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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2.10.목요일


호빵


 


드디어 마지막 4편이다. 지금껏 알바의 추억을 쓰면서, 나는 내가 이렇게 알바를 많이 했었든가 하고 새삼 놀랐었다. 하지만, 파도 파도 끝이 없을 것 같았던 내 추억도 여기서 끝이다. 이제 앞으로 무슨 글을 써야 하나 하는 막막함 반, 연재를 마무리한다는 후련함 반으로 알바의 추억 4편을 시작한다.


 


1. 대목 맞이


 


어릴 때 내가 가장 좋아했던 날은 설날과 추석이다. 다른 아이들도 마찬가지였을 거다. 우선 학교를 쉰다는 게 첫째로 좋았고, 평소 먹지 못하던 특별한 음식을 먹을 수 있다는 게 두 번째. 마지막으로는 부모님이나 집에 온 손님들께 용돈을 받을 수 있다는 게 최고였다. 용돈도 다른 날과는 급이 다르다. 많이 받아 봤자 천 원짜리 한 장이 다인 평일과 다르게 이런 명절에 받는 용돈은 최하가 만원이다. 백 원짜리 동전이나 모으던 빨간 돼지저금통에 파릇파릇한 만 원짜리 지폐를 넣을 때의 그 충족감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다들 아실 거다.


 


그래서 나는 명절이 좋았다. 비록 애들은 먹지 않는 연양갱이 빠지질 않고 들어가 있는 과자종합선물세트도 좋았고, 절 한 번에 만 원을 받을 수 있는 것도 좋았고, 어머니가 부쳐주는 돼지고기와 버섯이 들어간 꼬치도 좋았다. 명절이 끝나 학교에 가서 애들과 각자 받은 용돈을 비교해보고 주머니에 두둑하게 챙겨온 구슬로 구슬치기하는 건 덤으로 좋았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이런 명절이 최고의 날이다. 하지만 어머니 입장에서는 다르다. 음식장만도 해야 하고, 손님접대도 해야 하며, 손님들이 자식에게 용돈을 주면 어머니는 받은 만큼 그 손님의 자식들에게 용돈을 줘야 한다. 그나마 우리 집은 애가 셋이라 보통 애들이 한 두명씩 있는 손님들에 비해 받은 거보단 조금 덜 주는 셈이다. 그래도 어머니에게는 명절이 좋지만은 않았을 거다. 알바생도 똑같다. 명절마다 꼬박꼬박 쉬는 곳에서 일하면 모를까, 시내 음식점이나 PC방 같이 명절을 쉬지 않고 일하는 가게의 알바생들은 괴롭다.


 


이런 날에는 아침부터 손님들이 쏟아져 들어온다. PC방이라면 낮부터 용돈 쥐고 들어온 학생들로 가게가 붐비고, 시내에 있는 음식점이라면 나들이를 나온 손님들로 북적인다. 사장은 사장대로 이 대목을 놓치지 않으려 가게를 늦게까지 연다거나, 또는 알바생을 더 충원해 쓴다.


 


꼭 명절만 대목이 아니다. 보쌈집은 여름보다 겨울에 장사가 더 잘되고, 삼계탕 집은 복날이 대목이다. 이런 대목에 특별히 충원되는 알바생이 바로 대목 맞이 알바생이고, 내가 이야기하려는 알바 경험담도 대목 맞이 알바에 대한 것이다. 내가 대목 맞이 알바로 한 알바는 12월 한정 음식점 알바, 추석 일주일간 백화점 양말 코너 알바 등이 있으나 그중에서도 특별히 기억에 남은 복날 삼계탕 집 알바 경험을 추억하려 한다.


 


2. 여름 삼계탕 집


 



 


당시 대학 여름방학을 맞아 나는 알바를 구하려 했다. 그러나 알바를 구하는 곳도 잘 없었고, 있다 해도 상당히 까다롭게 면접을 봤다. 고작 알바 하나 쓰면서 대학은 어딘지 부모님은 뭐 하시는지 성격은 어떤지 꼬치꼬치 캐묻곤 했다. 그래서 기껏 찾아낸 알바자리에서도 변변히 퇴짜를 맞아 나는 주눅이 들었다. 여름방학과 겨울방학에는 대학생 인력이 쏟아져 나와 알바를 구하기가 힘이 드는데, 나는 그걸 몰랐었다. 발 빠르게 종강 직전부터 알바를 찾아도 알바를 구할까 말까인데 방학이 시작되고도 3,4일이 지나 일자리를 찾는 늑장을 부렸으니 말 다한 셈이다.


