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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부 문제 합의에 대해 박근혜 대통령은 “피해자 분들과 국민들께서도 이해를 해 주시기 바란다”고 하셨다.


나는 이 ‘이해’라는 단어가 눈에 거슬렸다. 차라리 ‘답답하지만 어쩔 수가 없다’고 했으면 모르겠다. 이해해달라니. 이해라는 단어는 어떤 문제의 앞뒤관계나 조건 상황에 대해 충분히 인지한다는 전제 하에 나오는 단어다.


우리는, 아니 일단 ‘이해해달라’는 우리 정부는 위안부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가?



위안부 피해자 숫자는 알고 있는가?


현재 위안부 피해 숫자는 일본 학자들이 ‘암산’한 숫자에 불과하다. 당시 중국이나 동남아 전선에 나간 일본군 총 병력이 300만 명(현재 밝혀진 바에 따르면 병력 360만 명, 군속 300만 명, 도합 660만 명 정도로 추정된다) 정도 되니까 병사 100명, 50명, 혹은 30명 당 1명 꼴로 위안부가 있었을 것이다. 또 위안부도 계속 병사를 받을 수 없으니 교대를 해야 하는데, 그 교대 인원이 얼마나 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그래서 나오는 숫자가 최소 3만 명에서 최대 41만 명이라는 숫자다.


여성가족부 산하에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e역사관”이라는 게 있다. 아마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운영하는 곳이라 여겨진다. 그곳에도 역시 3만 명에서 40만 명까지 다양한 의견이 있다고만 적혀져 있다. 한 마디로 정부 차원에서 연구가 전혀 안 돼 있다는 것이다.


연구가 조금이라도 돼 있다면 ‘여러 의견 가운데 당시 상황이나 위안소 숫자, 피해자 증언, 일본 측 자료 등을 종합해 볼 때 최소 얼마에서 최대 얼마 정도로 추산한다’라도 쓸 수 있다. 혹은 ‘최소 얼마 이상은 된다’고 말할 수 있다. 홈페이지는 일본 학자들이 나열한 수치만 언급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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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죽었는지 짐작하고 있는가?


'죽은 것'과 아무리 피폐해지더라도 '살아서 돌아온 것'은 천지차이다. 또한 죽었더라도 전염병 따위로 죽었는지 아니면 일본군이 학살을 한 것인지에 따라 또 차이가 있다.


위안부의 생존율은 25%에 불과했다는 연구가 있다. 1965년 어느 일본 자민당 정치인은 14만 5000명의 조선인 성노예가 죽었다고 하기도 한다. 만약 이 중에 상당수가 사실이라면 얘기는 완전히 달라진다. 성노예로 했을 뿐더러 다수를 학살까지 했다면 이는 엄청난 것이다. 


올해 8월 8일 KBS 뉴스에서 위안부 학살에 대한 간단한 사례를 보도한 적이 있다. 중국인 증언에 따르면 윈난성에서 조선인 위안부 십여 명이 일본군에게 총살됐고, 조선인 위안부 수십 명이 사살된 장면이 담긴 연합군 측 사진도 있다고 한다. 이런 사실을 알고 있는지, 이런 것에 대해 일본 측에 정식으로 제기한 적이 있는가?



마지막으로 진상을 규명하려 얼마나 노력했는가? 


과연 지금 새로운 사실을 밝혀낼 수 있을까? 가능하다. 필자는 경남에 있다. 경남 밀양 출신으로 악랄한 친일반민족행위자 박춘금에 대해 자료를 볼 일이 있었다. 1920년대 일본에서 친일 깡패 조직인 상애회를 결성하고, 일본으로 넘어오는 조선인 노동자·여공에 대한 생사여탈권을 쥐었다. 마음에 안 들면 바로 사창가에 팔아 버렸다. 상애회는 일본 당국의 비호 아래 총기로 무장하고, 조선인 노동조합이나 좌파 단체들을 공격해 여러 명을 살해하고 수많은 인명피해를 냈다. 박춘금은 이 공으로 일본 재선 국회의원이 됐다. 일제시대 유일무이한 조선인 국회의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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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춘금


1930년대까지 상애회는 조직이 유지됐고, 한때 조직원 숫자가 10만 명에 달했다. 상애회는 이름만 바뀌면서 계속 유지됐고, 상애회-일본 사창가로 이어지는 성노예 루트는 위안부 초기 공급루트와 비교해 보면 분명 연결고리가 나올 것이다.


일본은 위안부 문제를 희석시키기 위해 줄곧 ‘초기 위안부는 일본인이었고 전체 위안부 가운데서도 10~20%는 일본 본토인이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초기에 위안부로 끌려 온 사람은 일본 본토 사창가 가운데서도 가장 하층계급부터 끌려왔을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일본 본토 위안부 가운데서도 일본에서 일하다 일본 사창가로 팔려온 조선인 여공일 가능성이 있다. 논문 한 편으로도 이런 추론이 가능하다. 작심하고 뒤진다면 아직도 남아 있는 진실이 많을 것이다.


앞서 말한 여성가족부에서 만든 위안부 공식 사이트를 뒤져봤다. 2000년대 이후 위안부와 관련된 활동 중 단 한 건도 추가적인 연구나 자료조사 사업은 없었다. 무슨 시의회에서 결의안을 통과했니, 외교부 장관이 무슨 발언을 했니 그런 건 많지만 자료를 모으거나 연구를 위한 활동은 전무했다. 사실 정부가 한 건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증언을 정리한 것이 거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머지는 모두 민간단체나 일본 포함 해외시민·인권 단체에서 밝혀낸 것이 절대 다수다. 


위안부 가운데 최소 50%, 많게는 70~80%가 조선인이고 그 중에서도 절대 다수는 ‘남선인’ 즉 중남부지역 사람이었다. 우리나라가 가장 큰 피해국인 셈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아는 건 얼마나 되는가? 무엇을 가지고 국민더러 ‘이해’해달라고 할 수 있는가?


사실 어제 발표는 예견된 일이다. 강력한 무기가 되는 실체적인 진실을 알려고 노력한 흔적이 별로 없는 우리 정부가 치밀한 일본 정부의 논리에서 벗어날 방법은 없어 보였다.


앞으로가 더 문제다. 이미 일본 우익 뿐 아니라 우리나라 뉴라이트 계열에서 ‘위안부 강제동원은 없었다’느니 ‘위안부 숫자가 과장됐다’는 주장이 끊임없이 나오고 있다. 그들은 눈에 불을 켜고 그들에게 조금이라도 유리한 자료를 찾으려 지금도 애쓰고 있다. 


필자는 현재 위안부 서술도 많이 축소돼 있다고 생각한지만, 정부가 ‘이미 끝난 사안’이라고 손을 놓고 있으면 머지 않은 미래에 우리 후손들은 위안부 문제가 아주 사소한 해프닝 정도로 기억하거나 아니면 역사 전공자들이나 아는 용어로 전락할 수 있을 것이다.


역사를 규명하는 건 엄청난 노력이 들지만, 역사를 잊는 건 금방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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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종금


편집 : 딴지일보 홀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