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서 방학숙제로 표현했던 미루고 미뤘던 미합의 항목을 찐으로 이야기 할 시간이 왔다. 업계용어로 '집중교섭'이라고 쓰고 '끝장토론'이라 읽는다. 시간에 구애 받지 말고 합의 될 때까지 해보자는 의미다. 물론 한 번 만에 합의가 안 될 때는 여러 번 하기도 한다.
우리에게도 이 시간이 왔다. 포기해야 할 것과 반드시 얻어야 할 것을 냉정하게 구분해야 할 때가 된 것이다. 착잡한 심정으로 우선순위를 매기고, 포기해야 할 것들을 정리하고 있는데, 기쁜 소식이 들려왔다. 우리와 함께 교섭을 했던 게임회사 ‘B지회’가 포괄임금제 폐지를 주요골자로 잠정합의한 것이다. ('잠정'합의인 이유는 조합원 찬반 총투표의 절차가 있기 때문이다)
동네 친구의 합의 소식은 기쁘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우리도 빨리 합의를 해야 겠다는 부담으로 다가왔다. 회사 측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게임 관련 커뮤니티나 언론이 우리 회사가 언제 쯤 합의할 지 계속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게임 산업에서 워낙 흔한 일이 아니다 보니) 회사는 이런 관심에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만연한 이직 풍토도 부담의 한 축을 담당했다(이 때가 2월 중순, 바야흐로 이직의 시즌이었다). 포괄 폐지 여부에 따라 연봉이 같아도 실제 내 주머니에 들어오는 돈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B회사로 이직할 충분한 이유가 되는 지라 회사도 시간이 많지 않았다. (같은 이유로 주변 게임회사들도 우리 교섭에 관심이 컸다고 한다)
다시 교섭으로 돌아가자.
우리는 집중교섭을 통해 앞선 교섭에서 합의 못한, 60%에 가까운 항목을 다시 논의해야 했다. 큼지막한 것부터 입장 차만 좁히면 되는 항목까지 다양했다. 하지만 중심으로 내건 ‘포괄임금제 폐지’(너무 자주 나오니 끝판대장이라 명명한다), ‘고용 안정’, ‘복지 향상’은 여전히 조금의 합의되지 못한 상태였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노동시간 기준으로 야근 수당을 지급할 경우 인건비가 20~30%는 증가할 것인데, 수십 억의 돈이 더 들어갔다. 그렇기에 돈과 관련된 항목은 이놈의 ‘끝판대장’을 어떻게 할지 정해야 이야기를 진행할 수 있었다. 시간이 지난 지금은 아주 쬐끔 이해가 되지만 교섭 한복판에서 잔뜩 격양된 상태로 있던 그 때에는 회사의 말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우리 회사는 7천 억 대의 매출과 40% 수준의 영업이익을 내는, 소위 '돈 쓸어 담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잘나가는 게임사는 영업이익이 거진 30% 이상은 된다)
증가하는 인건비 분이 결코 적은 돈은 아니지만, 그간 한 푼도 받지 않은 직원들이 야근해가며 쌓아 놓은 돈에 비하면 크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저 정당한 나의 몫을 받아오는 것인데, 회사에서 '돈!' '돈!' 하니 화가 났다. 야근비 챙겨 준다고 게임사 사장님들 재벌 순위는 안 변할 텐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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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회사의 앓는 소리는 더 이상 듣기 싫어 끝판대장 같은, 바로 돈이 들어가는 문제를 미뤄두고 나머지 것들부터 합의점을 찾기 시작했다.
기업의 사회적 책무, 투명 경영 같은 노조의 상징성은 있지만 실효가 적은 항목들은 아쉽지만 철회하였고, 그 외에 우선순위가 낮은 복지 향상도 현재 수준으로 합의했다. 양보의 아이콘이 된 것 같아 속이 끓었지만, 큰 딜을 해야 하는데 작은 거에 집착하면 모든 걸 그르친다는, 경력 20년 차 상급단체 분들의 조언을 따르기로 했다. 그리고 그것은 이번에도 옳았다.
이렇게 첫 번째 집중교섭은 진짜배기를 다시 뒤로 넘겨 놓은 채 끝이 났다. 여러 차례 회사가 끝판대장은 어렵다는 입장을 공식, 비공식적으로 전했기 때문에 이 국면을 어떻게 돌파할지 깊은 고민이 시작되었다.
우리는 많은 논의와 회의를 거쳐 단순하지만 명료한 결론을 내었다.
"끝판대장이 노조 간부 몇몇의 요구가 아닌 직원 모두가 바라는 요구라는 것을 보여주자!"
어떻게? 현장에서 의견을 직접 묻는 것이다.
두 번째 집중교섭이 있기 하루 전, 점심시간에 회사식당 앞에 앙케이트 보드를 세우고 자신의 의견을 스티커로 표현하도록 했다.