 


그날도 나는 내가 가진 옷 중에서 가장 예쁜 옷을 차려입고 얼굴엔 할 줄도 모르는 분칠까지 하고 시내를 서성이며 알바를 찾았다. 방학 동안 알바를 하지 못하면 2학기 학비 낼 돈이 모자라 대출을 받아야 했다. 그렇게 되면 나도 말로만 듣던 빚쟁이 대학생이 되는 거다. 절박한 마음으로 나는 시내 곳곳을 누비며 가게 문에 종이가 붙은 곳을 볼 때마다 달려가 종이 내용을 확인하곤 했다. 몇 번 ‘주방 이모 구함’ 에 낚이고 나니 차라리 홀 서빙보다는 주방 이모가 되어 일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칼질은 자신 없지만 설거지는 제법 잘한다. 심각한 얼굴로 내가 ‘주방 이모 구함’ 종이를 노려보는데 그 가게에서 사람이 쓱 나와 문에다 종이 하나를 더 붙였다. ‘홀 서빙 학생 구함’이라는 글자를 보자 두 눈이 번쩍 뜨였다. 나는 잽싸게 그 삼계탕 집에 들어갔다.


 


사장님은 눈썹 문신이 무서워 보이는 50대 아주머니였는데 나를 보는 눈이 그리 좋지 않았다. 사장님은 퉁명스럽게 우리 가게는 일이 힘들고 뚝배기가 무거워 나같이 비실비실해 보이는 애는 일을 시킬 수 없다고 했다. 기껏 찾은 가게에서 또 튕기게 생겼다. 다른 데 가서 알아보라는 사장님의 말에 이래 봬도 일을 잘한다고, 음식점 알바도 해본 적이 있다고 힘차게 대꾸했다. 사장님은 그래도 고개를 저었다. 나는 안절부절못하다 마침 식사를 마친 손님이 나가 테이블이 비자 얼른 달려가 테이블을 치웠다.


 


평소 수줍음을 타고 얌전한 나이지만 그때는 반드시 이 가게에서 일하겠다는 집념으로 싹싹하게 테이블도 닦고, 주방에서 나온 뚝배기도 날랐다. 들어보니까 뚝배기가 확실히 무겁긴 무거워서 팔이 후들후들 떨렸다. 홀에서 서빙을 하던 이모들이 나를 보면서 빙그레 웃었다. 이모들은 내가 마음에 드는 듯했다. 사장님은 뒤에서 관심 없는 척 장부를 뒤적거리고 있었는데 그러면서도 은근히 내가 하는 행동을 지켜봤다.


 


한 10분쯤 가게 일을 도우니까 사장님이 그럼 내일부터 나오라고, 여름 한 달만 쓰는 알바니까 한 달만 고생하라고 그랬다. 드디어 알바를 구했다는 기쁜 마음으로 나는 꾸벅 인사를 드리고, 가게를 나와 문을 닫으면서도 몇 번이나 감사하다고 인사를 했다. 드디어 일을 할 수 있다. 정말 뻥이 아니라 대학에 합격했을 때보다 더 많이 기뻤다. 깍두기 국물이 튀어 옷을 좀 버린 건 신경쓰이지도 않았다.


