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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숭이 섬의 비밀

2009-12-17 2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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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12. 21. 월요일


필리온


 



 


1. 게임에 대한 나의 기억


 


초등학교 6학년 때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느 날, 난 컴퓨터 잡지의 게임 순위에서 이런 이름을 발견했다. '원숭이 섬의 비밀, 장르: 어드벤처'. 아래에 설명이 붙어 있었다. '해적이 되려고 카리브해의 한 섬을 찾은 풋내기 소년의 모험 이야기!' 환상을 좋아하는 초등학생에게, 그 문구가 얼마나 매력적으로 보였겠는가?


 


마음에 걸리는 것은 딱 한 가지였다. '어드벤처' 라는, 처음 보는 장르. 당시 페르시아의 왕자와 같은 액션 게임만 접해보았던 나에게, '어드벤처' 라는 장르는 생소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adventure'의 뜻이 '모험'임을 알게 되자, 당장 그 단어는 나에게 마법처럼 설레임과 두근거림을 전해 주었고, 결국 난 디스켓 여덟 장이라는 거대한 용량의 게임을 큰 마음 먹고 카피하게 되었다. (8천원이면 당시의 초등학생에겐 엄청나게 큰 부담이다.)


 


여담이지만, 당시는 패키지화된 게임이 거의 없었다. 그나마 외국에서 만들어진 이런 게임들은 아예 판권 계약이 이루어지지 않아 국내에서는 판매되지 않았다. 그래서 이런 게임을 구하기 위해서는, 조그마한 컴퓨터 샵 등에서 디스켓에 게임을 카피해오는 수 밖엔 없었다. 한 장에 1000원씩 정도 내고 말이다. 그나마 찾던 게임을 찾으면 운이 좋은 것이다. 아예 게임을 찾을 수가 없어 돈을 주고도 못 구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지금이야 인터넷에서 검색해보면 세상 무엇이든 나오지만, 당시에는 통신망조차 거의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그때는 내가 어떤 새로운 장소에 가거나 하면, 가장 먼저 찾곤 하는 곳이 바로 컴퓨터 샵이었다. 혹시 내가 찾는 게임이 없을까, 설레는 마음으로.


 


아무튼 어렵사리 게임을 구입했고, 플레이를 하게 되었다. 그리고 바로 게임에 빠져들었을까? 그건 아니었다. 불행하게도 이 게임은 상당 수준의 영어 실력을 요구했다. 'sea'가 바다인지, '보다(see)' 라는 동사인지 헷갈리던 나로서는... 도무지 뭐가 뭔지 하나도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서도 나는 정말 나름대로 재미있게 게임을 즐겼다. 무슨 말인지 전혀 알아듣지 못하면서도 대화를 이끌고 퍼즐을 풀어내며 이야기를 끌어냈다. (지금 생각하면 참 미련했다.) 하지만 역시 영어를 모르고는 한계가 있었다. 어느샌가 막혀 버린 후로는 더 이상 게임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 와중에도 8천원이라는 거금을 투자한 가치가 충분할 만큼 재미있었다는 기억이 남아 있는 걸 보면,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다시 든다.


 


고등학교 시절을 지나, 대학에 진학했다. 어느 날, 무료해서 천리안 자료실을 뒤지다 문득 '원숭이 섬의 비밀'을 발견했고, 곧바로 어릴 적 두근거리던 기억을 되살리며 게임을 다운받았다. 그리고 다시 플레이를 시작했다. 내가 진정으로 이 게임의 맛을 느끼기 시작한 것은, 바로 그때부터였다.


 



2. 게임에 대해서


 


이 게임의 최대 특징은 황당하다 못해 엽기적이기까지 한 유머들이다. 혹시 '멋지다 마사루'라는 일본 만화를 읽어보셨나? 이 게임은 간단하게, 미국판 '멋지다 마사루'라고 생각하면 된다.


