 본 소감은 어떻습니까? 이 연극은 한국의 유명한 베스트 셀러 동화를 각색한 연극입니다. 당신을 만나 이야기를 듣고 싶었습니다. 과연 한국의 이야기, 서사의 힘이 어떤 식으로 당신에게 다가갔는지, 언어가 통하지 않는 당신에게 미지의 연극은 어떤 이미지를 남겼는지 이야기해 줄 수 있나요?

 

내가 본 공연중에 <강아지 똥>은 나를 울게 한 유일한 작품입니다. 알다시피 나는 무용을 위주로 한 공연 전문 저널리스트이자 비평가입니다. 지겹도록 많은 공연을 보는 것이 내 일이에요.

 

이 곳에 와서도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루도 쉬지 않고 숱한 공연을 보았습니다. 나는 어지간한 공연에는 쉽게 눈물을 흘리거나 심장이 떨린다거나 하는 감동을 받지 못합니다. 많은 공연을 보다보면, 사람이 무뎌지니까요. 그리고 비평을 해야한다는 생각에 최대한 이성적인 자세로 공연을 보려고 노력하죠.

 

그 이성적인 판단을 바탕으로 리뷰를 씁니다. 그런데 강아지 똥은 내가 울고 있다는 걸 의식할 겨를 조차 없이 나를 온통 뒤흔들고 지나갔습니다. 언어가 통하지 않는 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극장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있노라면 움직임과 음악, 그리고 공연 자체가 피부에 와 닿아요. 배우들이 하는 대사를 다 알아듣지 못하는 건 괜찮습니다. 오히려 미지의 세계에 모험을 떠나는 기분이 들어서 흥분이 되곤 합니다. 그 아름다운 움직임, 하찮고 추하며 더럽다고 여겨지는 강아지 똥이 다른 한 생명으로 다시 재생되는 순간의 감동은 말로 다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좋은 이야기가 가진 힘은 크고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영역을 압도할만큼 강합니다. 움직임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는데 무용공연만큼은 반드시 극장에 가서 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영상이나 2차적인 매체로는 그 움직임이 다 전해지지 않지요. 사람의 몸이 만들어내는 에너지는 선명하고 명료하지만 음악이나 연극, 오페라등과 비교하면 2차 매체에서 접할 때의 아쉬움이 큽니다. 결국 당신은 연극 <강아지 똥>의 내재된 무용적인 요소에 반한거군요.

 

그렇습니다. 나는 작년에 서울국제무용제의 초대를 받아 서울에 갔습니다. 시내 한복판에 있는 절에 갔어요. 큰 빌딩숲이 있는데 그 옆에는 또 절이 있더군요. 서울은 놀라운 도시였습니다. 우린 그 절에서 많은 경험을 했습니다. 그때 받은 염주는 나는 늘 지니고 다닙니다. 한국 전통 악기를 다뤄보기도 했지요. 이름을 모릅니다만 이렇게 악기를 걸머지고 움직일 수 있습니다.

 

(염주에 적힌 글자를 보고) 봉은사에 다녀왔군요. 북을 직접 연주해보았다니 기분이 어땠나요?

 

서양악기와 동양의 악기들은 소재가 다르므로 그 소리의 느낌이 참 다릅니다. 신비롭다고 말하기엔 다 표현되지 않는 청아하고 기품있는 아름다움이 스며있습니다. 자기자신을 드러내며 퍼져나가기 보다는 주변의 다른 악기와 조화를 이루며 먼 곳까지, 하지만 힘있고 분명하게 퍼져 나가더군요. 나도 악기를 배우기를 오랫동안 소망해 왔어요. 하지만 운이 닿지 않았죠.

 

 

포르테보다는 피아노를 연주하기 힘들다고 알고 있습니다. 누구나 세고 강하게 두드리면 큰 소리는 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린 소리를 분명하게 내려면 많은 노력이 필요하지요. 그건 노래하는 방식의 차이와도 같아요. 나는 모시는 사람들의 <몽연>을 보았지만 의문스러운 것이 있습니다. 왜 그 연극안에 흔한 앤드류 로이드 웨버 스타일의 뮤지컬 넘버들이 들어가 있지요? 왜 배우들이 그 방식의 노래를 부르는 걸 택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건 연출측에서 부러 의도한 겁니까? 나는 그보다 여주인공이 부른 색다른 노래 방식을 더 오래 기억합니다.

