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 엘빠의 마지못한 축하 2009.10.26.월요일 채병용이 던진 높은 공을 나지완이 빠따로 쪼갠 순간 대한민국 야구 역사상 가장 드라마틱한 한국시리즈가 끝나버렸다. 씨바... 나 지독한 엘빠다. 더구나 올해 엘빠들은 기아를 이뻐할래야 할 수가 없다.
그런 덕에 뼛속까지 엘빠... 평소에도 "내몸엔 줄무늬 피가 흐른다" 라고 생각하고 다닐 정도인 필자는 이번 한국시리즈에서는 당연히 자연스럽게 기아의 맞상대 SK를 응원했었다. 나름대로 전문가인양 한국시리즈 예상도 해봤었다. 예상평과 희망사항을 넘나드는 필자의 단호한 예측을 객관화하기 위해 여러 가지 논거가 필요했다. 필자의 작지만 예리한 눈을 피해갈 순 없을 것이다.. 라는 자딸과 함께 마음에선 신물나게 엘지를 발랐던 기아의 허탈한 준우승을 상상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씨바... 죄다 틀렸다... 죄다... 필자가 과거 뭘 어떻게 조평신 같은 허접 예상평을 했는지 살펴보고 거기에 맞춰 이번 한국시리즈를 한번 되돌아 보자.
단기전에서 슈퍼에이스의 중요성은 두말할 나위 없이 중요하다. 그런 와중에 적게는 2승, 많게는 3승 정도를 책임져줄 슈퍼에이스의 역할은 그야말로 절대적이다. 기아의 경우 막강한 선발진을 보유했다는 것이 강점으로 부각됬지만 사실 필자는 오히려 이 부분이 약점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결국 다 고만고만하다는 뜻... 양현종이 싱싱한 공을 뿌린다고는 해도 신인이나 마찬가지인 젊은 선수가 한국시리즈라는 큰 무대에서, 긴박한 상황을 이겨낼 수 있을 것이라고는 보기 힘들었다. 윤석민은 2차전에서 7이닝 무실점의 호투를 해줬지만, 웬지 모르게 불안했었고 그 결과 6차전에서 실패했다. 구톰슨은 두경기 모두 4회 이상을 버티지 못하고 강판됬으며, 양현종은 그 좋은 볼을 던지고도 SK타자들의 집중력에 무릎을 꿇으며 4차전을 내주는 빌미를 제공했다. 씨바.. 근데 로페즈를 간과한 것이다.
로페즈가 사실 07년 두산 리오스만큼의 압도적인 피처도 아니었고, 곧잘 흥분하는 성격이라 SK의 잔야구를 감당할 수 있을런지, 분위기가 긴박해진 상황에서 심판의 애매한 볼판정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를 주목했기 때문에 1승 이상의 성공을 가져오리라고는 예상치 못했던 것이다. 물론 좋은 투수이긴 하지만 한국시리즈라는 특성을 감안하면 초반에 2~3점 정도 실점하고 크로스게임의 양상으로 흘러간다면 많은 이닝을 감당하지 못하고 불펜진이 가동될 것이며 이에 따라 상대적으로 불펜진이 약한 기아가 불리할 것이라는 생각.... 그게 필자가 첫 번째로 기아의 실패를 예견한 이유였다. 그런데 웬걸? 우선 이닝을 참 많이도 잡솨 주신거다. 거기에 가장 중요한 시점에서 로페즈의 진가가 발휘됬다는 점에서 사실상 이번 한국시리즈의 실질적 MVP는 로페즈다. 단기전에서 가장 중요하다는 1차전 승리와 2승뒤 2연패로 팀이 벼랑에 몰린 5차전에서의 완봉승은 장난 아닌 값어치인 것이다. 결국 필자가 예상했던 기아의 슈퍼에이스의 부재는 로페즈가 완벽하게 해결해 준 것이다. 로페즈가 바로 그 슈퍼에이스였음을 간과한 탓... 쳇~ 그거 내 탓은 아니다.
