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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12. 18 .금요일

파토


 


 




관련기사덕만과 미실, 그리고 민주주의에 덧붙여서



  


 




 


 


결국 저자가 바뀌어가며 선덕여왕 시리즈 3탄이 이제서야 나오게 되었다.


 


일단 논의를 끌어내 주신 아홉친구님께 감사 드린다. 위원이 직접민주제와 관련된 글을 쓰고 또 여기저기에 그 단어를 등장시키는 이유는 이 개념이 어떤 형태로든 인구에 회자되고 논의가 시작되도록 하자는 것이다. 그래서 님의 글이 올라온 얼마 후에 이 글의 초고를 써 뒀는데, 그간 한지수씨 건 등으로 인해서 정리하고 올릴 기회가 없었다.


 


그런데 이후 시간이 지나면서 투덜님의 매트릭스 글이 등장하고 이어지는 반론에 반론 등 시스템의 재편관련된 논쟁이 오락가락 하는 것을 지켜봤다. 그래서 굳이 이 시점에서 예전 글에 대한 답글을 쓸 필요가 있는 건지, 혹은 나도 최신 경향인 매트릭스 쪽으로 방향 전환을 해야 하는 건 아닌지 고민도 쪼매 있었다.


 


허나 위원은 매트릭스는 권력 관계보다는 신비주의적 접근을 선호하는 데다가, 반론을 제기하려는 목적이 아니라 지난 글들에서 본 위원의 주장이 좀 산발적이고 단편적이었기에(시간을 두고 조금씩 풀어가고자 했던 거지만) 기왕 이렇게 된 거 원래의 흐름 하에서 썰을 풀기로 한다.


 


아홉친구님의 전반적인 현실주의적 주장에 이해 가는 면이 없다고 한다면 그건 거짓말일 것이다. 그 이유는 님의 논리가 역사의 경험과 교훈에서 비롯된 실제 현실에 근거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위원 역시 지금 이 순간에도 그런 문제들을 고민한다.


 


그래서 직접민주제의 실현성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한 2003년 이후 만 6년이 지나서야 이 단어를 처음으로 쓸 수 있었다. 노무현의 죽음이 아니었다면 아직도 내 입을 통해서는 안 나왔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과 민의 융합이 사실상 불가능할 것이라는 전제에는 동의할 수 없다. 님이 규정한 바 인과 민의 구별이 현실에서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며, 유사이래 대개의 경우 (소규모의 단순한 사회에서는 그렇지 않았던 경우도 많음) 그래 왔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로 인해 미래 또한 영원히 그럴 것이라는 논리가 성립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님의 주장의 근거는 오로지 경험적인 것뿐이다.


 


이를 전제해 두고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공자의 시대부터 지금까지 세상은 결코 완만한 연속선을 그리며 변해 오지 않았다는 점이다. 동아시아를 기준으로 본다면 2500년 전 그 시절부터 불과 100년 전까지도 세상은 사실상 똑같았다. 따라서 최근의 100년 동안의 변화 곡선의 기울기는 나머지 2400백 년 전체를 합친 것보다도 훨씬 더 크다. 서양도 다소의 차이는 있지만 본질적으로 크게 다를 것은 없다.


 


이는 무슨 뜻인가? 민주주의와 인권 개념의 정착과 기술, 교육, 지식, 정보 등의 모든 면에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는 그 이전 수천 년과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라는 뜻이다. 보편률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는 아니지만, 과거에 보편적인, 혹은 절대적이라고 여겨졌던 수많은 가치들이 근대화의 과정 속에서 붕괴되거나 변화된 것은 엄연한 역사의 진실이다.


