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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2.11.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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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벼랑끝 외교전술의 종말...


 


새로운 천년이 열렸음에도 북한핵의 위험은 여존히 현실하는 위협이었다. 이미 제네바 합의는 말 그대로 사문화되어가고 있었고, 지켜지는 사안이라면 중유공급과 경수로 건설 단 두가지 밖에 없는 듯 하였다. 이 상황에서 북한의 농축우라늄 방식의 핵개발 프로그램이 진행되고 있는 것이 드러나게 된다. 제2차 북핵 위기의 도래였다.


 


1차 핵위기와 같은 주제, 같은 배우, 같은 무대의 모습이었지만, 그 전개사항은 1차 핵위기때와 사뭇 다르게 진행되었다. 그 이유가 뭘까?


 



 


첫째, 학습효과이다. 1차 북핵위기를 통해 미국은 두가지를 배우게 된다. 절대 북한의 벼랑끝 외교전술에 말려들지 말자. 그리고 북한이 요구하는 북-미간 양자협상은 절대 거부한다 라는 것이다. 벼랑끝 외교전설은 이미 90년대를 지나 새로운 천년을 맞이하면서 이미 그 효용이 떨어졌는데, 양치기 소년의 외침과 같은 것이었다. 처음이야 늑대가 나타났다고 외치면 그 효과가 나올수 있겠지만, 이게 두 번, 세 번 반복되면서 그 효과는 점점 떨어지게 되고, 결국에 가선 아무도 이 말을 믿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북-미간 양자협상의 경우에는 이미 제네바 합의라는 ‘비싼 수업료’를 내고 배웠듯이, 북-미간 양자협상은 아무런 실효성이 없다는 것이다. 협상을 하고, 합의를 도출해 봤자 북한을 구속할만한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제네바 합의의 가장 큰 문제점이 바로 여기에 있었다. 합의를 도출해 봤자 이를 구속력있게 강제할 수단이 없었기에 북한은 수시로 NPT 조약을 무시하게 되었던 것이다. 결국 이런 북한을 강제할 수 있는 방법은 다자간 협상을 통해 북한에 영향력을 줄 수 있는 국가를 끌어들여 북한을 압박하는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둘째, 주인공의 변화이다. 2000년 클린턴 행정부를 이어받은 부시 행정부의 면면을 보면, 매파의 최선봉에 선 인물들이란 것이 한눈에 들어온다. 부시를 필두로 해서, 럼스펠드, 체니, 콘돌리자 라이스 등등등...이들은 북한과의 협상에서 양보를 생각할 수 없는 인물들이었다.


 


셋째, 시대 환경의 변화. 2001년 911테러로 인해 바짝 예민해져 있는 부시 행정부는, 미국에 대한 어떠한 도발도 용납지 않는다는 분위기이다. 이런 상황에서 북한핵은 1차핵 위기때처럼 중동에 대한 ‘핵확산의 위협’이 아니라 ‘미국 본토에 대한 실질적 위협’으로 인식 되어진 것이다. 이는 이미 1998년 8월31일 발사된 대포동1호에서 확인된 사안이었다. 자신들의 안전에 위해를 가하는 북한을 상대하는 부시 행정부로서는 섣불리 양보를 생각할 수 없는 입장이 되었던 것이다.


 



 


새로운 무대에서 바뀐 주인공들끼리, 똑같은 핵위기를 어떻게 풀어나갈 것인가가 바로 2000년대에 도래한 제2차 북핵위기의 본질이었다.


 


2000년5월24일 미국 대표단 제2차 금창리 지하시설 방문


 


2000년6월15일 역사적인 남북 정상회담이 성사되게 된다.


 


2000년6월19일 미국, 대폭적인 대북 제재조치 완화 발표...이때는 북한의 미사일 시험발사 유보에 대한 보상차원이었다. 클린턴 행정부 말기, 북한 미사일 해결을 위한 클린턴의 유화책이 정점에 오른 시점이었던 것이다. 클린턴 행정부는 1기때는 북핵위기로, 2기때는 미사일 위기로 북한에게 끌려다니는 모습만 보여주다 역사에서 퇴장하게 된다.


 


2000년10월23일 클린턴의 북한 미사일 해결을 위한 노력의 정점을 보여주게 되는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의 북한 방문이 성사되게 된다.


