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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룡 추천0 비추천0

2009.12.14.월요일


김지룡


 



나는 술을 마시면 무척 많이 마시는 편이다. 그러다 보니 집에서 억울하고 야속한 일을 당할 때가 있다.


 


금요일에 늦게까지 술을 마시고, 게다가 과음까지 하면 주말에 일찍 일어나지 못할 때가 있다. 12시 쯤 일어나면 아이들은 입이 비죽 튀어나와 있고, 아내는 눈을 흘기기 일쑤다.


 


그런데 일 년에 한두 번 정도는 지독한 감기에 걸려서 주말에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할 때가 있다. 그때도 아내와 아이들은 내가 술을 많이 마셔서 그런 것이라고 지레짐작한다.


 


딸아이가 열 살 때의 일이다. 목감기에 걸려서 목이 바짝바짝 말랐다. 몸살기도 있어서 자리에서 일어나기 힘들었다. 내 옆에서 책을 읽고 있는 딸아이에게 “물 좀 한 잔 떠다 줄래?”라고 했다. 그런데 딸아이는 “왜?”라고 했다.


 


몸이 아파서인지 속에서 화가 치밀어 올라왔다. 머릿속에서 이런 말이 맴돌았다. “떠오라면 떠올 것이지 왜 그렇게 말이 많아?” 하지만 꾹 참았다. 아빠가 아이에게 하는 말 중에 가장 나쁜 말은 “그냥 시키는 대로 해”라는 말이기 때문이다. 아빠들이 곧잘 이런 말을 하는 것은 군대의 영향일 것이다. 군대문화란 한마디로 “까라면 까”는 문화이다. 군대에서 경험한 것은 모두 잊어버리려고 노력했다. 더구나 내 아이에게 그런 말을 쓸 수는 없지 않은가.


 


다시 한 번 딸아이에게 부탁했다. “아빠가 무척 목이 마른 데, 자리에서 일어날 수가 없네. 물 한 잔 갖다 주면 고맙겠다.” 딸아이는 내 얼굴을 빤히 보더니 “싫어”라고 했다. 또 다시 머릿속에서 이런 말이 맴돌았다 “이제부터 주말에 놀아주지 않을 거야.” 하지만 한 번 더 참았다. 이런 말은 보복이기 때문이다. 아이랑 원수지간도 아닌데 보복을 할 일은 없지 않은가.


 


간신히 몸을 일으켜 물을 마시러 주방으로 향했다. ‘아이고, 아이고’라고 신음소리를 내면서. 딸아이의 표정을 살폈다. 딸아이는 당황한 듯한 그리고 미안한 듯한 표정이었다. 딸아이가 물었다.


 


“아빠 왜 그래?”


“너무너무 아프다.”


“난 또 술 많이 마셔서 그런 줄 알았지.”


 


그 뒤로 ‘아프다’는 말을 붙이면 딸아이는 물을 떠다 주기도 한다. 딸아이 판단에 정말 아픈 것처럼 보일 때다. 술 많이 마셔서 못 일어난다고 판단을 할 때는 물을 떠다 주지 않는다. 대개 그런 경우는 자업자득이니까 할 말이 없다.


 


생각해보면 “그냥 시키는 대로 해”라고 말하는 것은, 그 말에 타당한 이유가 없다고 고백하는 것과 같다. “그냥 시키는 대로 해”는 “나는 너보다 힘이 세니까 너는 내가 시키는 대로 해야 돼. 이유 같은 것은 따지지 마.”라는 의미이다. 이런 말을 사용하는 것은 아이에게 ‘힘 있는 사람에게는 무조건 복종하라’고 가르치는 것과 같다.


 



 


아이는 성장하면서 자신보다 힘이 센 사람을 무척 많이 만난다. 학교 선배를 만나고, 교사를 만나고, 직장에서 선배와 상사를 만난다. 심지어는 자신보다 힘이 더 센 아이를 친구로 만날 수 있다.


 


힘이 더 센 친구가 미끄럼틀에서 뛰어 내리라고 명령하거나, 학교 선배가 물건을 훔쳐오라고 할 때 아이가 무조건 따라야 할까. 내 아이들이 단호하게 “싫어”라고 말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아이는 엄마 뱃속에서 10개월을 함께 지낸다. 엄마와 아이는 일심동체의 측면이 강하다. 아이가 만나는 첫 번째 타인은 바로 ‘아빠’다. 아이는 아빠와 접하면서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는 법을 배운다. 아빠의 말에 무조건 복종하는 아이는 밖에서도 똑같은 행동을 할 것이다. 집에서는 복종하면서 밖에서는 자기 의견을 말하는 아이로 키우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청소년기에 접어들면 아이는 별의별 유혹이나 요구를 접하게 된다. 아이가 친구의 강요나 또래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생각을 굽히지 않고 주장할 수 있기를 바랄 것이다. 그렇다면 아빠의 요구에 이유를 묻고, 자신의 의견을 말하고(흔히 대든다고 하는 것), 요구를 거부하며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는 것을 허용해야 하지 않을까. 아니 오히려 권장해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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