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 기사 추천 기사 연재 기사 마빡 리스트




2009.10.21.수요일
필독


 



 


징가는 브라질 축구의 감성과 방법론이다. 그렇다면 재료는 무엇일까. 여기서 말하는 재료란 피지컬, 즉 신체조건을 말한다. 우직함보다 재치를 선호한다고 해서 상대를 기만하는 플레이가 가능하진 않다. 신체조건이 받쳐주어야 한다. 히딩크는 이런 명언을 했다.


 


"정신력은 체력에서 나온다."


 


맥락이 좀 다르지만, 징가의 정신도 일단 몸이 받쳐주어야 구현된다. 화려한 플레이를 하려면 창조성이 몸에 입력되어야 한다. 체력과 근력도 중요하다. 이런 조건이 형성되는 과정은 무척 아이러니하다. 변변한 시설조차 없는 열악한 환경이 브라질 축구의 토양이 된다.


 


브라질인들이 축구와 유난히 친한 이유 중 하나는 축구의 경제성이다. 공은 세상에서 가장 싼 장난감이다. 축구는 공 하나만 있으면 어디서든지 가능하며, 군대식으로 뛰면 서른 명이 함께 놀 수도 있다. 그러니 현실적인 이유로 생활과 교육에 제한이 많은 브라질 아이들도 축구만큼은 마음껏 할 수 있다.


 


브라질 인구의 대부분은 상파울로와 리우데자네이루 등 대도시에 몰려 있으며, 이들의 절대 다수가 빈민이다. 과장을 좀 섞자면 도시 전체가 슬럼이다. 극도로 복잡한 브라질의 골목은 축구에 있어 엄청난 창조성을 키워준다. 아이들은 시멘트 바닥에서건 진흙탕에서건 아랑곳하지 않고 축구를 한다.


 


전봇대를 이용해 상대를 제치고, 골목의 경사를 이용해 날카로운 패스에 성공하며, 공에 바람이 빠져 있는 정도를 감안해 골키퍼를 속이는 슈팅을 익힌다고 생각해보라. 공을 자유자재로 다루지 않을 수 없다.


 




 


브라질 축구가 최강인 이유 중 하나는 환경에 대한 적응력이다. 아무리 규정에 따른다 해도 그라운드의 조건은 경기장 별로 다르다. 그라운드에 심는 잔디는 지역마다 종이 다르며, 같은 종이라도 기후조건에 따라 다르게 자란다. 바람이 심할 수도 있고 비가 내려 잔디가 미끄러워질 수도 있다. 브라질 선수들은 어느 곳에서든 기량을 보여준다. 전통적으로 남미에서 개최된 월드컵에서는 남미 팀이, 유럽에서는 유럽 팀이 강한 경향이 있다. 그러나 브라질 대표팀은 장소와 상관없이 강하다.


 


그렇다고 열악한 환경이 성장의 조건이 될 수는 없다. 유소년 육성에 있어 잔디구장의 부족은 우리나라의 고질적인 문제인데, 브라질의 경우를 빗대 헝그리정신을 강요하는 것은 무리다. 단단한 흙바닥은 부상의 위험이 높다. 부상을 두려워하다보면 자유롭게 플레이할 수 없으며, 신체조건을 100% 활용하지 못한 채로 성장하게 된다. 자연히 한정된 플레이스타일로 굳어진다.


 


또한 종일 축구만 하며 ‘방치되어’ 자라는 것이 그다지 옳지도 않다. 브라질은 열악함이 워낙 극단적이다 보니 어느 시점에서 강점으로 전환되는 독특한 경우다. 그리고 브라질 아이들에게 축구는 공놀이다. 즉 엄격하게 훈련받아야 할 과제가 아니다. 1편에서 어느 정도 설명했지만, 열심히 축구를 한다는 것은 열심히 노는 것이며 사실 열심히 노는 것이야말로 가장 효과적인 훈련이다.


