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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소망 교도소에 바람

 

2009.10.19.월요일
알려지지않은주시자

 

 정의의 여신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정의의 여신은 한 손에 검을, 한 손에 저울을 들고 안대로 눈을 가리고 있다. 알려져 있는 여신들 가운데 가장 SM플레이에 조예가 깊을 것 같은 이 섹시한 누님이 왜 이런 아이템들로 후학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자나깨나 사법시험에 몰두하게 하시는지에 대해선 여러가지 의견이 분분하다만, 비교적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얻고 있는 해석은 다음과 같다. 저울은 죄의 무게를 가늠하고 검은 권위와 강제력을 상징하며, 안대는 공평함을 상징한다는 거다.

 

공정한 판단을 위해서는 불필요한 사실들을 인지하지 않는 편이 좋다는 이 역설적인 설명은,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도 꽤나 많은 교훈을 주고 있다. 2009년 가을까지 한국땅에 살며 이너넷 뉴스 좀 읽어본 분들이라면 대기업 회장님이나 디자인 좋은 뱃지를 단 분들이 법정에 섰을 때 판사님들께서 알아서 기는 모습을 몇 번쯤 감상하셨을 테니 말이다.

 

사시 준비하던 어느 남학도의 꿈에 정의의 여신이 나타나 저울로 그 날 게임방 간 시간과 집중해서 공부한 시간을 재어 본 후 저울이 전자쪽으로 현저히 기울자 일단 스스로 눈을 가린 뒤 그 친구를 벗겨놓고 검 옆면으로 매섭게 훈도하는 바람에 그 사시 지망생은 법의 진리가 아닌 SM플레이에 눈을 떠 훗날 저명한 포르노 감독이 되었다는 이야기는 아직 들어보지 못했다. 안타까운 일이다.

 

 법복

 

법복은 판사나 검사가 법정에 설 때 입는 그 까만 옷을 의미한다. 예산상의 문제로 변호사들에겐 지급되지 않는다(치사하게!!). 의사들의 흰 가운이나 녹색 수술복에 비해 그다지 청결해 보이지 않는 이 검은 옷에도 이유가 있다고 한다. 검은 색은 다른 색깔로 물들일 수 없는 마지막 색깔이며, 이 옷을 입는 것을 통해 사적인 이익이나 감정에 물들지 않고 공정한 판단을 하겠다고 다짐을 한다는 거다. 

 

그냥 세탁비가 싸게 먹혀서 검정으로 통일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가끔 해 본다. 군에 있을때 흑복입은 친구들과는 그럭저럭 좋은 관계를 유지했던 터라, 검은 옷에 대해서 별다른 반감이 있는 건 아니다만. 그때 같이 라면 끓여먹던 특경대 아해들 지금 어디서 뭐하고 있을라나(난 헌병 출신 아니다).

 

 흩어지거나, 깨지거나, 빛나거나

 

법이라는 것이 공정함 혹은 공평함에 대해 이렇게 병적인 집착을 보이는 이유는 뭘까. 물론 법이 공평하게 집행되어야 하기 때문이긴 하지. 그런 기말고사 답안지같은 이야기 말고, 진짜 이유는 뭘까. 

 

인류 역사상 대부분의 시간동안 법이 공평하게 집행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영도님께서 명작 피를 마시는 새를 통해 지적하셨듯, 세상의 어떤 규율도 인간에게 흩어지지 말라거나 깨지지 말라 거나 반짝거리지 말라고 하진 않는다. 그건 애시당초 불가능하니까, 금지할 필요가 없는거다. 거꾸로 말하면, 무언가를 금지한다는 건 지금까지 그 규율을 어긴 자들이 있었다는 의미이다. 살인하지 말라 남의 아내를 탐하지 말라 도둑질 하지 말라는 말은 그런 규율을 그 사회가 필요로 하고 있다는 말이다. 즉, 누군가는 누군가를 죽이고, 누군가는 남의 아내나 남편을 뺏고, 누군가는 남의 재산을 훔치는 사회라는 의미지. 

 

법은 공평하게 집행해라. 사사로운 감정이나 개인적인 이익에 현혹되지 마라. 공정하게 공평하게가 이렇게 강조되는 이유는 그것이 그만큼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법은 사람이 만든 것이고 법조인도 모두 사람이다. 나와 독자제위가 똑같은 사람이라고. 많은 결점과 그 보다 더 많은 약점을 가진 우리들이, 아무런 사심없이 공평한 판단을 하고 그것을 공평하게 집행한다는 것은 무지하게 힘든 일이다. 

 

하지만, 혹은 그런 만큼 그것은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가치이기도 하다.

