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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2.15. 화요일


필독


 


오래 기다리셨다. 필자도 그동안 축구문화사로 인사드리고 싶었으나, 사이트 개편 이후의 후폭풍을 감당하느라 경황이 없었다는 점, 양해해 주기 바란다. 3편과 본 4편의 텀이 길었으니 그냥 본문으로 넘어가기가 좀 그렇다. 본 편은 첫 번째 시리즈 잉글랜드에 이은 브라질의 네 번째 편이다. 1편 <징가란 무엇인가>, 2편 <거리의 아이들>, 3편 <황금시대로 가는 문턱>을 순서대로 복기하고 읽으면 더 좋을 것이다.


 


 





1


 



저번 시간엔 드디어 펠레가 등장했다. 펠레 얘기 좀 해볼까.


 



사람들은 과거의 영웅에 무관심한 경향이 있다. 스포츠에서는 특히 그렇다. 선수들의 평균 기량이 날로 향상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펠레는 어째 왕년의 실력이 아닌 ‘펠레의 저주’로 더 유명한 듯하다. 본의 아니게 저주 전문가가 된 펠레가 ‘축구 황제’로 불리는 것을 역사적 인물에 대한 예우 정도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설마 그때 그 실력 그대로 회춘한다면 크리스티아누 호나우두만 하겠냐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필자,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전성기의 호나우두는 전성기의 펠레에게 상대도 안 된다. 황제란 칭호가 과장이라고 치자. 하지만 과장된 칭호일지언정 괜히 얻어지는 건 아니다.


 



크리스티아누? 그게 누굽니까?


 


다소 말라 보이는 그의 몸은 엄청난 탄력과 정밀함을 자랑했다. 그는 현역시절 헤딩을 포함한 갖가지 종류의 슛, 드리블, 패스, 페인트, 페널티킥, 프리킥 등 축구 플레이의 모든 요소를 완벽하게 시전 했으며 당시까지 존재했던 축구기술-그의 전매특허인 오버헤드킥을 포함하여- 거의 전부에서 일인자였다. 양 발을 완벽하게 사용했고 경기가 끝날 때까지 지치지 않고 뛰었으며 경기를 읽는 시야도 일반적인 선수의 수준을 한참 뛰어넘었다.


 



펠레가 최고냐, 마라도나가 최고냐 하는 본좌 논쟁은 예전부터 이어져온 지겨운 떡밥이다. 본인도 딱히 누구의 손을 들어주기는 어렵다. 하지만 둘 사이에 스타일의 차이는 있다. 마라도나가 축구에 있어 불세출의 천재인 것은 사실이다(펠레와 마찬가지로). 하지만 마라도나의 플레이는 축구의 모든 요소를 포함하지는 않는다. 펠레는 다르다. 그를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축구라는 스포츠에서 인간의 신체가 한계점까지 진화한 ‘완전체’다.


 



펠레의 동작에는 미학적 완결성이 있다. 위 이미지는 축구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장면이라고 일컬어지는 펠레의 바이시클 킥 장면이다. 당시 펠레 나이 열일곱이었다.


 



일례로 펠레와 마라도나는 둘 중 누가 역사상 최고인가의 논쟁에 스스로 뛰어들곤 하는데(이 노인네들 싸우는 거 보면 참 귀엽다. 언제 한 번 디벼줄테니 기대하시라.), 펠레는 자신이 마라도나보다 위대한 이유 중 하나로 이런 예를 들었다.


 



“나는 양 발과 머리를 모두 사용했으며 모든 종류의 슛을 구사했다.”


 



이게 왜 그토록 대단한 걸까. 축구라는 종목의 특성 때문이다. 역도선수들의 몸은 거기서 거기다. 단거리 육상선수들의 몸도 그렇다. 수영선수의 경우 몸매의 굴곡만 봐도 물에서 노는 사람임을 알 수 있다. 하나의 스포츠에는, 그 영역에서 최고를 다투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 다 같이 가장 효과적이라고 검증된 훈련을 하고, 가장 효과적인 동작을 한다. 따라서 몸이 비슷해질 수밖에 없다. 심지어 성격도 비슷해진다고 한다.


