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러스가 엉망으로 만들어놓은 것이 한두 개 일까만은, 봉준호의 성취를 제대로 축하해 줄 겨를이 없었다는 것은 아쉬운 일이다. 비록 로컬 영화제지만 <기생충>이 아카데미를 씹어 먹은 것은, 한국 영화 100년사의 의미 있는 이정표다. 무엇보다 우리의 언어와 공간으로 묘사된 '현재에 대한 문제의식'이 전 세계의 공감을 얻었기에 그렇다.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고 있는 지금 우리의 사회문화가 영화의 밑그림이 되어준 것이다. 졸라 우아하지 않나. 이러니 오스카가 뻑이 가지.
헌데 기생충보다 더 코로나19를 원망해야 했던 영화가 있었으니, <남산의 부장들> 되시겠다. 봉준호는 상이라도 받았지, 이 영화는 레이스도 제대로 못 쳐보고 패를 꺾었다. 한참 뒷심을 발휘해야 할 즈음 터진 바이러스로, 손익분기점 언저리에서 영화를 내려야 했다. 운명에 운명으로 점철되어 있던 10•26 그날처럼, 영화도 예상치 못한 비운을 맞이했다. 여러모로 운명적이다.
액자에서 나온 박정희
<남산의 부장들>도 기생충 못지않은 영화사적 의미가 있다. 박정희라는 인물이 주연으로 제대로 다뤄진 최초의 극영화라는 점이 그렇다. 같은 시공간을 다룬 영화 <그때 그사람들>에서 박정희는, 죽기 위해 등장하는 조연에 지나지 않았다. 김재규의 거사를 촌극으로 바라보는 냉소적인 시각에서 박정희의 역할은 크지 않았다. 그 현장에 있었다던 시바스 리갈, 딱 그 정도로.
이번 영화에서 박정희는 다르다. 적극적으로 잔인하고, 구체적으로 탐욕스럽다. 그동안의 박정희 캐릭터들이 생김새와 말투를 흉내 내는 데에 바빴다면, 이성민이 연기한 박정희는 전혀 다르다. 가장 박정희와 다른 얼굴이지만 가장 박정희 같은 얼굴이다. 언뜻 짓는 표정이, 사료 속의 인물과 순간적으로 겹친다. 인의 장막 뒤에서 정말 그렇게 담배를 피우고 정말 그렇게 말했을 것 같은 상상력을 자극한다.
박정희를 이렇게 전면적으로 해석한 이유는 영화의 주제에 닿아있다. ‘김재규는 왜 방아쇠를 당겼을까’. 사람을 양계장 분쇄기에 갈아버릴 정도의 충심이 어쩌다 주군의 가슴에 총알을 박는 야수의 심정이 되었나. 그 극적인 변심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박정희가 신랄하게 말하고 움직였어야 했다.
그동안 영화에서 박정희는 시대의 표상에 불과했다. 파출소장 책상 위에, 학교 교단 앞에 초상으로 걸려있던 그는, 무참했던 시대의 공기를 말해주는 장치일 뿐이었다. 민초의 삶을 짓밟은 것은 그의 대리자들이었다.
<효자동 이발사>
<남산의 부장들>의 가치는 여기에 있다. 사진에 박제되어 있던 박정희를 꺼내 많은 대사를 쥐여줬다. 민주주의와 인권을 유린한 주체가 누구였는지, 이제 그를 우상화된 액자에서 꺼내 오롯이 바라보게 된 것이다. 더딘 속도지만, 여기까지 온 것이다. 불과 15년 전, <그때 그사람들>이 박근혜와 박지만의 소송으로 가위질 당했던 것을 상기하면 말이다.
하지만 <남산의 부장들>은 시대를 다룸에 있어 아직 미완성이다. 아주 중요한 퍼즐 하나를 비워놓고 영화를 끝맺었기 때문이다. 버리기 아까운, 버려서는 결코 안 될 캐릭터 하나가 원작에 묻혀있다. 그는 바로,
남산의 마지막 부장
영화의 원작 김충식 기자의 <남산의 부장들>은 이렇게 시작한다.
JP, HR 과는 또 다른 제3의 방향으로 뛰는 30대 초반의 청년이 있었다. 그는 ‘혁명’을 위해서도 반혁명을 위해서도 아니었다. 누가 쿠데타를 벌였느냐, 그를 도와 출세 길을 열 것이냐, 상황 파악을 위해 숨 가쁘게 내닫고 있었다.
<남산의 부장들> 39 쪽
1961년 5월 16일, 어수선한 아침이었다. 초조한 마음으로 혁명공약을 인쇄하는 김종필, 병력 파악에 허둥지둥하는 이후락, 인생의 베팅을 시작한 하급 장교 박종규, 차지철. 그 사이에 대위 전두환이 있었다.