 


2001년1월20일 조지 W 부시...미국 대통령으로 취임. 부시 행정부는 출범 이후 힘을 통한 패권안정에 치중하면서 북한 등 '불량국가들(rogue states)'로부터 나오는 위협으로부터 미국과 우방국을 지킨다면서 미사일방어(MD) 체제구축에 주력했다. 그런 의미에서 북한의 대포동 미사일 발사와 핵보유는 더없이 좋은 ‘호재’였다. 1조달러를 넘어가는 이 어마어마한 군사체제를 설치하려면 그에 걸맞는 ‘위협’이 있어야 했다. 이런 위협은 북한이 제공해 주었기에 부시 행정부는 이를 명분으로 MD 드라이브에 엑셀레이터를 밟게 된 것이었다.


 


클린턴 행정부 시절 북한의 벼랑끝 외교전술은 협상으로의 복귀를 의미했으나, 부시 행정부 시절에는 오히려 부시 행정부의 강경드라이브를 부추기며, 궁극에 가서는 미국의 군비확장을 지원하는 것이 되어버렸다. 부시는 북한이 계속해 ‘악당으로서의 행동’을 보여야 MD체제를 구축할 수 있었기에, 북한을 계속해 불량국가, 깡패국가, 쓰레기 국가로 만들어야 했다.(만들지 않아도 북한 스스로가 알아서 그렇게 되어갔지만 말이다)


 


2001년 3월에 열린 한미정상회담에서 북한 지도자에 대해서 '회의감(skepticism)'을 표시


 


2001년 9월11일 WTC에 대한 알카에다의 자살공격. 전세계가 미국의 대응을 숨죽이며 바라보게 됨. 이 엄숙한 순간에 북한은 자신들과 이번 테러가 무관함을 말하게 된다. 정권 초기 패권안정에 치중하였던 부시는 911테러 직후 정책 최우선 순위를 반테러와 대량살상무기(WMD) 비확산에 두고, 이 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책을 찾게 된다. 북한의 악몽이 시작된다.


 


2002년 연두교서에서 북한을 '악의 축(axis of evil)'의 하나로 지목. 이란과 이라크 등 이슬람국가로만 구색을 맞추는게 형평성에 어긋난다는 판단에서 북한을 넣었다 하나, 북한은 이미 미국의 적으로 그 입지를 굳혀가고 있었다.


 


2002년 3월에 공개된 '핵태세검토(Nuclear Posture Review: NPR)' 보고서에서 북한을 미국의 핵공격 가능 대상국으로 명시. 본격적인 대북한 압박이 시작됨


 


2002년 5월 21일 발표한 연례 '국제테러유형 보고서: 2001년판'에서 북한을 테러지원국으로 재지정


 


2002년 7월 미국은 지난 1998년부터 북한이 우라늄 농축을 통한 비밀 핵활동을 할 가능성에 대한 첩보 수준의 의혹을 갖기 시작하였다. 미 CIA의 WMD에 대한 2000년 전반기 정보보고서에 의하면, 미국은 북한이 핵 프로그램 관련 물질들의 확보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판단하였으나 구체적 정보를 갖지 못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CIA의 WMD에 대한 2001년 후반기 정보보고서에서는 북한이 우라늄농축을 위한 원심분리 관련 물질 등을 찾고 있었고, 우라늄농축 관련 장비들을 구입하였다. 2002년 7월에 되서는 북한이 우라늉 농축을 통한 핵물질 생산의 결정적 증거를 확보하게 된다. 이 증거를 통하여 미국은 북한이 연간 2개 이상 핵무기 제조가 가능한 우라늄농축 활동을 모색하고 있다고 평가하였다. 북한이 우라늄농축 관련 원심분리기를 많은 양으로 이미 확보하고 있음이 밝혀졌다.


 


2002년 10월3일 제임스 켈리 미 정부 특사 북한 방문, 이때 켈리 특사가 북한측에 그동안 미국이 수집한 정보를 공개. 북한을 압박하게 된다. 결국 북한은 농축우라늄 방식의 핵무기 개발 프로그램이 있음을 시인. 당시 북한 관계자는 ‘더욱 강력한 무기’도 갖고 있다면서 위협적 주장을 함


 


2002년 10월17일 미국, 북한의 농축우라늄 프로그램 시인 사실 발표


 


2002년 11월14일 KEDO 집행이사회, 대북한 중유공급 중단 발표


 


2002년 12월12일 외무성 대변인 담화로 북한 핵동결 해제 선언...제2차 핵위기에 대한 벼랑끝 외교 시작


 


2002년 12월 21 5MW 원자로의 봉인을 제거하고 감시카메라 작동을 중지시켰다. 12월 22일에는 8,000여개의 폐연료봉 저장시설에 대하여, 12월 23일에는 핵연료 제조공장 및 플루토늄 재처리용 방사화학실험실에 대하여 봉인 제거 및 감시카메라 작동중지 조치를 취하였다.


