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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통 전성시대


"유통이란 상품이나 서비스를 생산자로부터 소비자에게 이르게 해 주는 모든 경제활동을 말한다"



좋든 싫든 한국을 대표하는 기업 삼성의 창업자 이병철과 현대의 창업자 정주영과는 공통점이 있다. 선뜻 떠오르지 않는다면 기왕 글로벌 시대를 살고 있는 만큼 조금 더 시야를 넓혀 나이키의 창업자 필 나이트, 코카콜라의 창업자 아사 캔들러, 노스페이스의 창업자 더글라스 톰스킨까지 살펴보자. 이들에겐 모두 같은 공통점이 있다. 이들을 아우르는 공통점은 바로 그 모든 사업이 '유통'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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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현대그룹 시작은 부산에서 시작된 현대토건으로 알려졌지만 사실 정주영이 처음으로 시작한 사업은 바로 일제강점기 신당동에서 시작한 쌀가게 '경일상회'였다. 삼성의 시작은 이병철이 대구 북성로 인근에서 농산물과 별표 국수 등을 판매한 '삼성상회'였다. 정주영은 인근 정미소 뿐만아니라 황해도 연백 등의 산지에서 쌀을 직접 반입해 높은 마진을 남겼다. 일제가 쌀 자유판매 금지, 배급제를 시행하면서 사업을 접었으나 1,000원이나 되는 이윤을 남겼다고 전해진다. (당시 중앙은행 첫 월급이 70원이던 시절) 이병철은 대구 근교에서 생산된 청과물과 포항 등지에서 건어물 등을 매입해 중국과 만주 등에 팔았다. 이렇듯 이 둘은 누군가의 생산품을 가져다 소비자에게 판매한 상인, 즉 유통업자였다. 나이키의 필 나이트는 일본 아식스의 전신인 오니카의 운동화를 수입해 판매했던 '블루리본'으로 사업을 시작했고, 코카콜라의 아사 캔들러는 약제도매상을 하던 중 존 스티스 펨버턴 박사에게 그가 개발한 청량음료의 권리를 2,300달러에 사들여 코카콜라를 시작했다. 아웃도어의 대명사 노스페이스는 창업자 더글라스 톰스킨이 17살에 가출해 알바를 전전하다 유럽의 암벽과 설원을 경험한 뒤 빌린 돈 5,000달러로 유럽의 좋은 장비를 수입해 판 것이 그 시작이다.


앞서 언급한 모든 기업의 역사는 유통의 한 부분인 도매, 혹은 소매를 통해 시작되었다. 그들의 시작은 모두 상인이었고, 이익을 얻기 위해 물건을 사서 파는 '장사꾼'이었다. 그들은 모두 유통을 기반으로 거대한 제조(생산) 그룹을 만들어냈다. 이유는 간단하다. 소자본으로 시작할 수 있고 제조업보다 관리가 쉬우며 운만 따른다면 한 번의 계약으로, 한 번의 구매로 일확천금을 노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산업이 고도화되고 생산물이 넘쳐나면서 산업구조는 더욱 치밀하게 분업화되었고, 생산자와 소비자를 연결하는 유통의 비중이 더욱 또렷해지기 시작했다. 제조업에 비해 상대적으로 위험성이 덜한 유통에 수많은 신흥강자가 속속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는데 그게 바로 세계 곳곳에 체인을 둔 월마트(1962년, 샘 월턴 창업), 테스코(1919년, 잭 코언 창업), 까르푸(1963년, 포니에르&디포레이일가 창업), 코스트코(1983년, 제임스 시네걸&제프리 브로트먼 창업) 등의 대형 할인 유통업체들이다. 그들은 오프라인 대형 유통 업체의 본좌였던 백화점의 아성을 무너뜨리고 왕좌에 등극했다. 현재는 아마존과 알리바바로 대표되는 인터넷 온라인 쇼핑몰이 오프라인 대형 할인마트를 위협하고 있는 형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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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유통 군웅할거(群雄割據)시대에 다소 생소하지만 돋보이는 기업이 있다. 18개국에 9,000여 개의 점포(2015년 3월 기준)를 가진 알디Aldi다. 알디라는 낯선 기업의 명성은 자국 독일에 한정되어 있지 않다. 알디는 매장 평균 면적이 850㎡로 거대하지도 화려하지도 않으나 영국에 진출해 영국 1위, 글로벌 2위 유통기업, 게다가 매장평균면적 4,500~12,000㎡를 자랑하는 테스코에 비해 무려 평균 22% 저렴하게 물건을 판매하며(영국 시장조사기관 AC닐슨) 똥줄을 타들어 가게 하고 있으며, 2001년 진출한 호주에서는 토종 식료품 공급업체인 울워스와 콜스의 간담을 서늘케 하고 있다. 게다가 독일 홈경기에서 글로벌 1위 유통기업인 월마트를 퇴출시키고 미국 어웨이 경기에서는 트레이더 조 Trader Joe’s라는 이름으로 세력을 확장하고 있으며, 세계 최대 시장 중 하나인 중국 진출을 모색하고 있다.