 


사실, 브라질 소년들에게는 그들만의 잔디구장이 있다. 바로 모래밭이다. 브라질의 대도시들은 대게 해변에 몰려 있다(식민지시대의 유산이다.). 많은 아이들이 골목을 벗어나 모래밭에서 공을 차며 논다. 잘 다치지 않는 곳이다. 발이 푹푹 빠지는 백사장에서 매일같이 축구를 하다 보니 발목이 단련되지 않을 수 없다. 상대를 기만하는 브라질 선수들의 화려한 몸동작은 바로 몸을 지탱하는 발목 힘에서 나온다. 상대를 기만한다는 것은 연속된 동작에 관한 상대선수의 고정관념을 역행하는 것이다. 이는 곧 스포츠역학에 역행함을 뜻한다. 발목이 버텨주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이런 성정환경에 징가가 더해진 브라질 선수들의 기술과 스타일을 외국인은 결코 체득할 수 없다. 


 


한편 브라질의 해변 공놀이는 곧 비치풋볼(폭은 비치사커)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비치풋볼은 ‘막축구’가 아니라 하나의 고유한 스포츠형태가 되었고, 공식 종목으로 인정받기에 이르렀다. 현재는 많은 나라가 국가대표팀을 갖고 있으며, 국제 대회도 개최된다.


 



이것이 정식 비치풋볼


 


비치풋볼은 연습이 스포츠에 있어 열악한 조건이 새로운 스포츠종목을 만들어버린 특이한 경우로, 브라질인의 축구중독이 어느 정도인지 보여주는 좋은 예다.


 


 



 


브라질 축구도 시작은 매우 초라했다. 1895년 4월, 상파울루에서 영국인들이 하일 웨이와 콤파니아 데 가스라는 팀으로 나뉘어 간단한 규칙 설명과 함께 공을 찬 것이 브라질 최초의 공식 축구 경기였다. 그러나 이미 브라질의 빈민가 골목에서는 축구가 서서히 번져나가고 있었다.


 


1894년, 영국계 이민 2세였던 찰스 밀러는 잉글랜드 유학 생활을 마치고 브라질로 돌아오는 길에 축구 규칙집 한 권과 축구공 2개를 가져왔다. 이때부터 축구는 이 골목에서 저 골목으로 빠르게 번져나가기 시작했다. 찰스 밀러는 브라질 축구의 아버지로 불리는데, 브라질 축구의 위상을 생각해보면 이는 대단한 아우라를 자랑하는 칭호다.


 



찰스 밀러. 아버지되기 참 쉽다...


 


이후 대도시를 중심으로 하나 둘씩 축구팀이 생겨나더니 1914년에는 드디어 브라질 국가대표팀이 탄생했다. 이 해에 브라질은 잉글랜드의 클럽팀 엑세터 시티와의 친선경기에서 2:0 승리를 거둔다. 엑세터 시티는 결코 강팀은 아니었지만 어느 정도 명성은 있는 팀이었다.


 


이는 브라질 축구의 빠른 성장속도를 보여주는 사례다. 브라질은 1930년 제 1회 우루과이 월드컵에서부터 2010년 열릴 남아공 월드컵까지 유일하게 모든 월드컵 본선에 진출한 나라다. 브라질은 초창기부터 강호까지는 아니더라도, 다크호스의 모습은 보여주었다. 초대 월드컵에서는 볼리비아를 4:0으로 이겼지만 유고슬라비아에 패했다. 1934년 이탈리아 월드컵에서는 스페인에 1:3으로 발목이 잡혀 8강 진출에 실패했다.


 


하지만 1938년 프랑스 월드컵에서 브라질은 선수들의 환상적인 플레이로 프랑스 축구팬들의 인기를 독차지했다. 브라질이 이 대회에서 3위에 오른 과정은 꽤 재미있다. 브라질은 첫 경기에서 폴란드를 6:5로 꺾었다. 골을 많이 내주는 대신 그 이상 넣어버리는 브라질 축구의 초창기 스타일이다. 이 경기에서 브라질의 절대적 에이스 레오니다스가 혼자서 4골을 몰아쳤다.


 


레오니다스는 브라질 최초의 진정한 슈퍼스타였다. 그의 별명은 검은 다이아몬드, 혹은 고무인간. 그의 유연한 몸동작을 짐작케 한다.


 



이 레오니다스 말고...