 


2002년 12웡26일 북한 IAEA사찰관 3명 추방 통보. 12월31일 추방


 


2003년 1월 6일 IAEA 북한이 핵사찰 규정을 위반하였다는 결의안을 채택


 


2003년 1월 10일, IAEA의 결의안에 반발, 북한 정부 성명으로 NPT 탈퇴 선언


 


2003년 2월 12일 IAEA특별이사회, 북한 핵문제 안보리 보고 결의안 채택


 


2003년 2월 28일 미국, 북한의 5MW 원자로 재가동 공식 확인


 


2003년 3월 20일 미국의 이라크 2차 침공. 국제사회의 반대를 무릎쓰고 악의 축의 하나인 이라크 침공, 다른 악의 축인 이란과 북한 숨을 죽이고 이를 지켜봄


 


2003년 4월23일 북한 핵문제에 관한 1차 미, 중, 북 3자회담이 북경에서 개최, 북경회담 만찬시에 북한측 수석대표 이근이 미국측 수석대표 켈리 차관보에게 북한이 핵무기를 가지고 있다는 비공식으로 언급 함. 국제사회에 파장 확대


 


2003년 4월말~8월 북한은 다자회담의 불필요성을 언급하게 된다. 반면 미국은 한미 정상회담(5. 14), 미일 정상회담(5.23), G8 정상회담(6.1~6.3), EU 정상회담(6.19~6.20) 등을 통하여 대북 외교압력을 가중하고, 나아가 북핵문제의 유엔안보리 회부를 위협한다. 또한 대북 경제제재, 군사제재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는 등의 강경자세를 보이게 된다. 이러한 대북 압력의 가중 상황 속에서 북한은 미국이 제안한 5자회담을 6자회담으로 확대하는 형식으로 하여 대화를 갖기로 합의하게 된다. 북한의 벼랑끝 외교전술이 통하지 않는다는게 점차 확인 된다.


 


2003년 8월27일 북한 핵문제에 관한 1차 6자회담이 북경에서 개최


 



 


2003년 10월 2일 북한 외무성 대변인, 연료봉 8천개 재처리 완료 발표. 북한의 극단적인 벼랑끝 외교전설이 나오기 시작함. 이때부터 북한의 핵무기 수량에 대한 구체적인 논의가 되기 시작한다. 북한의 핵능력은 기존의 플루토늄 재처리에 의한 1~2개, 8,000여개 폐핵연료봉 재처리에 의한 4~6개, 5MWe 원자로 재가동에 의한 연간 1개, 50MWe와 200MWe의 건설 완료에 따라 2008년경부터 연간 35~50개, 우라늄농축 시설 완공에 따른 2004년~2006년경부터의 연간 2~6개 등의 핵무기 제조가 가능할 것으로 분석되었다.


 


2003년 12월 1일 금호지구 경수로공사 1년간 잠정중단


 


2003년 12월 북한, 국제사회의 비난이 격해지자 우라늄농축 핵개발을 시인한 바 없으며, 미국측 켈리 특사의 잘못된 이해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주장을 하게 됨


 


2004년 1월 6일  미국 학자, 전문가 영변 핵시설 방문


 


2004년 2월25일 북한 핵문제에 관한 제2차 6자회담 북경 개최. 미국은 북한에게 리비아식 모델을 따르라고 압력을 가함(리비아의 핵프로그램 포기 방식) 미국의 목표는 북한이 사실상의 모든 핵 프로그램을 포기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으며, 핵동결 조치도 미흡하다며 강경일변도로 나아갔다. 핵포기에 대한 북한측에 대한 보상은 아직 논의할 시기가 아니라고 말하며 계속해 북한을 압박해 들어갔다. 이때 미국측은 대선을 의식해 협상은 계속 진행하겠지만, 양보하는 모습은 보여줄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2004년 4월 7일 한미일, 북핵정책협의회 발족 


 


2004년 4월19일  베이징, 북중 정상회담 개최, 김정일-후진타오 북핵회담 지속합의/


 


1961년 중국과 체결한 중조우호합작 및 상호원조 조약(군사력 자동개입 조항 포함)에 대한 중국 지도부의 재계정 움직임이 김정일의 북경방문 이후 수면 아래로 가라앉음.


