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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어디 있는가?

2009-12-25 1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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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2.28.월요일


정치불패 Architect



2009년이 다 지나가고 있다. 바쁘게 지나가는 일상들 속에 묻혀서 시간가는줄 모르고 일만하다, 어느덧 다가온 연말 연휴...


 


회사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차구간 정비공사를 보면서 문득, 우리나라가 생각난다. 우린 어디에 있는가?


 


국제경기의 불안정함에, 어느나라나 국내경기를 부양하기 위해서, 이런 저런 공사를 한다. 프랑스에서 일했을 때는 라데펑스 재건축 프로잭트 일도 했었고, 지금 여기 캐나다에선 지하철과 전차 의 구간 연장 설계를 위해 일을 하고 있다.


 


라데펑스 재건축.. 지금은 흐지부지된 계획이지만, 그 당시 밥먹기 위해 일을 하면서도 참 어처구니 없다 라고 생각되던 계획안이었다. 이미 전체 라데펑스의 사무실 건물은 공실율이 40퍼센트를 넘어 50퍼센트에 도달하고 있었고. 기준층이라고 볼수 있는 거리와 최저 16미터의 고저차가 나는 거대한 성벽과 같이 느껴지던 곳.


 


떨어지는 공실률을 잡으려면, 보다 근본적으로 실물경제를 끌어 올려야 되는데, 실물경제와는 아무상관 없이, 그저 외국의 투자를 끌어오기 위해 별다른 계산도 없이, 정치적 신념만으로 강행시키던 공사.. 결국은 관계당국 관계자가 경질되면서 말만 무성했던 프로잭트가 되어 버렸다. 초기 계획안에 들어간 천문학적 단위의 금액만을 쥐도새도 모르게 써버린뒤.


 


그리곤, 횡단보도에서 전차가 지나가는 소리에 잠시 정신을 추스른뒤, 떠오른건 다름아닌 사대강.


 


사대강.. 사대강이 무엇을 가져올수 있을까?


 


토론토에서 벌어지고 있는 지하철과 전철 구간 연장공사. 뭐, 프로젝트 관리가 아닌, 디자인을 하기에, 사무적인 부분에 깊이 들어가지는 않았지만 업무계획서를 보면 시간당 1000달러씩 받으면서, 보고서도 제출하지 않고, 회의에도 참가 하지 않는 사람들을 보면서 실소가 나오는 건 어쩔 수가 없다. 


 


그래도 전체적으로 보면, 이 공사 하나로 단순히 토건족들 뿐만이 아닌, 기계, 전기, 화학, 섬유 등등 수많은 산업으로의 파급효과를 만들고 있기에 그래서 수천 수만명이 월급 받아서 살 수 있는 기회를 만들기에,, 설사 이름만 올려 놓고 한몫 잡는 소위 토건족 들이 있어도 그려러니 동료들이랑 욕 한마디 하고 말아버린다.


 


영라인 과 블르어 라인 의 두개의 지하철 라인에, 그리고 셰퍼드 와 스케보로우 쪽으로 가는 짧은 라인만을 가지고 있는 토론토 로썬, 지하철과 전철의 구간 연장은 현 경재 위기에 있어서 내수의 부양과 동시에 미래를 위한 투자이기도 한 공사 이기에...


 


그렇다면 과연 사대강 은 무얼 가져올수 있을까? 공사 시작했다고 가끔가다 자랑스럽게 신문에 실리는 형편없는 수준의 공사 조감도를 볼 때면 사실 자연환경의 파괴와 재원의 낭비, 그리고 이름만 올려 놓고 돈만 챙겨가는 토건족들에 의한 소득 불균형만을 가져 오겠구나 라는 생각 이 든다.


 


과학과 철학은 끊임없이 소통을 통한 통합을 이야기 한다. 혼돈이론으로 부터 출발해서, 복잡성 이론과 이머전스 이론으로 발전한 이론은 철학과 사회학 그리고 신기술들을 넘나들며, 소통을 통한 세상의 긍정적 통합이 진리가 될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우리가 사는 현실 세상은 어떨까?