 


펠레의 전매특허였던 바이시클 킥(오버헤드 킥이라고도 한다.)은 원래 그의 기술이다. 레오니다스가 바이시클 킥을 창안했다고는 할 수 없지만, 최초로 완성했다고는 말할 수 있다. 바이시클 킥의 최고 권위자인 펠레조차도 이 기술을 가리켜 “쉽지 않다.”고 했을 만큼, 최고의 난이도를 자랑한다. 축구기술이 완숙해지지도 않았던 시절임을 감안하면, 당시 관중들에게 레오니다스가 얼마나 외계인처럼 보였을지 상상할 수 있다.


 





펠레의 바이시클 킥 영상. 바이시클 킥은 멋을 내기 위한 기술이 아니다. 바이시클 킥은 정확히 시전할 수만 있으면 골 결정력이 매우 높다. 공을 받고 몸을 돌리고 슛 자세를 취하는 과정을 모두 생략해버리므로 골키퍼의 템포를 두세 단계나 앞질러버린다. 상대 수비수들의 압박을 무력화시키며, 등으로 골키퍼의 시야를 가려버린다. 단, 다 좋은데 하기가 어렵다는 게 문제.


 


 




보르도에서 열린 체코슬로바키아와의 8강전은 보르도 전투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다. 브라질 선수들은 기본적으로 거리의 아이들이다. 축구가 놀이라고는 하지만 길거리는 싸움의 진원지다. 그래서인지 브라질 대표팀은 국제적인 난투극을 종종 일으켰는데, 그 첫 번째가 보르도 전투다.


 


이 ‘전투’에서 3명의 선수가 퇴장당하고 6명의 선수가 부상당했다. 손해는 체코슬로바키아가 더 많이 봤다. 주장은 오른팔이 부러졌다. 그의 동료는 오른다리가 부러졌으며, 다른 하나는 내장손상을 입었다. 브라질도 세 명이 부상당했는데 그중 하나가 하필이면 레오니다스였다. 경기는 1:1 무승부였다. 당시의 규정에는 승부차기가 없었고 재경기를 하게 되어 있었다. 다행스럽게 레오니다스는 건재했다. 이틀 뒤 재시합에서 그는 두 골을 넣어 2:1 역전승을 이끌었다.


 


그런데 브라질은 4강전 상대인 이탈리아를 너무 우습게 봤다. 아데마르 피메타 브라질 대표팀 감독은 결승에 대비하기 위해 위기 때마다 브라질을 구한 레오니다스를 선발 명단에서 제외해 버렸다. 결국 브라질은 자만의 대가로 이탈리아에 1:2로 패배하고 만다.


 


스웨덴과의 3/4위전에서는 레오니다스가 2득점을 올려 4:2로 승리했지만 이미 때늦은 용병술이었다. 만약 피메타 감독의 판단이 정확했다면 브라질의 역대 우승횟수가 하나 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덧붙여 레오니다스는 정작 가장 중요한 경기에서 뛰지 못한 비운의 스타가 되었다. 유럽의 불안한 정국과 2차 세계대전으로 1950년까지 월드컵이 열리지 못했고, 그는 자신의 능력을 세계에 보여줄 기회를 다시 잡지 못한 채 전성기를 흘려보내고 말았다.


 


1950년 제 4회 월드컵 개최지는 브라질이었다. 브라질은 연합국 편을 들긴 했지만 본격적인 전쟁터가 유럽인 덕에 전후 일본이 6.25전쟁을 기회로 경제발전을 이룬 것과 같은 새치기에 성공했다. 대유럽 수출은 브라질의 경제와 2차 산업을 발전시켰다. 이 시기 브라질에서 생산된 TV와 라디오의 디자인과 품질은 미국을 위협할 정도였다. 브라질뿐만 아니라 남미 전체가 뜨는 해였고 유럽은 급속도로 지는 해였다. 북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합쳐서 신대륙)의 위상은 거의 대등했다(6.25 전후 남도 북도 아닌 중립국을 선택했던 많은 사람들이 남미로 이민을 갔다. 북아메리카나 남아메리카나 똑같은 아메리칸 드림이었다.).