 


2004년 4월23일  북한 룡천역 대규모 폭발 사고, 김정일 국방위원장에 대한 암살시도로는 관측이 있었으나, 이런 여론을 파악한 북한측이 황급히 진화함 


 


2004년 4월28일  미, 북핵 최소 8개로 추정 발표 


 


2004년 4월29일  북,미,한,중,러,일, 5월12일 북핵실무그룹회의 베이징 개최 공동 발표 


 


2004년 4월30일  부시, 대북 직접대화 거부 의사 표명. 1차 북핵위기때처럼 북한의 노림수에 말려들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명 


 


2004년 5월12일  6자회담 실무그룹회의 


 


2004년 5월22일  북-일 정상회담/ 뉴욕타임즈 북한이 리비아에 핵무기 제조를 위한 우라늄을 제공했다는 기사를 보도함 


 


2004년 5월25일  미국 3차 6자회담 진전 없을 땐 유엔 안보리 상정 검토 경고



2004년 5월27일  북한, 리비아에 핵물질 판매했다는 NYT보도 사실무근이라고 주장 


 


2004년 6월 9일  G-8 정상회의, 북핵문제 우려 및 폐기 촉구 공동성명 발표 


 




2004년 6월23일  3차 6자회담 개최, 미국 '북핵 5단계 해법' 제시, 북한 '미, 보상 수용시 핵동결 폐지' 발표, 의장성명 발표. 미국측이 제기한 북핵 5단계 해법은 민주당 인사들조차 놀랄 정도로 진일보한 해법으로서 평가받았는데, 이는 부시 행정부가 1기 재임기간 안에 북핵을 해결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으로 해석되었다. 여기서 5단계 해법안을 잠시 살펴보면,


 


1단계 : 초기 준비기간을 3개월로 잡고 이 기간에 북한이 우라늄을 포함한 모든 핵프로그램 포기 선언, 모든 핵프로그램 중단, 핵시설 및 물질 봉인, 핵무기및 재료, 원심분리기등의 폐기를 위한 공개 조치 허용등의 4개사항을 이행할 경우 중유제공


 


2단계 : 3개월간 4가지 사항을 이행하고 나면 2단계로 불가침보장을 포함한 다자 안보 보장


 


3단계 : 북한이 필요한 에너지에 대한 다국간 산정작업을 거쳐, 비핵에너지 제공


 


4단계 : 테러지원국 해제토의


 


5단계 : 북한의 비핵화가 종료된 후 국교정상화등 총체적 조치 이행


 


2004년 8월 북일수교협상 돌입


 


2004년도 11월 미국 대선... 북한은 년 미국 대선의 결과 이후를 바라보고 있는 상황이었고, 그때까지 시간을 끌다보면, 대선의 결과를 볼 수 있고, 혹시 켈 리가 집권하게 되면 대북한 정책이 바뀔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하는 듯 했다. 그러나 대선기간 내내 켈리는 부시가 미숙하게 대처해 북한이 핵무기를 양산해 냈다며 부시를 몰아붙혔고, 켈리가 집권하여도 미국의 대북한 외교정책은 그리 쉽게 바뀔거 같지 않다는 전망이 나오게 되었다.


 


2004년 12월 8일 북한이 납치했던 요코다 메구미(당시 13세)의 유골에 대한 유족들의 DNA 검사결과 가짜유골인 것으로 드러났다. 일본열도는 북한의 이같은 파렴치한 행위에 대해 분노했으나, 고이즈미 총리는 북일수교협상의 중단은 없다며, 북한과의 수교에 강한 의지를 불태우게 된다. 


 


2005년 1월 8일 미국이 두차례 의원단을 파견하게 된다. 유화적 제스쳐의 움직임이었다.


 


2005년 2월2일 부시 대통령은 워싱턴 의회에서 연두교서를 발표하고 북한, 이란 핵문제를 외교 창구를 통한 대화로 풀어나가겠다는 의지를 천명했다. 부시는 북핵 6자회담의 재개를 강조하며 ‘다른 관련국들(한국, 일본, 중국, 러시아, 일본)과의 긴밀한 협조를 통해 북한의 핵무기 개발 의지를 저지하겠다’고 밝혔다. 부시 행정부 2기 출범에 앞서 유화적 제스쳐를 보냈던 것이다.