 


나는 지금껏 알바 경험담을 쓰면서, 사장을 좋게 표현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이 삼계탕 집 사장님은 다른 사장들과는 달리 정말 좋은 분이었다. 비록 무뚝뚝하셔서 내게 따듯한 말을 해준다거나 칭찬을 해주지는 않았지만, 내가 실수를 해도 크게 아댠치지 않았고 가게가 늦게 끝나는 날에는 차비하라면서 돈도 쥐어주고 그랬다. 같이 일하는 이모들도 다들 좋았다. 어린 나를 유난히 예뻐해 주고 다정하게 대해주셨다. 물론 내가 운이 좋은 탓도 있었다. 내가 일하기 전에 일했던 알바생이 워낙 일을 못하고 농땡이를 피우다 일주일 만에 그만둬버려 새로 뽑은 게 나였다. 덕분에 가게 이모들은 일 못하던 전 알바생과 나를 비교하며 이번 애는 참 괜찮은 애가 들어왔다고 좋아하셨다.


 



 


가게는 종일 알바로, 나는 아침 10시 반부터 밤 10시 반까지 12시간을 일했다. 친구들은 또래 하나 없이 아주머니들 틈에 끼여 일한다고 나를 걱정했지만 나는 오히려 그게 더 좋았다. 막내야 막내야 하며 예뻐해 주시는 것도 좋고, 손님이 비는 오후 시간에 이모들이 틀어놓는 7080가요를 듣는 것도 좋았다. 거기서 잊혀진 계절이나 알고 싶어요 같은 흘러간 옛노래를 이모들에게 배웠다.


 


또, 아침 점심 저녁으로 맛있는 밥을 잔뜩 먹어서 즐거웠다. 나는 고등어를 싫어했는데, 주방 이모가 해주는 묵은지 고등어찜이 무진장 맛있어서 반찬으로 나오기만 하면 밥 두 공기는 그냥 먹었다. 한 그릇에 구천 원이나 하는 비싼 삼계탕도 일하는 한 달 동안 네 번이나 먹었다. 잘 먹어야 일 잘한다는 사장님의 지론에 따라 오리불고기도 먹고, 영계구이도 먹고, 귀한 복어탕도 먹었다. 가끔은 내가 돈 받으며 일하는 게 미안해질 정도로 매일 맛있는 밥을 얻어먹었다.


 


복날은 모두 세 번 있다. 초복 중복 말복인데, 다른 날보다 초복 날에 유난히 손님이 많았다. 우리 어머니는 보통 말복에나 닭을 삶아 주셔서 나는 다들 말복만 챙기나 했는데, 실제로는 초복을 더 많이 챙겼다. 초복 날, 사장님은 외부에서 일일 이모를 다섯 명이나 부르고 두 딸과 사위들도 모두 불렀다. 사장님은 마치 지휘관처럼 우리에게 맡을 포지션을 말했다. 두 딸은 식기담당, 나는 물컵 설거지 담당, 일일 이모들은 설거지와 홀 서빙 담당이었다. 가게 문을 아직 열지도 않았는데 바깥에선 벌써 손님들이 줄을 서서 기다렸다. 진짜 거짓말이 아니라 한 오십 명 가까이 되는 사람들이 기다랗게 줄을 서서 가게 안을 기웃대며 쳐다봤다. 우리가 맡은 위치로 가고 주방 이모들이 뚝배기 오십 개를 일제히 끓이기 시작하자 사장님은 가게 문을 활짝 열었다. 우리의 초복이 시작된 것이다.


 


요란하게 레게머리를 한 남자도, 눌러쓴 모자 아래로 보이는 코에 볼펜 선이 선명한 여자도, 계 하러 온 아주머니들도 다들 우리 가게에서 삼계탕을 먹었다. 컵을 빨리 씻으려 고무장갑을 끼지 않고 맨손으로 설거지하는 나도 바빴고, 무겁고 뜨거운 뚝배기를 나르는 홀 이모들도, 한쪽에서 열심히 식기를 닦아대는 딸들도 바빴다. 초복이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렇게 바빴는데도 이상하게 마음이 들떴다. 설거지를 하며 틈틈이 뒤를 돌아보면서 줄이 줄었다 싶으면 오히려 걱정이 될 정도로, 나는 손님이 많이 많이 와서 삼계탕이 많이 많이 팔리길 기원했다. 남의 집 일을 하는 게 아니라 마치 우리 집 일을 하는 거 같고 이 가게가 우리 가게 같았다. 그동안 알바를 하면서 이런 기분은 처음 느꼈다. 예전엔 크리스마스에 손님이 넘치게 올 때면 한숨을 쉬고 크리스마스는 제발 가족과 함께 보내라며 커플들 욕을 해대던 나였는데 말이다.
 
