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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2.28.월요일


산하


 


나는 매우 과거지향적인 인간이다. 당대보다는 오히려 시간이 좀 흐른 뒤에 그때를 추억하는 것이 더 즐겁고, 피부를 넘어 속내로 받아들이게 된다. 어느 곳에 발길이 닿으면 아 그때 누구랑 여길 왔었지 하면서 잠깐이라도 눈을 감기 일쑤고, 이 골목에는 언제 촬영을 왔었고 누구와 승강이를 했었지 하는 기억이 발걸음을 잡아채는 일이 잦다.   

요 한 3일간 나는 진실로 오랫 동안 까마득히 잊고 있었던 추억 하나를 붙들고 살고 있다.  아주 옛날 "호돌이와 토순이" 같은 어린이 프로그램에도 자주 등장하여 청아한 목소리를 들려 주었던 별셋 아저씨들의 노래로 그 추억의 주머니를 열어 본다.


 


 "구름이 간다  하늘도 흐른다 피 끓는 용사들도 전선을 간다. 
  빗발치는 포탄도 연기처럼 헤치며 강 건너 들을 질러 앞으로 간다.
  무너진 고지 위에 태극기를 꽂으면 마음에는 언제나 고향이 간다.
  구름이 간다.  하늘도 흐른다. 피끓는 용사들도 전선을 간다........" 



 


이  노래는 드라마 <전우>"의 주제가다. 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익힌 드라마 주제가였다.  받아쓰기 시험 보면 사정없이 틀려나 가던 주제에 이 노래 가사를 외우고 또 익힌 이는 나뿐이 아니었다. 초등학교 1학년 소풍을 갈 때 반 남자 친구들은 이 노래를 합창하면서 걸었고, 소풍 장소에 도착해서는 솔방울을 수류탄 삼고 나뭇가지를 카빈총 삼아 투타타타타 입총 소리를 내면서 뒹굴고 비명을 지르고 "돌격~"을 부르짖었다.  

하나 문제가 있었다. 열이면 열 자기가 '소대장'을 맡겠다고 뻗댄 것이다.  심지어 어떤 덜떨어진 녀석이 자기 도시락을 내 주고 소대장을 차지할만큼 경쟁은 치열했다.  초딩 소대장도 일단 감투를 쓴 뒤엔 엄청나게 용감하게 행동했다.  괴뢰군이 던진 솔방울 위로 수류탄이다~~~~를 부르짖으며 배를 깔고 덮쳤고, 지금 생각해도 날랜 몸동작으로 바위와 바위 위를 건너 뛰며 아군의 돌격을 외쳤다. 아이들의 장래 희망 가운데 대통령 다음으로 인기있었던 직업은 바로 "소대장". 그것은 드라마 전우의 나시찬 소대장이었다.  바로 이 분이다. 


 


 


 


이 분은 우리가 소풍을 갔다 온 직후인가 직전인가 기억이 나지 않으나 그 막대한 인기를 뒤로 하고 세상을 뜨셨다.  언젠가 주워들은 얘기에 따르면 그분은 지병이 있으셨는데 워낙 드라마 촬영에 바빠서 제대로 된 치료조차 받지 못하다가 갑자기 돌아가셨다고 한다. 요즘 가수들이 몇 탕을 뛰다가 졸도를 하네 링게르를 맞네 하는 이야기랑은 차원의 차이가 크다. 그들은 자기와 자기 식구들을 위해 "필 받을 때 (돈) 땡기기 위해" 무리를 했지만 나시찬 소대장님은 그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때는 조금만 뜨면 떼돈을 버는 시대가 결코  아니었을 뿐 아니라, <전우>같은 국책 드라마를 찍다가 게으름(?)을 피운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분이 돌아간 다음 드라마 <전우>의 인기는 눈에 띄게 시들었다. 하지만 그냥 썩히기에는 아까왔던지 내가 잠깐 까까머리 중딩이었던 시절 <전우> 시즌 2가 만들어졌다.  이때의 소대장님은 <전우> 시즌 1의 선임하사로 출연했던 강민호씨였다. 


 



 


기억에 남는 스토리 하나는.....최전방에서 부모를 잃은 채 살아가는 한 소년을 소재로 한 것이다.  굶주림에 지친 새까만 얼굴을 하고서도 웃음을 잃지 않던 소년은 부대의 마스코트로서 소대원들의 사랑을 받는데 이 소년이 결국은 인민군의 총에 맞아 죽는다.  전선에서 얼쩡거리던 소년을 발견한 후 "동무 총 가져오라우"라고 아무렇지도 않게 얘기하는 인민군 장교는 <지금 평양에선>의 인민무력부장 오진우로 유명한 이치우씨였다.  인민군은 소년을 정조준하고 왕년의 미군이 한국 민간인 쏘아 죽이던 솜씨로 소년을 사살한다.  그때 강민호 소대장은 필사적으로 기어가 소년을 부축해 보지만 이미 소년은 절명한 상태.  소대장은 분노의 고함을 지르며 온몸을 노출한채 기관단총을 난사한다. 아마도 유명한  M3 기관단총이었을 것이다.