 


따라서, ‘관념적으로는 동의할 수 있는 이야기들이 왜 경험적 사실로 증명되지 않았는가라는 님의 의미 있는 고민에 대해 위원은 이렇게 대답해 보고 싶다. 단지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었기 때문이라고. 공화국 미합중국이 탄생한 것이 불과 2백여 년 전(1776), 민주주의의 발상국이라는 영국에서 모든 여성이 참정권을 가진 것이 겨우 80년 전(1928), 톨레랑스의 나라 프랑스의 여성 참정권 인정은 60년 전(1946), 미국에서 흑인에게 참정권이 부여된 것은 위원이 태어나기 불과 10년 전의 일이다.


 


그 이후에 태어나거나 자란 대부분의 우리들에게는 세상이 원래부터 이랬던 것처럼 느껴지지만, 인류의 민주주의 역사는 실은 이토록 일천한 것이다. 한편 이 사실을 반대로 되짚어 보면 참으로 짧은 시간 동안에 많은 극적인 변화가 있었으며, 이는 당장의 현실과는 무관하게 거시적 관점에서 향후 민주주의의 발전과 사회적 진보의 속도에 희망적인 관측을 낳게 한다. 그 걸음의 방향이 이번 세기에는 구체적으로 어디를 향해야 하는가, 위원의 문제의식은 그것이고 또 그 답이 직접민주제에 있다고 생각하는 거다.


 


그리고 무엇보다, 바로 우리가 이 땅에서 머잖아 그것을 실현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위원은 누구나 기회가 주어진다면 같은 수준의 지식을 얻고 같은 사고를 할 것이다라는 식의 절대평등적 관점을 갖고 있지 않다. 누구나 알다시피 모든 사람은 다르다. 어떤 사람은 힘이 세고 어떤 사람은 머리가 좋으며 어떤 사람은 인격이 훌륭하다. 지식을 포함해 이들이 어떤 측면에서건 똑같은 상태에 놓이게 되는 것은,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에 묘사된 태생적 전체주의 사회가 아닌 한 가능하지 않으며 민주주의도 아니다.


 


그렇다면 가능한 일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깨어있는 시민을 조직화된 힘으로 만드는 것이다. 노무현 사후 끝없이 회자되지만 정확한 의미는 아무도 모르는, 아니 아무도 규정하려 들지도 않는 이 거대한 숙제에 우리는 보다 열린 자세로 접근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내용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인민과는 또 다른 시민이라는 개념에 대해 좀 이야기를 해 보자.


 


시민은 영어로 citizen 으로 번역되지만 도시에 사는 사람이라는 의미는 물론 아니다. 시민권이라는 단어가 함의하듯, 그리고 시민권을 가진 자만이 참정권과 선거권, 피선거권을 가지는 대부분의 나라에서 보듯 이 말의 핵심은 바로 주체성과 책임이다.


 


따라서 시민은 국가주의 냄새를 풍기는 국민이나, 아홉친구님께서 설명하신 인민과는 또 다른 무게와 의미를 가지는 근대 정신의 산물이다. 국민의 민이 국가에 종속되고 인민의 민이 인에 종속된다고 본다면, 그에 반해 시민은 자신의 지혜와 책임을 통해 스스로 서는 자다. 직접민주제고 아니고를 떠나서 모든 민주사회의 구성원으로서 가장 건강한 형태는 바로 이런 의미에서의 시민이다.


 


그 맥락에서, 위원이 일차로 말하고 싶은 것은 과거와 현재의 우리의 상태가 국민이던 인민이던 이제는 진짜 시민의 상태로 진화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만이 우리가 진정한 주권자로서 역할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시민이 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위대한 천재의 지식도 아니고, 우주의 숨겨진 비밀에 대한 접근도 아니다. 그저 가장 기본적인 수준에서의 상식이다. 이 상식은 반드시 차가운 이성에 의한 것만도 아니요, 정치와 사회에 대한 전문가적인 안목도 아니다. 단지 논어의 한 대목인 아래의 윤리적 명제일 뿐이다.