‘하드 디스카운트 스토어 최강자’라는 닉네임을 가지고 있는 알디의 창업주는 독일 최고의 부자임과 동시에 전 세계 유통시장에서 단연 돋보이는 존재이자, 극강의 검소함과 외부에 사생활을 절대 노출하지 않는 은둔의 아이콘이다. 이렇듯 알디 창업주 ‘알브레히트 형제’는 모든 면에서 유통왕으로서 풍모를 갖추고 있다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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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오 알브레히트(1922, 좌), 카를 알브레히트(1920, 우)




알브레히트 형제 Albrecht Brothers


1914년 독일을 대표하는 탄광 도시 중 하나인 에센(Essen)의 허름한 건물 2층에 살고 있던 안나 알브레히트(이하 안나)에게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이 전해진다. 7월 18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세르비아의 전쟁으로 촉발된 제1차 세계대전에 독일이 참전을 선언하면서 남편이 징병 된 것이다. 안나는 생계를 위해 허름한 식료품 상점을 운영하기 시작했다. 인근의 빵 공장에서 빵을 가져다 팔았고, 오크통에 담긴 와인을 병에 따라 팔기도 했다. 4년 동안 지속된 지긋지긋한 전쟁은 1918년 11월 독일과 연합국의 휴전협정 체결로 막을 내렸고 다행히 남편도 살아 돌아왔다. 돌아온 남편이 얼마나 반가웠을지는 두말하면 잔소리. 1920년 형 카를 알브레히트(이하 카를)가, 1922년 동생 테오 알브레히트(이하 테오)가 태어난다. 전 세계 유통업계를 호령하는 알브레히트 형제는 이렇게 세상에 등장한다.


독실한 가톨릭 집안에서 평범한 유년기를 보낸 형 카를은 인근의 고급 식품 판매점인 ‘바일러(Weiler)에서 점원으로, 동생 테오는 어머니의 식료품 상점 운영을 돕고 있었다. 하지만 평화도 잠시, 형제를 기다리고 있던 건 1939년부터 시작된 인류 역사상 최대 규모의 전쟁인 제2차 세계 대전이었다. 아버지가 그러했듯 형제 모두 참전하게 되고, 아버지가 그러했듯 1945년 독일의 항복과 함께 연합군 포로수용소에 수감되어 있던 형제는 무사히 어머니의 곁으로 돌아온다. 1948년 아버지가 사망하자 알브레히트 형제는 어머니로부터 상점을 물려받게 된다. 이렇게 전 세계를 호령하는 하드 디스카운트 스토어 알디(Aldi)의 진짜 역사가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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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브레히트 형제의 첫번째 매장 (에센)




전후 독일 그리고 1961년 알디(Aldi : Albrecht Discount)의 시작


1945년 5월 8일 베를린 공방전에서 패하고, 히틀러가 자살하자 독일은 ‘항복’을 선언한다. 나치즘에 기반해 제1차 세계대전으로 무너진 자존심 회복하고자 시작되었던 인류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전쟁은 그렇게 끝이 났다. 패전국 독일은 전쟁을 치르는 동안 전체 인구의 10%가 목숨을 잃었고, 부채는 국내총생산(GDP)의 200%에 이르렀으며 영토의 1/4을 잃었다. 그나마 남아있던 영토는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에 의해 사이좋게 4등분 되어 분할통치 되었고, 미국과 영국, 프랑스가 합의해 점령 영토를 합쳐 서독이 탄생, 소련의 반대로 동독이 탄생하면서 그 유명한 베를린 장벽을 경계로 분단된다. 2번의 전쟁을 통해 독일 국민의 삶은 궁핍의 정점을 찍었고, 터키와 이탈리아 등에서 이주민들이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러한 전후 독일의 상황에서 알브레히트 형제의 알디가 시작된 것이다.