 


기억의 지층 저 아래에 켜켜이 묻혀 있던 <전우>의 추억을 이렇듯 깊숙히 캐낼 수 있도록 해 주신 분은 KBS 사장 김인규씨다. 그분이 오신 다음 맞는 한국전쟁 60주년에 kBS가 세상에 이 <전우>를 리메이크해 주신다는 반가운(?!) 소식이 날아든 것이다. 나의 고마움과는 별도로 의아함이 치미는 것은 <전우>가 절찬리에 방영되던 시대에 대한 떨떠름함 탓이리라. 한국전쟁 60주년을 맞아 공영방송 KBS가 야심차게 내미는 작품이 그래 <전우>란 말인가. 

<전우>의 인기는 상당 부분, 꺼진 불도 다시보고 의심나면 신고하여 한 마리면 3천만원 최고는 5천만원, 우리 모두 간첩 잡아 수표 한 번 만져 보며, 간첩은 표시없어 3천만이 살피고, 때려잡고 초전박살하며, 괴수 김일성이 시청 앞 광장에서 불질러지던 시대에 기반을 두고 있다. 나시찬 소대장님의 용맹은 괴뢰군들 앞에서 태양과도 같은 빛을 발했고, 괴뢰군들의 매복 공격으로 픽픽 쓰러져가는 국군을 보며 분노의 주먹을 부르쥐었으며, 마침내 역경을 딛고 고지를 점령한 태극기에 열광하면 되는 매우 단순한 시대였고 , 그리고 단순해야 하는 시대였다. 단순하지 않으면 혼나는 시대였다. 혹여 <전우>의 리메이크가 그 시대에 대한 그리움의 결과는 아닐까. 땡전뉴스의 선봉으로 지난 세월 동안의 "편향 방송"을 경계해 온 분께서 취임식 취임사에서부터 들먹이신 <전우>이기에 그 의구심은 더욱 커지고 깊어진다. 

한국 전쟁 회갑을 맞은 해에 또 다시 피도 눈물도 없는 잔인한 인민군에게 맞서는 최수종 소대장 (그렇게 캐스팅됐다는데......)을 보면서 내 아들이 비비탄총을 들고 뚜두두두두 거리고 뛰어다니는 모습을 결코 마주하고 싶은 것은 나의 과민함일까. KBS에 따르면, 이념을 떠나 전쟁의 비참함을 그리겠다는데,  눈 하나 깜짝 않고 거창의 양민들을 죽여 대던 11사단 화랑부대 용사들의 용맹함을 인민군의 잔학무도함과 동등한 수준으로나마 묘사해낼 수 있을까. 인민군을 폭격하는 비행기에 환호 (여기까지는 진실이라고 치고) 하다가 융단폭격의 네이팜탄에 온몸이 타들어가는 민간인의 모습을 담아낼 수 있을까.  

<실미도>에서 강간을 저지르고 맞아 죽는 특수부대원이 악이 받쳐서 부르는 "적기가" 마저 음악으로 덮어 버리는 공영방송에서, <웰컴 투 동막골>조차 빨갱이 영화로 몰아부치는 사람들이 이제야 KBS가 바로 선다고 헤벌쭉거리는 시점에서, 우리의 <전우>는 과거와 동떨어진 휴머니즘 작품으로 우리 앞에 돌아올 수 있을까. 아 유 수어?  엠 아이 슈어?  

이왕 추억에 젖은 김에 김인규 사장님의 다음 역작을 기대해 본다. 김정일 역으로 인생 역전을 이룬 탈랜트 김병기씨를 다시 기용하고, 강호동을 김정남으로, 이승기를 김정철로 캐스팅한 <지금 평양에선>이 될 수도 있을 것이고, 드라마 <추적>에서 단골로 간첩으로 나왔던 백윤식씨를 수사반장으로 기용하여 "남한에 고정간첩 5만명이 있다"는 개같은 소리가 난무하는 요즘, 국민들의 안보 의식을 고취하는 <추적> 시즌 2를 선보일 수도 있겠다. 

다시 한 번 추억의 사이렌이 울린다. "피양서 왔시다. 공화국 수도 피양." 을 느물거리면서 독침을 날리고 권총을 쏘아대던 악당들과 그들을 목숨 걸고 쫓는 중앙정보부 요원들 (내지는 대공과 형사들)의 그 절박한 대결은 얼마나 손에 땀을 쥐었던가.   그 중앙정보부 요원들의 본업 가운데 하나가 사람 몸에 전기공사를 하고 깡통로보트의 고춧가루를 사람 코에 들이붓는 것이었다는 사실은 절대로 드라마 <추적>에 나오지 않았었다.  

추억은 추억으로 남기는 것이 가장 좋다. 헤어진 연인을 추억 속에 묻지 못하고 기어코 그 집 앞을 찾아가서 핸드폰을 눌러댈 때 얻을 것이라고는 스토커 피의자 신분밖에 없듯 말이다. 한국전쟁이 환갑을 맞는 이 시기에 나는 <전우>를 다시 보고 싶지 않다. 나의 정다운 추억을 제발 가만히 놔 두어 주기를 바란다. 소대장님~~~~~  김일병~~~~ 거기 그대로 있어.... 이 종간나 새끼들아.......  수류탄~~~~~ 개새끼들~~~~ 고지를 점령했습니까? 그래 이 일병 훌륭했다~~~~ 아.....  이제 그만 추억의 문을 닫고 싶다.........   

구름은 갔고 하늘은 60년을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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