 



하지만 축구선수들의 신체조건과 동작의 차이는 극한의 다양성을 보여준다. 브라질의 호베르토 카를로스와 잉글랜드의 피터 크라우치를 비교해보라. 크라우치의 키는 201cm이고 카를로스는 168cm이다. 둘 다 명선수지만, 오히려 키가 33cm나 작은 카를로스가 훨씬 뛰어나다.


 




필드의 루저 호베르토 카를로스. 체지방률 7%의 인간병기. 뉴튼 물리학을 역행한다는 평을 받는 그의 신체능력을 스페인 GTT(교통 기술 단체)가 정밀 측정한 적이 있다. 슈팅 시속은 무려 122km. 스로인 비거리는 36m. 100m 달리기는 10초6. 불과 67kg의 체중에서 이 결과가 나왔다. 전 러시아 국가대표였던 모스트보이는 카를로스가 레알 마드리드에 있던 시절 이렇게 말했다.


“레알 마드리드에서 플레이하는 것의 이점? 그건 카를로스가 프리킥을 할 때 수비벽을 쌓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이렇듯 축구는 매우 원초적인 운동인 탓에, 천차만별의 다양한 재능과 요소가 필드 위에서 결부된다. 따라서 명선수일수록 자신만의 색깔이 있게 마련이다. 즉 펠레의 경우 완전체인 것도 경이롭지만, 축구가 완전체 자체가 가장 나오기 힘든 바닥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2006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미들스 보로와의 경기에서 잔치를 벌였다. 이 경기에서 팀이 프리미어리그 통산 1000골을 기록했기 때문이다. 펠레는 선수생활 동안 혼자서 1000골 이상을 넣었다. (공식적으로는 1283골-1281골이라는 기록도 있다-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행정 오류로 실제 득점에서 많은 골이 누락된 숫자다. 대략 1500여 골을 넣었다고 한다.)


 



이에 대해 마라도나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유럽무대(세리에-A)에서 존재를 증명했다. 펠레는 브라질 국내에만 박혀 있었다.” 이 말은 사실이다. 그러나 펠레가 현역일 당시 유럽과 남미의 주요 리그 수준은 비슷하거나 동일했다. 브라질 리그는 최강 리그 중 하나였으며, 펠레의 친정이라 할 수 있는 산토스 FC는 세계적인 명문 구단이었다(물론 지금도 전통의 명문팀이다.). 브라질 경제가 지금처럼 붕괴하기 전에는 리그에 돈도 많이 돌았다. 펠레는 유럽에서 가열찬 러브콜을 받았다. 결국 브라질에 남은 이유는 단순하다. 산토스 FC가 가장 좋은 조건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이쯤 썼으면, 황제에 대한 예우는 충분히 한 것 같다.


 


 




2


 



58년 스웨덴 월드컵, 소련과의 조별예선 3차전. 순진하게 생긴 17살의 깡마른 소년이 필드에 등장하자 축구팬들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그래도 가장 경악한 것은 브라질의 매스컴과 국민들이었다. 사고뭉치인 가린샤까지 딸려 나왔으니 말이다. 선발 출장한 펠레의 포지션은 공격수였다. 전통적으로 브라질 축구에서는 선발 공격수가 가장 중요한 포지션이다. 이걸 미성년자가 맡은 것이었다.


 



한 가지 에피소드. 1950년부터 모든 선수들은 등번호가 새겨진 유니폼을 입었다. 하지만 당시에는 매 경기마다 등번호를 변경할 수 있었다. 1958년에야 등번호는 선수의 포지션에 따라 정해졌고, 대회 도중 변경할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브라질은 이 표준을 무시했다. 특별한 철학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냥 행정 처리를 닥치는 대로 했기 때문이다.