1948년 어머니로부터 식료품 상점을 넘겨받은 알브레히트 형제는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상점을 운영했던 어머니와는 달랐다. 형제는 원칙을 세웠다. 다름 아닌 ‘다른 상점보다 무조건 더 싸게 판다는 것’이었다.


탄광 도시 출신답게 형제는 상점의 지하에 땅굴을 파서 우유와 버터 등의 식료품의 신선도를 유지하며 저렴하게 판매하기 시작했다. 1950년대부터 냉장고와 냉장시설 등이 보급되기 시작했으나 형제는 최저가 유지를 위해 땅굴을 이용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이때부터 형제는 수요를 예측하기 시작했다. 땅굴을 이용한 보관으로는 한계가 있었으므로 수요를 예측해 필요량만을 공급받아 판매하는 방식을 적용한 것이다. 시설, 재고 등 유통에 필요한 모든 비용을 절감함으로써 최저가를 실현한 것이다. 경제적으로 풍족하지 않았던 고객들은 자연스레 알브레히트 형제의 상점을 찾기 시작했다.


물이 들어오고 있음을 간파한 알브레히트 형제는 노를 젓기 시작했다. 형제는 모든 비용을 절감해 ‘최저가 넘사벽’을 쌓아 올리기 시작했다. 큰 매장, 화려한 인테리어를 배제했고, 직원이 상품을 일일이 진열하는 대신 고객이 직접 집어가게 함으로써 인력을 최소화했다. 그리고 꼭 필요한 식료품과 생필품을 소품종 최저가로 공급하기 시작했다. (사업 초기에는 가벼운 손상을 입은 상품을 매입해 최저가로 판매했다.) 이를 통해 알브레히트 형제의 상점이 곧 최저가라는 인식이 사람들 사이에서 공유되기 시작했다. 더불어 마셜 플랜으로 알려진 유럽 부흥 계획이 미국에 의해 진행되면서 서독의 재건, 경제성장의 바람이 소비를 촉진하기 시작했다. 물도 들어온 데다 순풍까지 불기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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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디의 흔한 매장 풍경



순풍에 돛까지 단 알브레히트 형제는 어머니에게 상점을 넘겨받은 뒤 5년 만에 31개의 매장을 오픈, 연간 매출액 6백만 마르크를 달성했고, 7년 뒤 1960년 매장 수는 10배인 300개로 늘어났고, 매출액은 17배인 1억여 마르크가 됐다. 1961년 알브레히트 형제는 자신들의 건설한 하드 디스카운트 스토어 체인의 이름을 알디Aldi로 바꾼 뒤 정확히 2등분 해 형 카를이 남부지역(Aldi South)을, 동생 테오가 북부지역(Aldi North)을 나눠 가졌다. 형제는 ‘최고 품질의 상품을 가장 싸게 판다’는 철칙은 공유하고 있었으나 결정적으로 ‘담배 판매’를 두고 의견이 갈리면서 둘로 나뉘게 됐다고 전해진다. 물론 매장 및 토지의 소유형태, 냉장, 냉동식품의 공급 등을 놓고 견해차가 있었다고도 한다. 하지만 알디는 주식회사가 아닌 유한회사의 형태로 지금까지도 형제 가족의 재산이나 다름없으며, 운용전략은 행정이사회를 통해, 상품의 매입 역시 두 개의 매입 회사를 통해 일괄적으로 이뤄지고 있다. 이렇듯 알디는 유혈이 낭자한 형제의 난(亂)이 아닌 매우 평화롭고 단순하지만, 합리적인 방식으로 나누어지게 된 것이다.


이렇게 독일 시장을 남과 북으로 나눠 정복한 형제는 해외 진출도 나란히 사이좋게 나눠 진행했다. 형 카를의 알디 사우쓰가 남유럽과 호주 미국에 진출했고, 동생 테오의 알디 노쓰가 구동독과 프랑스, 스페인 등의 동유럽에 진출했다. 형제는 독일 시장을 정복하고 해외 진출을 진행하면 독일을 대표하는 하드 디스카운트 스토어로서의 체계를 더욱 견고히 했다. 매장과 인건비 등의 비용 등을 최소화하고, 경쟁력 있는 소품종(현재 3,500개로 테스코는 45,000개, 월마트는 120,000개의 상품을 취급한다)을 공급하는 기존의 시스템에 철저한 관리와 계획을 통한 자체브랜드상품(PB)의 비율을 90%로 유지, 광고는 체면치레하는 정도로만 진행하고 있으며, 대형 유통업체에 비해 적게 취하는 마진(대형유통업체 18%, 알디 12%)을 통해 가격경쟁력 우위를 확보하고 있다. 1980년대부터 보급되기 시작한 바코드의 도입은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직원들에게 가격을 외우게 해 계산기를 직접 두드리게 했고(2000년이 되어서야 도입했다), 운송차량의 타이어는 홈을 더 파내 오래 쓰도록 했고, 매장에 전화를 놓는 것조차도 오랫동안 금기시되어 왔다.


