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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가 닥치면 진짜 힘이 드러나고, 동시에 문제점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우리는 코로나 국면에서 현재 우리의 진짜 힘을 확인했다. 그리고 하고 있다. 지난 4월 30일, 첫 국내감염 확진자 0명이 되며, 그 이후 며칠 동안 확진자가 조금이라도 나오는 날에는 오히려 이상함을 느끼기도 했다.

이 기분 좋은 이상함은 2주 전, 이태원 클럽발 코로나의 전파가 다시 시작되면서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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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코로나 국면을 임의로 이태원 클럽발 코로나 전파 전과 후로 나눈다면, 전에는 우리의 힘을 발견했고, 후에는 힘과 함께 우리의 문제점을 발견했다.


이태원발 코로나로 발견된 문제

 

물론 이태원 클럽발 재전파가 시작된 후로도 우리의 힘은 강했다. 다시금 여기저기 전파가 되고 있기는 하지만 여전히 잘 관리가 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 사회의 ‘포용력’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이태원 클럽발 재전파가 시작되면서 정부는 코로나 진단검사를 권고했다. 하지만 많은 클럽 이용자들이 정부의 권고를 따르지 않은 채, 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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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업다운뉴스>

 

왜 숨었을까. 그리고 왜 정부는 숨은 이들이 검사받게 하기 위해 익명을 약속했을까? 용인에 살며 이태원 클럽을 이용했던 이태원발 첫 코로나 확진자가 갔던 클럽들이 게이클럽이기 때문이다. 게이클럽? 근데 왜 숨었을까. 우리 사회에 성 소수자에 대한 차별이 있기 때문이다.

코로나 국면 속에서 과도하게 밀집된 실내장소에 가고, 그곳에서 마스크도 쓰지 않았던 행위들을 옹호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동성애를 이 기사에서 중점적으로 다룰 마음도 없다.

 

동성애는 자유이고, 누구도 그 자유를 억압할 수 없다고 개인적으로 생각은 하지만, 동성애에 대해서 기사로 쓸 만큼 우리 사회의 동성애 이슈에 대해서 잘 알고 있지도 않다.

내가 말하고 싶은 건 우리 사회의 ‘포용력’이다. 우리 사회가 자신과 다른 면을 갖고 있는 이들에게 포용력이 있는 사회였다면, 동성애 합법화 이슈를 떠나서 사회적으로 동성애에 대한 차별적 시선이 없었다면, 그들은 숨지 않았을 것이다.

포용력에 대해 말하고 싶은 건, 사해동포주의 같은 도덕적 관념 때문이 아니다. 그것이 실용적이고, 우리 사회를 더 발전시키기 때문이다.



게이와 기술

포용의 실용성에 대한 이론이 있다. 경제지리학의 이론으로 일명 ‘3T 이론’이라는 것이다. ‘어떤 지역의 번창 혹은 몰락에 영향을 미치는 주된 요소는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답하는 이론으로 「도시와 창조계급」, 「도시는 왜 불평등한가」 등의 명저를 쓴 캐나다 토론토 대학의 리처드 플로리다 교수가 창안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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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플로리다 토론토 대학교수>

 

미국의 주요 도시들에 대해 연구를 하던 어느 날, 리처드 교수는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미국에서 첨단산업이 발달한 도시의 순위와 게이 지수(Gay Index)가 높은 도시의 순위가 거의 같은 것이다. 게이 지수란 각 도시마다 동성애자의 거주 비율을 의미한다. 즉, 동성애자의 비율이 높을수록 첨단산업 더 발달했다는 것이다.

이 결과를 토대도 그가 창안한 ‘3T 이론’이란 도시가 포용력(Tolerance, 3T)이 높을수록 재능(Talent, 2T)있는 사람들이 모여들고 그 결과, 기술(Technology, 1T)이 발달한다는 이론이다.