 

그 색다른 방식은 아주 오랜 연습과 훈련을 통해서만 소리를 내는 것이 가능한 우리의 전통 음악입니다. 판소리라고 하지요. 긴 서사시와도 같은 정식 공연으로 들으면 장장 6시간이 넘습니다. 당신의 마음에 들었나요?

 

가장 나를 매혹시킨 노래였습니다. 어떻게 그런 깊고도 진한 소리가 가녀린 여인에게서 뿜어져 나올 수 있을까요? 그 노래를 더 들었더라면 좋았을 거란 생각을 합니다. 앤드류 로이드 웨버와도 같은 뮤지컬 넘버야, 브로드 웨이나 웨스트 엔드에서 흔하게 들을 수 있는거니까요. 그 노래가 질적으로 나빴다는 건 아닙니다. 그들의 노래는 질이 우수했습니다. 다만 내가 말하려고 하는 건 스타일이에요. 가장 독창적일 수 있는 방식을 두고 왜 흔해터진 방식을 답습하고 있는건가요? 나에겐 지루한 부분이었습니다.

 

글쎄, 한국에 뮤지컬이 도입된 건 얼마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현재 한국에서 가장 인기있는 공연 장르 중에 하나에요. 어지간한 해외 유명작품들이 라이센스로 다 들어오고 있습니다. 한국 배우들은 공수해온 의상-드레스나 턱시도, 시대의 코스튬-을 입고, 분장을 하고, 영어가사를 한국어로 번역한 노래를 부릅니다. 당신이 알고 있는 한국적인 것들은 막상 현재, 한국에서는 그닥 찾아보기 힘들 수도 있어요.

 

서구화된 것들이 도입되었고 그것이 주류  뮤지컬로서 자리를 잡았어요. 그러므로 현재의 한국에서 판소리 공연은 외려 흔히 찾아보기 어려운 걸수도 있습니다. 역설적이지만요. 당신이 한국적이라고 생각하는 건 일종의 포장된 것일 수도 있어요. 당신이 한 체험들, 절에 가서 신발을 벗고 선방에 들어가 앉아 차를 마시고 북을 치는 것은 서울에 살고 있는 한국인에게도 체험일 수 있는 일입니다.

 

또 나름대로는 이런 생각이 들어요. 연출가와도 이야기를 나눴지만 판소리의 전통적인 창법으로 전체 극을 이끌어 가기에는 관객들에게 너무 낯설고 어렵지 않을까 하는 짐작이 있었을 겁니다. 해서 영어 대사를 곳곳에 배치했겠지요. 그 전달력에 대해서는 의문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만 좀 더 친숙하게 관객에게 다가가려고 했던 시도일 겁니다.

 

 

안타깝습니다. 나는 비평가로서, 창작자들이 좀더 관객들이 새로운 것을 기꺼이 경험하려는 의지가 강하다는 걸 믿고 과감해졌으면 합니다. 말이 통하지 않는 연극을 기꺼이 보겠다는 마음을 먹은 관객들은, 결국 새로운 세계로 떠나는 여행에 몸을 던지겠다는 마음으로 극장에 옵니다. 그들이 경험하는 새로운 것들은 낯설지만 아주 매혹적인 것들이에요. 그 매혹을 생각한다면 나는 <몽연>의 영어대사와 뮤지컬 풍 노래들은 아쉬운 점이었다고 여깁니다.

 

창작자와 관객, 비평가는 삼위일체와도 같은 역할을 합니다. 모두가 만족할 수 있을 때 그 작품은 최상의 되지만 각각의 사이에서 이뤄지는 교감은 언제나 백 퍼센트일 수는 없어요. 저는 그 지점이 가장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창작하는 사람으로서 시선을 어디에 맞추느냐, 하는 문제 말이죠. 당신이 이야기 한대로 극단 모시는 사람들은 자막없이 그저 연극 자체만으로 이곳 에딘버러에 왔습니다. 그건 연극 자체가 가진 서사의 힘을 믿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어요. 하지만 한편으로, 전혀 말이 통하지 않는 외국관객들을 고려해야 하지 않을까요.