 



첫 번째 시합 전, 브라질 축구 협회 관계자는 자기 마음대로 선수들의 등번호를 정해버렸다. 이로써 펠레는 원래 주전이 아님에도 불고, 순전히 우연에 의해 10번 유니폼을 입은 채 월드컵에 데뷔한 것이다. 만약 브라질 축구 협회가 세계적인 흐름을 따라갔다면 펠레는 10번이 아닌 다른 번호를 달았을 것이다. 펠레 이후 10번은 에이스의 상징이 되었는데, 이는 10번 포지션 자체의 아우라 뿐만 아니라 펠레 개인의 역할도 컸다. 브라질 축구협회의 주먹구구식 운영과 우연이 아니었다면 축구만화에서 주인공이 10번을 다는 일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토털풋볼이 세계축구의 표준이 된 지금은 공격형 미드필더임을 보여주는 7번이 에이스를 상징하지만.


 



막장의 분위기를 풍기던 브라질은 경기가 시작되자마자 분위기를 반전했다. 먼저 가린샤가 골포스트를 맞히며 소련의 기선을 제압했다. 이어 브라질 선수들의 발재간에 소련 수비진이 붕괴하더니, 브라질 골잡이 바바가 경기 시작 3분 만에 선제골을 성공시켰다. 이는 ‘축구 역사상 최고의 3분’이라 불릴 정도로 역사적인 장면이다.


 



바바는 창조적인 플레이어는 아니지만 동료들이 만들어주는 골은 착실히 넣는 참한 득점기계였다. 그는 후반전, 전설의 골키퍼 야신을 상대로 두 번째 골을 넣는 영예를 얻었고 브라질은 소련을 2:0으로 물리쳤다.


 



이 경기에서 펠레와 지토, 가린샤로 구성된 일명 ‘3인방’이 등장하면서 브라질 역사상 첫 드림팀이 탄생하게 된다. 이때부터 17살의 어린 펠레가 세계 최강의 브라질 대표팀을 이끄는 진풍경이 연출되었다. 필드의 무게추가 디디에서 펠레로 넘어가는 장면은 매우 극적이다. 웨일즈와의 8강전 후반 21분, 상대 수비수들에게 둘러싸인 디디가 패스를 달라고 고함치던 펠레를 보았다. 디디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펠레에게 패스했다. 펠레는 상대 수비수를 속임수로 제치고 골키퍼와 1:1 상황을 만들고는, 골키퍼를 속여 넘기며 골을 성공시켰다. 브라질은 이 골로 웨일즈를 1:0으로 이겼다.


 



펠레라는 선수의 가치는 프랑스와의 준결승전에서 드라마틱하게 폭발했다. 프랑스에는 당대 최고의 골잡이로 불리던 쥐스트 퐁텐느가 버티고 있었다. 선제골은 바바가 기록했다. 곧이어 퐁텐느가 만회골을 성공시키며 1:1 동점. 팽팽하던 전반전은 브라질의 사령탑 디디가 두 번째 골을 넣으며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후반 들어 프랑스는 한골 차를 만회하기 위해 공격중심의 전술을 펼치게 되고, 이로 인한 프랑스 수비진의 균열을 펠레가 포착했다. 펠레는 23분 만에 세 골을 몰아치며 헤트트릭을 기록했다. 프랑스의 만회골이 있었지만 경기 결과는 5:2 대승. 마지막 결승전 상대는 개최국 스웨덴이었다.


 


 




3


 



그때까지 월드컵에는 깨지지 않던 징크스가 있었으니, 바로 월드컵이 개최되는 대륙의 국가가 우승팀이 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인지 스웨덴은 결승전을 앞두고 우승에 대한 기대로 부풀어 있었다. 게다가 행운까지 겹쳤다. 경기 전날 비가 내린 것이다. 유럽의 잔디는 짧고 넓고 부드럽고, 남미의 잔디는 길고 꼬부라져있고 질기다. 한마디로 유럽의 잔디는 브라질 축구 특유의 발기술이 나오기에는 미끄럽다는 뜻이다.


