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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 캐롤>, <2012>와는 너무 다른 보수주의


 


2009. 12. 4. 금요일


허기자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는 상상을 현실로 재현하는 첨단의 엔터테인먼트지만 한편으로는 스펙터클한 이미지 뒤로 미국의 기독교적 보수주의를 전파하는 전령이기도 하다. 흥미롭게도 비슷한 시기에 미국적 보수주의의 가치를 설파하는 두 편의 영화, <크리스마스 캐롤>과 <2012>가 개봉했다. 두 영화가 보여주는 메시지는 보수주의적이라는 점에서 같지만 이를 드러내는 태도는 천양지차라는 점에서 흥미롭다.


 


언제나 영상의 신기술 도입에 가장 빠른 대처를 보여줬던 로버트 제메키스 감독은 <폴라 익스프레스>(2004) <베오울프>(2007)에 이어 <크리스마스 캐롤>로 ‘퍼포먼스 캡션’의 정수를 보여준다. <크리스마스 캐롤>은 그 유명한 찰스 디킨스의 동명원작을 영화화한 작품. 천하의 구두쇠로 악명을 날리는 스크루지(짐 캐리)가 크리스마스 새벽에 찾아온 과거, 현재, 미래의 유령을 만나 개과천선한다는 이야기다.


 


이 영화가 주는 메시지는 명약관화하다. 빈자와 약자, 그리고 힘없는 자를 보살펴 도와 천국의 삶에 이르라는 것. 로버트 제메키스 감독은 이것이 기독교의 가치라는 것을 숨기지 않는다. 스크루지를 찾아오는 유령의 형상 중 하나가 백인 예수의 모습으로 등장하는 것은 물론이요, 영화의 마지막 대사는 'God Bless You!' 바로 ‘신의 가호가 있기를’ 이다.


 


로버트 제메키스의 영화를 꾸준히 보아온 관객에게 이런 종류의 메시지는 결코 낯선 것이 아니다. 다만 <포레스트 검프>(1994) <콘택트>(1997) <캐스트 어웨이>(2000)를 통해 미국의 보수주의적 가치를 옹호했다면 <폴라 익스프레스>를 기점으로 급격히 훼손되고 있는 미국의 가치에 대한 풍자적 성격이 강해졌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이를 테면, <베오울프>에서 미국의 자존심과 다를 바 없었던 독보적 영웅의 가치가 예전 같지 않음을 반영한 것에 더해 <크리스마스 캐롤>에서는 미국의 훼손된 가치의 복권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중요하게 제기할 수 있는 질문은 메시지와 첨단의 이미지 간의 상관관계다. 영화의 해상도가 높아질수록 관객의 상상력은 줄어든다. 할리우드 특유의 거대한 스펙터클은 말초적 감각을 자극해 이성을 마비시키고 그 틈을 이용해 보이지 않는 정보를 주입한다. 로버트 제메키스는 <누가 로저 래빗을 모함했나>(1988)에서 애니메이션 캐릭터를 실사에 끌어들였고 <포레스트 검프>에서 CG 합성의 새 영역을 개척했으며 <폴라 익스프레스>에서는 퍼포먼스 캡션을 끌어들였다. 매 작품 업그레이드되는 특수영상 기술에 맞춰 제메키스의 메시지는 더욱 더 수면 위로 드러나는 대신 이미지는 더 현란해지고 더욱 화려해졌다.


 


그에 반해 <2012>의 롤랜드 에머리히는 거대한 이미지 자체가 메시지인 영화를 만든다. <해운대>의 쓰나미 따위 우습다는 듯 현존하는 재난은 모두 끌어들여 지구 전체를 멸망의 구렁텅이로 몰아넣는다. 그 기저에는 어떤 우월감이 깊게 자리 잡고 있다. 미국만이 세계 평화를 지키고 유지할 수 있다는 믿음은 거대한 파괴의 이미지로 보는 이의 불안감을 조장한다. 불안감은 구원에 대한 믿음을 필요로 하고 이를 위해 <2012>를 위시한 롤랜드 에머리히의 영화는 팍스 아메리카나로써 지구를 재건할 백인 구원자의 아우라를 노골적으로 암시하는 것이다.


 


롤랜드 에머리히의 <2012>와 로버트 제메키스의 <크리스마스 캐롤>은 메시지를 위해 볼거리를 강화한다는 점에서 겉보기엔 닮았다. 하지만 볼거리에 담긴 메시지의 가치는 같은 듯 다르다. <2012>가 보수주의적 가치를 앞세워 무시무시한 팍스 아메리카나를 전파한다면 <크리스마스 캐롤>은 말 그대로 기독교적 보수주의, 즉 전통적인 가치를 옹호한다. 롤랜드 에머리히가 노림수를 가지고 영화를 만든다면 로버트 제메키스는 적어도 자신이 옹호하는 가치에 솔직하다. 에머리히의 영화가 오로지 박스오피스의 숫자로 평가받는 것에 반해 제메키스의 영화가 오랫동안 기억되는 이유다.