 


내용의 전개에 있어 개연성은 철저하게, 의도적으로 무시된다. 혀를 내두르게 하는 상상력을 통해, '와, 말도 안 돼'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정말 기가 막힐 만큼 황당하게 내용이 이어져 나간다. 그 황당한 내용 전개 속에서 기발한 유머들이 숨쉴 새도 없이 터져 나오는데... 보고 있으면 대단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이 화면은 주인공 가이브러쉬가 사납게 짖는 개들을 재우는 씬이다. 숲에서 꺾은 꽃을 고기에 섞어서 개들에게 던져 주면 개들이 고기를 뜯어먹고 잠이 든다. 그런데 여기서 전혀 예기치 못한 '중요 공지'가 뜬다. 내용은 직접 읽어보시라...


 



정말 능청스럽다.


 


저 공지가 없어도, 저 개들이 죽었다고 생각할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중요 공지라고 이름은 붙어 있지만, 이는 진지한 공지가 아니다. 말하자면 '저는 건전한 게임이에요!' 라면서 익살을 떠는 것이다.


 


이런 능청스러움은 게임 전체를 지배한다. 주인공과 여주인공의 만남은 마치 삼류 로맨스 영화처럼 익살스럽게 과장되어 있으며, 마지막 장면에서 악의 근원인 해적 선장 리척을 처치하는 방법은 허탈하기까지 하다. (직접 해보시라.) 조금 전에도 말했지만, 이 게임은 개연성을 용납하지 않는다. 조금만 상황이 진지해지려고 하면 곧바로 뒤통수를 때리는 황당한 설정과 함께 상황을 엎어 버린다. (하긴 주인공 이름부터가 Guybrush Threepwood 이니...)


다음의 스크린샷도 그 일부이다.


 



이렇게 사랑스러운 녀석을 어떻게 내가 팔 수 있겠어?


 


주인공이 배를 샀다. 오른쪽의 저 친구는 배를 파는 스탠이라는 친구다. 지금 저 친구가 말하고 있는 것은 대충 이런 것이다. '저 배는 너무 멋지다, 아, 보고 있자니 내가 배를 판 것이 후회된다. 저 녀석은 내 보물인데! 팔기 싫어졌어! 거래를 취소하고 싶어! 다시 배를 돌려줘!'


 


그리고 그 다음 씬.


 



별똥별이 떨어지면서 돛대가 무너졌다 -_-


 


약 3초 간의 정적이 흐른 후, 스탠의 말이다. '어쨌든 거래가 끝난 건 끝난 거다, 그렇지?' 참고로 이 배는 게임 진행 도중 단 1cm도 움직이지 않는다. 주인공이 이 배에서 목적지에 도달하는 방법은 배를 타고 가는 것이 아니라 배에 있는 대포에 들어가 직접 포탄이 되어 날아가는 것이다.


 


그렇다. 이 게임은 그런 게임이다. 이런 황당무계한 설정이 중간중간 등장하는 것이 아니다. 아예 이런 설정들을 동인으로 해서 이야기를 이끌어 나가는 것이다. -_-;; 이런 황당한 설정들은 게이머로 하여금 웃음을 멈출 수 없게 한다.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역시 '원숭이 섬의 비밀'의 백미는 칼싸움이다. 칼싸움 역시 우리가 생각하는 페르시아의 왕자 풍 칼싸움이 아니다. (그래픽 연출은 비슷하지만) 칼솜씨를 겨루는 것이 아니라, 입심을 겨루는 것이다! 너무나 '원숭이 섬의 비밀' 다운 이 칼싸움은, 바로 재치 싸움이다. 주인공과 해적이 주고받는 몇 개의 대사를 보면 정말 탄성이 흘러나온다.


 



이 질문의 대답은 'So you got that job as janitor, after all.'


 


질문: 다가가기만 해도 사람들은 내 발 밑에 쓰러지지!
대답: 니 입냄새를 맡고?


질문: 난 무시무시한 투쟁을 통해 이 얼굴의 흉터를 얻었다!
대답: 이제는 콧구멍 후비는 법을 터득했나?


질문: 이제 기저귀는 안 입겠지?
대답: 왜, 하나 빌리려고 했었나?