그날 새벽, 그의 움직임은 그 누구보다 육감적이었다. 동숭동 서울대 문리대 ROTC 교관이었던 그는 시내의 총성을 듣자마자 육군본부로 달려간다. 쿠데타를 직감하고 주체세력을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그때가 오전 8시. 박정희 소장이 헌병의 총탄을 뚫고 제1한강교를 건넌지 채 4시간이 지나지 않은 시각이었다. 다음날 육사 동기들과 다시 육본에 쳐들어간 그는 혁명위 본부 김종필 중령을 만난다.
“아니 이토록 중대한 일을 하면서 어찌 연락을 안 주셨습니까?”
“(널 뭘 믿고..) 보안 때문에 어쩔 수 없었네. 미안하게 됐네.”
혁명위에 육사 11기의 쿠데타 지지 결의를 전달한 전두환은 차량과 무기를 지원받아 육사 후배들을 끌어내러 태릉으로 향한다. 정변의 순간, 일개 대위의 움직임에서부터 그의 다분한 정치군인으로서의 기질이 드러난다.
탈모진행 인증 후에 금고를 털고 사라졌던 영화에서와는 달리, 원작<남산의 부장들>에서 전두환은 여기저기 종횡무진 등장한다. 캐릭터로 보자면 골 때리는 씬 스틸러다.
이들은 한결같이 최고 권력자 박정희의 총애를 자처했다. 그런 자부심으로 오성회니 칠성회를 만들어 스스로 용성(勇星•전두환), 관성(冠星•노태우), 여성(黎星•김복동), 혜성(彗星•최성택) 등으로 부르기도 했다.
<남산의 부장들> 94 쪽
용감한 별, 으뜸 별, 검은 별, 총명한 별이 모여 은하수를 이룬 것이다. 땅, 불, 바람, 물, 마음 다섯 가지 힘을 하나로 모아 지구를 지켰던 캡틴플래닛처럼, 이 전대미문의 일진 모임은 하나회로 번성했다. 후에 정말로 육군의 별이 된 그들은 대통령, 국회의원, 기관장 등으로 뻗어나가 5공화국을 수놓았다. 지구방위대의 원조는 후뢰시맨이 아니라 육사 11기였던 것이다.
하극상이 만연한 당나라 군대에서 이런 중2병 같은 초급장교 시절을 보낸 그들이 참군인으로 성장할리 만무했다. 그들의 전장은 부정부패, 이권, 정치자금이 오가는 정치판 이었다.
전두환 소령 등은 최고 회의 시절 한남동 우리 집에 와서 술도 먹고 가고 그 동기들도 자주 다녀가곤 했다. 전두환은 그때도 꼭 술병이라도 하나씩 들고 가는 습성이 있어 기억에 남는다. 나중에 12•12가 나고는 나와 가족들을 잡아넣고 재산을 송두리째 빼앗아 갔다.
김용태 전 의원 증언, <남산의 부장들> 96 쪽
그를 진공상태의 권력을 어부지리 훔친 쎄복좋은 인간으로만 볼 수 없다. 영화에서처럼, 따블백 메고 금고나 털어가는 그런 좀도둑 수준의 캐릭터가 아니다. 그는 박정희 시대의 웃자란 독버섯이다.
나는 보안 사령관으로 있으면서 부정부패에 관한 종합 보고서를 만들어 박 대통령께 보고하려 했다. 그때 KCIA 부장, 경호실장, 비서실장 등의 권력관계를 분석하고 각 부처의 부정 유형을 조사해 보았던 것이다. 그런데 10•26사건이 터져 그날 밤 김재규를 잡아넣고 이튿날 새벽 보고서를 절단기에 넣고 없애버렸다.
81년 10월 대통령이 된 전두환이 공개석상에서 한 말이다. 위세가 하늘을 찔렀다던 중정부장 김재규와 경호실장 차지철의 약점을 잡고 흔들 수 있었을 만큼, 비중 있는 악역이었던 것이다. 참모들에게 으스대면서 했을 이 발언을, 김충식 기자는 이렇게 평한다.
권력이 누구의 손에 떨어질지 아직 캄캄한 밤이었으므로 후환을 없앤 것이었다. 뒷날 전 사령관이 정권을 수중에 넣은 뒤 그와 부하들은 아까운 ‘기록 인멸’을 후회하고 탄식했다고 한다. 성급한 ‘피난(避亂)’ 이었다고.
<남산의 부장들> 729 쪽
김재규의 탄환이 박정희의 머리에 박힌 그날, 전두환은 육본에 달려간 5•16 아침처럼 본능적으로 움직였다. 체포된 김재규를 보안사 주력 분실인 서빙고가 아닌 VIP 전용 세종로 분실로 ‘모신' 것이다. 김재규가 어디까지 그림을 그리고 쿠데타를 기획했는지 불투명했기 때문이다.
동원 병력 없이 밑도 끝도 없이 쏴 제낀 것을 파악한 전두환은 주저없이 김재규를 서빙고로 연행한다. 국가 원수를 살해한 '내란음모사범 김재규'를 손에 넣는 데까지 채 두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로부터 6개월 뒤, 전두환의 공수부대는 광주로 내려간다.