반응은 뜨거웠다. 식사를 마치고 나온 사람들은 자기 의견을 표현하기 위해 보드 뒷쪽으로 줄을 섰다. 줄을 선 사람이 수 십 명이 넘어가자 사측에서 전화가 왔다. 교섭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이런 식의 활동을 꼭 해야 하겠냐고. 당연히 ‘네, 꼭 해야 합니다.’라고 답했다.
급기야 찾아왔다. 예상을 훌쩍 넘는 민감한 반응에 조금 당황하긴 했지만, 우리의 의지는 확고했고,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었다. 물러설 수 없었다.
사측 : 교섭 하루 전에 이런 식으로 여론몰이를 해서 교섭에 영향을 꼭 줘야겠어요? 지금 이러시면 내일 대화가 더 어려워질 수 있다는 거 염두해주시길 바랍니다.
나야나 : 정당한 우리의 홍보 활동이고, 그저 사람들의 의견을 묻는 과정입니다. 어떤 부분이 문제가 되는 거죠? 우리가 진로를 방해했어요? 업무를 방해했어요? 지금 이거 막는 거 부당노동행위로 간주하겠습니다!
논쟁하는 사이 찬성 쪽 면은 스티커로 가득 채워져 갔다. 그 조그만 동그란 스티커 하나하나가 자신감과 힘이 되었다. 그래, 더 당당히 요구하자. 우리의 요구는 틀리지도 무리하지도 않다. 반드시 ‘이런다고 되겠어?’라고 냉소하던 사람들에게 보여주자 생각했다. 우리가 하나로 뭉치면 반드시 해낼 수 있다.
두 번째 집중교섭의 날이 되었다. 어제의 영향인지 회사가 드디어 끝판대장 이야기를 꺼냈다. 기분 좋아할 시간은 없었다. 아니, 기분은 스카이 점프 마냥 땅으로 곤두박질쳤다. 아주 그냥 조옥~ 같았다.
회사는 즉시 폐지를 할 경우 제도에 혼선이 오고, 비용적인 측면에서 임팩트가 크니 '단계적으로 폐지'하자고 했다. 현재 52시간(연장 12시간)으로 된 부분을 46시간으로 1차적으로 줄이고, 내년 3월로 '폐지'하는 안이었다(이 때는 2월). 대신 조합에서 요구한, 돈이 들어가는 복지를 최대한 향상시키겠다고 제안했다.
이게 무슨 말이냐! 현재는 1주에 12시간까지인 공짜 야근을 6시간으로 줄이고, 그 이후에나 야근수당을 준다는 말이다. 언뜻 보면 공짜 야근 시간도 줄고, 복지도 좋아지고, 시간이 좀 걸리지만 폐지도 되니 괜찮지 않아? 라고 물을 수 있겠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우리가 돈 몇 푼 더 받으려고 끝판대장을 이야기한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끝판대장을 이야기 한 것은 노동자, 회사 모두를 망가뜨리는, 사람 갈아 넣는 노동문화를 바꾸기 위해서였다. 다시 말해 공짜 야근은 이 바닥에 없다는 메시지를 모두에게 각인시키고자 한 것이었다. 이런 취지에서 하는 것이라고 수도 없이 말했는데, 회사는 먼 미래보다 눈앞의 주판에 정신이 팔려 돈만을 외치고 있으니 분노조절 장애가 올 것만 같았다.
딱 내 표정이 진짜 이랬을 것 같다
설령 돈 문제라고 쳐도, 우리가 돈을 '더' 내놓으라는 것도 아니고, '더 일한 만큼' 달라는 건데, 왜 안된다고 하는가. 심지어 바로 코 앞에 회사는 올해 8월에 없앤다는데 우리는 내년 3월? 1년이나 넘게 남았다. 더군다나 민주노조의 생리 상 집행부가 합의를 해도 조합원 총투표에서 과반 이상이 찬성해야 최종으로 통과가 되는 걸 잘 알면서 내놓은 합의안이 겨우 이거라고? 우리를 우롱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회사는 이 안을 받아들이는 전제로 다른 항목들을 빠르게 논의하자고 했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안은 받을 수도 없고, 받아 봐야 조합원 총투표를 통과 못하기 때문에 더 적은 옵션으로 다시 교섭을 열 것이라고 맞섰다.
그 뒤로 이야기는 계속 평행선이었다. 더 말해봐야 이견을 좁힐 수 없을 것 같았다.
두 번째 집중 교섭이 끝났다. 합의를 할 것이라 기대해서 그런지 평소보다 힘이 더 빠졌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지난한 싸움은 우리 모두를 지치게 했다. 결국 우리의 안을 관철시키기 위해서는 쟁의가 불가피하다는 결론에 다다랐다.
마음이 착찹했다. 하지만 ‘A지회’도 하는 걸 우리라고 못할 리가 없다. 처음이 힘들지 하다 보면 어떻게든 될 것이다. 여태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우리에겐 명분도, 조합원들의 든든한 지원도 있지 않은가?
그럼에도 가보지 않은 길은 역시 두려웠다. 하지만 언제까지 두려움에 손을 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모여 정말 우리가 쟁의를 할 수 있을지, 한다면 어떻게 해야할 지 등 현실적인 대책을 세워 나갔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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