 



여기에 비가 내렸으니 더 미끄러워질 터. 그런데 바이킹의 후예들은 ‘진정한 승부’를 위해 경기장 전면을 옷감으로 가려주는 매너를 발휘했다. 브라질 선수들은 엄청나게 감격했다. 훗날 브라질 대표팀의 감독이 된 마리오 자갈로는 이렇게 말했다.


 



“감동적이었다. 스웨덴은 승리 이상으로 가치 있는 일을 했다.”


 



스웨덴이 승리 이상의 가치를 얻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승리는 브라질의 것이었다. 브라질 선수들은 마른 잔디를 누비며 스웨덴을 5:2로 대파했다.


 





스웨덴을 상대로 골을 넣는 펠레. 공이 땅에 떨어지기 직전에 킥이 들어가는 모습을 감상해보자.


 




종료 직전의 다섯 번째 골은 펠레의 정교한 헤딩골이었다. 징크스가 처음으로 깨지는 순간이었다. 참고로 2002년, 최초로 아시아 대륙에서 열린 한일 월드컵에서 브라질이 우승한 것을 제외하면 이 기록은 아직까지도 깨지지 않았다.


 



우승을 갈망해온 브라질의 분위기가 어땠는지는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때부터 사람들은 스웨덴 월드컵을 ‘펠레의 월드컵’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1958년 월드컵에서 펠레만 이야기하는 것은 가린샤에 대한 결례다. 소아마비환자 가린샤의 ‘신의 드리블’이 없었다면 과연 대륙 징크스가 깨졌을지 의심해 봐야 한다. 펠레는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많은 사람들이 1958년 월드컵을 펠레의 월드컵으로 부르고 있다. 하지만 가린샤가 없었다면 브라질은 월드컵을 정복할 수 없었을 것이다. 특히 1962년 칠레 월드컵은 가린샤의 월드컵으로 불리길 바란다.”


 



중원의 사령관 디디는 훗날 가린샤를 회상하며 이렇게 말했다.


 



“시합에서 이기고 싶으면 가린샤에게 공을 넘겨주면 된다.”


 



그러니 펠레가 말한 1962년 월드컵으로 어서 넘어가보자.


 


 




4


 



1962년 칠레 월드컵은 자칫하면 아르헨티나 월드컵이 될 뻔했다. 월드컵은 오랫동안 남미와 유럽을 오가며 개최되었는데, 이때 원래 개최국 싸움에서 아르헨티나가 유력했다. 아르헨티나와 경쟁 중이던 칠레는 갑작스런 지진으로 전국이 초토화, 절망상태에 빠져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월드컵 유치를 따오는 일은 국가재건의 상징처럼 되어버렸다.


 



칠레 축구협회 회장인 카를로스 디트보른은 월드컵 유치를 위해 자신의 사재까지 털었다. 그는 이런 말로 국민들을 격려했다.


 



“우리에겐 이제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다. 월드컵마저 빼앗긴다면 어떻게 살 것인가.”


 



칠레인들은 칠레가 월드컵을 치를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다. 사막에서 600톤의 흙을 날라 경기장을 채우는가 하면 유럽에서 잔디를 수입해 깔기도 했다. 이 일은 지금까지도 칠레인들의 애국심을 자극하는 에피소드다. 결국 월드컵을 손에 넣었으니 참 대견하지만, 비극이 하나 있었다. 가장 많은 노력을 기울였던 디트보른이 대회 직전 갑자기 사망한 것이다. 이 얼마나 슬픈 죽음인가.


 




디트보른의 이름을 딴 디트보른 스타디움


 



대회의 우승 1순위 후보는 단연 브라질이었다. 펠레가 한 단계 업그레이드되어 21살의 나이로 되돌아왔고, 드리블의 제왕 가린샤, 사령관 디디, ‘골키퍼 킬러’ 바바, 니우톤 산토스, 자우마 산토스, 마리오 자갈로, 질마르 등 1958년 우승 멤버들이 대부분 포함되어 있었다. 초호화 군단이었다. 그 중 정점은 펠레였겠지만, 브라질은 불안요소는 바로 펠레에서부터 시작된다.