 

 무색투명한 국가

 

법이 공평하게 집행되지 않았던 지난 세월동안, 항상 법의 심판을 받아야 했던 민중들이 법을 무기삼아 그들을 억압한 자들에게 가진 반감과 증오는 이루 헤아릴 수 없다. 지역과 인종을 막론하고, 20세기 들어 현대적인 헌법과 형법이 어느정도 틀이 잡히기 전까지, 법이라는 이름의 권력을 가진 자들은 그 권력을 이용해 제도적인 폭력을 행사해 왔다. 그것을 통해 탄압받은 가치는 다양하지만, 그 내용물은 언제나 강자가 약자를 억압하는 구조였다. 강한 종교는 법의 이름으로 약한 종교를 탄압했고, 남성은 여성을 법제도로 옭아매었고, 스스로 우월하다고 믿는 염치없는 인종은 다른 인종을 차별하는 법을 만들었다.

 

이 모든 어리석음을 깨달았을 때, 인류는 그때까지 저지른 바보짓에 비하면 감탄할 만큼 깔쌈한 대안을 찾아내게 된다. 다른 모든 가치를 초월한, 혹은 그런 가치에서 해방된 권력기관을 만들어 보자는 거였다. 우리가 흔히 국가라고 알고 있는 그 추상적인 개념체 말이다. 특정한 종교를 신봉하는 것도 아니고, 특정한 인종만이 우월하다고 인정하는 것도 아니며, 특정한 성별이 다른 성별보다 존중받아야 한다고 생각하지도 않는, 그저 모든 인간은 인간으로서 평등하게 존중받아야 한다라는 아주 개념있는 행동기준을 가지고 있는 권력기관에 법의 집행을 맡기면, 우리가 그토록 목마르게 찾아 헤메던 공평한 법 집행이라는 것이 실현될 가능성이 좀 늘어나지 않을까. 

 

한국은 많은 결점을 가지고 있지만 적어도 법 집행에 관해서는 지금까지 거론한 이념을 어느 정도 충실히 이행해 왔다. 뭐, 이행할려고 열심히 노력했다는 평이 더 적합할지도 모르지만.

 

근데 말이다.

 

기사링크☞ 국내최초 민영 소망 교도소 2010 개소 목표/ 쿠키뉴스

 

요런게 생긴다고 한다.

 

좀... 답답한 노릇이다.

 

 소망이 없는 자를 위한 변명

 

법을 집행하는 기관, 그것도 가장 엄격하고 가장 인권침해의 가능성이 큰 징역형을 집행하는 교도소는 적어도 내가 가진 상식에 따르면 무색투명해야 한다. 대한민국의 헌법과 그 이념에 따라 국민의 대표인 국회가 제정한 법률에 의해 심판을 받고, 대한민국의 이름으로 그 심판에 따른 형이 집행되는 것이라면, 그 외의 다른 가치가 여기에 섞여들어서는 안되는 거다. 그것도 모든 종교의 협력을 통해 종교의 힘으로 개도를 한다는 식의 최소한의 화장도 없이 아예 특정종교가 운영한다고 대대적으로 광고를 하고 나오면, 정말이지 어이가 없어질 뿐이다. 

 

소망 교도소를 추진하는 분들의 가장 큰 주장은 재범률 감소다. 난 이 사회가 지난 수 년 사이에 이렇게 숫자를 신봉하는 사회가 되어버린 점에 대해 염증을 느낀다. 역시나 대통령이 경제인이다 보니 모든 가치는 숫자로 통하게 된 것일까? 

 

 

그들의 주장은 정당하지 않다. 우선, 교도소라는 법 집행기관은 종교와 무관해야 한다는 것은 그런 숫자놀음으로 메울 수 없는 소중한 가치이다. 교조적인 태도라 비판할 지 모르지만, 법이 무색투명하지 않았던 시절 인류가 저질러 온 죄악을 생각하면 이 정도의 알러지 반응은 오히려 당연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법은 무색투명해야한다. 적어도 종교의 영향을 받아서는 안된다. 한 방울의 잉크는 컵 안의 물을 물들이기엔 충분한 양이니까.

 

재범률을 줄일 수 있을 것이라는 주장도 부당하다. 주가를 올려줄테니 대통령을 시켜달라던 어느 위인이 생각나긴 한다만, 리바이벌은 좀 사양하고 싶은 마음이다. 

 

소망 교도소가 생긴 뒤, 재범률에 관한 경우의 수는 세 가지이다. 재범률이 오히려 늘거나, 다른 교도소와 똑같거나, 혹은 줄거나. 