 


적어도 한국은, 능력과 도덕성이 떨어질대로 떨어진 자들이 보수 내지는 우익을 표방하며, 극우적 정책들을 서슴없이 저지르고 있다. 동시에 자신들의 편이 아닌 사람들을 좌익 내지는 빨갱이로 규정지어 버린다. 적어도 한국사회에서 소위 좌익 내지 빨갱이로 불리우고 있는 사람들 중, 처음부터 자신의 정체성을 좌익으로 규정짓고 시작한 사람들이 있을까? 자체적으로 사회주의 이론이 발전한 적도, 그리고 실제로 그 이론데로 고스란히 정책에 반영이 된적도 없었던 한국에서?


 


굳이, 이 소위 좌익 이란 사람들을 제대로 규정 짓자면, 그저 민주사회복지 주의자 들이라 규정해야 함이 마땅할 것이다. 사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민주주의 와 사회주의 를 대립항으로 놓는 것 자체가 이미 이론적 오류이다.


 


생산의 방식인 자본주의와 분배의 방식인 사회주의, 그리고 의사결정의 방식인 민주주의가 서로 조화되어 선순환하는 것이 아닌, 대립항이 된다는 것 자체가 성립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맑스의 자본가가 자본주의로 확대해석된 부작용일까? 아니면 극단적 공산주의와 사회주의의 혼동일까? 그도아니면 보수주의 와 자유주의의 혼동일까?퇴행과 진보의 혼동일까?


 


이도 저도 아니면 어설픈 지식인 내지는 어떤 특정한 놈들(예를 들면 쥐날당 과 그 따까리 학자,,뭐 김똥길이 이문욜이 같은,,) 의 언어적 정의 흐리기를 통한 이론적 농간이자 강간 때문일까?


 


흔히들 사회주의 국가의 모델이다(혹은 이었다) 라고 말하는 프랑스의 경우를 봐도, 어느 누구를 잡고 물어봐도, 자신들은 사회주의 국가가 아닌 자본주의 국가 라고 말한다. 심지어는 지금도 친하게 지내는 녹색당 시의원 조차도, 자신들은 철저한 자본주의 국가이며, 사회주의적인 분배방식을 따르며 민주주의적 의사결정 방식을 따를 뿐 이라고 자신있게 말한다. 또한 자신들의 성향을 보수 내지는 자유주의 로 나누며, 진보라는 말은 이념이 아닌 정치적 과제로 사용이 된다.


 


내 기억이 맞다면, 프랑스 현대 정치에 있어서 진보라는 단어를 정치에 사용한 사람은 자신을 다른 좌익(국회에서 좌측에 위치하며, 동시에 사회적 분배에 중점을 두며 “신 자유시장주의” 를 배척하는 근본적인 좌파의 의미) 들로 부터 구별하기 위해 이 단어를 아주 잠시 사용했던 현역 우체부출신의 정치가 올리비에 브정스노가 유일한 것으로 기억한다.


 


언제부터 우리는 대한민국이란 나라에서, 진정으로 나라의 발전과 다수의 행복을 바라는 민주적 사회복지 주의자에서 좌익, 빨갱이 그리고 좌빨이 되어버려 온갖 자의적이고 악의적인 오명들을 뒤집어 쓰게 된 걸까? 언제부터 모든 언어적 정의가 혼용되버려, 딱히 정체를 밝히기 어려운 애매한 말들이 되어, 귀에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팔목에 걸면 수갑이 되어버리는 정치적 장치가 되어버린 걸까?


 




세상의 이치는 소통을 통한 조화의 통합으로 가는데, 정치는 강제적 통합을 위한 자의적 분리를 향해 나아가는 것 같다.