 


 


己所不欲 勿施於人


기소불욕 물시어인


 


내가 원하지 않는 것을


남에게 강요하지 말라


 


 


동서고금을 막론해 인간에게 필요한 가르침은 이 문장 하나면 충분하다. 이를 넓은 의미에서 포괄적으로, 능동적으로 해석하면 인////, 사랑과 자비 등의 고전적인 덕목은 물론 자유와 책임 등 근대적인 덕목조차도 모두 포함된다.


 


물론 이 경지의 완벽한 성취를 원한다면 대단한 수양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 논의하는 목적을 위한 상식 선에서의 성취는 우리 일반인도 가능하다. 이는 신분 상승을 위한 교육이 아닌, 시민을 키워내기 위한 학교와 사회에서의 교육을 통해 이루어질 수 있다. 아홉친구님이 지적한 바로 그 감정적 만족감, 혐오 등의 고질적 폐해를 없애기 위한 시민 교육이다.


 


그럼 이들의 조직화라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


 


그것은 비록 한 사람 한 사람을 떼어 놓고 본다면 여전히 단점도 결점도 많고 때로 감정에 휘둘리는 우리 인간들도, 그들이 기본적으로 건강한 상식을 보유한 시민이라면 집단으로서는 올바른 결정을 내리게 된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시민의 시민됨이 집단의 여기저기에 내재된 비상식적이고 비민주적이며 부정적 요소들을 상쇄하기 때문이다.


 


이 시민됨은 위의 기소불욕 물시어인으로 상징되는 리버럴하고 공평무사한 상식적 윤리를 바탕으로 책임감, 자존감, 목적의식, 열정, 주체성, 한국식으로 보자면 체면 같은 요소도 포함한다. 그런데 이 요소들을 잘 보면 실은 절반이 감정적인 면이다. 그것은 일반적인 인식과 달리, 진정한 참여는 상식에 기초한 건강한 감정을 플러스의 에너지로 끌어낼 때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차가운 이성만으로는 아무도 진심으로 참여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 시민됨은 특성상 권력이 주어지면 더욱 보강된다. 이 대목이 바로 집단으로서의 시민과 전통적 의미에서의 군중(群衆)의 차이다. 군중은 권력이 주어지면 동요하고 흥분하여 통제불능의 상태로 빠져든다. 그러나 시민은 반대로 움직인다. 오히려 신중해지고 스스로 질서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것이 가능하다는 증거는 이미 촛불에서 반복되어 드러났다. 단언하건대 촛불은 지금의 우리나라가 아닌 어느 나라에서도, 어느 시대에서도 벌어질 수 없던 현상이다. 비록 막판에는 다소의 혼선이 있었다고 하나 완벽에 가까웠던 질서와 비폭력, 자발성과 주체성은 시민의 새로운 가능성에 대해 가히 역사적인 지평을 열었다.


 


단지 여기서 부족했던 것은 이 촛불의 저력이 온전히 발휘될 수 있는 힘의 발산과 행사를 위한 구조뿐이었다.


 


얼마 전 좌담회에서 유시민은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촛불 들고 잘못된 점을 외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만으로 안 바뀐다면 바뀔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한다’. 정확한 말이다. 그러나 이는 다시 예전의 정치 행태로 돌아가는 길이 아니라, 촛불의 에너지를 폭력이나 부정적인 방향이 아닌 건강한 민주적 힘으로 승화시키는 새로운 방향을 고민하는 길이어야 마땅하다.


 


그래서 위원은 이것이 앞으로의 진보가 나아갈 방향이며, 이를 고민하고 실현해 나가는 것이 소위 21세기의 지식인이 할 일이라고 믿는 것이다.


 





과거 엘리트의 전유물이었던 지식과 정보의 독점은 현재 인터넷과 미디어를 통해 무서운 속도로 붕괴되고 있으며, 이는 백성, 국민, 혹은 인민의 시대였던 지난 4천년 인류 역사 속에서 한번도 벌어진 일이 없는 문명전환적 사건이다. 따라서 이것의 가치를 제대로 보고 그 현실적 적용법을 찾아가는 것은 현 시점에서의 시대적 사명이다.


