➄ 이순신 장군 전사설
돌고돌고 돌아서 다시 전사설로 돌아왔다.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다.
“이순신 장군은 1598년 11월 19일 노량해전에서 함대를 이끌다가 일본군이 쏜 총탄에 맞아 전사하셨다.”
사람들은 어째서 '전사'설에 반기를 든 걸까?
음모론이나 정사가 아닌 야사나 이설(異說)에 관심이 가는 건 인간의 어쩔 수 없는 습성이지만, 이 습성이 발현되기 위해서는 정설에 '이설이 파고들 수밖에 없는 허점'이 있어야 한다. 이순신 장군 전사설에는 그런 허점이 몇 군데 있다.
첫째, ‘내 죽음을 적에게 알리지 말라’ 라는 이순신 장군의 유언이다.
‘죽음을 알리지 말라’라는 것까지는 어느 정도 수긍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 그러나 ‘내 죽음을 '적'에게 알리지 말라’라는 말이 가능할까?
1) 조총탄에 맞았는데 이런 유언을 남길 수 있을까?
조선왕조실록에 항왜(降倭, 조선인에게 항복한 일본인)가 들고 온 대조총을 조정에서 실사격한 기록이 있다. 이때 이순신의 부하 중 한 명인 정운(鄭運) 장군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정운 장군은 참나무 방패 3장과 쌀 두 섬을 뚫고 날아온 총탄에 전사했다. 이순신 장군이 흉탄에 맞았을 때 과연 유언을 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있었을까?
2) 유언 문구에 대한 의문
‘적(敵)’이 문제다. 승정원일기에 나와 있는 이원익의 발언을 보자.
“적과 대치하고 있으니 죽음을 알리지 말라.”
그럼 ‘내 죽음을 적에게 알리지 말라’라는 말이 나오는 출처는 어디일까? 이순신 장군의 조카인 '이분(李芬)'이 쓴 <이충무공행장록>이다.
문제는 이분이 현장을 목격했냐는 거다. 안타깝게도 이분은 현장에 없었다. 노량해전 당시 이순신 장군을 모셨던 이는 아들 희와 조카 완(이분의 동생), 그리고 종인 김이였다. 이분이 쓴 이충무공행장록에서의 노량해전 관련 글은 동생인 완의 전언을 기반으로 쓴 거다. 어느 정도 ‘각색’이 있을 수도 있단 의미다.
3) 유언이 사실이라면 더 큰 문제다
이분(李芬)이 쓴 이충무공 행장록의 내용이 100% 사실이라면 이게 더 큰 문제다. 이순신 장군을 호종(扈從, 수행하는 것)했던 3명, 그러니까 아들, 조카, 노비가 이 급박한 상황 속에 이순신 장군을 방 안으로 모신 다음, 이순신 장군의 유지를 받들어 총수 2만에 육박하는 조명 연합군을 지휘했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세 명의 지휘능력은 둘째친다고 해도, 과연 이순신 장군의 기함에 있던 수많은 사람들의 눈을 피할 수 있었을까?
판옥선 평균 승선원은 120~188명이다. 이 중 노군이 56~120명이라면 전투요원은 68명 수준이며, 이 중 방포장 요원이 23~40명이라면, 망루 위와 갑판 위에도 꽤 많은 인원이 있었을 거다. 평균적인 판옥선일 때도 이런 데 기함의 경우에는 어떠할까?
전라우수영의 기록을 보면, 대장선에는 항상 90명의 기를 든 나졸이 배치되어 있었고, 이순신이 있던 곳에도 60명의 군사들이 있었다 한다.
그렇다면 최소한 60명의 군사들이 쳐다보는 가운데, 전선의 최고 지휘관이 적탄에 맞아 남몰래 ‘내 죽음을 알리지 말라’라고 말했고, 조카인 완과 아들인 희, 그리고 종으로 부리는 김이가 다른 군사들 눈을 피해 군사를 지휘했다? 상당부분 의구심이 든다.
이 모든 걸 종합해보면 무리가 따르지만, 은둔설, 자살설에 비해서 설득력이 있다.
결국 적당한 수준에서 타협을 보자면,
“약간 과장되고, 윤색이 된 구석이 있지만 가장 현실성이 있는 모습이다.”
라고 말할 수 있다.
한 가지 안타까운 사실은 이순신 장군이 목숨 걸고 지킨 노력을 선조와 조선 행정부가 인정하지 않았다는 거다. 아니, 폄훼 했다는 게 옳을 거다.
“(상략) 이번의 적변(賊變)은 전에 없던 변고로서 이는 변변찮은 나로 말미암은 소치이다. 그런데 중국 조정에서 군사를 동원하여 적을 몰아내고 강토를 회복했으니 이 또한 옛날에 없던 공적이다. 이것은 호종했던 여러 신하들의 충성스러웠던 덕분이니, 어찌 다른 사람들이 한 일이겠는가. 또 힘껏 싸운 장사(將士)들에 대해서는 그 공을 기록하지 않을 수 없겠으나 우리나라 장졸에 있어서는 실제로 적을 물리친 공로가 없다. (하략)”
- 조선왕조실록 선조 35년(1602년) 7월 23일의 기록 중
선조가 보기에 임진왜란을 이길 수 있었던 건 자신의 노력이 있기 때문이었다(아니더라도 그렇게 주장해야 했다). 조선 행정부의 분위기를 단적으로 보여준 기록이 하나 있다. 조선왕조실록에 당당히 나와 있는 기록이다.