흔히들 전문가들이 얘기하길 큰 경기 경험이 승패를 좌우하는 경우가 많다고들 얘기한다. 완전히 조까는 소리는 아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큰 경기 경험보다는 기본적인 전력이 일단 우세해야 이길 확률이 높다는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수비는 좀 주목하고 싶었다. 플레이오프에서도 다잡아 놓은 경기를 놓쳤던 두산이 그 수비 잘한다던 손시헌의 실책으로 무너져 내렸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기아의 젊은 수비수들이 숨이 목까지 턱 막히는 그 엄청난 긴장감과 압박을 견뎌낼 수 있을까 싶었다. 특히 내야수비는 기아의 가장 큰 불안이었다. 누가 봐도 3루 최정 , 유격수 나주환, 2루수 정근우, 1루수 박정권이 버티는 SK의 내야수비진과는 비교될 수 밖에 없는 것 아닌가. 실제로 정규시즌에 기아는 총 96개의 실책을 범해 이 부분에서 롯데와 동률을 이뤘지만 경기당 실책율에서 5리 차이로 꼴지를 기록했다. 아~~ 그러나 기아의 젊은 수비수들은 한국시리즈에서 단 2개의 실책.. 그것도 승패에 크게 연관되지 않는 상황에서의 실책만 기록하고 완벽하게 임무를 수행해낸다. 이현곤이야 원래 좋은 유격수였다지만, 엘지에서 실책머신이었던 김상현이 무리 없는 수비를 해내며 구멍의 오명에서 벗어났다. (이친구가 원래 엘지에서도 숏바운드 처리는 곧잘 했었는데, 이번 시리즈에서 유독 김상현의 주특기인 숏바운드 타구가 많이 나왔다)
거기에 안치홍은 대체 뭐냐... 특히 5차전 중견수 쪽으로 빠지는 조동화의 타구를 잡아 초절정 센스의 토스로 선행주자를 잡아낸 장면이라던가, 6차전 정근우의 강습타구를 다이빙 캐치로 잡아내는 장면은 2루수 안치홍이 완벽하게 자리잡았음을 선포하는 장면들이었다. 개인적으로 최희섭이 시즌에서 간혹 보여줬던 몸개그가 나오지 않나 기대했었지만 무난한 수비로 구멍을 만들진 않았고... 반면 철벽같이 느껴졌던 SK의 수비가 오히려 발목을 잡았던 결과로 이어졌다. 그거 또 SK님들 주특기잖어... 마치 필자의 예상을 거꾸로 뒤집기라도 하듯 기아의 수비수들은 문안함을 떠나 결정적인 호수비로 팀 분위기를 끌어올렸고, 반면 SK의 수비수들은 천추의 한으로 남을 실책을 통해 결국 분패했다.
기아의 공격력에서 최희섭-김상현 라인이 차지하는 비중은 실로 절대적이었다. 올해 이 두 타자의 활약이 대단했음은 부인하지 못하지만 오히려 기아 타선의 약점이 될 수 있다는 것을 필자는 주목한 것이다. (사실 전문가들도 많이 지적한 내용이긴 하다.) 김상현이 정규시즌 SK전에서 무려 9개의 홈런을 기록하며 비룡 킬러의 면모를 보여줬다 하지만 SK에는 분석야구의 달인 김성근이 있었다. 김성근은 지난번 베이징 올림픽 해설에서도 보여줬듯이 어떻게 보면 남의 팀 선수를 그 팀 감독보다 더 잘 알고 있는 대단히 치밀하고 꼼꼼한 감독이다. 이런 김성근 감독이 기아 공격력의 근간인 CK라인의 무력화를 위해 대비책을 마련해놓았을 것이고, 사실 이 두 타자들도 엄청난 스탯에 가려지긴 했지만 약점도 두드러진 타자들이기에 이들이 막힌다면 기아의 공격력은 반감될 수 밖에 없다. 결과적으로 SK는 CK라인을 웬만큼은 봉쇄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최희섭의 경우 승부의 분수령이 될 만한 타이밍에서 결정적인 타점을 기록해주며 팀의 중심타자 노릇을 톡톡히 했고, 김상현도 여전히 막강한 파워를 선보이며 SK투수들을 압박했다. 이들이 두산의 김현수-김동주 라인처럼 SK투수들에게 철저하게 봉쇄당했다면 시리즈의 향방은 SK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이 정규시즌만큼의 활약은 아니었더라도 적절하게 타선의 중심을 잡아주는 역할 정도는 충분히 해줬기에 기아의 공격력은 만족스럽진 못했다 하더라도 우승을 먹을 정도의 역량은 보여준 셈이다.
실례로 6번으로 이종범이 포진됐던 1차전은 막강한 CK를 피해 이종범과 승부를 보려했던 SK의 패착이 승부를 갈랐다.
SK는 치고, 던지고, 달리는 것에만 능한 것이 아니라 심리전에서도 달인이다. 사실 이 때문에 SK야구가 욕을 많이 먹기도 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오히려 신경전은 기아가 먼저 걸어왔다.