 

도널드, 당신처럼 비평을 하고 공연을 보러 다니는 것이 생활인 사람도 있지만 그저 단순히 시내에 나왔다가 들러서 공연을 보게 된 일반 대중의 관객도 있어요. 에딘버러를 축제때문에 일부러 찾은 관광객도 있지만 에딘버러 근처에 살고 있다가 간만에 나들이를 나왔을 수도 있죠. 예를들면 우리는 켄 로치의 영화가 훌륭하다는 걸 압니다.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 같은 작품은 아일랜드 사람이 아니어도,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이 아니어도 본 사람에게는 언제나 오래 기억될 겁니다. 하지만 그 영화를 보고 <스파이더 맨>이나 <007 시리즈>와 같은 시각적 효과와 쾌감을 기대하지는 않을거고요. 저는 극단측에서 관객과 비평가와 창작자 사이의 균형을 찾기 위해 이런 구성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적인 것이란 과연 뭘까, 당신의 이야기를 들으니 더욱 흥미로워지는군요. 그만큼 서구화된 뮤지컬이 존재하고 있다니 놀랍습니다. 나는 작년 서울 국제무용제에 초대 받았습니다. 짧은 체류기간이었지만 지금처럼 아주 많은 공연을 보았고 한국 무용의 수준에 대해 말해달라는 조언을 구하는 요청도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 짧은 기간을 두고 한국 무용에 대해 거론하는 건 위험한 일이지요. 처음부터 아예 불가능하기도 하고요.

 

가장 인상 깊게 보았던 작품은 전통적인 의상을 입고 정적인 동작으로 구성된 한국적인 작품들이었어요. 기생을 모티브로 한 작품과 광대들이 벌이는 놀이판을 묘사한 작품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의상과 섬세한 움직임은 <강아지 똥>에서 본 것처럼 특별한 것이었어요. 사실 한국에서 놀랐던 점은 대부분의 현대무용작품들이 마사 그레이엄의 몸짓을 그대로 따라하고 있다는 거에요. 60년대 70년대 이미 미국을 휩쓸고 지나간 스타일이죠. 짐승처럼 거칠고 과장된 몸짓은(일어나서 동작을 취하며) 이미 시대가 지나간 스타일인데 대부분의 작품들이 그 영향을 받았더군요.

 

아니, 그것을 모방하거나 복제하는데 그치고 있었어요. 물론 그들이 춤을 못춘다거나 질적으로 떨어지는 작품을 선보였다는 건 아니에요. 그들은 잘했죠. 아주 수준급으로요. 그렇기 때문에 더 아쉬운겁니다. 마사 그레이엄의 느낌을 찾으려면 얼마든지 이곳에서도 가능해요. 긴 비행시간을 버티고 찾아간 새로운 나라인 한국에서 지극히 한국적인 것을 볼 수 있으리라 기대했던 내가 너무 순진했던 걸까요?

 

우리가 기대하는 것은 각각 다르니까요. 하지만 당신의 기대가 오리엔탈리즘의 일부일 수도 있어요. 이미 서울을 다녀왔다니 잘 알겠지만 우리는 전통적인 것을 많이 잃어버렸어요. 서울은 최첨단을 걷고 있는, 역동적으로 변화하고 있는 도시 중 하나니까요. 엄청난 인구밀도와 함께 말이에요. 당신이 이야기 한 기생은 그 시대의 예술가라고 볼 수 있어요.

 

그들은 어린 시절부터 아주 혹독한 훈련을 받은 직업예술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거의 모든 장르에 통달한 전방위적 예술가였어요. 시를 짓고, 악기를 다루고,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고, 동시에 서화에도 능했으니까요. 한국에서만 가능한 것을 놓친 채, 무작정 서구의 것이 진정한 것이고 오리지널의 아우라를 가지고 있다고 추앙하며 흉내내기에만 바쁜 것이 현실 일 수도 있습니다. 서구문화의 유입은 굉장히 갑작스럽게 이루어졌어요. 아시아의 근대화의 속도는 유럽과 비교할 수 없지만 특히 한국은 한강의 기적이라 불리우는 엄청난 경제성장을 이루어냅니다.

