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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2.10.목요일


허기자





* 영화 감상에 방해가 될 만한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신예 던컨 존스 감독의 <더 문 Moon>은 올해 나온 SF영화 중 가장 중요한 작품으로 꼽을만하다. 제작비 500만 달러에 불과한 <더 문>은 첨단의 기술력과 그에 비례하는 고비용의 장르로 인식된 SF에 대한 편견을 순전히 아이디어 하나로 극복한다.


 


 


저예산이라 놀리지 말아요


 




영화는 가까운 미래 지구에 불어 닥친 에너지난을 달에 매장된 헬륨3로 해소한다는 내레이션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달기지 ‘사랑’에서 홀로 작업 중인 한 남자를 비춘다. 그는 다국적 기업 루나 인더스트리에 근무하는 샘 벨(샘 록웰)이다. 샘은 인공지능 컴퓨터 로봇 거티(케빈 스페이시 목소리 출연)의 도움을 받아 달 표면의 헬륨3을 채취해 지구로 보내는 것이 임무다. 3년 계약을 맺어 이제 2주 후면 사랑하는 부인과 갓 태어난 딸이 있는 지구로 귀환할 예정이지만 아뿔싸! 불의의 사고를 당하고 만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몸을 추스른 샘 앞에 자신의 모습을 한 또 다른 샘이 나타나니, 어찌된 일일까.


 


<더 문>은 배우 샘 록웰의 열렬한 팬인 던컨 존스 감독이 그를 위해 만든 영화다. 극중 샘 벨을 빼면 변변한 캐릭터가 없는 이 영화에서 샘 록웰은 원맨쇼에 가까운 활약을 펼친다. 한편으로 샘 록웰의 1인 3역을 비롯해 달기지 사랑을 벗어나지 않는 배경, 7,80년대 SF영화에서나 볼법한 아날로그적인 기지 내부 모습 등 <더 문>은 곳곳에서 저예산의 전략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그렇다고 이 영화가 품고 있는 의미와 메시지마저 저예산을 지향하는 것은 아니다.


 


여러 명의 샘이 등장하는 작품인 만큼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철학적인 의문을 제기하기도 하고 달에 홀로 남아 외로움과 사투를 벌이는 한 남자의 심리드라마이기도 하며 돈에 눈먼 대기업과 하청을 받은 비정규직 노동자 간의 관계를 은유한 사회비판물로도 기능한다. (혹자는 다국적 기업이 한국과 미국의 합작회사라는 점을 들어 한국의 비인간적 노사관계의 메타포로 읽어내기도 한다.) 하여 드라마틱한 감정의 블록버스터를 선사하는 <더 문>은 작은 규모와 달리 다층적인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둔 작품인 것이다.


 


SF영화를 즐겨보는 관객들에게 <더 문>이 전하는 복합적인 메시지는 익숙한 구석이 많다. 사실 이 영화의 메시지는 그리 독창적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더 문>은 SF영화 자체에 대한 오마주라고 해도 틀리지 않을 정도로 익숙한 설정과 요소가 수시로 눈에 밟힌다. 던컨 존스 감독의 말을 그대로 인용하자면, <더 문>의 아이디어는 “블루컬러 노동자들이 주인공을 맡았던 7,80년대 SF영화에서 얻었”고 샘 록웰의 1인 다역은 “제레미 아이언스가 쌍둥이를 연기한 <데드 링거>(1988)를 참고했”으며 거티의 존재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1968)와 <사일런트 러닝>(1972)에 대한 인용”이라고 한다.


 


감독의 언급을 염두에 두지 않더라도 <더 문>이 직간접적으로 영향 받은 SF영화는 셀 수 없을 정도다. 이 영화가 보여주는 철학적 질문은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솔라리스>(1972)를 연상시키고 기지내부를 벗어나지 않는 구성은 리들리 스콧의 <에이리언>(1979)이 선배 격이며 1회용으로 소모되는 샘의 운명은 또한 리들리 스콧의 <블레이드 러너>와 조지 루카스의 <THX-1138>(1970)에서 먼저 시도됐던 것이다.