알디의 성공은 알디만의 종특인 미친 절약만으로 이룬 게 아니었다. 우선 독일의 통일이 그들에게 행운을 가져다 줬다. 1990년 독일 통일 이후 중산층의 세금이 높아지면서 저소득층 중심이었던 기반이 순식간에 중산층까지 확대되었다. 이후 알디는 식료품 외에 다양한 상품들을 취급하기 시작하는데 1995년 당시 무명이었던 메디온을 통해 선보인 자체브랜드 상품인 ‘알디 컴퓨터’를 당시 시세의 반 가격에 공급해 순식간에 완판, 몇몇 지점에서는 남은 ‘알디 컴퓨터’를 놓고 손님들이 난투극을 벌여 경찰이 출동한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리고 자체브랜드상품(PB)의 제조사를 철저하게 비밀로 하자 독일의 한 기자가 끈질기게 조사한 결과 네슬레나 유니레버 같은 글로벌 대형업체인 것으로 밝혀지자 그로인해  ‘값은 싸나 품질이 별로’라는 자체브랜드상품에 대한 인식이 바뀌었다는 일화에, 독일 정부가 매달 발행하는 <제품 평가(www.test.de)> 보고서를 통해 알디의 자체브랜드상품 품질이 글로벌 유명브랜드에 뒤처지지 않는다는 평가 등이 곁들여지면서 알디는 '값도 싼데 품질도 확실한' 독일을 대표하는 국민 마트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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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가가 등장했으니 줄을 서시오



1948년 알브레히트 형제가 넘겨받은 조그만 식료품 상점은 독일은 물론 유럽과 호주, 북아메리카에 이르는 18개국 9,000여 개의 매장을 통해 77조의 매출을 올리는 독일을 대표하는 공룡기업이 되었다. 덕분에 2010년 동생 테오가, 2014년 형 카를이 사망하기 전까지 독일의 최고 부자의 자리는 늘 알브레히트 형제의 것이었다(2009년 독일 매니저 매거진 발표에 따르면 카를이 215억 달러로 부자 순위 1위, 테오가 188억 달러로 부자 순위 2위를 차지했고 포브스의 2009년 억만 장사 순위에서는 각각 6위와 9위에 올랐다)


하지만 유통왕 알브레히트 형제의 강려크함은 비단 그들의 부(富)로 얻어진 것은 아니다. 억만장자가 상상이 안 될 정도의 검소함과 철저하게 자신들을 숨긴 은둔자적 기질이 더해졌기 때문이다.


유통왕 알브레히트 형제를 이루는 3요소. 부자, 검소, 은둔 바로 그것이다.




부자, 검소, 은둔


2009년 당시의 알브레히트 형제의 재산은 403억 달러, 우리 돈으로 약 47조 7백억 원으로 부자 오브 더 부자라 해도 모자람이 없다. 당시 1위였던 빌 게이츠의 400억 달러보다 무려 3억 달러가 더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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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 형제의 위용 (2009년, Forbes.com)