 


이후 미국의 정치적/경제적 간섭, 군사독재와 국내 무력투쟁으로 삶의 질과 치안이 바닥으로 떨어지지만 당시에 브라질을 비롯한 남미 사람들의 미래에 대한 청사진은 매우 이상적이었다. 국제적인 스포츠대회는 스포츠 자체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88올림픽과 2002월드컵이 우리에게 스포츠 이상이었듯이, 브라질 국민들에게 1950 월드컵은 특별한 의미였다. 그리고 자국에서 개최된 대회인 만큼, 목표는 당연히 우승이었다.


 



1950년 대회 포스터


 


유럽인들은 브라질의 실력을 간과하고 있었다. 이들이 기억하는 브라질 대표팀은 감초 같은 스펙터클을 보여주는 인기 팀이었고 나쁘게 말하면 서커스 팀이었다. 막상 뚜껑이 열리자 진실이 드러났다. 브라질은 조별예선에서 지징요, 아데미르를 앞에서 당시 유럽의 최고급 강호로 통하던 유고슬라비아를 2:0으로 완파했다. 이어지는 경기에서 강호 스웨덴과 스페인을 차례로 대파했다. 축구에 대한 브라질의 진정한 재능이 드러났다고 할 수 있지만, 사실 다른 이유도 있었다. 길고 꼬부라져서 발에 척척 감기는 남미의 잔디가 유럽 선수들의 발목을 괴롭혔던 것이다.


 


 



 


결승전 상대는 남미 최강이었던 우루과이였다. 사실 결승전이라기보다는 ‘결승리그 마지막 경기’라는 표현이 더 적합하다. 이때의 대회 방식은 조별예선을 리그방식으로 통과한 팀들이 다시 결승리그를 통해 1등 팀을 가리는 식이었다. 즉 4개 조를 1위로 빠져나온 4팀의 리그전이었다. 그래서 실질적인 결승전이었지만, 2승을 올린 브라질이 1승 1무를 기록 중인 우루과이보다 유리했다.


 


브라질은 비기기만 해도 우승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전반 3분 만에 프리시아의 골로 1:0으로 앞서가자 경기가 열린 마라카낭 스타디움과 브라질 전역은 열광의 도가니에 빠져들었다. 조금만 있으면 브라질에서 브라질이 우승할 분위기였다. 브라질 사람들은 일이 조금만 잘 풀리면 사태를 낙관하는 경향이 있다. 중요한 순간에 방심하는 브라질 선수들의 고질병이 도졌고, 이들은 관중들에게 손을 흔드는 등 축제 분위기에 동참했다.


 


여기서 우루과이와 우루과이 축구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남미 지도를 보면 브라질과 아르헨티나가 남미 땅의 태반을 잡아먹고, 여타 국가들이 나머지를 쪼개먹은 형국이다.


 



 


남미의 형세는 축구뿐 아니라 다른 많은 면에서 브라질vs아르헨티나의 구도다. 브라질과 아르헨티나는 다방면에서 다르다. 브라질 인은 포르투갈어를, 아르헨티나는 스페인어를 쓴다. 브라질은 삼바로 대변되는 카오스적인 용광로로써, 흑-백-황의 갖은 인종과 문화가 혼재한다. 아르헨티나는 남미 속의 유럽으로 불리며, (아르헨티나편에서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재미한인 아줌마들이 한복을 입는 것처럼 오히려 유럽보다 더 유럽적이다. 두 대국의 사이는? 별로 좋지 않다.


 


우루과이는 두 거인 사이에 낀 난쟁이다. 브라질과 아르헨티나가 모두 이 난쟁이를 탐냈다. 동아시아 역사와 맥락이 조금 다르기는 하지만, 이른바 소(小)제국주의라 할 수 있다. 소제국주의란 제국주의에 피해를 입거나 그 영향권 아래에 있는 상황을 인정한 집단(국가)이, 그걸 그대로 모방해 자신 이하의 집단(국가)에 강요하는 것을 말한다. 베트남이 중국을 모방해 주변 동남아 제후들에게 권력을 행사하며 황제국을 자칭했던 것이 대표적이 예다. 조선이 조선통신사 등을 통해 일본에게 예를 강조한 것도 비슷한 경우다. 물론 이때 ‘예’란 한마디로 고개를 숙이라는 뜻이었다.


