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12.04 금요일
이동현
[1] 준비된 슛터의 자세
감기에 걸렸다. 신종플루가 아니기를 기도하는 마음으로 진통제를 남용하며 사흘을 보냈다. 마침내 열이 내렸고 정신을 차리고 보니 배가 고팠다. 뭔가 먹고 싶었는데 지갑에 돈이 없었다. 주섬주섬 옷을 주워입고 밖으로 나갔다. 서교로-홍대입구 청기와 주유소에서 정문으로 올라가는 길-에 국민은행이 있다. 아직 해는 저물지 않았지만 날은 몹시 추웠다. 잠바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고 걸었다. 그리고 은행에 도착하기 직전에 이런 문구를 보았다.
용역깡패
정신이 번쩍 들었다. 여기는 나의 홈그라운드 홍대앞이다.
슛터 미쓰리 : 아저씨!
노점 아저씨 : 뭐 사시게요?
슛터 미쓰리 : 아니요!
노점 아저씨 : ...
슛터 미쓰리 : ...
노점 아저씨 : ...
슛터 미쓰리 : ...
나는 낯선 사람에게 쉽게 말을 걸지 못한다. 술자리에서 조차 새로 등장한 사람을 제대로 소개받기 전까지는 눈도 잘 마주치지 못한다. 그런데 주머니 속 휴대폰에 손이 닿았다. 슛을 해야할 때로구나. 다시 용기를 내어 힘차게 물었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에요?"
몇 사람을 거쳐 서울시 서부 노점상 연합(이하 서노련)의 검정색 잠바를 입은 '수염 아저씨'와 대화를 할 수 있었다. 용역깡패, 2억이란 금액, 깜짝 놀랐다. 자세한 대화 내용은 슛 영상을 통해 보시라.
<서울시 용역깡패?>
(대화 중에 휴대폰이 끊기는 바람에 두 편으로 나눠졌습니다. 그 사이 실수로 카메라에 포착된 감기 걸린 미쓰리의 초췌한 얼굴을 잠깐 보실수도 있습니다만 그로인해 안구에 이끼가 자라난대도 책임지지 않습니다.)
여담이지만 나는 남자의 수염을 정말정말정말정말 좋아한다. 남자의 턱을 아기 궁둥이마냥 매끈하게 밀어버린 로마넘들과 미국넘들의 되먹잖은 관습과 문화적 영향력에 분노를 느낄 정도다. 그래서 수염이 자라난 남자의 얼굴을 보면 이목구비의 균형이나 조형미는 젖혀두고 일단 무성한 털을 감상하게 된다. 그러나 이번에는 여유롭게 수염을 감상할 수가 없었다.
"요 옆에 가면 차량 안에도 용역이 있어요."
수염아저씨가 일러준대로 골목 뒤로 돌아가봤더니 승합차 한 대와 검정색 그랜저 한 대가 서 있었다. 모두 새까맣게 선탠이 되어있어서 안을 볼 수는 없었다.
<서울시 용역깡패 동원 의혹차량>
두 시간 동안 밖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술집 안에서 뜻밖의 사건이 벌어졌다. 학부 때의 후배넘이 나타난 것이다.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다. 그넘도 내 이름을 기억할리 없으니 여기까지는 매우 공평하다. 그러나 그넘은 깔끔하게 차려입고 역시 잘 차려입은 여자친구와 데이트를 하는 중이었다. 반면 나는 무릎이 튀어나온 레깅스에 보풀이 일어난 티셔츠를 입고 펑퍼짐한 검정색 패딩잠바를 뒤집어쓴 차림이었다. 사흘동안 한 방울의 물도 닿지 않은 모발은 쫀득쫀득하게 눌러붙은 상태였고 안면의 상황도 다르지 않았다.
후배넘의 시선이 나의 얼굴을 스쳐지나 한 손에 쥐고있는 휴대폰과 테이블 위에 놓인 빈 술잔 세 개와 꽁초가 가득 들어있는 재떨이에 이르렀다.