알브레히트 형제는 독일 최고의 갑부임에도 불구하고 검소한 생활을 해 온 것으로도 유명하다. 알디 매장이 화려함 대신 최저가로 승부했듯이 알디의 주인인 형제의 삶도 그러했다. 알브레히트 형제 가족의 결혼식, 장례식 등의 행사들은 외부에 노출되지 않은 채 가족들만의 조용한 행사로 치러진다. 1955년과 1957년, 형제는 자신들의 사업을 시작했던 에센에 각각 평범한 주택을 구입해 50년 이상을 살았다. 집안 복도에서 현관까지 5~6m밖에 되지 않을 정도로 소박한(?) 주택이라 알려져 있다. 1997년, 알브레히트 형제는 2회에 걸쳐 약 7만 마르크(당시 한화 4200만 원)를 들여 가족 장지를 구입하기도 했는데 알브레히트 형제가 장지를 전혀 관리하지 않아 잡초로 무성해지자 참다못한 관리인이 형제에게 경고장을 보냈다. 얼마 후 알디의 트럭이 장지에 도착해 묘목을 잔뜩 내려놓고 갔다. 알브레히트 형제는 장지가 개판이 되든 말든 자신들의 장지를 꾸밀 묘목의 세일 기간을, 그것도 자신들의 알디 세일 기간을 기다렸던 것이다. 형제는 남의 시선에 연연하지 않았다. 테오는 이웃이자 대형 출판사 WAZ의 사장인 귄터 그로트캄프가 연 파티에 자신이 음료를 제공하겠다고 제안한 뒤 알디에서 판매되는 값싼 샴페인을 제공했다. 손님들은 테오의 구두쇠틱함에 놀랐을 테고, 아마도 테오는 당연한 듯 태연했을 것이다.


1971년 허름한 양복을 입고 혼자 운전해 집에 가고 있던 테오가 납치당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도박 빚에 시달리는 변호사를 포함한 2인조 납치범의 소행이었는데, 납치범은 테오의 모습을 보고 억만장자라고 믿어지지 않아 신분증 사진을 대조해 확인한 뒤 납치했다. 납치된 테오는 오히려 직접 인질들과 협상해 자신의 몸값을 깎았으며, 납치 17일 만에 풀려난 뒤 범인을 잡았으나 지불한 몸값(400만 달러)의 절반밖에 찾지 못해 현상금(60만 마르크)을 내걸었고, 법정에서 자신의 몸 값에 대한 세금감면을 요구해 슈퍼 구두쇠의 위용을 뽐내기도 했다.(물론 세금 공제 신청을 독일 법원에서는 거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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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납치사건 직후의 테오 알브레히트



1971년 테오의 납치사건은 가뜩이나 외부에 노출되는 것을 꺼려하는 알브레히트 형제가 더욱 철저하게 외부와 차단하고 은둔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형제의 공식 사진도 1971년에 공개된 것이 유일하며, 언론을 통해 알려진 공식 발언 역시 1953년 “저렴한 가격이야말로 우리의 광고다”라는 카를의 발언이 유일할 정도다. 형제는 지역 단체와 주민들에게 꾸준히 지원하고 있는데 조건은 ‘우리의 지원을 일체 발설하지 않는다’다. 치료비를 후원은 치료비를 후원받은 이가 죽은 뒤에나 세상에 알려진다. 2010년 독일 최고 갑부인 테오의 장례식도, 2014년 카를의 장례식도 모두 치른 뒤에나 가족의 발표를 통해 언론에 보도되었다. 2010년 테오가 사망하기 몇 달 전 한 독일 언론에서는 ‘카를 알브레히트가 90세 생일을 맞이했을 것’이라는 추측성 기사를 내보내기도 했는데, 언론에서조차 생사를 파악하고 있지 못할 정도로 철저하게 세상과 자신들을 차단해 온 형제 은둔자적 기질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렇게 알브레히트 형제는 그들이 이룩한 부와 그에 어울리지 않는 검소함, 은둔자적 기질을 세상을 떠나는 그 날까지 유지했던 것이다.




왕의 시대


월 마트, 테스코, 코스트코, 까르푸. 세계를 호령하는 글로벌 유통기업계의 '판타스틱 포'다. 업계 최강자인 월 마트는 2012년 기준¹ 4,690억 달러로 1,012억 달러 매출을 올려 2위를 차지한 테스코를 가볍게 제치고 왕좌를 유지했다.(롯데쇼핑의 경우 48위) 이에 비해 알디는 730억 달러의 매출로 월 마트 매출의 16%밖에 되지 않으나(전체 순위 8위) 주목해야 할 지표는 바로 성장률과 해외매출비중이다. 성장율은 월 마트(5%)보다 알디가 2.5% 앞서 있으며(7.5%), 해외매출비중에서는 월마트(29.1%)를 압도하고 있다.(알디 59.2%) 알디는 ‘값싸고 품질 좋은 제품을 공급한다’는 철칙과 독일인이 지멘스와 BMW에 이어 가장 존경하는 기업으로 꼽는다는 기업의 이미지(조사기관 Gfk), 거기에 검소한 은둔자 알브레히트 형제의 존재감이 더해 빠르게 시장을 확대해 나가고 있다. 