 


 


영화에서 원천을 얻다


 



 


나는 여기서 현대 SF영화의 중요한 변화를 감지한다. 요 몇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SF영화가 삼는 원전은 소설이 거의 대부분이었다. (그도 아니면 <우주전쟁> <지구가 멈추는 날>과 같은 리메이크 작품이 차지했다. 하지만 원작영화 역시도 대부분 소설에서 출발한다!) 실제로 우리가 SF영화에서 걸작이라 부르는 작품의 상당수는 소설을 원작으로 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더 문>에서 인용된 작품을 예로 들자면, <데드 링거>는 바리 우드의 <트윈스>를,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와 <솔라리스>는 각각 아서 클라크와 스타니스와프 렘의 동명의 작품을, <블레이드 러너>는 필립 K. 딕의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을 꿈꾸는가?>가 원작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명약관화하다. 이제 신예 SF연출자들은 소설보다 영화에서 더 많은 영감의 원천을 얻는다. <더 문> 이전에 SF영화계에 신선한 충격을 몰고 왔던 닐 블롬캠프의 장편 데뷔작 <디스트릭트9> 역시도 외계인 영화에 대한 공식을 뒤바꾼 그 기저에 제작자로 참여한 피터 잭슨의 그림자가 짙게 깔려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공교롭게도 <디스트릭트9>은 던컨 존스가 그랬던 것처럼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의 그것에 채 10분의 1도 되지 않는 3,000만 달러(그에 비하면 <더 문>의 제작비 500만 달러는 껌 값에 불과하다.)에 불과한 제작비의 한계를 발상의 전환으로 극복했다. 과연! 인간이 외계인을 슬럼가에 격리시켜 착취한다는 설정이 무릎을 치게 만드는 것이다.


 


원래 피터 잭슨은 닐 블롬캠프와 함께 게임원작 영화 <헤일로>를 준비하던 중 여의치 않자 <디스트릭트9>의 아이디어를 듣고는 그 자리에서 바로 제작을 결정했다. 여기에는 장르의 묵은 공식을 참신한 아이디어로 돌파하려는 젊은 감독의 패기가 영화 제작의 1순위로 작용했지만 피터 잭슨의 사심이 상당 부분 개입한 것 역시 주지의 사실이다. 제작자로 참여한 피터 잭슨의 초창기 작품을 기억하는 팬이라면 그가 <디스트릭트9>을 통해 초짜 감독 시절 꿈꿨던 영화적 야망을 재현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의심이 들 정도다.


 


실제로 <디스트릭트9>에는 <고무인간의 최후>(1987)와 <포가튼 실버>(1996)의 그림자가 짙게 깔려있다. <디스트릭트9>의 외계인이 생체실험에 차출되고 기업에게 기술력을 착취당하는 등 인간에게 유린당하는 모습은 어딘지 모르게 <고무인간의 최후>를 닮았고 인터뷰와 뉴스릴 화면을 적극 이용해 대체역사물처럼 구성한 방식은 <포가튼 실버>에서 이미 피터 잭슨이 선보인 바다. 전설적인 B급영화로 회자되는 <고무인간의 최후>(1987)를 통해 잔인무도하게 외계인을 살상하는 인간을 다뤘고, ‘페이크 다큐멘터리‘ <포가튼 실버>(1996)에서는 허구의 인물을 등장시켜 조국 뉴질랜드의 영화사를 넘어 세계영화사를 다시(?) 썼던 그에게 <디스트릭트9>은 21세기 버전의 <고무인간의 최후>요, <포가튼 실버>이었던 셈이다.


 


아닌 게 아니라, 피터 잭슨은 어느 인터뷰에서 <디스트릭트9>의 제작을 두고 사심이 얼마간 작용했음을 밝힌 적이 있다. “<디스트릭트9>을 두고 외계인 버전 <클로버필드>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건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얘기입니다. 실황중계라는 점에서 두 영화는 동일한 방식을 취하고 있지만 <클로버필드>는 장르의 공식을 그대로 따랐죠. <디스트릭트9>은 아예 장르를 새롭게 창조했어요. 그건 내가 <고무인간의 최후>와 <포가튼 실버>에서 궁극적으로 이루려고 했던 바죠. 그걸 이 애송이(닐 블롬캠프)가 데뷔작에서 멋지게 해낸 거예요.”


 


닐 블롬캠프와 피터 잭슨의 관계처럼 던컨 존스 역시 제임스 카메론이라는 대가의 후원을 등에 업은 것으로 유명하다. <더 문>을 보고 던컨 존스의 비범함을 알아본 리들리 스콧은 그를 자신의 후계자로 점찍었다. 하여 던컨 존스는 <더 문> 이후 차기작 <소스 코드>를 리들리 스콧의 제작 하에 연출하며 차차기작 <뮤트>는 <블레이드 러너>(1982)에서 많은 부분 아이디어를 얻어 기획된 작품으로 알려진다. 