여러 연구는 성 소수자들이 가장 마지막까지 차별받는 집단이라고 말한다. 첨단산업이 발달한 도시의 순위와 게이 지수가 비슷했던 이유는 성 소수자들마저 큰 문제를 느끼지 않고 살아갈 정도의 도시라면, 이러저러한 이유로 차별받는 다양한 사람들도 당연히 잘 살 수 있는 도시라 생각되어 많은 재능 있는 사람들이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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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샌프란시스코>
 

샌프란시스코는 미국에서 성 소수자들의 상징적 도시이며, 가장 첨단산업이 발달한 도시이다.


포용을 다룬 상반된 태도 ( 로마, 스페인 )

역사적으로 포용력을 발휘하냐 못 하냐에 따라 국가의 흥망이 결정되는 경우도 많다. 포용력에 관한 많은 역사적 사례 중 포용력을 잘 발휘한 대표적 사례인 ‘로마’, 발휘하지 못한 대표적 사례인 ‘스페인’의 사례를 이야기하고자 한다.

-로마


1차 포에니 전쟁이 끝나고 23년 후인 기원전 218년, 카르타고의 명장 한니발은 피레네와 알프스산맥을 넘어 로마를 침공하며 2차 포에니 전쟁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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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로마는 도시국가였고 주변 도시국가들을 자신들의 패권에 집어넣으며 동맹 연합체를 구성하고 있었다. 한니발은 로마 동맹체의 북부부터 차례로 정복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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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니발의 침공 경로>

 

로마인이 아닌 이탈리아인 포로들에게는 대우도 잘해주며, 한 편이 되길 원한다고 말했다. 한니발은 남하하며 계속해서 정복해 나갔고 로마를 멸망 직전까지 몰고 갔다.

그러나 소수의 동맹국을 제외하고, 모든 동맹국은 로마 곁에 끝까지 남아 로마에 힘이 돼주었다. 한니발은 결국 전쟁에서 패하며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로마가 멸망 직전까지 간 상황에서 동맹국들이 한니발의 편에 서는 것은 국제관계에서 배신이라고 부를 수도 없다. 그것은 배신이라기보다 약자가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일 수도 있다.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위기의 순간에도 로마 옆을 지키게 만들었을까.

로마는 주변 나라들을 정복해가며 승자의 권리를 전혀 행사하지 않았다. 정복민에게 로마 시민권을 주며 공평하게 대우하였다. 따라서 후대에 로마를 이끈 사람들은 대부분 오리지널 로마인이 아니다.

한니발과의 싸움에서 전쟁을 지휘하는 집정관 ‘오타릴리우스 크라수스’는 로마가 40년간 전쟁 끝에 굴복시킨 삼니움의 평민 출신이었다. 짧게 유지된 패권 국가들과 로마의 차이점은 로마는 일단 자신들에게 편입이 되고 나면 철저한 포용정책을 펼쳤다는 것이다. 로마에는 ‘파란 눈을 가진 로마인은 최상위 계층’이라는 식의 차별은 존재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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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타릴리우스 크라수스>

 

한니발과의 전쟁 후로도 로마는 이 정책을 유지했고, 더 많은 민족이 로마시민이 되었다. 서기 193년에는 카르타고의 피를 이어받은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로마 황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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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셉티미우스 세베루스>

 

로마의 이런 관용은 한니발에 의한 위기의 순간에 보답을 받았다. 위기의 순간에 로마의 동맹국들은 로마를 버리지 않았다. 이들은 단순한 동맹이 아니었다. 그들은 상당수가 이미 로마 시민권을 획득해서 로마인으로 살고 있었다. 오타릴리우스 크라수스의 사례는 아주 흔한 예였다. 로마는 그들에게 이미 조국이었다.