 


그와 관련하여 당장의 폐해와 혼란도 없는 것은 아니지만, 여하튼 거대한 덕만의 첨성대는 이미 세워지고 있다. 그런 첨성대를 보고 또다시 음식을 바치고 절을 할 것인지, 아니면 천체의 운행을 이해하고 거기에 따라 농사를 지을 것인지가 바로 지금부터 우리의 선택이고 노력이며, 교육이고 실천이다.


 


이런 발상의 전환과 또 객관적인 조건의 변화를 감안할 때, 이제 우리는 조금씩 직접민주제로의 길로 걸어갈 수 있는 지점에 이미 도달했다고 본다. 이는 뜬구름 잡는 환상이나 관념의 유희가 아니라 매우 실제적인 고민이다.


 


지난 편의 횡선을 없앤다는 표현은 말 그대로 지위의 구분이 완전히 사라진 상태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모든 사람이 전적으로 평등한 세상을 꿈꾼다면 그야말로 망상이다. 그러나 정치 권력을, 예컨대 세종시나 4대강이나 급식예산 삭감이나 해외 파병 같은 중차대한 사안들에서의 결정권을 더 이상 대통령이나 정당이 아닌, 시민의 덩어리로서의 총체적이고 능동적인 통합체로서의 시민 인격에 부여하는 것은 목표로 삼기에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그것이 달성되는 과정에서 기존의 지배와 피지배 관계는 이제 역할 분담의 관계로 바뀐다. 여전히 관리자는 존재하겠지만 그들은 지위에 맞게 존중 받고 다소의 권리와 결정권을 가질 뿐 통치하거나 군림하지 않는다. 그들은 지식인일 것이며 여전히 일반 사람들 하나하나보다는 뛰어나고 중요할것이다. 그러나 진정한 권력자인 시민 인격 앞에서는 극히 왜소한 존재일 뿐이다.


 


직접민주제로 낙원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다. 그 속에도 부조리도 불평등도 존재하며 부패도 비리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세상은 적어도 헌법이 거짓말을 하는 세상은 아니다. 국민이 주권을 가진다는 언어의 유희 속에 실은 주권과 정권이 분리되어 있고 그 속에서 시민의 실제 권력행사 수단은 나중에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명목상의 대리인이자 사실상의 진짜 권력자를 뽑는 한 표에 영원히 고착되어 있는, 그런 세상은 아닌 거다.


 


위원은 이 방향이야 말로 우리가 이제부터 키워 나가야 할 우리 자신의 모습이자 민주주의의 미래라는데 아무런 의심도 없다. 게다가 앞서 말했듯 우리는 이것을 실현할 수 있는 시민 의식을 이미 일부분 봤고, 또 직접적인 주권의 행사를 최첨단 기술을 통해 물리적으로 가능케 할 세계 최고 수준의 정보 네트워크 및 인프라도 보유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이를 어떤 형태와 내용으로 건설해 나가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논의와 합의가 있어야 하겠지만, 예컨대 스위스는 이미 오래 전부터 중요한 국가적 사안을 국민투표로 결정하고 있다. 스위스의 사례는 따로 기회를 봐서 살펴봐야지만 얼마 전인 12 1일에도 매우 중요한 두 개의 법안이 국민투표를 거쳐 결정되었다.


 


그렇게 나온 결과가 때로 의 생각과는 합치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는 적어도 충분한 토의와 판단을 거친 시민의 다수결에 의한 민주적 결정이다. 지금 우리나라처럼 위정자와 기득권층이 거짓과 독선을 일삼는 것과는 다르며, 대리인으로 뽑아준 국회의원들이 자신들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 말을 바꾸고 전횡을 일삼는 것과도 다른 것이다.


 


스위스식 국민투표가 꼭 우리의 해답이라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결국 이런 식의 방향으로 가는 것이 민주주의의 회복과 완성을 위한 순리이고, 이를 위한 논의와 대비를 지금부터 시작하자는 거다.