결국 그날 우리는 삼계탕을 천 그릇도 넘게 팔아치웠다. 사장님도 흡족해하고, 이모들과 나도 기분이 좋았다. 사장님은 이모들에게 보너스로 십만 원씩 주고 일개 한 달 알바에 지나지 않는 나에게도 오만 원을 주셨다. 중복 때는 천 그릇을 못 팔았다. 그래도 사장님은 여전히 우리에게 보너스를 주셨다. 말복 때도 마찬가지로 챙겨주셨다. 심지어 사장님은 내가 한 달 알바를 끝내고 나가는 날에 봉투에 현금으로 백만 원을 넣어주면서 또 따로 십만 원을 더 주셨다. 그동안 일 잘했다고 더 주는 거라고, 앞으로 학교 열심히 다니라고 하셨다. 그런 말씀을 하는 사장님의 무뚝뚝한 얼굴에 겸연쩍은 미소가 잠깐 떠올랐다. 가게 이모들은 눈물을 보이면서 홀 이모가 지은 내 애칭을 부르며 손을 흔들었다. 정말 좋은 가게였다.


 




 


3. 이모들의 다툼


 


이렇게 분위기 좋고 사장님도 좋은 가게긴 했지만, 일하는 동안 딱 한 번 이모들 간의 싸움이 있었다. 보통 오후 4,5시엔 손님이 없어 이모들은 잠깐 낮잠을 자고 나는 가게를 지키면서 노닥대는데 그날은 주방에 일이 많아 홀 이모들만 방에서 낮잠을 잤다. 주방 이모 세 사람이 주방일을 하는데 영 끝날 기미가 없자 낮잠을 자던 홀 이모 두 분이 도와주겠다며 일어나 주방으로 갔다.


 


나는 이모들 주려고 근처 새마을금고로 가서 공짜 율무차를 다섯 잔 뽑아왔는데 가게로 돌아오니 분위기가 영 나빴다. 말소리가 험하게 나는 게 싸우는 것 같았다. 슬금슬금 주방에 들어가는데 순간 내 옆으로 식칼이 날아와 바닥에 꽂혔다. 말 그대로 식칼이 휙 날아와서 콱 하고 바닥 타일에 박힌 거다. 이모들도 놀라고 나도 놀라고 던진 이모도 놀란 눈치였다. 마침 손님이 와서 일이 흐지부지 마무리됐는데 나중에 들어보니 새로 온 주방 이모와 홀 이모가 싸웠다고 했다.


 


주방일이 바쁜데 실컷 낮잠 자다 끝날 때쯤 되니까 도와준답시고 생색을 냈다며 새 주방 이모가 욕을 했다고 했다. 가뜩이나 새 주방 이모가 교인이라 매주 일요일은 물론이고 가끔 평일에도 교회 일로 빠져서 감정이 상했던 홀 이모도 지지 않고 욕을 했단다. 감정이 폭발한 주방 이모가 던진 칼이 멋들어지게 바닥에 꽂힌 거고.


 


두 사람이 싸운 일이긴 하나 사건은 홀 이모들 VS 주방 이모들로 바뀌었다. 굳이 따지자면 나는 홀 서빙 알바이니 홀 팀이 된다. 사실 정도 홀 이모들에게 더 많이 들었다. 홀 이모 두 분은 전라도 분이었는데 말을 참 재밌게 하는 분들이었다. 한가할 때 두 분의 대화를 듣고 있으면 시간가는 줄 모를 정도였고, 나에게 팔뚝 살이 빠지는 체조도 가르쳐주고 예쁜 머리끈도 주고 그랬다. 두 이모는 정도 참 많았다.


