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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도시에서 살만하냐

2009-12-11 1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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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2.11.금요일


그냥불패 불타는오겹살


 


대도시에서 살만하냐?


 


졸라!


딴지에 처음 쓴 글이 메인에 올라가는 바람에 가문의 영광이 되어버렸다. 그냥 하고 싶은 말을 편하게 쓴 글인데 많이들 읽어줘서 너무 고마웠다.


 



고마워 으헝엉엉


 


오늘도 그저 편하게 쓴다. 평소 생각하고 있던 건데, 내가 이곳의 딴지스들과 너무 동떨어진 생각을 하고 있는 건 아닌지 궁금하기도 하다. 썰 들어간다.


 


나, 시골 산다.


시골이라고는 해도 서울에서 가깝다. 요즘 귀농하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은데, 귀농에 성공하는 사람도 많지만, 실패해서 다시 도시로 돌아가는 사람도 많다고 한다. 귀농 문제는 나중에 따로 이야기하자.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40여년을 살았으니, 나는 분명 도시, 서울놈이다. 하지만, 서울에 산다고 다 서울 사람이 아닌 거, 너희들도 잘 알거다. 지금 ‘서울’사람은 바로 ‘강남’사람일 뿐이다. 강남구로 대표되는 특권층만이 ‘서울사람’이라고 하면, 반발할 사람들도 많겠지.


 



 


서울 인구가 1천3백만 명이 넘는데, 서울 산다고 다 서울사람이겠냐. 난 오히려 그게 이상하다. 너희들도 잘 알고 있듯이, 70년대 박정희가 주도한 산업화 정책에 따라 농촌 인구가 급격히 도시, 특히 서울로 진입하면서, 도시 중심보다는 변두리에 거의 대부분 자리 잡은 거다.


 


진짜 서울 토박이는 서울 사대문 안에 3대(100년) 이상 살았던 사람을 말한다. 서울 사대문 안은 중인 이상 계급이 살았던 지역이고, 결국 우리나라에 진짜 서울 토박이는 몇 만 명도 안 된다는 거다. 서울 산다고 자기를 ‘서울 사람’으로 믿는 자기 기만은 이제 하지 말자.


 


양반 계급에 열등감 느낀 자들이 돈 가지고 없는 족보 만들어서 거실 책장에 죽 늘어놓고 살 듯이, 자기 고향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지 않는 찌질이들이 자기를 ‘서울 사람’이라고 떠들고 다닌다. 내 말 맞지? 그래서 나는 스스로를 ‘서울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해.


 


아버지는 평안도사람이고, 어머니는 충청도 사람이니, 지역으로는 내가 남북의 딱 중간이더라. 내가 태어난 곳은 서울이지만, 사실 난 단 한 번도 서울을 내 고향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나에게 시골은 특별한 추억이 있는 곳이다.


 


첫 번째 시골


아버지는 지금의 표현으로 하면 ‘루저’였다. 실패한 인생이었지. 인쇄소 문선공으로 일하다 퇴직하고 나서, 침술을 배웠다. 침술을 배운 건 좋았지만, 무허가였다. 집에서 ‘야매’로 침도 놓고 뜸도 떴지만, 돈이 될 리 만무였다.


 


내가 초등학교 1학년 겨울방학이었는데, 어느날 새벽에 어머니가 나를 깨웠다. 새벽 첫바람에 졸린 눈을 억지로 비비며 일어나서 따라간 곳은 어느 시골이었다. 아버지가 시골 사는 누군가를 치료하러 내려 온 것이다. 나중에야 알았지만, 그곳은 경기도 여주였다.


 


삿갓봉이 보이는 곳이었는데, 내가 아주 오래 된 기억의 디테일을 이렇게 잘 기억하고 있는 것은 그만큼 그때의 시골 체험이 강렬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작은 집에서 살았는데, 아궁이에 불을 때고, 쇠죽을 끓이는 부엌이 있었다. 툇마루와 다락이 있는 정겨운 시골집이었고, 방에는 놋쇠로 만든 화로가 있었다. 화로에 고구마를 구워 먹던 기억이 난다.


 


겨울이었지만 아침부터 해질녘까지 밖에서 동무들과 놀았다. 얕은 언덕에서 눈미끄럼을 타고, 눈사람을 만들고, 눈싸움을 하고, 언 손을 호호 불며 추운 줄도 모르고 놀았다.