 


변태 퇴행 매국 친일 신 시장자유주의자 들이라고 밖에 정의할 수 없는 쥐새끼와 일당들은 서슴없이 좌익이란 말을 사용하며, 국민들 속에 딱히 정체를 밝힐수 없는, 하지만 왠지 부정적인 무언가를 심어놓기 위해 부단히들 아가리를 벌려댄다. 심지어는 고정간첩 뒤집어 씌우기 까지 사용해 보려던 것 같았지만, 딱히 실효성이 없자 그만 둔 거 같다.


 


동시에 국민들을 불특정 다수의 서민으로 규정하여, 정치의 보호를 받아야할 사람들 이라는 느낌을 주고, 또한 그럼으로써 정치에 기댈 수 밖에 없는 존재로써 인식을 시키기 위해 별 개수작을 다 떤다. 물론 언론통제등 국민들의 눈과 귀를 실질적으로 막을 수 있는 짓거리 들도 동시에 하면서.


 


선거 당시에는 가짜 이미지를 덮어씀으로써 목적을 달성했다면, 지금은 국민들이 자발적으로 이미지를 만들어 내도록 모든 것을 조정하고 있다. 언어를 혼동시키고, 시선을 돌리며, 의심을 심어 놓고, 근거 없는 믿음을 만들어낸다.


심지어는 극단주의적 기독교 논리를 이용, 일부이지만 다수인 먹사들을 대동하여 종교적 배타성을 정치적 배타성으로 까지 발전시키기도 한다.


 


이러한 혼동과 잘못된 이미지의 자발적 생산이 가속화 될 수록, 정치판은 점점 더 노골적이 되어가며 보다 변칙적이 되어간다. 즉 원칙이 사라지는 것이다.


 


3일 전 예산안을 날치기 했다면, 어제는 무슨무슨 모임에서 누구를 고소하고, 오늘은 검찰이 누군갈 기소하며, 아마도 내일은 ‘30년전 맛봤던 전대가리 똥닦은 국물 맛을 잊지못하는 처녀 총각 학부형 이자 예비역 군 면제자들의 모임’ 같은 놈들 내지는 년들 또는 놈년들이 불쑥 나타나서 총수나 너부리편집장을 고소해 버릴 수도 있을 것이다.


 


자신들이 자발적으로 만들어낸 이미지 내지는 환상에 갖혀있거나, 언어적 정의의 혼동을 겪고 있는 국민들은 이러한 노골적이지만 불규칙한 정치행태에 대한 판단의 기준을 잃어 버린다. 판단의 기준이 흔들리는 것의 진정한 무서움은, 그 옳고 그름의 명확함이 사라지는 것 보다는, 망각의 가속화 일것이다. 마치, 소소한 일상에서 뭐라 판단하기 애매한 일들은 그냥 놔버리고 잊듯이... 오히려 옳고 그름의 명확함은 악의적으로 재구성되어 도구화 된다.


 


이러한 혼동과 혼란은 심지어는 자신들을 좌파로 커밍아웃 한 사람들에게도 적용이 된다. 원칙이 없는 변칙에 적응하다 보니, 내부적 일관성이 깨어지고, 분열하는 것이다. 이미 좌파라는 단어를 사용한 순간, 저들의 놀이판에 한발 담그게 된 것이지만. 여하튼 소위 좌파는 분열함으로써 무너지는 것이 아닌, 이런 식으로 분열되어짐으로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흔히들 혼돈이라 불리우는 상태는 무질서의 상태가 아닌, 다양한 질서의 공존을 말함이다. 이러한 다양한 질서들이 서로 경쟁하고 소통하면서 서서히 자연스럽게 통합되어 모두에게 합당한 개체로 발전하는 과정을 진보라 부르며, 거기에 작용하는 메커니즘을 선순환 이라 부른다.