 


 


<백야행> 검증된 원작이 완성도를 담보하지 않는다


 



 


<백야행-하얀 어둠 속을 걷다>(이하 <백야행>)는 충무로의 일본 소설 판권 경쟁 속에서 (<검은집> 이후) 가장 먼저 영화화된 작품이라 할만하다. 국내에 불어 닥친 일본 장르문학의 유행 속에서 유난히 각광받는 히가시노 게이고의 원작인데다가 한석규, 손예진과 같은 톱스타가 출연한 까닭에 근래 개봉한 한국영화 중 가장 많은 관심을 모으고 있기도 하다.


 


흑과 백이 강렬히 대비한 포스터처럼 영화는 미호(손예진)가 벌이는 대낮의 섹스신과 요한(고수)이 저지르는 한밤의 살인 장면이 교차하는 가운데 시작한다. 이렇듯 대비와 교차는 <백야행>의 이야기를 설명하는 가장 중요한 열쇠 말이다. 과거의 사연을 숨기고 새로운 삶을 사는 미호가 빛을 상징한다면 여전히 과거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요한이 어둠을 의미하고, 이들의 현재가 14년 전의 어떤 사건과 수시로 교차하는 가운데 이야기가 펼쳐지는 것이다.


 


다만 이 영화가 보여주는 야심과 스케일과는 달리 박신우 감독은 썩 만족할만한 완성도를 담보하지는 못한다. <백야행>은 시종일관 원작의 방대한 이야기를 담아내는데 급급한 모습을 보여준다. 원작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던 미호와 요한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상당 부분 쳐내고도 설득력이 부족한 인상을 준다면 이는 우선적으로 각색의 문제에서 비롯된 결과다.


 


<백야행>은 출소 직후 살해당한 한 남자의 과거와 연관된 미호와 요한의 사연을 쫓는 장르적 구조를 취하지만 실은 이들의 사랑이 품은 비극성에 초점을 맞춘 신파드라마에 가깝다. 원작 역시 하얀 눈처럼 차갑고 이기적인 미호 곁을 그림자처럼 떠나지 않는 요한의 조건 없는 순애보적 사랑이 작품의 정서를 좌우했다. 특히나 그럴 수밖에 없는 미호와 요한의 사연이 사건을 둘러싼 심리적 묘사로 축적된 것에 반해 영화에서는 오로지 사건의 압축적 설명으로 제시되는 까닭에 관객들로 하여금 감정의 동화를 이끌어내는데 실패하는 것이다.


 


단 하나, 미호와 요한, 현재와 14년 전의 사건을 매개하는 형사 동수(한석규)의 역할은 원작과 달리 설명자의 역할에만 머물지 않는다. 오히려 미호와 요한의 관계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그다. 다만 영화는 미스터리를 지향하지만 추리과정은 오로지 동수의 설명과 그의 기억에만 의지할 뿐이다. 무엇보다 요한이 최후를 맞이하는 순간, 그의 사정을 대변하는 동수의 신파조 웅변은 <백야행>이 미스터리적 쾌감과 심리 묘사보다 설명적 대사에 의지하고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라 할만하다.


 


<백야행> 관련한 많은 리뷰들이 공통으로 지적하는 ‘기계화된 연기’에 대한 불만 역시 이에서 기인한 바 크다. 극중 캐릭터들이 스스로 이야기를 끌고 간다기 보다 짜인 각본에 연기를 맞춘 티가 너무 눈에 띄는 것이다. 이는 전적으로 감독의 책임이다. 연기에 대한 통제가 거의 실종됐다싶을 정도로 배우들은 대사만 읊고 표정만 지을 줄 알았지 감정을 담는 데에는 도통 관심이 없어 보인다. 


 


이것이 증명하는 바는 딱 하나다. 심리보다 사건의 전개에만 관심이 있다는 것. 이는 일본소설, 특히 일본의 장르문학을 원작 삼은 한국영화가 가장 쉽게 저지르는 패착 요인 중 하나다. 일본 장르문학이 한국에서 인기를 얻고 있는 건 단순히 장르적 이야기의 탄탄함 때문만이 아니다. 복잡한 사건에 대한 기계적인 해결보다 이에 반응하는 캐릭터의 심리와 정서가 설득력 있게 제시된 까닭이다. 바로 그 점이 히가시노 게이고 소설의 매력이자 정수임을 영화 <백야행>은 간과하고 말았다. 그런 점에서 <백야행>이 얻은 유일한 성과라면, 앞으로 대기 중인 일본 장르문학 원작의 한국영화들을 향한 반면교사 역할이었는지 모른다.


 


 


허기자


(edwoong@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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