딴지일보 편집부 기자 시절, 1년 반 동안 <찌질한 위인전>을 연재하면서 끝까지 나를 고민하게 만들었던 인물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었다. 한 번 꼭 이야기해보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찌질한 위인전>에 소개된 다른 인물들은 현재 나의 삶을 기준으로 했을 때 과거에 속해있지만 노무현 전 대통령은 나와 같은 시간을 살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여전히 그는 현재진행형으로 남아있었다. 그를 지지하고 그리워하는 사람들은 물론 그를 적대시했던 사람들까지도 아직은 그를 놓아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고인이 되었지만 완전히 마침표가 찍힌 것은 아니라는 생각에 끝내 엄두를 내지 못했다. 솔직히 자신도 없었다. 잘 쓸 자신, 욕먹을 자신 둘 다.
엄두를 내지는 못했지만 그를 통해 하고 싶은 이야기는 분명 있었다. ‘부끄러움’에 대한 이야기다.
부끄러운 고백
1994년, 정치인 노무현은 자신이 쓴 첫 번째 책 ⟪여보, 나 좀 도와줘⟫를 출간한다. 초선 국회의원으로 청문회 스타, 의원직 사퇴 파동 등 숱한 화제를 일으킨 그가 3당 합당에 반대하여 YS와 결별한 뒤 통합민주당 후보로 14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다가 낙선한 지 2년 뒤에 나온 책이다. 당시 마흔아홉의 그는 ‘노무현 고백 에세이’라는 부제 그대로 자신의 삶과 생각에 대한 고백을 책에 담았다.
정치인이 자서전 스타일의 에세이를 쓰는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이례적인 일은 아니다. 낙선한 정치인이 ‘비록 지금은 낙선했지만 앞으로도 꿋꿋하게 계속 정치하겠다’는 뜻을 밝히는 책을 내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여보, 나 좀 도와줘⟫에는 남다른 면이 있다. 이 책에서 그는 시종일관 자신의 부끄러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책 속에는 국민학생, 중고등학생 노무현과 고시생, 노가다꾼 노무현, 남편 노무현과 판사, 변호사, 국회의원 노무현이 등장한다. 그리고 그 모든 노무현들이 저질렀던 부끄러운 행동과 생각들이 고백되어 있다. 정확히 세어 보지는 않았지만 이 책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표현 또한 ‘부끄러움’이 아닐까 할 정도다.
변호사 노무현은 갓 개업한 사무실 형편이 궁핍해지자 굳이 변호사를 선임하지 않고 충분히 합의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로 찾아온 의뢰인의 사건을 덜컥 수임하고, 이미 받은 돈의 법적 환불 책임을 면하기 위해 서둘러 피의자까지 접견해버린다. 눈물을 흘리며 돌아서는 의뢰인 아주머니가 던진 ‘변호사는 본래 그렇게 해서 먹고 삽니까?”라는 한 마디가 그의 부끄러운 기억이다.
판사 노무현은 당시 잘못된 법조 문화에 휩쓸려 선배 판사들을 따라다니며 변호사들에게 비싼 술을 얻어먹고, 짠돌이 변호사에게 ‘따끔한 맛’을 보여주는 부끄러운 짓을 했다.
국회의원 노무현은 의원직 사퇴서를 내놓고 도망 다니다 주변의 만류에 못 이겨 결심을 뒤집게 되자 “변명할 말이 하나도 없습니다. 오로지 부끄러울 따름입니다”라고 말하며 고개를 숙였다.
노가다꾼 노무현은 동료들과 어울려 돌아다니다 함께 지나가는 부녀자를 희롱했고, 국민학생 노무현은 가난이 창피한 나머지 어수룩한 짝꿍을 꼬셔 자신의 낡고 찌그러진 필통을 짝꿍이 쓰던 새 필통과 바꾸었다가 다른 친구들의 따돌림에 못 이겨 돌려주고 만다. 5학년이 되어서는 부잣집 아이의 고급 가방을 이유도 없이 면도칼로 찢어 놓고 끝내 모른 척 하는데, 이것이 그가 스스로 고백하는 부끄러웠던 기억들이다.
정치인이 자신의 삶을 책에 담을 때는 자랑스러운 모습, 감동적인 일화를 위주로 하고 실수로 보아 넘어가 줄 수 있는 일 몇 가지를 ‘인간적 면모’로 포장하는 것이 보통이다. 더군다나 노년의 정치가가 삶의 끄트머리에서 정치 인생을 마무리하며 남기는 회고록이라면 모를까 당시의 그는 정치인으로서 자신의 포부를 드러내고 앞으로 더 많은 일을 맡겨달라고 대중에 호소해야 할 입장이었다.
부끄러운 기억에 대한 그의 고백 가운데 가장 충격적이라 할 만한 것은 ‘남편 노무현’에 대한 부분이다.
견딜 수 없는 초조감과 불안감에 나는 급기야 아내에게 손찌검까지 하는 남편이 되고 말았다. (…) 그러나 나는 아내가 조금이라도 불평을 하면 소리를 질러 대었고, 그 말에 심하게 반발을 하면 다시 손을 올려붙였던 것이다. 정말 기억하기에도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여보, 나 좀 도와줘⟫, <하늘의 절반> 중에서
고시 공부를 하던 중 결혼한 아내에게 그는 홧김에 손찌검을 하는 일도 있었다. 고시 합격 후 연수원에 있을 때는 ‘아내를 꽉 잡고 사는 비결’을 묻는 동료에게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조져야 된다’고 자랑스럽게 말하는 남편이었다. 그것이 당시 자신의 기본적인 사고방식이었음을 책에서 털어놓는다.