 

그 빠른 속도가 가져온 경제성장은 부작용과 이면을 운명처럼 가지고 왔어요. 그 와중에 우리는 우리의 것을 대하는 방법을 잠시 잊었던 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당신이 마사 그레이엄 워너비들을 보고 놀람과 함께 약간의 실망을 느낀 것처럼 나 역시 종종 불교에 관심이 많다는 사람들, 동양 문화를 좋아한다는 사람들에게서 기대하지 못한 것을 마주친 듯한 놀라움을 느낍니다. 동시에 그들이 매혹된 신비로운 동양문화의 얄팍함과 피상적인 형태에 실망을 하기도 하죠. 어쩌면 우리는 언제나 뭔가 새로운 것, 낯설고 색다른 것에 먼저 이끌리는 걸까요? 당신은 한자가 새겨진 염주를 보고 특별히 아름답고 멋스러운 장신구라고 여기지만 사실 나는 별다른 감흥이 없습니다.

 

내가 한국에 더 오래 머물렀더라면, 혹은 일정기간 체류할 수 있는 경험이 있었다면 기대하는 것이 달랐을까요? 예술가로서 나는 각각의 문화가 지닌 고유성이 보존되기를 바랍니다. 만약 작년의 서울국제무용제에서 전통 의상을 입고 진행되는 그 몇편의 작품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나는 절망했을 겁니다. 한국에 온 보람이 없는 셈이니까요. 오리엔탈리즘일지도 모른다고 했나요? 글쎄 그 부분에 대해서는 생각해 봐야겠습니다. 하지만 한국에서 볼 수 있으리라 기대한 것, 한국적이라고 여기는 것을 막상 한국에서 보지 못한다면 그건 재앙입니다.

 

 

사실 외국 관객들이 기대하는 것은 지극히 한국적인 것, 그들에게 새로움과 경이를 선사하는 것인가 봅니다. 극단의 홍보가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알고 있나요? 그들은 한복을 입고 거리로 나왔고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았습니다. 사실 외국인들이 외모만으로 한중일을 구별하기는 어려워요. 사람들은 늘 중국에서 왔느냐 일본에서 왔느냐를 먼저 묻습니다. 그들에게 아직 한국은 낯선 나라니까요.

 

그러나 극단 단원들이 한복을 입고 국악기를 연주하는 모습은 정말 파괴력이 있었습니다. 몇몇 관객들이 한국에서는 늘 저 옷을 입고 다니느냐고 묻기도 하더군요. 당신이 서울국제무용제에서 봤던 의상과 아주 비슷하지는 않지만 어쨌든 전통의상이란 점은 같으니까요. 세세한 디테일의 차이가 있을 뿐. 이런 시선을 집중시키는 홍보에 이끌려 극장을 찾은 사람들은 <몽연>을 보는 동안, 아주 만족한 눈치였습니다. 한국에서도 보기 힘든 광경을 에딘버러에서 연출한 영리함에 나는 지지를 보냅니다. 도널드, 당신말대로 한국적인 것을 막상 한국에서는 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되어버렸습니다. 

 

나는 에딘버러에서 한국 연극을 만날 수 있어서 행복했습니다. 82편의 공연 중에서 오랫동안 내 안에 남아 나를 움직이게 하는 힘이 되어줄 겁니다. 의식할 수 없는 사이 나를 눈물짓게 한 것처럼요. 기대하는 것이 무엇이든 극장에서, 무대에서 만나게 되는 에너지는 특별합니다. 인터내셔널 페스티벌의 세계초연, 페트르슈카를 볼 건가요? 스트라빈스키의 음악에 맞춰 누레예프와 함께 무대에 선 적이 있습니다. 물론 큰 역할은 아니었어요. 이런, 벌써 23년 전인가요. 무대 위에 있거나 무대를 바라보는 객석에서나 나는 무대로부터 참 많은 것을 받고 있습니다. 내년에 또 만나기를 바랍니다. 한국의 연극이든 무용이든 질적인 우수함은 이미 확인했습니다. 수준을 논하는 건 늘 위험한 일이지만요. 내년에는 더욱 한국적인 것, 진짜인 것을 만나기를 바랍니다.

 

누레예프와 한 무대에 섰다니 상상할 수 없네요. 다음번엔 무대 위에서의 당신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도 흥미롭겠어요. 내년엔 덜 피곤한 상태에서, 더 느긋하게 이야기 할 수 있길 바랍니다. 시간을 내어주어서 감사합니다.

 

 

 

나나(mllenahui@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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