“유신이라는 거대한 괴물”이 “박정희 한 사람이 없어지면 그대로 없어질 것”으로 보았던 김재규는 유신의 머리를 자르는 데는 성공했다. 그러나 머리 잘린 유신이란 괴물에게 새로운 머리가 솟아났다. 박정희의 정치적 사생아 전두환이었다. 전두환은 김재규를 베고 광주를 피로 물들였다.
한홍구 <유신> 409 쪽
<남산의 부장들>이 김재규의 사정으로만 끝맺어서 안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박정희 못지않게 구체적으로 탐욕스럽고 면밀하게 사악했던, 우리 역사의 역대급 빌런을 이렇게 묻어두어서는 안 될 일이다. 한니발이 그랬고 조커도 그랬던 것처럼, 악당의 악행을 이해하는데에 그의 전사(前事)를 들여다보는 것보다 좋은 방법은 없다. ‘전두환은 박정희 시대를 어떻게 살았는가’에 대한 시선은 박정희의 재평가만큼이나 중요하다.
우민호 감독에게 남산의 부장들 프리퀄, <전두환 라이징> 제작을 촉구하는 바이다.
이렇게 가시면 아니 되옵니다
호창 : (다방 TV를 바라보며) 우리 부대 체육대회 때 축구시합을 했었거든. 저 양반이 상대편 골키퍼를 봤었어. 내가 찬 공에 얼굴을 정통으로 맞아가지고 쌍코피를 막 흘리는 거야. 와! 완전히 쫄아가지고 내가.. 근데 저 양반이 딱 일어나더니,
(성대모사 톤으로) 본인이 연대장이라고 살살하는 건가~ 본인을 전두환 이병이라고 생각해~
야! 저 양반 진짜 남자더라.
(세영의 눈치 보며) 아 너는 참 저 양반 안 좋아하겠구나. 아니 뭐 나도 정치적으로 좋다는 것은 아니고 남자로서 매력 있다는 얘기지...
영화 <스카우트> 중
그동안 영화 속 전두환도 다르지 않았다. 그도 많은 대사가 없었다. 불의한 시대를 환기하는 장치로서만 존재했다. 박정희와 다른 점이 있다면, 희화된 이미지다. 전두환 나름의 대중 스킨십이었을 것이다. 물론 자신을 희화할 자유는 본인에게만 있었지만.
유머 감각은 확실히 있었다. 자학 개그를 구사했다. 대머리 탤런트는 출연을 금지당했지만, 전두환 스스로는 벗겨진 머리를 희화화했다. 서울 올림픽 준비를 점검하기 위해 IOC 위원장 사마란치와 부위원장 바이츠가 방한했다. 둘 다 대머리였다. 전두환은 “두 분이 다 대머리이신데 나와 셋이 나가면 주변이 환해질 겁니다.”라고 말했다.
고나무 <아직 살아있는 자 전두환> 178 쪽
벗겨진 머리와 어눌한 발음 등 그의 허술한 부분에서 인간적인 면모를 찾는다. 그렇게라도 위안 삼지 않으면 엄혹한 시절을 견뎌 내기 힘들었기 때문일까. 어쩌면 우리는 그런 희화된 이미지에 뭉뚱그려 그가 역사에 지은 죄를 바로 따져 묻지 못했는지 모른다. 의리로 똘똘 뭉친 부하들, 보스로서의 호탕한 기질. 이런 것도 다 거지 같은 소리다. 한 국가를 긴 세월 뒷골목 건달패처럼 주물러 왔다는 말과 다름없다.
정신이 온전치 못하신다는 분이 18홀을 정정하게 누비고 계신다. 박근혜 정부가 추진한 전두환 추징법은 약빨이 떨어졌는지 연희동 저택과 일가의 권세는 2020년 5월 18일 오늘까지도 건재하다. 희생된 이들에게 죄스러운 일이다.
뉴스타파-KBS 공동기획 <전두환과 그들 재산 추적기>
그가 기어코 천수를 누리고 떠나는 어느 날. 정호용 같은 자가, 허화평 같은 자가, 장세동 같은 자가 그의 영정 앞에 둘러앉아 “호상이시로군”같은 소리 하는 꼴을 보게 될까 봐, 두렵다.
사과할 자세가 되어먹지 않은 자에게 공허한 사죄를 요구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그의 눈과 귀가 조금이라도 건강할 때, 자신의 비뚤어진 젊은 날을 연기하는 배우의 메스꺼움을 보셔야 한다. 조금이라도 총기가 남아있을 때, 자신의 목덜미에 씌워진 역사의 멍에를 느끼고 가시게 해야 한다. 자식과 손주들이 잘 먹고 잘 살 거라는 안도감 말고, 자신의 과오에 대해 평생 대신 손가락질 받으며 고통스럽게 살아갈 거라는 섬뜩함을 안고 가셔야 한다. '용감한 별'은 그렇게 스러져야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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