“적을 물리치고 나라를 회복한 공로는 모두 성상께서 지성으로 사대(事大)하시어 중국 조정에서 곡진하게 구제해 준 결과일 뿐입니다.”
어쩌면 당연한 이야기일 수도 있다. 선조와 선조 주변의 근신들은 전쟁영웅들에 대한 콤플렉스가 있었다. 아니, 콕 찍어 말하자면 선조의 콤플렉스였다. 단순 '콤플렉스'면 그냥 보아 넘길 수 있겠지만, 이 때문에 권력누수가 생기고, 통치권에 문제가 생길 정도였다.
‘우리나라 장졸에 있어서는 실제로 적을 물리친 공로가 없다.’
그렇다 보니 이런 말이 나온 거다. 나라를 구한 영웅들의 공을 깎아 내려야만, 자기의 위상이 올라가기 때문이다.
선조 어진 (추정)
임진왜란 7년 동안 목숨 걸고, 혹은 목숨을 버리며 나라를 위해 싸웠던 이들 중 고작 18명만 공신 훈호를 받았다. 선무공신(宣武功臣)이다.
목숨 걸고 싸운 자 보다 선조 옆에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포상을 받은 자들도 있었다. 바로 호성공신(扈聖功臣)이다. 무려 86명이나 책봉 됐다. 일본군과 맞서 싸운 이들보다 훨씬 많은 숫자가 공신으로 책봉된 거다. 이들이 어떤 대단한 성취나 결과를 가져왔던가? 명나라 병부상서 석성에게 눈물로 읍소 명군의 참전을 이끌어 낸 정곤수와 같은 이들의 공은 인정해야겠지만, 단순히 선조를 따라 다녔다는 이유로 공신에 오른 이들이 훨씬 많았다.
86명의 호성공신 중 내시가 24명, 마의(馬醫)가 6명, 의관(醫官)이 2명(여기엔 허준도 포함됐다), 별좌사알(別坐司謁, 임금의 명을 전달하던 잡직)이 2명이었다. 파천 중 사망한 왕자 신성군도 포함 돼있는데, 이 정도면 '공신'이라는 칭호가 부끄러울 정도다.
목숨을 버려가며 나라를 지킨 이순신 장군에게 부끄럽지 않았을까? 그러나 정치는 비정했다. 부끄러움은 후손들의 몫이었고, 선조는 다시 한 번 부끄러운 짓을 했다.
"원균을 2등에 녹공해 놓았다마는, 적변이 발생했던 초기에 원균이 이순신에게 구원해주기를 청했던 것이지 이순신이 자진해서 간 것이 아니었다. 왜적을 토벌할 적에 원균이 죽기로 결심하고서 매양 선봉이 되어 먼저 올라가 용맹을 떨쳤다. 승전하고 노획한 공이 이순신과 같았는데, 그 노획한 적괴(賊魁)와 누선(樓船)을 도리어 이순신에게 빼앗긴 것이다.
(중략) 나는 원균이 지혜와 용기를 구비한 사람이라고 여겨 왔는데, 애석하게도 그의 운명이 시기와 어긋나서 공도 이루지 못하고 일도 실패하여 그의 역량이 밝혀지지 못하고 말았다. 전번에 영상이 남쪽에 내려갈 때 잠시 원균을 민망하게 여기는 뜻을 가졌었는데, 영상이 기억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오늘날 공로를 논하는 마당에 도리어 2등에 두었으니 어찌 원통하지 않겠는가. 원균은 지하에서도 눈을 감지 못할 것이다."
- 조선왕조실록 선조 36년(1603년) 6월 26일 기록 중
이순신을 삼도수군통제사 자리에서 끌어내리고 그 자리에 원균을 앉힌 실수를 변명하기 위해 선조는 원균을 이순신과 같은 반열에 올린 것이다. 문제는 원균의 공이 이순신의 그것에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을 만회하기 위해 일부러 이순신을 깎아내렸다는 점이다.
자신의 실수를 만회하고 변명하기 위해, 나라를 위기에 빠뜨린 원균을 1등 공신 자리에 올려놓고, 그도 모자라 이순신의 공을 깎아내린 거다.
선조가 왜 그랬는지는 충분히 이해한다. 정치가 원래 그런 것이니, 이해의 범주 안이다. 역사를 더듬어 보면 이런 사례는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권력에게 필요한 영웅은 살아있는 영웅이 아닌 죽은 영웅이니 말이다.
그러나 이순신 장군에 관한 건 정도가 심했다. 선조가 지금까지 욕을 먹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거다. 그러니 이순신 장군 자살설, 은둔설 같은 이야기가 지금까지 흘러나오는 게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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