 


반면, 이러한 혼돈의 상황에서 내부적 균형이 억지로 깨져나가면서 자발적이지 않은 강제적 통합이 되어 조화의 수준에서 낮은 단계의 개체가 발생하는 과정은 퇴화 내지는 변태 라고 부르며, 거기에 작용하는 메커니즘을 악순환이라 부른다.


 


진보란 노선도 아니고 성향도 아니며, 그저 나아갈 방향이다. 언제부터 우리에겐 진보가 대한민국 역사에 존재해보지도 않은 좌파란 이름으로 불려지고, 낙인 찍혀지고, 소위 남들과는 다른 사람이 되었을까? 그저 보다 민주적이며, 보다 공평하고, 보다 더불어 살기좋은 그런 세상을 바랄뿐 인데.


 


경제 역시 극단적인 분열의 양상을 보인다.


 


자본시장은 자본시장대로 독립적으로 돌아가며, 끊임 없이 인플레이션을 만들어대며, 실물시장은 자본과 동떨어져, 자본시장에 의해 묶여 있는 돈의 흐름에 의해, 돈이 부족한 디플레이션 현상을 겪는다.


 


마치 각각 팔과 다리를 한데 묶인 채 양쪽에서 소가 잡아당겨 반으로 찢어지고 있는 형국이다. 잘못된 자본의 흐름에, 물가는 폭등을 하지만, 말라버린 돈의 흐름에 월급봉투는 줄어들기만 한다.


 


갑자기 그린스펀 이란 늙은이가 생각이 난다. 레이건 시절부터 아빠 똘아이 부시, 클린턴, 아들 똘아이 부시 시절까지, 금융시장은 정부의 간섭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를 주구장창 외쳐데다 결국은 청문회에서 “당신이 미국의 경제와 세계의 경재를 위험에 빠뜨렸음을 인정합니까?” 라는 물음에 축쳐진 어깨로 ”예” 라는 말 밖에 할 수 없었던 늙은 시궁창 쥐...


 



 


왜 우리는 지금 이 늙은 시궁창 쥐새끼보다 더 독하고 인면수심의 쥐새끼를 대떵으로 만들었을까?


 




금융시장, 부동산 투기시장이 주는 공짜돈의 달콤한 환상에 모두 빠져버렸던 걸까? 결국은 그 달콤한 환상이 결국은 독이 되어, 우리들의 월급봉투를 얇아지게 만들며, 어린아이들을 굶게 만들고, 가난한 자들을 엄동설한에 내쫓으며, 멀쩡히 잘살던 집을 재개발 이란 명목하에 거리로 내모는 그런 쓰디쓴 현실이 되어 버렸는데..


 


공짜돈에 대한 환상을 무너뜨리기엔 우리가 이미 겪어 보았던 IMF 의 기억만으로 는 부족했던 걸까?


 



 


아니면 여전히 우리가 갖고 있는 잘못된 언어의 혼동 때문인가?


 


죽어라 윤전기를 돌려대도 결국은 내부적 메커니즘에 의해 총량의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는, 자본주의의 돈의 흐름에서, 흔히들 말하는 진보란 의미를 제대로 된 사회적 분배에 의함이 아닌, 모두들 공짜돈 벌어 다들 잘살어 보자 라는 환상으로 이해했기 때문일까?


 


다시 사대강으로 돌아가 보자.


 


이러한 자본과 실물 시장이 극단적인 분리의 양상에서, 제대로 정신이 박힌 고위공무원들, 대통령과 국회의원 등등이 택할수 있는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현실적인 대안은 무엇일까?


 


그건 자본시장에게도 매력적일 수 있으며, 동시에 실물시장의 부흥도 동시에 가지고 올수 있는 방안 일 것이다.


 


그러나 과연 사대강은 무엇인가?


 


실물시장의 부흥을 가져오는가?


 


멀쩡한 유기농 사업장을 쫓아내면서 까지, 꿈에 부풀었던 한 농부를 자살에 이르게까지 하면서, 논과 밭을 잔듸밭과 축구 야구 농구 장으로 바꾸어 버리는 것이 어떻게 실물시장의 부흥을 가져오는가? 거기 농구장 가서 농구하면, 한골당 1000원씩 돈이 들어오기라도 한다는 것 인가?