 


아침이면 너무 피곤해서 입술이 퉁퉁 부어올랐다. 밥은 조와 수수가 많이 섞인 잡곡밥이었는데, 밥 할 때 아궁이에 지피던 솔가지 내음이 얼마나 향긋한 지 지금도 생각난다.


 



 


그때 이웃집에서 항아리에 담근 고염을 먹었는데, 그 맛을 잊을 수가 없었다. 몇 십 년이 지나서 작년에 우리 동네에서 고염 나무를 발견하고, 고염을 먹었다. 어린 내가 고염을 기억하고 있다는 게 너무 신기했다.


 


두 번째 시골


그렇게 짧은 시골 경험을 하고 나서는 내내 도시에서만 살았다. 그러다 군대 갔는데, 군대 얘기는 나중에 또 하기로 하자. 군대에서 만난 동기 녀석-지금도 같은 지역에 산다-과 친하게 지냈는데, 이 녀석 고향이 양평이었다. 양평에 살기 전까지 내 마음의 고향은 여주였다. 친구 집에 자주 드나들고, 또 농사도 조금씩 도우면서 양평이 좋아졌다. 좋은 벗이 사는 곳이라면 당연히 좋지 않겠냐. 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 말, 맞는 말이다.


 


군대 전역하고 한동안 백수로 지낼 때, 양평에 자주 갔었다. 친구네 집에서 먹고 자면서 콩도 묶고, 오이도 따고, 벼도 베고, 밤이면 술 마시고 고스톱도 치면서 즐겁고 재미있게 지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내 고향은 여주에서 양평으로 바뀌었다. 여기서 중요한 뽀인트.


 


내 친구가 살고 있는 지역은 예전에 여주 지역이었다. 여주의 일부였다가 양평에 편입되었던 곳이다. 즉, 지역으로만 보면, 여주나 양평이나 다 같은 곳이라는 거다.


 


시골 경험이 즐겁고 재미있었던건 친구가 있기 때문이고, 또 농사라고 해야 아주 잠깐씩 했을 뿐이니 농사가 즐겁다고 말 할 자격조차 없는 건 당연하다. 나 역시 시골이 좋긴 했지만, 농사를 지을 엄두도 내지 못했다. 지금은 조금 생각이 달라졌지만.


 


친구가 양평 살았지만, 그저 막연하게 시골에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을 뿐, 시골에 살려는 구체적인 계획은 전혀 없었다. 그렇게 도시에서 살았고, 결혼해서도 내내 서울에서 사는 걸 당연하게 생각했다.


 


세 번째 시골


지금은 시골 산다. 시작은 우연이었지만, 아주 쉽게 시골로 이주했다. 다행이도 아내와 내 생각이 같았고, 직장도 큰 문제없었다. 유치원에 다니는 아이가 있었지만 특별히 아이의 교육을 생각한 것도 아니었다. 물론, 근처에 초등학교가 있어야 했다.


 


이쯤에서 우리 부부의 교육관을 좀 밝힐 필요가 있겠다. 뭐, 대단한 것은 아니지만, 우리 아이가 다니는 학교의 학부모들은 대개 생각이 비슷하다고 믿는다. 내 아이는 도시 학교의 극심한 경쟁 속에 내맡기고 싶지 않았다. 또 학교 끝나고 밤늦게까지 학원을 전전하는 것도 용납할 수 없었다.


 


우리 인생은 어떤 시기든 딱 한 번 뿐이다. 미래의 성공, 미래의 행복, 미래의 출세, 미래의 명예를 위해 현재를 희생해야 한다는 건, 보이지 않는 것에 내기를 거는 도박인 것이다. 지금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하는 사람들은 모두 도박을 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인생을 걸고.


 


요즘 같은 치열한 경쟁 사회 속에서 나는 분명 ‘루저’다. 나 자신도 잘 안다. 누가 나를 찌질이라고 불러도 인정한다. 나는 가진 것도, 배운 것도, 내세울 것도 없는 정말 평범하고 평균보다 부족한 인간이다.


 


하지만 시골에 살면서부터 새롭게 느끼는 것이 있다. 나도 쓸모가 있고,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이 다른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도시는 익명의 숲이고, 시골은 그물망 같은 곳이다. 이웃을 자연스럽게 알게 되고, 서로 인사를 하고, 필요한 도움을 주고 받고, 서로 도우며 살아간다.