 


 


모방을 넘어 장르의 규칙을 바꾸다


 




개인적으로 <디스트릭트9>와 함께 <더 문>을 올해 나온 가장 중요한 SF영화로 꼽고 싶다. 신예감독의 데뷔작, 저예산의 한계를 아이디어로 극복했다는 점에서 두 영화는 닮았지만 무엇보다 과거와 달리 선배 감독의 영화를 적극 차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징후적이다. 바야흐로 이제 SF에서도 영화광 세대가 주도하는, 그들이 영향 받은 영화에 대한 언급을 서슴지 않는 작품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물론 영화광들의 영화는 쿠엔틴 타란티노를 위시해 많이 만들어졌고 현재도 만들어지고 있다. 다만 닐 블롬캠프와 던컨 존스가 등장하기 전까지 SF 장르에서만큼은 SF소설광들이 만든 작품은 등장했어도 영화광들의 영화라고 부를만한 작품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를 ‘SF영화를 위한 SF영화’라고 표현해도 좋을 것 같은데 그런 이유로 <더 문>과 <디스트릭트9>을 올해 가장 중요한 SF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다만 영화광의 영화라고 해서 단순히 모방의 수준에서 그치는 것은 아니다.


 


<더 문>과 <디스트릭트9>의 가장 훌륭한 점은 모방을 통해 창조를 이뤘다는 사실이다. 장르는 소위 시대의 산물이다. 마치 살아 숨 쉬는 생물과 같아서 적극적으로 시대를 반영하고 내부 규칙을 업데이트하면서 진화해온 까닭이다. 그중에서 SF는 시대의 변화에 가장 민감한 장르다. 우리가 소위 대가라고 칭송해마지 않는 SF소설가들은 가까운 미래를 부정적인 암흑세계로 즐겨(?) 예언해왔다. 그들이 묘사한 디스토피아적인 미래는 불행하게도 지금 현실이 되었다. 그래서 <더 문>과 <디스트릭트9>은 오마주를 넘어 여기에 (영화광 세대의 놀이의 전유물 같은) 장르 비틀기를 통한 현실을 덧씌운다. <더 문>이 냉전시대 미국의 국력을 과시했던 달에 대한 상징을 날로 영향력을 잃어가는 국운의 공허한 이미지로 바꾸었다면 <디스트릭트9>은 페이크 다큐멘터리를 도입해 인종차별이 횡행하는 현실의 남아공을 노골적으로 은유한다.


 


여기서 우리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또 하나의 현실과 마주하게 된다. 인간을 위협하는 적의 개념으로 인식돼 온 컴퓨터와 외계인이 도리어 더 인간적인 모습으로 변모한 것. <더 문>의 거티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의 할(HAL)에게서 가져온 것이지만 인간을 감시하고 위협하는 대신 샘을 도와 지구로의 탈출을 돕는다. <디스트릭트9>의 외계인은 어떤가. 쓰레기 더미의 판자촌에서 생활하고 고양이 먹이로 하루하루를 연명하며 심지어 강제철거까지 당하는 그들의 모습에는 하층민의 삶이, 우리네 현실이 겹쳐진다. 바꿔 말해, 컴퓨터와 외계인은 더 이상 인간이 넘보지 못하는 미지의 존재가 아니다.


 


컴퓨터와 외계인을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존재로 인지하게끔 변화시킨 건 영화를 비롯한 영상매체다. 물론 <사이버리아드>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등과 같은 소설에서도 인간의 마음과 정신을 가진 외계인이 등장한 것은 사실이지만 <미지와의 조우>(1977) <E.T.>(1982) <새 엄마는 외계인>(1988) <너 어느 별에서 왔니?>(2000) 등 영화에 비할 바는 아니다. 던컨 존스와 닐 블롬캠프처럼 영화로 현실을 접하는 영화광 감독들에게 컴퓨터와 외계인은 이미 친숙한 존재다. 촛불을 든 시민에게 곤봉을 휘두르고 비인간적인 철거에 항의하는 철거민들에게 물대포를 쏘아대며 노동 환경 개선을 요구하는 파업을 불법으로 매도하는 인간 실격의 현실에서 그들은 도리어 컴퓨터와 외계인으로부터 인간(적인 감정)을 본다. SF의 장르역사를 돌아보건데, 소설은 영화가 되었고 영화는 현실이 되었다. 그러나 이제 현실은 다시 영화를, 장르의 규칙을 창조하기 시작했다. <더 문>과 <디스트릭트9>은 그 명백한 증거다.


 



허기자(edwoong@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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