 


그럼 자본시장의 부흥을 가져오는가?


 


아무리 대한민국 땅을 갈아 엎어서 유원지 처럼 만들어 봐야. 누가 한국의 땅에 집을 짖고 살겠는가? 같은 돈에 프랑스 브르타뉴 나 남부에 집을 짓던지, 아니면 사계절 따뜻한 곳에 집을 짖지.


 


기업도 마찬가지 이다. 실물경제가 죽어나가고 있는데, 누가 와서 투자를 할것인가? 제대로된 투자를 하기보단, 그저 환투기로 한탕하고 빠질 궁리만 하며 잠시 왔다가 사라지는 뜨내기 자본만이 들어올 뿐이다.


 


라데펑스에 아무리 삐까번쩍한 빌딩을 올려봐야 실질적인 투자를 할곳이 없다면, 그저 빌딩 한채, 땅한조각 샀다가, 눈먼 놈한테 프리미엄 붙여 팔아먹고 손털면 그뿐이다. 뒤통수 쳐맞은 눈먼 놈은 어디 하소연 할 수도 없다. 어찌되었던 법적으로 문헌적으로 정당한 거래였기 때문이다.


 


개미란 동물들을 보자, 많은 과학자들이 개미의 사회를 이상적이라 부른다. 그 이유는 개미는 소통하는 동물이기 때문이다. 먹이를 찾기위해선, 먹이의 존재를 먼저 찾은 개미가 다른 개미들에게 페로몬으로 소통을 하고, 그렇게 정보를 나누고 교환하며 먹이를 확보해야만 살아갈 수 있는 존재이다.


 


그 어디에도 왕으로 군림하며, 이거해라 저거해라 지시하는 놈팽이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미의 도시구조를 살펴보면, 인간의 그것보다 더 완벽하게 조직되어 있다. 여왕벌이 아늑하게 알을 날수 있는 곳을 만들며, 그곳을 보호하기 위한 도시구조적 장치들이 존재하고, 심지어는 쓰레기장과 공동묘지까지 정확하게 구획되어 있다. 쓰레기장과 공동묘지가 개미들의 도시에 있어 환경적 문제를 일으키지 않을 정도의 거리를 정확하게 지키며, 동시에 그 접근성을 잃어 버리지도 않는다.


 


하지만 인간사회는 다르다. 개미의 사회는 생산 자체가 분배이다. 생산과정 자체가 분배의 과정과 정확히 일치하기에, 거기에 대한 별개의 장치를 만들 필요가 없다.


 


그러나 인간사회는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에 의해 자본가와 노동자가 분리 되어 진다. 이러한 자본가와 노동자의 분리의 문제에 의해 수많은 학자들이 자본주의를 넘어서기 위한 다른 대안을 생각했지만, 결국은 자본주의를 진정으로 넘어서진 못하였다.


 


뭐 들뢰즈 같은 철학자의 말을 빌어 표현을 한다면, 자본주의는 우리의 사고방식 속에 깊숙히 들어와 있는 기본적인 생활의 방식이기 때문에 자본주의 자체를 바꾸기 위한 대안을 연구하고, 혁명을 바라기 보다는, 제대로 된 분배를 생각하는 것이 보다 생산적일 것이다.


 




 




내가 100원을 부담하고, 누군가 50원을 부담하고, 또 누군가는 내밑에서 일만 한다면, 사업에 있어서 책임의 양만큼, 내가 좀더 가져가야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인지상정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내가 다른 사람보다 좀더 가져가는 것에는, 다른사람의 노동과 아이디어 와 희생이 따르는 것도 당연한 것이다. 이 두가지 측면은 서로 떨어뜨려놓고 생각할래야 생각할 수가 없다. 이것이 생산과 분배의 문제이다.