 



펠레는 대회 전 당했던 부상으로 대퇴부에 통증을 느끼는 상태였다. 조별예선 1차전에서 멕시코를 상대로 득점, 팀의 2:0 승리를 이끌 때까지는 좋았다. 하지만 체코슬로바키아와의 2차전에서 상대 골키퍼 쉬로이프와 충돌, 대퇴부의 통증이 악화되고 말았다(어느 정도 쉬로이프의 고의성이 있었다.). 펠레는 경기에서 아웃. 당시엔 선수교체라는 룰이 없었기 때문에 브라질은 10명으로 싸워야 했고, 고군분투 끝에 비기는 데는 성공했다. 그러나 펠레는 다음 경기부터 출전하지 못하게 되었다.


 



펠레의 공백은 무서운 득점력을 자랑하는 신예, 아마릴도가 메우게 됐다. 그의 진가는 스페인과의 조별예선 최종전에서 그대로 드러났다. 그는 두 골로 팀의 2:1 역전승에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 8강전 상대는 자존심 강한 잉글랜드. 이 전설적인 경기는 가린샤의 인생에서 가장 영광스러운 순간으로 남아 있으며, 잉글랜드에게는 팀 전원이 가린샤의 원맨쇼에 농락당한 굴욕으로 기억되고 있다. 축구팬들은 이 경기를 브라질-잉글랜드전이 아니라 가린샤-잉글랜드 전이라고 부를 정도다.


 



원래 경기스타일이 보수적인 직선적인 잉글랜드는 상대의 변칙적인 플레이나 전술에 잘 말리는 경향이 있다. 그래도 축구의 종주국이 가린샤에게 당한 것만큼 밟힌 적은 전에도 후에도 없었다. 소아마비 환지인 가린샤의 오른다리는 심하게 휘어진데다 왼쪽보다 6cm나 짧았다. 잉글랜드의 축구 형태는 이런 상대에게 가장 약하다. 또한 지능이 8살 수준이었던 가린샤는 패스, 슛, 드리블 등의 플레이 패턴이 ‘자폐적’이었다. 순 자기 생각대로 경기를 하다 보니 상대가 그를 예측하기는 더욱 힘들어진다.


 



사실 가린샤는 시합을 했다기보다는 그냥 공놀이를 즐긴 편에 더 가까웠다. 이게 워낙 먹히다보니 감독도 동료 선수들도 그냥 방임한 것이다. 가린샤를 막던 잉글랜드 수비수들의 엉덩방아가 속출했다. 가린샤는 전반 31분 선제골을 터뜨린다. 잉글랜드의 제랄드 히친스가 7분 뒤 동점골을 기록했지만 킬러 바바가 후반 8분에 결승골을 기록했다. 결국 시합의 주인공인 ‘작은 새’가 마무리를 지었다. 후반 14분 가린샤의 골이 시합에 쐐기를 박았다.


 




영상 초반의 장면은 ‘개 난입 사건’인데, 말 그대로 이 시합에서 작은 개 한 마리가 경기장에 난입한 일을 말한다. 개를 붙잡고 있는 사람은 잉글랜드 공격수 지미 그레아브스다. 그는 네 발로 엉금엉금 기어가서 개를 간신히 붙잡았는데, 덕분에 관중들은 폭소를 터뜨렸다.


 



가린샤의 플레이는 잉글랜드의 축구 해설가도 감탄하게 만들었을 정도다. 잉글랜드 선수들은 시합 후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가린샤 같은 선수와는 두 번 다시 만나고 싶지 않다.”