 


대충 요런 것들. 



말싸움에서 세 번 밀리면 칼을 떨어뜨리게 된다. 그런데 패했을 때의 상황도 재미있다. 말로는 죽인다 살린다 하지만 칼을 떨어뜨리면 'UNCLE! UNCLE!' 이라는 비굴한 대사를 내뱉는다. 또는 'Look behind you! a three headed monkey!' 라고, 게임 내에서 위기 상황에 처했을 때마다 종종 쓰곤 하는 치사한 대사도 사용한다. -_-; 정말 깜찍하지 않은가?


 



뒤를 봐! 머리 세 개 달린 원숭이가 있어!


 


표정이 참... 저 작은 픽셀로 저런 표정을 표현한 것도 굉장하다.


 


정말 압권은 게임 후반부에서 이 대사를 썼을 때의 상황이다. 후반부의 무대가 되는 Monkey Island에서 주인공은 식인종을 만나게 된다. 도망칠 곳이 없어 궁지에 몰린 주인공은 몇 번 써 왔던 이 대사를 또 쓴다. 'Look behind you! a three headed monkey!' 일단 한 번은 이 말이 통해서, 식인종들은 뒤를 돌아보게 된다. 하지만 주인공이 도망치려고 하면 다시 돌아서 주인공을 붙잡는다.


 


그 다음에 다시 'Look behind you! a three headed monkey!' 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게 말하면 어떻게 될까? 다음 스크린샷을 보라. 


 



...


 


진짜로 머리 세 개 달린 원숭이가 등장한다. -_-;


 


이 식인종들한테 '이봐, 당신들 뒤에 정말 머리 세 개 달린 원숭이가 나왔다니까?' 등의 말을 해도 믿어주지 않는다. 게임 속이지만 정말로 당황스러웠다. 기다리면서 화면을 보면 저 원숭이는 유유히 손에 들고 있는 바나나를 까먹기도 한다.


 


원숭이 섬의 비밀에는 이런 포복절도케 하는 유머가 곳곳에서 터져나온다. 게임을 하다 보면 가끔씩은 배를 잡고 웃기도 하고, 가끔씩은 피식거리며 웃음을 흘리기도 하고, 가끔씩은 정말 허탈해서 실소하기도 한다. 웃음이 터져나오는 적절한 타이밍, 그것이 다소 난이도가 높은 이 게임을 끝까지 붙잡고 늘어질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다.


 


 


3. 리뷰를 마치며


 


사실 어드벤쳐라는 장르는 보통 사람들에게 생소하다. 그리고 지금 게임계에서도 어드벤쳐 게임은 주류보다는 매니아 취향으로 흘러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어드벤쳐라는 장르는 그렇게 묻혀 버리기엔 너무 아깝다. 리뷰를 쓰면서 계속 망설였던 것이, 사실은 훨씬 재미있는 게임이 내 조악한 글솜씨 때문에 재미없게 보이지 않을까, 리뷰라고 한 것이 오히려 해가 되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글을 쓴 이유는, 역시 재미있는 게임을 같이 즐기고 싶은 마음 때문이다.


 


긴 글 읽어주시느라 너무나 수고 많으셨다. 정말 감사하다. 이왕이면 게임을 다운받아 플레이도 해주시면 더욱 감사할 것이다. 다음에 올라올 리뷰도 읽어 주시면 정말정말 감사할 것이다. 내 글을 읽어주는 당신에겐 행운이 함께하고 자손만대 번창할 것이다. 농담이고, 어쨌든 읽어보고 재밌겠다 싶으면 한번 해보시라. ^^ 게임이 막히더라도 걱정하지 말라. 리플 달아주시면 친절하게 답해드리겠다. (혹은 우수한 누군가가 대신 친절하게 답해드릴지도 모른다...)


 


 


* 이 게임은 ScummVM을 사용하는 것이 가장 좋다. 자세한 사항은 아래 링크를 참조하시기 바란다.
* 게임 다운로드 : Monkey16.zip
* ScummVM 한국판 공식 사이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