 


브라질은 우루과이가 브라질의 소유라고, 아르헨티나는 아르헨티나의 소유라고 주장했다. 각각 자국을 식민 지배했던 포르투갈과 스페인을 모방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우루과이는 우루과이 국민들의 것이고, 결국 현재까지도 독립국으로 남아있다. 그러나 양쪽에서 불어오는 소제국주의의 느끼한 입김은 우루과이 국민들에게 굉장한 스트레스였다.


 


축구란 경기력에 감정이 개입되는 스포츠다. 한국 대표팀은 일본을 상대로는 객관전 전력 이상의 플레이와 박력을 보여주는 경향이 있다. 우루과이는 지금도 브라질과 아르헨티나에 유독 강하며, 이 두 축구강국이 가장 만나기 껄끄러워하는 상대다. 여기엔 신대륙의 아픔을 공유한 이들끼리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 하는 우루과이인들의 억하심정이 깔려 있다. 


 


게다가 우루과이는 우승 후보였다. 브라질 축구의 진면목이 드러나는 시기였다 해도, 당시 유럽에서는 헝가리, 남미에서는 우루과이가 축구를 선도하고 있었다. 무시해서는 안 되는 상대였던 것이다. 그런데 브라질 선수들이 노는 듯 경기에 임하자 화가 난 우루과이 선수들의 움직임이 격해졌고 이는 역사적인 역전 명승부로 이어진다.


 


 



 


결승 후반전, 전세가 역전되어 우루과이가 브라질을 완전히 압도하기 시작했다. 후반 21분 우루과이의 후안 스키아피노가 동점골을 터뜨리자 브라질 국민들의 표정은 순식간에 굳었다. 이어 경기시작 79분, 우루과이의 알치데스 기지아에게 그림 같은 역전골을 허용하며 브라질은 1:2로 패하고 말았다.


 



역전골을 터뜨리는 기지아의 모습


 


우루과이에서는 우승의 감격을 감당하지 못한 사람들이 심장마비로 사망하는 일이 속출했다. 이 때 우루과이 국민들의 심정은, 가정을 하자면 마치 독일에서 독일을 상대로, 2:1 역전승으로 우승을 거머쥔 폴란드 국민들의 그것과 비슷했을 것이다.


 


한편 브라질 사람들이 보여준 절망도 굉장했다. 다 잡은 우승을 놓치자 마라카낭 스타디움은 섬뜩할 정도의 정적에 휩싸였다. 무려 20만이 넘는 관중들이 유령처럼 고요히 스타디움을 빠져나온 사건은 유명하다. 우승에 실패했다는 좌절감을 이기지 못해 자살하는 사람들까지 생겨났다. 우루.과이 선수들은 금메달을 목에 걸 수 없었다. 브라질 팀의 금메달만 준비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매너 문제를 떠나, 그 정도로 브라질은 우승을 당연시했다.


 


이후 브라질 사람들은 축구에 있어서만큼은 우루과이를 영원히 증오하게 되었다. 유니폼 색깔이 바뀔 정도였다. 이때까지 브라질 대표팀의 색깔은 흰색이었다. 대회 이후 ‘우루과이에게 졌을 때의 색’을 입는 것은 굴욕으로 간주되었고, 대표팀 선수들이 흰 유니폼 착용을 거부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브라질은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노란 바탕에 초록이 들어간 유니폼을 입게 되었다(이는 다른 종목의 대표팀 유니폼에도 영향을 끼쳤다.).


 



우루과이 덕분에 탄생한 브라질 대표팀의 멋진... 색을 보란 말이다, 색을.


 


이 유니폼을 입고, 브라질은 펠레로 대변되는 축구 황금시대를 향해 간다. 다음 편에는 그 이야기를 쓸 예정이다. 가능하면 드디어 펠레가 나올지도 모르겠다. 미리 귀띔하자면, 펠레 못지않게 정성껏 설명할 선수가 하나 더 있다. 그럼, 다음 시간에. 


 


 


필독(the.dog.on.the.field@gmail.com)


 


딴지 보급소딴지 편집부필진 모델1호헤라취지보기인증갤러리추천제안게시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