 

재범률이 늘었을 경우, 이 그다지 위대하지 않은 실험이 실패로 끝난 것은 반길만한 일일 테지만(피해자들 입장에선 별로 반갑지도 달갑지도 않겠지만) 사회적인 비용 측면에선 대한민국의 이름으로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제기하고 싶을 일일 것이다. 뭐, 그것을 통해 특정 종단이 물심양면으로 타격을 입는다 해도 나는 그러려니 할 테지만.

 

재범률이 다른 교도소와 똑같을 경우, 소망 교도소는 4대강 사업에 버금가는 위대한 삽질로 기록될 것이다 .오히려 재범률이 는 것만 못하다. 재범률이 늘면 많은 비판을 받고 소망 교도소의 운영이 중지된 뒤 다시는 이런 실험이 벌어지지 않도록 후세 사람들이 조치를 취할 테지만, 다른 교도소와 비슷한 숫자가 나올 경우 흐지부지 계속 운영이 될 수도 있으니 말이다. 똑같은 결과를 내기위해 많은 비용을 들이고 게다가 그 비용에는 소중한 가치를 훼손한다라는 덤까지 부착되어 있다면, 이것을 삽질이라 부르지 않고 무엇이라 할텐가.

 

재범률이 준다고 해서 환영할 만한 일은 아니다. 일단 범죄 피해자가 줄었으니 사회적으로는 좋은 일이라 할 지 모른다. 일견 좋아 보이겠지. 이 사업을 추진한 개신교의 이미지도 좋아질 거고. 그럼, 다른 종교는 봉인가? 특정 종교만 이미지 메이킹 하는데 자기들은 쌀밥만 먹고 있을 순 없지 않나.

 

불교가 교도소를 만들고 천주교가 교도소를 만들고 원불교와 통일교와 증산도가 뒤를 이으면 어떻게 할 셈인가? 헌법은 종교의 자유를 보장한다. 자유를 보장한다는 건, 모든 종교를 평등하게 대해야 한다는 거다. 개신교가 교도소를 만들 자격이 있다면 다른 종교도 똑같은 자격을 가진다. 

 

이제 셈 좀 해 볼까? 개신교 교도소는 재범률 4.01%를 찍었다. 어라, 원불교는 1사분기때 3.71%였던게 이번 분기 3.723%로 증가했네. 천주교는 4.11%로 마의 4.00%을 깨지 못했으니 짜져 있으라고 하자. 불교는 4사분기 3.89%를 목표로... 

 

지금 장난하나?

 

아까 잉크 어쩌고 한 이야기를 듣고 비유가 심하다고 생각한 독자제위도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무색투명이라는 가치는 정말 굉장히 지키기 힘든 거다. 이것을 지키기 위해선 어느 정도 히스테릭 해져야 할 만큼. 결과가 좋으니 과정은 봐 주자는 식의 타협이 성립하면, 요 위에서 묘사한 것 같은 어이없는 사태가 발생하지 말라는 보장도 없는거다. 온 나라를 주식시장으로 만들 셈이냐.

 

종교는 평등하다. 수 천년을 이어져온 종교건, 어제 생긴 신흥종교건, 법 앞에서는 종교법인이라는 이름으로 평등하고, 또 평등해야 한다. 내가 늦은 공부 접고 한국으로 귀국해 알려지지 않은 주시자교라도 하나 만들어 헌금을 모은뒤 알려지지 않은 교도소(이름이 좀 위험하긴 하다)를 만들 자유도 이제는 보장된다는 말이다. 재범률 2%찍으면 표창 줄 건가? 낮은 재범률에 감흥받은 전 국민이 알려지지 않은 주시자교에 입교해 알려지지 않은 주지사라고 오타내는 초등학생들은 반성문 쓰는 나라 만들어 볼까? 나야 재밌겠다만.

 

딴지가 총수의 위업에 경탄하는 신자들을 모아 절대로 옴 진리교는 아닙니다라는 각서를 일본 외무성에 보낸 뒤 한국에서 종교법인으로 인정을 받으면, 이제 티셔츠 판 돈으로 교도소를 운영할 수 있게 된 거다. 매일 틈새논평 수십번 배껴쓰기를 시키거나, 총수의 무한한 사랑을 연극으로 재현하는 교소도 생활을 보낸 이들이 꿈의 재범률 0.9%를 찍는 그날, 드디어 한국은 지금까지의 구태를 벗어던지고 진정한 명랑사회로 진출하게 될까.

 


???