 




스위스에서 대통령은 1년 임기의 순번제로


현직 대통령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도 많다.


완전한 형태는 아니지만 직접민주제는


이미 지구상에서 운영되고 있는


엄연한 현실 정치 체제이다.


 


그럼 지금 당장의 현실로 돌아와 보자. 풀어가야 할 눈앞의 숙제들이 산적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진보 연대는 어떤 방식으로 이룰 것인가, 내년 지자체 선거는 어떻게 치를 것인가, 다음 총선과 대선에서 어떻게 해야 승리할 수 있을 것인가. 이 모든 것은 너무도 중요하고 또 심각한 과제들이다.


 


위원도 이런 문제들의 중차대함에 동의하지만, 한편으로는 선거에서의 승리와 패배라는 한 지점에 모든 것이 쏠려 있는 현재의 상태를 의심한다. 지난 대선에서 패배하여 이명박을 대통령으로 만든 것은 심각한 패착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노무현은 대선에서 졌기 때문에 임기 내내 기득권 보수 층의 집중 포화를 받았던가? 대선에서 졌기 때문에 평검사들에게 도전 받고, 탄핵의 직전에 몰리고, 나중에는 일반 국민들에게까지 바보라고 놀림 받으며 세상의 모든 부정적인 일이 놈현때문이라는 비아냥을 들었던가.


 


요컨대, 설사 다음 대선에서 진보/민주 진영이 박근혜라는 대마를 상대로 승리한다 한들, 그 결과는 모든 상황을 노무현 정권 탄생 때의 상태로 되돌려 놓은 것에 그친다는 것이다. 거기서부터 기득권층과 우익의 십자 포화 속에서 똑 같은 싸움을 다시 시작해야 하는 거다. 노무현을 겪었기에 이번에는 다를 것인가? 현직 대통령을 별 것도 아닌 것으로 탄핵하려 했던 그들이다. 그것을 저지한 것이 과연 헌법재판소였을까? 천만의 말씀. 시민의 힘, 촛불의 힘으로 저지한 거다.


 


이렇듯, 자본과 권력으로 무장한 기득권층 및 보수 우익과 대항할 수 있는 진정하고도 유일한 힘은 정치권이 아닌 시민에게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노무현의 말대로 이 시민의 힘만이 진짜 민주주의를 가져올 수 있고, 또 유지할 수 있는 마지막 보루다. 그러나 선거는 그것에 가까워지는 방법 중의 하나에 불과하며, 궁극적인 답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새로운 대안들을 찾아 나가야 한다. 그 지점에까지 생각이 미쳐야 다시 이 꼴을 당하지 않을 수 있다.


 


내년 지자체 선거를 앞둔 상황에서 민주 진보 세력의 연대는 필요하다. 이와 관련하여 단일 후보의 성사가 핵심 과제로 거론되고 있고, 그런 노력에 굳이 반대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여기에 대한 형식적인 집착 또한 현실주의의 외피를 쓴 관습적이고도 기계적 접근은 아닌가? 지난번에도 지적했지만, 유시민의 구상처럼 이 네 세력이 지도부의 통솔 하에 전국의 수백 개 선거구에서 단일 후보를 내어 한나라당과 1:1의 대결 구도를 만드는 것이 과연 실현 가능한 접근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크다.


 