 


 




5


 



본 축구문화사 앞 편에서 펠레와 함께 중요하게 소개하고픈 선수가 있다고 했는데, 그 사람이 바로 가린샤다. 황제에 대한 예우도 하랴, 가린샤도 비중 있게 다루랴 하다 보니 벌써 분량을 초과하고 말았다.


 



축구전문가들 중 일부는 어쩌면 가린샤야말로 펠레 이상의 선수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브라질vs아르헨티나의 남미축구 구도에 익숙한 우리는 축구역사의 본좌쟁투를 펠레vs마라도나로 인식하곤 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펠레vs가린샤vs마라도나>의 3파전이라는 점. 이것이 4파전, 5파전으로 확장될 때 요한 크루이프, 디 스테파노 등의 유럽 선수들이 뒤따른다는 점을 꼭 말해두고 싶다.


 



순서상 이르지만, 가린샤의 삶이 어떻게 끝났는지를 알아보고 다음 편을 기다리시자. 가린샤의 말년은 불우했다. 그는 스타였지만, 자신의 지적 수준으로는 갑자기 찾아온 부와 명예를 감당하기가 버거웠다. 그는 4번의 이혼과 5번의 공식/비공식 결혼을 반복했다. 그 과정에서 가린샤의 재산은 점점 조각났고, 그는 중년이 되기도 전에 알콜 중독자가 되었다. 그래서인지 브라질인들은 여자들이 가린샤를 이용해먹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특히 두 번째 부인인 ‘엘자(삼바 가수 출신이다.)’는 심하게 악녀 취급을 받았다.


 




<가린샤 - 외로운 별>이라는 제목의 영화 포스터. 저 여자가 엘자란다. 엘자가 아무리 나빠도 설마 화장을 저렇게 하고 다녔을까. 구도를 보면 가린샤는 근엄하고 순진한 영웅-팜므파탈의 기운에 갇혀 있지만 자신은 의식하지 못하는-의 모습을 하고 있다. 엘자는 그런 가린샤를 조망(鳥網)하고 있는 위치다. 엘자가 정말 나쁜 여자였을 수도 있지만 사실 팜므 파탈은 신화인 경우가 많다. 엘자가 가린샤를 떠난 결정적인 계기는 가린샤가 말다툼 중에 축구공을 차듯 그녀에게 발길질을 했기 때문이다.


 



심신이 극도로 쇄약해진 가린샤는 죽기 전까지 여덟 번이나 응급실에 실려 갔다. 재정적으로도 파산했다. 결국 49세이던 1982년 1월 19일, 마지막 술병을 비우고 요절했다. 급성 알콜 중독에 의한 혼수상태인 채였다. 사인은 간경변이었다. 그의 장례식은 브라질 축구의 심장이라 할 수 있는 마라카낭 스타디움에서 성대하게 치러졌다. 장례식 후 경기장의 벽엔 팬들에 의해 다음과 같은 문구가 그려져 있었다.


 



“가린샤, 지금까지 살아주어서 고맙다.”


 



축구는 대리전이고, 필드는 집단의 욕망이 서로 투쟁하는 곳이다. 필드를 정복했지만 오히려 현실에서는 한없이 나약했던 가린샤의 인생은, 그래서 묘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생각해보면 축구는 참 더럽고도 아름다운 특이한 스포츠다. 어쩌면 축구는 스포츠의 한 종목이 아니라 그냥 축구라는 생각도 든다.



 


다음 편에서는 가린샤의 남은 이야기를 어서 풀고, 브라질 축구의 다음 여정을 디벼본다. 아울러 펠레가 드디어 저주의 포문을 열기 시작한다. 그럼 어서 찾아뵙겠다. 이상!


 


 



PS. 가린샤가 브라질에서 그토록 추앙받는 이유 중 하나는 그가 최고의 ‘드리블러’였기 때문이다. 드리블을 가장 중요하게 치는 곳이 바로 브라질이다. 이에 관한 자세한 이야기는 축구문화사 브라질 1편 <징가란 무엇인가>에서 확인해 보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