한술 더떠 SK 맵핵 의혹 (전력분석원 수신호)을 기아 프론트가 제기함으로써 심리전 혹은 신경전의 양상은 기아가 완벽하게 우위를 점하는 모양새가 된다. SK가 이런 기아의 역심리전에 말려들었다는 징후는 보이지 않았다.
앞서 SK의 우승과 기아의 실패를 예상한 필자의 예상과 그 논거들은 사실 귀여운 수준이다. 전문가도 번번히 틀리는 한국시리즈 우승팀 예상을 필자와 같은 아마츄어가 맞춘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오히려 반칙이다. 더구나 1년 내내 (아니 27년 내내) 엘지 야구에 초점을 맞추어 지켜보던 엘빠중 엘빠가 남의 팀 허점이나 강점을 정확하게 짚어내고 예상한다는 것은 어쩌면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필자가 정말로 뼈아프게 생각하는 결정적인 예측 실수는 바로... 난 솔직히 SK선수들은 사람이 아니라고 봤다. 그렇기에 아무리 기아의 전력이 SK보다 강하고, SK에 부상선수들이 많아도 분명히 SK는 보이지 않는 그 무엇인가가 존재하고 그 존재에 의해 결국은 올해도 SK가 시리즈를 먹지 않겠느냐는 아주 아주 단세포적인 발상을 하고 만 것이다. 그러나 SK도 실수를 할 줄도 알고, 지칠 줄도 아는 인간이라는 점을 간과했다. 사실 어쩌면 정규시즌 막판 기적같은 19연승을 기록하고, 플레이오프 리버스스윕... 그리고 한국시리즈마저 4승 3패로 거머줬다면, 필자는 정말 그들을 인간보다는 기계로 생각하려 했다. 인간이 만들어낼 수 있는 드라마가 아니라고 봤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지막 7차전을 그리 내주면서, 필자는 이제 그들을 신이나 기계에서 사람으로 격하시키기로 마음 먹었다. 아니.. 아니... 그들은 이미 최고였고, 최강이다.
서두에도 밝혔듯이 지독한 엘빠인 필자가 이번 기아의 우승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지 독자제위들께서는 짐작하실 것이다. 벗뜨~~ 한국 역사상 가장 드라마틱한 명승부를 재연하며 온 나라 국민들을 야구의 묘미에 흠뻑 빠지게 한 타이거즈의 야구는 분명 올해만큼은 최고였다. 사실 타이거즈 야구팬들은 한을 안고 살아왔다. 그들에게 12년 세월은 처절하게 어두운 암흑기중 암흑기였다. 물론 중간 중간 포스트시즌에 진출하며 근근히 버텨오기는 했다. 아마 필자를 비롯한 트윈스팬과 자이언츠 팬들은 이 부분에서 발끈 하실 것이다. 9번 우승한 타이거즈 팬들이 12년동안 우승 못했다고 한을 운운하는 것이 말이 되느냐는 심정이실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절대강자였다. 절대강자의 자리를 내어주고 때로는 근처에서 방황하거나 때로는 멀찌감치 떨어져 있었던 옛 절대강자의 심정은, 오랜 기간 암흑기를 거쳤거나 지금도 겪고 있는 자이언츠와 트윈스 팬들의 그것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절대 강자의 자존심은 "꼴아"라는 치욕적인 비아냥으로 무너져내렸고, 팬은 많지만 성적은 바닥인 팀들을 일컫는 "엘롯기 동맹"으로 승화되었다.
그러나 그 한을 드디어 올해 풀고 말았다. 올해 타이거즈는 분명 최강팀이었고, 그들을 오랜 시간 지켜준 팬들의 승리였다. 이제 한국야구는 내년부터 더더욱 재미있어지게 됬다. 절대 강자로 군림하던 와이번스가 왕좌에서 물러나고, 타이거즈가 그 뒤를 이었다. 여전히 와이번스는 강한 팀이고, 타이거즈 또한 왕좌를 수성하고 옛 영광을 이어나가기 위해 더욱 노력할 것이다. 여기에 전통적인 강자 베어스와 라이온스의 절치부심... 여기에 잠에서 깨어나고 있는 갈매기 군단 자이언츠도 도전장을 이미 써놓은 상태다. 힘든 상황에서도 여러 가지 희망을 보여준 히어로즈, 새로운 지도자를 만나 도약을 꿈꾸는 트윈스와 이글스도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른다. 엘빠이기 이전에 야빠인 필자... 타이거즈의 우승을 진심으로 축하한다. 그러나 내년엔 다를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역시 올해는 너희가 최고였다.
에버프리(ahj2006@naver.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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