그렇게 본다면 이런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현 단계에서 조금씩 적용 가능한 다양한 구체적인 방법론 중 하나가 직접민주제적 접근이다. 예컨대 지난번에 언급했던 박원순의 국민공천제는 우리가 발상의 전환을 통해 시도해 볼 수 있는 무엇이다. 그리고 어쩌면 이 방식이 다수 정당 대 다수 정당의 단일화보다는 오히려 쉽게 단일 후보를 낼 수 있는 자연스런 방법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런 과정에서의 큰 이점은 잘만 한다면 (풀뿌리 혹은 직접) 민주주의를 겨냥한 참신하고 새로운 시도라는 점에서 노무현을 대통령에 당선시킬 때와 같은 열정을 불러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잘 건사하면 대선에까지도 연결될 수 있는 민주적 열정과 역량으로 승화될 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이번 선거에의 적용 문제와는 별개로라도, 앞으로 민주주의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노무현의 천운을 그 에너지를 그대로 살린 채로 천운이 아닌 조직된 힘으로 바꾸어 가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지 않고 과거의 룰로 게임을 계속한다면 우리는 결국 또 진다. 잠시 이겼다가도 또 지고 만다. 모두 경험했던 대로 말이다.


 


지난 2005, 유시민은 정혜신과 최창집에게 보내는 공개 편지에서 우리 모두는 앙시엥 레짐(Ancient Regime)의 자식이다라고 선언한 바 있었다. 그 글의 맥락과는 다르지만 위원은 그 말에 동의한다. 현재의 구조 하에서는 모두가 구체제의 자식들일 뿐이다. 그러나 그 속에서는 스스로가 만든 틀을 넘어서는 혁신적인 사고를 하지 않으면 그것이 구체제라는 것조차 이해할 수도 인정할 수도 없다.


 


노무현의 실패를 딛고 새로운 세상으로 나가기 위해서는 과거의 고정관념 하에서 그의 싸움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초월한 새로운 싸움을 해야 한다. 현실적이고 비현실적이고 구체적이고 관념적이고의 문제를 떠나, 그러지 않으면 현재 이 나라의 토양 하에서 진정한 민주주의는 이룩될 수 없기 때문이다.


 


당장 기존 제도를 모조리 뒤엎고 대통령제를 부정하고 국회를 해산하여 직접민주주의를 이루자는 말이 아니다. 한 걸음씩 준비하면서 가는 거다. 그런 의미에서, 당장의 지자체 선거도 그렇지만 특히 2012년의 총선과 대선은 반드시 직접민주제적 철학을 갖고 가능한 접근들 속에서 준비하고 또 치러야 한다. 현재의 제도 하에서도 공천, 경선, 선거 운동 과정에서 이를 도입할 수 있는 요소들은 얼마든지 있다.


 


이런 노력들을 통해 새로운 제도로의 접근은 물론, 패배나 승리의 결과와 상관없이 이후의 상황에 전략적으로 대비할 수 있게 된다. 지금처럼 일단 선거에서 이기면 밑도 끝도 없이 흥분하고 지면 스스로 지리멸렬하는 것이 아니라 선거전에서의 힘과 열정을 가급적 그대로 유지하면서 정부를 지원하거나 견제하는 조직된 시민으로 남아야 하는 거다.


 


아니면 우리는 설사 이긴다 한들, 결국은 다음 대통령마저 부엉이바위로 보내 버릴 것이다.


 


 


 




보수가 강한 이유는 인간의 이기심과 욕망의 본능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자연법칙이 그들이 편에 있다. 반면 진보에게는 그런 동물적인 추동력이 없다.


 


따라서 진보가 그에 상응하는 에너지를 얻기 위해서는 보수의 현실주의를 본받는 것이 아닌, 진보의 이상을 믿고 그에 맞는 스스로의 독창적인 길을 찾아 가야 한다. 비현실적이 되자는 뜻이 아니라 진보에 맞는 현실을 능동적으로 창조해 가야 한다는 거다.


 


아홉친구님의 지적처럼 우리는 역사 이래로 늘 같은 세상에 살고 있다. 그러나 그게 바로 미실의 세상과 동의어다. 지금껏 그래왔다고 해서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면, 또 이를 총체적으로 극복하기 위한 새로운 목표를 찾지 못한다면 진보는 보수의 강력한 추동력에 밀려 결국 허무 속에서 서서히 소멸해 갈 것이다.


 


진보는 이상을 먹고 살기 때문이다.


 


 


요즘 열심히 하는 트위터(patoworl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