이 책이 출간된 1994년 당시의 사회 분위기와 2020년이 된 지금의 사회 분위기는 많은 차이가 있다. 아내를 때리는 남편이었다는 한 정치인의 고백을 받아들이는 사회의 정서 또한 크게 다를 것이다. 하지만 당시에도 남편이 아내에게 손찌검하는 것이 자랑이 아니라 치부였다. 정치인이 본인 에세이에 굳이 그런 이야기를 쓴다는 건 더욱 놀랄 일이었다.
그가 말하고 싶었던 것
재선에 실패한 40대 정치인이 재기를 도모해야 할 시점에 내놓은 책에서 왜 그토록 자신의 부끄러운 기억에 대한 이야기를 가득 채워 넣은 것일까. 정치인으로서 그가 만들어 나가고자 하는 사회의 모습이 자신의 부끄러운 기억에서 시작된 고민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책에서 그는 자신의 부끄러운 기억을 그저 털어놓기만 하지는 않았다. 어린 시절 저질렀던 부끄러운 행동의 이면에는 가난에 대한 열등감과 함께 반대 급부인 자존심과 우월감이 자리 잡고 있었음을 고백하면서 학급 급장의 신분으로 어수룩한 짝꿍의 새 필통을 손에 넣었다가 따돌림을 당한 일에 대해서는 ‘공인(?)으로서의 도덕성에 관한 첫 심판’으로 기억하며 그것이 ‘두고두고 남아 내 자신의 인간성에 대한 회의로 남아 있었다’고 말한다.
자존심과 우월감 때문에 교내 붓글씨 대회에서 사고를 친 기억에 대해서는 잘난척하고 자기중심으로 생각하는 건 아닌지 매사에 경계하고 있으며, 가난에 대한 열등감으로 인해 자신만은 가난을 벗어나야겠다는 열망과 모두가 가난하지 않은 세상을 만들고 싶다는 꿈을 모두 갖게 되었다고 한다.
노가다꾼 노무현의 부끄러운 기억은 사람이 처한 환경이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깨닫는 계기가 되고, 버려진 사람들을 사회의 책임 있는 주체로 참여시키기 위한 사회적 관심과 배려의 필요성을 인식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판사, 변호사 노무현의 부끄러움은 개인의 반성을 넘어 잘못된 법조 문화에 대한 고민과 성찰로 이어지고 국회의원 노무현의 부끄러움은 한국 정치 현실에 대한 고민이 된다.
그리고 잘못된 여성관을 가진 부끄러운 남편 노무현에 대한 고백은 통렬한 반성과 여성관에 대한 학습 노력을 넘어, 정치인으로서 여성의 권익 신장과 사회 진출을 위한 방안을 내놓는 것으로 나아간다.
정치인 노무현과 인간 노무현은 분리될 수 없음을 그는 에세이를 통해 이미 밝혔던 것이다.
부끄러움을 안다는 것
사람은 늘 변한다. 사람은 늘 변하기 때문에 사람과 사람의 관계 또한 늘 변한다. 그래서 사람과 사람의 관계가 쌓이고 뭉쳐 만들어진 사회 또한 변한다. 변화의 방향은 일정하지 않다. 나아지는 방향일 수도, 나빠지는 방향일 수도 있다. 그리고 ‘부끄러움’은 변화의 방향을 더 나은 쪽으로 이끌어갈 단서가 될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부끄러움은 ‘잘못’에 대한 부끄러움이다. 그러므로 부끄러워한다는 것은, 잘못을 인지하고 인정한다는 것을 뜻하다. 잘못이 잘못인 것을 알지 못하면 부끄러움도 모른다. 여기서 ‘모른다’는 것에는 ‘고민하지 않고 따르는 것’도 포함된다. 왜냐하면 잘못을 판가름하는 기준이 사회적 규약이나 법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에게 있기 때문이다.
부끄러움을 안다고 해서 끝이 아니다. 잘못을 알면서도 인정하지 않고 타인을 속이면 부끄러워하지 않는 뻔뻔한 태도를 만든다. 책임을 자신이 아닌 다른 것에 전가하는 회피는 부끄러움을 희석시킨다. 그리고 부끄러움을 외면하는 경우도 있다. 잘못인 줄 알면서 부끄러움을 외면하고 되풀이하다 보면 결국에는 부끄러운 마음조차 들지 않게 된다.
‘부끄러움’을 통해 사람은 나아질 수 있지만, 부끄러움을 속이거나 피하지 않고, 희석하거나 외면하지 않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부끄러움을 아는 것을 넘어 그대로 인정하고 마주 보는 것에는 고통이 뒤따르기 때문이다. 때때로 엄습해오는 부끄러운 기억을 견디고 같은 부끄러움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고민하고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을 때 비로소 우리는 부끄러움을 딛고 한 발짝 나아갈 수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쓴 글과 대중 앞에서 한 말, 주변 인물을 통해 알려진 일화에 국한된 지극히 제한적인 정보를 가지고 내가 이렇다 저렇다 말한다는 것이 참 우스운 일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그는 부끄러움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자 정치인이었고, 부끄럽지 않으려 무던히도 노력했던 사람이자 정치인으로 남아 있다. 어쩌면 집착으로까지 보였던 그의 솔직함 또한 그런 노력의 한 모습이 아니었을까.
세상을 떠난 지 11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노무현 전 대통령을 그리워한다. 그가 그렇게나 부끄러움을 잘 아는 사람이 아니었다면, 부끄럽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 아니었다면 그렇게 허망하게 우리 곁을 떠나지는 않았을 것 같다.
공교롭게도 생존해 있는 전직 대통령들은 하나같이 책임지고 사과해야 할 무거운 과오가 있다. 그럼에도 아무도 그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그럴수록 ‘노무현’이라는 이름은 그립고, 아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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