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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2.08.화요일


문화불패 남가좌동


 


 





- 쉴드치지마라 오해 아니고 사실이다 


 



저 글의 메인 아이디어를 긍정한다는 전제 하에서 논의를 추가해 보자.


 


뽀르노가 뽀르노인 이유는 그것이 뽀르노로서 촬영되었고 뽀르노로서 매매되었기 때문이다. 당연하겠지만 뽀르노의 수용자는 뽀르노를 보고 성욕을 느끼고 딸을 친다. 혹여 파토님 같은 분이 있어 어떠한 성적 흥분 상태에도 도달하지 않고, 오직 자신의 순수한 소년적 판타지의 충족을 위해, 순수한 감상의 대상으로만 뽀르노를 받아들인다고 해보자. 파토님의 감상 태도로 인해 뽀르노는 앙드레 지드의 <좁은 문>이 될 수 있을까? 그럴 수 없다. 뽀르노는 누군가를 성적 흥분 상태에 도달하는 것을 목적으로 제작된 영상물이기 때문이며, 이것이 뽀르노를 뽀르노이게끔 만드는 거다.


 


소녀시대를 뽀르노에 비유한 점에 대해서 만국의 빠돌 빠순이들에겐 심심한 위로의 말씀을 전한다. 그저 비유일 뿐이라고 넘어가고 싶으실 터. 미안하지만 나는 본 글의 논지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대들과 그대들이 구입한 상품, 그 엔터테인먼트 상품의 제조사, 그리고 상품을 유통하는 미디어 카르텔이 이 나라 대중음악 전체에 끼치는 악영향은 뽀르노와 다를 바 없다고 말하려 한다.


 


당신이 이수만이라고 가정해보라.


 




당신은 소녀시대를 왜 제작했을까. 팝이 가진 다양한 가능성을 타진하고 소녀들이 가진 음악적 역량을 통해 대중음악의 새 지평을 열기 위해? 혹은 파토님과 같은, 이 땅의 순진한 중년들의 지순하고 소박한 판타지를 다독여주려고? 소녀시대라는 종합딸감세트가 지향하는 제 일의 미덕은 '소비'다. 소비되지 못한다면 그들이 가진 모든 오락의 가치는 쓰레기통에 들어간다. 따라서 소녀시대의 음악은 섹슈얼리티의 바코드다.


 


소시에 있어 전제된 타자는 '성적 판타지를 소비하는 대중'이라는 일면적인 범위로 제한되며 이 소비는 소통이 거세된 소비다. 소시의 가치는 소비대중이 '전제된 타자'에 포섭되는 과정 속에서 일방적으로 형성된다. 다시 말해, 소시의 음악은 성적 판타지의 충족과 소비라는 정형화된 인식 틀에 현실의 타자가 수동적으로 포섭되는 과정, 즉 '상품'을 '구매'하는 과정과 동일한 과정이라는 거다. 엄밀하게 말해 소녀시대의 음악은 예술의 '표현'이 아닌 소비의 '포장지'에 불과하다. 소녀시대가 데스메탈을 하거나 그레고리안 찬트를 하거나 그 기호는 변함이 없다. 결과적으로 이것은 가치지향의 문제, 소비지향이냐 아니냐의 문제인 것이다.


 



 


그래서, 상품이면 어떠냐고? 그래, 음악판에는 상품들도 필요하다. 다만 문제는 이 상품이 시장 지배적 사업자의 독점 공급이라는 점이다. 대중예술이 가진 다양한 가능성이 오직 어린 여자애들 허벅지에만 포커싱 되고 있다는 점이 문제라는 거다. 상품들이 설치는 만큼 진지하게 음악하는 사람들도 대중과의 접점을 찾을 수 있는 공정한 인프라가 구축되는 것이 건강한 문화시장의 첫발이다. 그 첫발 50년 넘게 못 내딛고 있는게 남한의 대중음악시장이다. 또 그걸 존나게 오랫동안 가로막고 있는게 앞서 말했듯 붕어들과 거대자본, 그와 손 잡은 미디어라는 거다. 그리고, 나는 그저 좆꼴리면 그만이라는 소비자 니네들도 그렇게 남한 대중음악의 기형적인 성장에 당당히 한몫하고 계시는 거라거. 그렇게 떳떳할 것 없다거.


 


끝으로 한 가지 더. 나는 사실 나를 포함해서 남자 시끼들이 소녀시대를 통해 충족시키는 욕망의 본질은, 방사장이 고 장자연 씨를 옆구리에 끼고 나뒹굴 때의 욕망과 별로 다를 바 없다고 본다. 우리가 돈과 권력을 가지면 그렇게 되는 거라고 강력하게 의심하고 있는 중이다. 순진하던 내 친구 선배들이 고액 연봉자 대열에 끼고 나서는 룸싸롱 안마방 드나들기를 당연시 하는 것을 보건대.


 


 


문화불패 남가좌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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