2005년 2월 10일 설연휴 마지막날  북한 외무성 대변인이 '핵 보유'를 선언하는 성명문을 발표. 성명문의 문맥을 살펴보면, 다음의 6가지의 메시지를 확인할 수 있는데,


 



첫째, 미국을 상대로 북핵문제의 조기 종결을 요구



둘째, 미국 및 국제사회를 상대로 북한이 핵보유국임을 기정사실화



셋째, 미국을 상대로 대북적대정책의 포기를 요구.



넷째, 미국을 상대로 협상의 여지는 남겨둔 것임



다섯째, 미국을 상대로 일본 강경파 문제에 대한 시사점을 던진 것이다.


 


여섯째, 한국 국민을 상대로 대북 일체성을 느끼도록 의도한 것이다.


벼랑끝 외교전술에서 한발 물러나 자신의 핵보유가 일종의 외교적 카드임을 어느정도 시인한 성명문이었다. 문제는 여기에 대한 미국과 국제사회의 반응인데, 미국의 경우는 의외로 담담한 반응들을 보이고 있었다. 이미 북한핵은 있었던 것으로 알고 협상에 들어갔는데, 지금에 와서 무슨 호들갑이냐? 라는 반응이었다.


 


미국의 의외로 침착한 반응 앞에서 전세계는 6자회담의 조속한 복귀를 요구하게 되었고, 미국은 북한이 복귀하지 않으면 북한을 제외한 5자회담이라도 개최할 것임을 시사했다. 그 동안 북한이 보여준 벼랑끝 외교전술이 완전히 그 효과를 잃어버렸음이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북한이 아무리 핵보유를 주장하여도, 그 동안 핵억제력, 핵물질 등등의 수사를 동원해 벼랑끝 외교전술을 사용하였던 것이 역으로 ‘핵무기 보유’선언의 파괴력을 약화시켰던 것이다.


 



 


2000년대의 핵 위기는 한마디로 말해 북한의 ‘벼랑 끝 외교전술의 소멸’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지난 1차 북핵 위기 때 비싼 수업료를 내고 배운 북한에 대한 대처방안 덕분에 부시 행정부는 북한의 벼랑끝 외교전술과 북-미간 양자회담을 극력 회피해 북한을 계속 핀치로 몰아넣을 수 있었다. 더구나 2003년 제2차 걸프전을 통해 부시 행정부의 강경드라이브를 대외에 천명하게 되고, 2001년 911 테러를 통해 미국 본토 방위가 부시 행정부 제1의 목표가 되면서, 클린턴 행정부 때의 미봉책은 정책 논의선상에서 아예 배제되게 되었다.


1차 북핵 위기 때의 주연이었던 북한이, 2차 북핵 위기에선 조연급으로 떨어져, 부시 행정부가 주도하는 북핵 협상에 말려들게 되었던 것이다. 결국 이런 외교적 수세를 타파하기 위해 북한은 최후의 카드라 할 수 있는 핵보유 선언을 외치게 된 것이었다. 부시 행정부가 주도권을 놓치지 않고, 북핵 협상을 이끈 결과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한반도 대량살상무기 반세기의 1편인 핵무기편이 이렇게 끝이 났다. 최대한 객관적인 판단 준거를 제시하기 위해 한반도에 처음 핵이 도입된 시점부터 북한이 핵무기 보유선언을 한 2005년 2월10일까지의 핵무기 역사를 최대한 객관적인 시각에서 서술하려고 애썼다. 객관성을 더하기 위해 연표 순으로 기술하였는데, 다시 뒤돌아보면 빈 구석이 많이 보이는 것은 글쟁이의 어쩔 수 없는 천형인 듯 하다. 다음 편은 한반도 대량살상무기의 2편인 미사일편이 준비되어 있다. 핵무기와 미사일의 관계는 그 둘이 결합 해야지만 완벽한 무기체계가 되는 상호보완적인 존재들이므로, 한반도 대량살상무기 체계를 이해함에 있어서 꼭 한번쯤은 거론되어야 할 주제일 것이다.


 


2편을 기약하며 이만 줄이겠다.


 


 


펜더(jagdpanter@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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