 

위의 두 문단을 읽고 오한이 든 독자제위라면 소망 교도소의 뉴스를 접하고 비슷한 경각심을 느껴야 한다. 굳이 한 번 더 반복하자면, 한국의 법 앞에선 수 천년 전 지구의 다른 지역에서 생긴 종교건 사흘 전 서울에서 인가를 받은 종교건 똑같은 종교다. 교리와 역사와 규모는 부수적인 사항일 뿐, 종교라는 개념에 속하는 건 똑같다는 말이다. 앞으로 신흥종교의 교도소 난립을 바라볼 베짱이 없는 자라면, 개신교의 교도소 건립에도 자중을 요구해야 옳다.

 

나는 개신교를 경멸하지 않는다. 그와 똑같은 논리로, 다른 종교보다 우월하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이 교도소를 만들어도 잘 운영할 것이라고 믿는다면, 이름없는 신흥종교가 교도소 설립 인가를 요구했을 때 똑같이 허가를 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결론에 독자제위는 동의할 수 있나?

 

소망 교도소가 수감자의 권익보호 차원에서 바람직하다는 발상은 식은땀이 흐를만한 망발이다. 여기서도 법 집행이 무색투명해야 한다는 논리는 똑같이 적용되니까.

 

소망 교도소가 다른 교도소보다 수감자의 권익을 더욱 보장한다면, 한국의 모든 교도소는 수감자의 권익을 불필요하게 억압하고 있거나, 혹은 소망 교도소가 원래 제약되어야 할 수감자의 행동을 널널하게 풀어주었다라는 말이 된다. 전자라면 한국의 교도소 행정을 바로잡아햐 할 일이며, 후자라면 종교라는 이름의 특권이 보장된 것으로 이야말로 종교가 법 집행에 관여해서 저지를 수 있는 가장 큰 죄악 가운데 하나다. 

 

소망 교도소가 다른 교도소와 동등하게 수감자의 권익을 보장한다면, 다시 말하지만 삽질이다. 그냥 보통 교도소에서 종교활동 잘 보장해 주면 될 일이다.

 

소망 교도소가 다른 교도소보다 수감자의 권익을 제약한다면, 물론 큰 죄악이다. 종교는 단 1g의 인권도 제약할 자격을 가지고 있지 않다. 적어도 대한민국에선.

 

내가 아까부터 공평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를 왜 이렇게 강조했는지, 이제 아마 감들이 오실 거다. 공평이라는 것은 정말 히스테릭하게 다른 가치를 배제했을 때 겨우 그것과 비슷한 결과물을 얻을 수 있을까 말까 한 꿈의 가치다. 서울시를 지멋대로 봉헌하신 분이 이런 사실을 알고 계실지 의문이 들긴 한다만.

 

 누구를 위한 잔치인가.

 

난 원래 남의 잔치에 감 세팅해라 배 세팅해라 하는 처사를 그리 달갑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이다. 개신교를 비롯한 각종 종교단체가 수감자의 개도에 노력해온 점은 충분히 존경받을 만한 일이라고 생각하며, 나로서는 감히 흉내도 못 낼 일일 만큼 오히려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 뿐이다. 그것을 통한 포교가 궁극적인 목적이던 아니던, 수감자라는 꼬리표를 다는 순간 경멸의 대상으로 생각해 버리는 현대 사회에서 그들을 감싸 안으려는 종교계의 의지와 활약은 실로 위대한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무색투명한 법의 테두리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행정적인 면에서 종교를 포함한 모든 가치는 배제된 상황에서도, 여러 종교인들은 수감자들의 개도를 위해 많은 노력을 해왔고, 또 많은 성과를 거두어 왔다. 그것을 막아야 한다고도, 줄여야 한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오히려 늘어났으면 좋겠다. 현행 교도소에서 종교활동의 자유가 잘 보장되는 것은 충분히 반길만한 일이며 이를 장려하는 방법으로도 충분히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 하지만, 법의 테두리를 벗어나 특정 종교가 운영하는 교도소가 생기는 것은, 법이 추구해야 할 가장 소중한 가치에 짙은 잉크를 흩뿌리는 일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한국의 법이 적용되는 모든 국민들에게 결코 바람직하지 않은 일이다. 게다가 그것을 정당화하기 위한 논리가 무슨 경제지표 보는 듯 한 숫자놀음이라면, 더욱 할 말이 없어진다. 

 

정부와 개신교는 소망 교도소 사업을 재고해야 한다. 이미 콘크리트 발라버린 시설 깨부수라고 하진 못하겠지만, 다른 활용방안을 찾아서라도 말이다. 대한민국의 수감자가 십자가 모양의 건물에 들어가는 일은 없어야 한다. 법이 마지막까지 지켜야 할 가치를 위해서라도.

 

 

 

알려지지 않은 주시자로 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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