-스페인


1492년은 스페인에게 참으로 모순적인 해였다. 711년에 침입하여 700년이 넘도록 이베리아반도(스페인반도)를 차지하고 있던 이슬람 세력을 완전히 몰아내어 이베리아반도를 통일하고, 콜럼버스에 의해 신대륙을 발견한 스페인의 앞길에 빛을 비춰줄 역사적인 해임과 동시에 쇠망의 길로 접어드는 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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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베리아반도에서 가장 강력했던 두 왕국, 아라곤 왕국과 카스티야 왕국. 이 두 왕국의 페르난도 왕자(아라곤)와 이사벨 공주(카스티야)가 결혼을 하고, 후에 이들이 각 국가의 왕이 되며 두 왕국은 (연합 왕국의 형태로) 합쳐졌다. 그리고 점점 세력을 키워 결국 1492년 이베리아반도를 완전히 통일했다.

두 왕국은 연합 왕국이었기 때문에 정식으로는 페르난도와 이사벨은 각각 아라곤과 카스티야의 왕이었고, 서로의 주권은 달랐다. 오직 종교 재판소만 합동으로 운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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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페르난도 (좌) / 이사벨 (우) >
 

당시 이들은 ‘가톨릭의 왕’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고, 1492년까지 이베리아반도에 있던 이슬람 왕국들이 여러 종교를 인정했던 데에 반해 이들은 가톨릭 외에 종교를 인정하지 않았다.

때문에 아라곤-카스티야 왕국이 이베리아반도를 통일해 나가며 정복한 지역에서는 수많은 종교 재판이 열려 많은 이교도가 죽어 나갔고, 개종한 아랍인, 유대인들도 꽤 있었지만, 가톨릭의 왕들은 이 개종을 믿지 않았다. 종교 재판은 원칙도 없이 마구잡이 마녀사냥으로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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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재판의 이단 심문>

 

아라곤-카스티야 왕국의 가톨릭 순혈주의는 더욱 심해져, 결국 1492년 3월 조인된 알람브라 칙령으로 인해 7월까지 이교도들이 모두 추방되었다. 그 결과 수많은 능력 있는 유대인, 아랍인들이 죽음을 피해 스페인을 떠나야 했다.

과학, 기술 학문 등에서 기둥 역할을 하던 이들이 떠나가면서 스페인에는 정치와 무력만 남게 되고 나라를 실제로 움직이는 실력자가 크게 부족하게 되어 정치적, 종교적, 정신적 순혈주의에 젖은 스페인은 통일의 순간 부강의 기틀을 잡는 동시에 이미 쇠망의 길로 접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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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인구의 3분의 1을 차지하던 유대인들이 갑자기 쫓겨나자 집값은 폭락하고 은행이 파산했으며 거의 모든 의사까지 사라지는 등 스페인은 가난한 농업 국가로 전락하고 말았다.

곧이어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하며 스페인의 몰락이 드러나는 것은 유보되었지만, 1517년,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이 선언된 후에도 가톨릭에 대한 순혈령만을 고집하며 배타성을 키워온 스페인의 몰락은 1567년부터 드러났다.

스페인의 왕이 지배하고 있던 네덜란드는 스페인 왕에 대한 충심이 꽤나 있었는데, 스페인 왕에게 요구한 건 단 하나 ‘종교의 자유’였다. 하지만 신교도가 많던 네덜란드의 종교 자유는 스페인 왕에게는 용납되지 않았다. 스페인 왕으로부터 돌아오는 건 강력한 억압과 죽음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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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 독립 전쟁>

 

스페인에 대한 반감이 커져가던 네덜란드는 1567년 독립전쟁을 시작했고, 80여 년의 독립전쟁 끝에 결국 독립했다.

1588년에는 삼류국가였던 영국에 최강대국 스페인의 무적함대 ‘아르마다’가 궤멸하고 말았다. 그 원인으로는 많은 신교도 선박 기술자들이 영국을 도왔고, 해적 출신으로 엘리자베스 1세가 총사령관으로 임명한 ‘프랜시스 드레이크’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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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랜시스 드레이크>

 

그 후로도 스페인은 배타성을 버리지 않았고, 몰락은 계속되었다.