 


그러나, 들뢰즈 나 가타리의 지적처럼, 어느사이엔가, 인간의 사회는 생산만을 생각하게 되었다. 생산과 분배라는 동전의 양면이 정신분열처럼 분열되어 버리고, 생산에만 집중하게 된다.


 


이러한 분열적 생산 강박의 정점은 바로 불로소득이다. 그저 돈을 굴려서 굴린 돈으로 만들어진 노동 없는 돈의 맛!!


 


자본이 실물로부터, 땀흘리는 노동으로 부터 분열되어 나오기 시작하고, 그에 맞추어 소위 지도자라는 공무원들은 공무원으로써의 자신들의 역할도 망각한채, 오로지 자본가, 불로소득자들의 후장만 빨아재끼게 된다.


 


국민들도 마찬가지이다. 부동산투기, 주식투기, 돈놀이가 주는 공짜생산의 맛에 푹 절어, 자신들은, 자본가이며, 동시에 생산자이고, 동시에 노동자이며 분배자라는, 복잡한 사회에서 오는 복잡한 개인의 역할을 망각한채 오로지 자본가이자 생산자로의 역할에만 집중한다.


 


이름은 잊었지만, 한때 에로소설의 대마왕으로 불리던 어느 소설가의 소설중, 구 소련에서 생산의 욕구에 대한 강박으로 배설마져도 신성한 생산적 쾌감이라 묘사했던 장면이 떠오른다.  


 




가타리가 그렇게도 현대사회는 정신분열적인 사회다! 라고 외친 이유는 여기 있는 것이다. 어떤 국개의원 새끼가 해리가 빵꾸똥꾸라 말하는 것을 정신분열이다 말한 그런 쥐지랄이 아닌.


 




어떻게 보면, 우리가 겪고 있는 언어의 혼동은 바로 여기서 온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오로지 생산에만 집중하다 보니 분배의 역할을 강조하는 사회주의는 생산의 자본주의와 병행하는 분배의 원칙 아닌, 자본주의의 대립항이 되어버리며, 공화당적 정치시스템 에서부터 흘러나온 보수라는 이름의 반대항은 자유주의가 아닌 진보가 되어버리며, 이러한 언어의 혼동은 한국사회에 존재해 보지도 않은 좌파 우파로 대표되어 흐지부지 되어버린다 (뭐 조선시대에 좌와 우가 있었다,, 이런식의 논리는 사절한다).


 


퇴행 내지 퇴보 변태 매국등의, 누구나 말하는 일상적인 단어들은 어느새 정치판을 정의하는 단어장에서 사라져 버린다.


 


쥐박 정권을 보라. 어떻게 이 정권을 정의할 것인가?


 


퇴행, 퇴보, 변태 매국 정권 이외의 다른 단어는 사용할 수도 없을 정도로 썩은 정권이다.


 


이들이 보수인가? 이들이 진보인가? 아니면 이들을 우파정권이라 부를수 있는가?


 


정확한 언어적 정의에 의하자면, 쥐박정권을 표현할수 있는 단어들은, 그저 퇴행 퇴보 변태 매국 등등의 일상의 부정적인 단어들이 전부이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정치판에 적용하기 꺼려하게 된 그런 단어들 외에는 아예 존재하지가 않는다.


 


하지만, 이 쥐박정권을 어떻게 정의하고, 어떻게 부르는 것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로 우리들의 소통이다.


 


소통에 대해서 지금처럼 강조하던 시대가 있었을까? 모두들 소통의 부재를 이야기 하고 소통의 필요성을 이야기 한다. 하지만 왜 소통해야 하는가? 라는 물음에 있어선 그저 관념적인 대답 내지는, 근거 약한 대답만이 나올 뿐이다. 마치 하나의 정언명제 처럼 '우리는 소통해야 되기 때문에 소통해야 된다' 라고 생각한다.