 



 


내가 누군가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것, 다른 사람들이 나의 존재를 인정하고, 나를 필요로 하고, 내 말을 귀 기울여 들어 준다는 것, 도시라면 이런 경험은 특별한 사람이 아니면 누리기 어려운 것들이다.


 


시골 산다고 다 농사짓고 살지는 않는다. 시골에 살아도 할 수 있는 일들이 많다. 요즘은 농사를 짓는 일 말고도 경제 활동을 할 수 있는 방법들이 다양하다.


 


시골이 좋으면서도 막상 시골에 살라고 하면 도시 사는 사람들은 말한다. 아이들 교육, 직장 문제, 불편한 생활, 서울에서 멀어지면 괜히 쫓겨나는 듯한 소외감, 깜깜한 시골이 무서워서, 시골은 지저분하고 교통이 불편해서 등등... 전부 일리 있는 말이지만 또한 내가 듣기에는 헛소리들이다.


 


특히 아파트에 목매는 사람들 많다. 아파트가 ‘주거 공간’이 아닌, ‘재화’의 수단으로 전락한 지 이미 오래되어 아파트 값에 연연하면서 어떤 지역, 어떤 아파트를 소유하고 있느냐에 따라 ‘계급’이 구분된 지 이미 오래다. 그게 옳지 않다는 건 너도 잘 알고 있다.


 


그러면서도 잘못을 바로잡지 못하고 있는 것은 바로 너의 탐욕 때문이다. 현실이 그런데 어떡하냐구? 바로 그런 탐욕이 이런 엿같은 정권을 만든 거 아니겠냐.


 


단 한 번도 시골에 사는 걸 꿈꿔보지 않은 사람들에게 시골이란, 주말이나 휴가철에 자동차로 놀러 가서 펜션에 묵으며 삼겹살이나 구워 먹고, 개울에 발 담그고 오는 곳이 전부일 것이다.


 


도시는 손만 뻗으면 원하는 것을 쉽게 얻을 수 있고, 온갖 문화, 오락, 쇼핑 장소가 밀집해 있으니 삶이 편하다고 느낄 것이다. 밤에도 휘황찬란한 조명으로 대낮처럼 밝고, 24시간 쉬지 않고 문명이 움직이고 있으니 그 속에 있어야만 안심한다는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바로 그 화려한 문명이 신기루라는 생각은 한 적이 있을까.


 


물론, 시골에 산다고 저절로 탐욕이 사라지고, 갑자기 행복해지는 건 아니다. 시골이 좋은 건, 물리적으로 도시보다 한가하고, 땅을 밟을 수 있고, 풀과 나무와 꽃을 쉽게 볼 수 있고, 맑은 개울이 있고, 주위가 고요하고, 새 소리를 들을 수 있고, 고라니며 멧돼지를 볼 수 있고, 밤이면 깜깜하고, 밤하늘의 별이 더 많이 반짝거리는 걸 볼 수 있고,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오고 가는 것을 피부로 느낄 수 있고, 자연 속에서 조금 더 자신과 가족과 이웃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여유가 있기 때문에 도시보다 좋은 것이다.


 


시골은 자동차가 없으면 움직이는 데 조금 불편할 수는 있지만, 그 외 다른 모든 면에서 불편함은 거의 없다고 본다. 도시에서 하는 행위들, 문화 예술, 오락, 쇼핑 등은 이미 시골에서도 인터넷에서 다 할 수 있는 것들이다.


 


그리고, 도시에서는 한 발짝만 움직여도 돈이 들지만, 시골에서는 많은 것들을 해도 돈이 들지 않는다. 이에 대한 내용은 다음 기회에 다시 이야기 할 수 있었으면 한다.


 


하여간, 도시를 떠나온 것은 내 삶에서 가장 잘 한 결정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아이가 다니는 학교가 지금 80명 가까이 된다. 우리 아이가 1학년 입학할 때 29명이었다. 요즘 젊은 부부들이 시골로 많이 들어온다. 대부분 자기 아이의 교육 문제와 건강(아토피)을 생각해서 내려오는 것인데, 이유야 어떻든 이렇게 조금씩이라도 도시를 벗어나는 사람들이 늘고 있어서 다행이다.


 



 


딴지에는 시골이나 농촌, 농업에 관한 기사가 드물어서 앞으로 그런 쪽으로 좀 쓸까 생각 중인데, 괜찮겠냐?


 


 


그냥불패 불타는오겹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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