그래서 하고픈 말

각종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하며 세계 2차대전 전까지 과학 강국이었던 독일은 2차 대전 후 과학기술 1위 자리를 미국에 단숨에 빼앗겼다. 나치 정권 12년 동안 독일을 떠난 인재들을 미국은 다 받아주었다. 그렇게 독일을 떠나간 인재 중 아인슈타인도 있었다.

그때 받아들였던 인재들을 기반으로 미국은 그 후 70년 이상 세계의 1등 국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르네상스 시대 포용력이 컸던 메디치 가문의 지원 아래 피렌체는 막강한 부와 웅장한 예술들을 꽃피웠고, 조선의 세종 시절에는 역사에 길이 남을 과학기술 유산들이 탄생했다. 우리는 지금도 이때 만들어진 글자를 사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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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외에도 포용을 발휘한 시대에 많은 인재가 나와 찬란한 시대를 피워낸 사례는 수도 없이 많다.

“망치를 든 사람은 모든 것을 못으로 본다.”라는 말이 있다. 어떤 문제를 특정 관점에서만 보면 특정 질문만 하게 되고, 특정한 각도에서만 답을 찾게 된다. 운이 좋아서 해결해야만 하는 문제가 ‘못’이라면 손에 쥔 ‘망치’가 안성맞춤의 도구일 수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어떤 문제를 해결하려면 다양한 도구가 필요하다.

복잡한 세상의 여러 문제, 예측하기 힘든 경우의 수를 잘 풀어나가기 위해서는 다양한 인재들을 보유한 포용력 있는 사회가 절대적으로 유리하다.

우리는 정도가 다를 뿐 모두 편향성을 지니고 있다. 자기 나름의 의견을 갖지 말아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단지, 세상의 모든 생각에 어느 정도 편향성이 있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우리는 자신의 생각에 대해 겸손하고 열린 마음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태원 클럽발 코로나 재전파 외 최근의 코로나 국면에서 눈에 띈 사례가 하나 있었다.

베트남에서 한국으로 귀화해 현재 경찰관인 이보은 경장이 코로나 확진을 받고 숨어버린 베트남 불법체류자 A 씨에게 베트남어로 된 문자를 보내며 지속적으로 상황을 설명하며 안심시켰고, 설득에 성공해 A 씨를 병원에 격리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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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SBS>

 

이보은 경장이 한국말이 서툰 A 씨에게 베트남어로 지속적으로 안심시키며, 동선을 알아낸 결과, A 씨와 접촉한 39명도 찾아냈다.

우리 사회가 귀화인을 우리 사회의 구성원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경찰공무원으로도 받아들일 수 없을 정도의 배타성을 유지하고 있었다면, A 씨로 인한 재전파가 싱가포르처럼 일어났을 수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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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뉴스핌>
 

한 사회의 포용력의 힘이란 좋을 때는 잘 못 느낄 수도 있다. 하지만 위기일 때는 그 빛을 발휘한다. 로마의 경우가 그랬고, 코로나 국면에서 이보은 경장의 사례에서도 그랬다. 그러나 우리 사회의 포용력에 대한 한계가 이태원 클럽발 재전파에서 숨어버린 성 소수자들의 사례에서 발견되었다.

지금 우리는 세계 속 코로나 국면에서 아주 잘 대처하고 있다. 우리의 영향력이 세계로 뻗어 나가고 있다. 국뽕에 취하는 건 좋으나 이 상황에서도 개선할 점은 개선해야 한다.

앞서 언급한 스페인의 사례처럼 우리나라가 떠오름과 동시에 내리막길로 가는 걸 원치 않는다. 이번 국면에서 내리막길로 갈 수 있는 위험 요소를 발견했다면, 고민하고 개선하는 것이 제대로 된 발전이다.

성 소수자들의 사례를 들어 이야기했지만, 이 기사에서 말하고 싶은 건 성 소수자 문제에 국한되지 않는다. 우리 사회 구석구석에 남아있는 모든 차별과 배척에 관한 기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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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를 이끌어 가는 ‘집단 지성’이란 결국 ‘집단 포용력’에서부터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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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지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