 


막 휴가를 나온 듯한 군복 차림의 군인들이 가게에 오면 군대 간 아들 생각이 난다며 줄 건 없지만 음료수라도 많이 먹으라며 콜라며 사이다를 공짜로 잔뜩 챙겨주셨다. 고향 사람이 오면 고향 사람이라고 또 음료수를 공짜로 줬고, 단골손님은 또 단골손님대로 음료수 값을 받지 않았다. 가끔 어린 아이를 데리고 오는 가족이 있으면 이모들은 어김없이 음료수를 마구 마구 꺼내주셨다. 삼계탕 전문 집이라 그나마 손님들에게 인심을 베풀 수 있는 건 한 병에 천 원하는 음료수뿐이었고, 사장님은 그 음료수 값은 안 받아도 그만이라며 이모들이 손님들께 서비스로 주는 건 물론이고 나보고도 목 마르면 냉장고에서 콜라를 꺼내 마시라고 그랬다.


 



 


물론 나는 사양하지 않고 아주 실컷 탄산을 맛봤다. 덕분에 보통 알바를 시작하면 몸무게가 3,4kg씩 빠지는 내가 이 삼계탕 집 알바 한 달만에 잘 먹고 잘 마셔 살이 토실토실 올랐다. 그래서 우리 어머니는 내 얼굴을 볼 때마다 정말 일하러 다니는 것 맞느냐고, 어쩜 그렇게 온종일 일을 해도 얼굴이 추석 때 뜨는 보름달 마냥 둥그렇게 뜨냐고 놀리셨다.


 


아무튼 이 사건은 커지는 기색이 보이려다 다행히 이모들끼리 서로 화해해서 하루 만에 끝났다. 예전 고딩 때 있었던 파벌싸움을 떠올리며 일이 커지면 홀 이모 편을 들어야지, 했던 내 얕은 생각이 부끄러웠다.


 


지금도 삼계탕 집 알바 했던 추억을 떠올리면 즐겁고 재미난 기억이 한가득 떠오른다. 인터넷에 맛집으로 올라온 거 보고 왔다는 손님들에게 신이 나서 가게 자랑을 했던 일. 일본인 손님이 더듬대며 주문을 하다 내가 못 알아듣자 가방에서 한국어 책을 꺼내 삼계탕 그림을 가리켰던 일 등등. 고작 한 달밖에 일하지 않았는데도 일 년이 넘게 일했던 보쌈집보다 훨씬 좋았다. 앞으로 또 알바를 한다고 해도, 이만큼 좋은 가게에서 일할 수 있을까 싶다.


 


4. 마치며


 


독투에 보니 공백님께서 편한 알바자리 구하기라는 글을 올리셨기에 재밌게 봤다. 그래서 나는 편한 알바자리 구하는 노하우 대신, 이왕 구한 알바자리에서 그나마 욕 덜 먹으며 일하는 내 나름의 방식을 말해 드리려 한다. 일 열심히 하고 친절해야 하는 건 당연하다. 그런 당연한 일 말고, 내가 말하려 하는 건 일종의 꼼수다. 바로 사장님의 아들 딸이나 손자 손녀를 공략하라는 거다.


 


하다못해 단골손님의 아들 딸을 공략해도 괜찮다. 애들이 따르고 좋아하는 알바생은 사장도 좋아한다. 단골손님이 사장에게 저 알바 참 괜찮다고 말해서 점수를 받을 때도 있다. 심지어는 일 대신 애 좀 봐달라고 해서 애랑 유희왕 카드 가지고 놀 수도 있다. 뭐 애들도 잘생기고 예쁜 사람을 더 좋아한다는 슬픈 사실 앞에 힘이 들긴 했지만, 그래도 관심을 주고 귀여워 해주면 자연히 나에게 넘어오기 마련이다. 나 같은 경우엔 사장님의 손자에게 피카츄를 부지런히 그려줬다. 한 달을 매일 그려주니까 드디어 나에게 넘어와서 재롱을 부리고 사장님도 그걸 보며 흐뭇해하더라. 문제는 그날이 내가 그만두는 날이었다는 거지만…….


 


아무튼, 이제 알바의 추억이 끝났다. 부족한 글을 재밌게 읽어주심에 거듭 감사를 드리며, 다음에는 더욱더 좋은 글로 찾아뵙겠다 말씀드리고 싶다. 고맙다.


 


 


호빵(hohohopang@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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