하지만 세상엔 공짜란 없는 법. 이제 이쯤에서 던져야 할 질문이 있다. 알디가 만들어낸 최저가의 함정과 희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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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디 할인판매 이면의 문제점을 지적한 쥐드도이체 짜이퉁(Sueddeutsche Zeitung)지 기사



생활용품숍 다이소 관계자는 한 매체와의 인터뷰²에서 경쟁사보다 최대 20% 정도 저렴한 알디의 가격에 대해 묻자 “20%는 불가능에 가깝다. 제품가에 2.5~3% 정도의 물류비와 20%가 넘는 인건비가 들어가는데 이것을 줄이는 것은 철저히 그 회사의 능력이다”고 답했다. 알디가 공식적으로 내세우는 최저가 실현 프로세스는 최소한의 품목을 취급해 단순화하고 집중도를 높이는 것, 자체브랜드상품(PB) 비율을 최대한 높여 브랜드의 거품을 빼는 것, 매장 면적, 인테리어 비용, 물류비용 심지어 광고까지 모든 비용을 쥐어짜 절약하는 것 정도다. 하지만 동종업계 관계자들마저 혀를 내두르는 최저가의 비밀은 바로 인건비에 있다.


유통과 같은 상거래에서 인건비가 차지하는 비율은 보통 매출액의 15~35%다. 하지만 알디의 경우 2.5% 정도 되는 것으로 추정된다. 알디의 모든 매장은 최소한의 인원(매장 평균 3명)만 고용되어 운영된다. 고용된 인원은 계산과 물품 정리, 청소 등 모든 일을 해야 한다. 그로 인해 초과근무가 빈번하게 발생할 수밖에 없는 것은 자명한 일. 2000년 가을 프랑스 노동조합은 알디의 사원들이 초과근무 수당도 없이 최고 60시간까지 일하고 있다고 폭로했으며, 같은 해 알디 아일랜드 지점 직원들의 초과근무를 강요당하고 있다고 말한 뒤 5명이 해고되기도 했다. 알디 매장의 여직원들은 오랫동안 '콜걸'로 불려왔다. 전화를 받는 즉시 필요한 일들을 할 준비가 돼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다. 알디의 직원들은 사내 연애 시 상사에게 보고해야 하며, 피어싱은 금지, 수염 역시 환영받지 못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디는 지금까지 노사 간 큰 분쟁이 없었다. 그렇다. 알디에는 노조가 없다. 대부분의 분쟁은 해고로 이어지고 해고 후 알디는 거액의 보상금을 지급한 뒤 침묵의 각서에 서명을 받고 소송을 피한다. 이렇게 강도 높은 일방적인 인력관리가 최저가 실현에 한 몫 단단히 하고 있음을 예상해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에 대해 알디 노쓰의 고위급 관리자는 이렇게 말한다. "임금이 계산되지 않는 노동시간이 다소 있더라도 평균보다 높은 기본임금을 받기 때문에 그 노동시간에도 지급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시사주간지 슈피겔에 따르면 하드 디스카운트 스토어의 가격에 맞춰 우유를 공급할 수 있는 농장은 대형화된 10여 개 정도뿐이라고 한다. 2013년 독일에서만 3,300개의 농장이 문을 닫았다고 한다. 소비자들이 알디와 같은 하드 디스카운트 스토어에서 최저가의 우유를 구매하는 데 따르는 희생이다. 독일 소매상 협회는 2003년 3월 알디를 비롯한 초저가 할인 업체들이 전해에 35,000개의 작은 상점들을 문 닫게 했다는 보고서를 발표했다. 이 보고서가 발표된 날 바이에른 주 농민들은 피켓을 들고 2001년 이후 우윳값이 15%나 하락했다며 항의시위를 진행했다. 뿐만 아니다. 한스 바이스와 클라우스 베르너는 그들이 쓴 [나쁜 기업]을 통해 알디가 태평양 산 작은 새우의 저가 공급으로 인해 동남아시아 일부 해안지역 전체가 새우어장을 탈바꿈했는데, 그로 인해 생태학적으로 아주 중요한 열대우림이 사라지고, 우림에 기반을 둔 마을 주민들의 생계가 위협받고 있다고 고발했다.