번듯한 후배 : 잘 지냈어요?
슛터 미쓰리 : 어... 응.
번듯한 후배 : 누구 기다리는 중이에요?
슛터 미쓰리 : 어... 아니.
번듯한 후배 : 그럼 혼자서 뭐해요?
슛터 미쓰리 : ...
번듯한 후배 : ...?
슛터 미쓰리 : ...
번듯한 후배 : ...?
슛터 미쓰리 : ...
번듯한 후배 : ...?
슛터 미쓰리 : 잠복근무!

Q. 사 년만에 후배를 만날 때 깜짝 놀라게 하는 방법은?
A. 잠복근무 중에 우연히 만난다.
[5] 법이냐 밥이냐
민망뻘쭘한 시간은 잠시, 창밖으로 뭔가 심상찮은 움직임이 보였다. 구호를 외치는 소리도 어렴풋이 들려왔다. 휴대폰을 손에 쥐고 계단을 뛰어내려갔다. 횡단보도 신호등은 왜 이리 길었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두 시간씩 잠복근무를 했던 주제에 교통규칙은 왜 그리 철저하게 지켰는지도 모르겠다. 길 건너편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건지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비명소리와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급해>
<20시 37분, 난투극>
(첫번째 영상은 밀치고 밀리는 흐름 속에서 휴대폰 버튼을 잘못 눌러서 대체영상으로 엉뚱한 이미지가 들어가버렸다. 두번째 영상은 뒤로 한 발 물러나 찍어서 상세한 내용이 보이지 않는데 현장에서 눈으로 봐도 뒤죽박죽인 상황이었으니 이해해주시길.)
그 사이에 구급차가 달려와서 쓰러졌던 노점상 할머니를 후송해갔다. 곧이어 난투 중에 자리에 쓰러진 구청 관계자 역시 구급차에 실려가게 되었다. 이제 양쪽에서 이야기하는 주제는 시위 과정에서 폭력성 문제가 되었다. 누가 누구에게 어떻게 폭력을 행사했는지 증언하는 과정에서 온갖 욕설이 난무했다.
그러다 또다시 카메라가 사건의 중심이 되어버렸다. 어느 젊은 노점상인이 컴팩트형 비디오 카메라를 꺼내들고 구청 관계자와 도와주러 온 사람(=용역)들의 얼굴을 영상으로 기록하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반대로 구청 쪽에서 "찍지 마" 소리가 터져나왔다.
슛터 미쓰리 : 어떤 부분 촬영하세에요?
노점 카메라 : 용역들 얼굴 찍고, 깡패들 얼굴 찍고.
슛터 미쓰리 : 현장 자체가 아니라 얼굴만 찍어도 법적 증거로 인정이 되나요?
노점 카메라 : 저쪽도 찍잖아요. 저쪽은 이쪽을 왜 찍겠어요?
저쪽이 찍으니까 우리도 찍겠다, 즉 시선의 권력을 공평하게 가지겠다는 의지는 중요하다. 그러나 지나가던 행인이나 근처에서 얼쩡대는 글쟁이 나부랭이 따위와 함께 구청 직원과 용역이 서 있는 모습이 저장될 뿐인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효과적인 방법은 아닌 것 같다.
<20시 55분, 어디서나 찍지 말라고 해>
<20시 59분, 영상을 찍는 이유는>
포만감과 함께 기침을 토해내다 내장까지 딸려나오는 환상이 총천연색으로 펼쳐지는 하드고어 스타일의 금지된 쾌락을 만끽하며 글을 마친다. 폭우가 쏟아져도 데스크탑 컴퓨터를 청바지 뒷주머니에 살포시 꽂아넣고 봉하산을 등반하는 딴지 전통 자학의 저널리즘을 계승했다는 자부심으로 밝아오는 아침이다.
슛터 미쓰리 건강전선 이상없다!

밖에서는 번듯한 미술비평가 겸
딴지 자학 저널리즘 계승 슛터
이동현
here.is.marilyn@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