 


다시 개미를 보자. 이들은 분배가 생산이며 생산이 분배이다. 그렇기에 이들에게 있어서 정보의 교환과 소통은 필요가 아닌, 생존의 방식이자 생활의 방식이다. 아니 개미의 삶과 개미 자체가 소통 그 자체이다.


 


과연 우리들이 이 개미들과 다른것이 무엇인가? 우리는 생산을 하는 노동자이자, 소비자이며 동시에 자본가 이다. 이러한 모든면을 동시에 가지고 생산이란 현재를 만들어 내는 구성원이다. 하지만, 결국 우리의 미래는 분배에 의해서 확신을 갖게 된다. 내가 지금 생산한 것이 나의 노후를 보장해주며, 내 자식들의 교육을 보장해 주며, 그들의 가능성을 보다 잘 실현시켜줄것이라는 확신은 현재 나의 생산에 기반하지만, 결국은 제대로된 분배가 결정시켜주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우리가 소통을 해야하며, 잘못된 언어의 정의를 바로잡고, 사물을 보다 넓고 깊게 그리고 현실적으로 봐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을 것이다.


 


어쩌다 이야기가 이렇게 흘러버렸을까?


 


그저 크리스마스 연휴라, 예수교를 믿지않는 나로썬 그저 다를 바 없는 일반적인 휴일처럼 퇴근길에 담배한대 물고, 앞에 걸어가는 어여쁘신 아가씨 몸매에 잠시 정신 놓고 있다가, 횡단보도의 흰색불을 기다리던 중 옆에서 윙크날려주시는 트렌스젠더 횽아의 눈길에 잠시 공황상태에 빠진뒤, 다른데로 눈을 돌리다 눈에 띈 전차구간 확장 공사를 보게되면서 사대강이 떠오르고 쥐박이 정권이 생각나다가.. 그저 어떻게 우리가 여기까지 왔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던거 같다.


 


아마도 이 길고 지루하며 장구하며 정리되지 않은 생각을 통해 내가 도달하고 싶었던 결론은, 결국은 소통인 거 같다. 소통은 관념적인 그런 것이 아닌, 우리의 생존임을..


 


그러기에 쥐박이와 일당들 좆중똥 같은 것들이 이 소통을 막기 위해 잘못된 개념을 흘려 넣으며, 또 가끔은 우리 자신이 만들어낸 잘못된 이미지들에 속으며, 또 가끔은 소위 자신들을 식자라 말하며 뻐겨데시는 지식인들의 잘못된 시각에 의해서 우리는 소통이야 말로 우리의 생존이며, 생산과 분배라는 이 사회의 두 작동방식을 통합할 수 있는 것 임을 잊어버린거 같다.


 



 


원칙이 있는 사회, 상식이 있는 사회는 바로 이러한 소통의 본질을 알게 되는 그런 사회가 아닐까? 어떻게 보면, 먼저 가신 바로 그 사람이 말하고 싶어했고, 그리고 그렇게 말하고 싶어했기에 공부했던 바로 그것이 소통 아니였을까? 세상을 바로 돌게 하는 것은, 한사람의 영웅적 대 서사시적 모든것을 한방에 해결하는 Deus Ex-Machina 같은 뜬금 떨떠름한 행동이 아닌, 바로 소통임을, 소통이 만들어내는 힘 임을, 그래서 모든 이들이 소통은 곧 이 모든이들의 생존이자 미래임을 알길 바랐던 것이 아닐까?


 



 


어쩌면, 우리들은,, 이러한 소통을 잊고, 마치 한 사람이 모든것을 해결해 줄수 있겠지 라는 먼치킨 영웅주의적 환타지 소설과 같은 망상을 가졌기 때문에, 그렇게도 욕하고 씹다가 결국은 죽음에 이르게 만들고, 이제는 히틀러 찜쪄먹을 누군가를 대통령으로, 세상을 구원해줄 다른 하나의 영웅으로 모신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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