'최저가'라는 명목 아래 주변 이웃들의 생계가 위태로워지는 상황에도 불구하고 소비자들은 품질 좋은 최저가 상품에 박수를 보낸다. 납품업체들 사이에서는 알디에 납품하는 것이 축구 선수가 분데스 리가에 진출하기보다 더 어렵다고 표현한다. 동시에 어떻게든 알디의 납품업체로 선정되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알디는 납품업체들과 약속을 어기지 않고, 뇌물, 금품 등 그 어떤 비윤리적 행위도 용납하지는 않는 것으로도 정평이 나 있다. 하지만 그것마져도 '알디만의 혹독한 요구'라는 대가를 필요로 한다. 살아남기 위해 알디의 납품업체가 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독자들은 이러한 사실들에 대해 전혀 놀랍지 않을 것이다. 우리 주변에서도 늘 볼 수 있는 흔한 일이기 때문이다. 독일을 대표하는, 그 바닥에서는 독일을 상징하기도 하는 알디라고 해서 다를 바는 없다. 그저 그들만의 고품질, 최저가 방식과 창업주 알브레히트 형제의 검소함과 은둔이란 가쉽으로 인해 덜 주목받았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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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딜가나 다 똑같다



2010년 동생 테오가, 2014년 형 카를이 사망하면서 알디는 시즌2를 맞이했다. 자국에서의 입지를 더욱 견고히 하며, 미국을 중심으로 한 해외 진출을 박차를 가하고 있다. 미국에서의 안착으로 다음 행선지는 중국을 중심으로 한 아시아가 될 확률이 높아진 상황이다. 과연 그들의 성공만큼이나 그들이 꾸준히 지적받았던 문제들을 풀어갈 수 있을 것인가. 적어도 당분간은 '그럴 일 없다'고 보는 게 합당하다. 알브레히트 형제가 남과 북으로 알디를 나누었을 때도 그들의 원칙과 운영은 다르지 않았다. 그리고 알브레히트 형제가 모두 떠난 지금 유산을 두고 벌어지는 막장드라마나 지적받은 문제에 대한 변화 등의 조짐은 찾아볼 수 없다. 알디는 철저하게 가족이 아닌 경영자 그룹에 맡겨져 있고, 경영자 그룹은 오랫동안 알브레히트 형제들과 함께 원칙과 운영을 공유해온, 형제의 유지를 단단히 붙들고 늘어질 이들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독일 언론 슈피겔은 시장 연구자 퀘크의 말을 빌린다.


"알디는 할인매장으로서의 원칙을 포기하느니, 원칙을 지키면서 위엄 있게 몰락해갈 것입니다"


알디는 여전히 그 실체가 명확하지 않다. 알디 사우쓰와 알디 노쓰는 수십개의 회사로 구성되어 있고, 공식적인 전체 기업 재무재표는 공개하지 않는다.(개별 회사들의 재무재표도 기업정보를 공개하라는 독일정부의 압력에 밀려 2003년에서야 공개했다.) 알디는 수시로 매출현황을 체크하지 않는다. '최저가 구현'을 위한 그들의 집중력에 저해된다는 이유에서다. 그들의 수익은 오랜기간 확실했다. 덕분에 은행 대출을 금기시 하는 그들의 방침은 번복된 적이 없다. 상장도 하지 않았을뿐만 아니라 지금도 매장 확대에 필요한 모든 자금은 현금으로 처리한다. 알브레히트 형제의 은둔자적 기질을 그들의 기업 알디도 빼다 박은 것이다. 2010년 사망하기 전 테오 알브레히트는 경영자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의 성공 아이디어를 잊어버리지 말 것을 당신에게 말하고 싶소"


앞으로도 알디는 알브레히트의 형제의 알디와 마찬가지로 변함없을 테고 많은 이들이 알디의 최저가에 환호하고 화답할 것이다. 덕분에 유통왕 알브레히트 형제가 세운 알디 왕조는 당분간 변함없는 모습으로 유지 될 것이다. 누군가의 노동과 누군가의 생계와 누군가의 터전과는 무관하게 말이다. 




(1) Global Powers of Retailing 2013 : 대한상공회의소

(2) 비지니스워치 2015. 03. 18





*참고서적

나쁜 기업(한스 바이스, 클라우스 베르너)

- 단순하게 경영하라 (디터브란데스)

- 소비자의 반란 (마이클 J. 실버스타인, 존 부트먼)

- 세계 슈퍼 리치 (최진주, 문향란, 남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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