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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최대의 야쿠자 조직, 야마구치구미를 성장시킨 요인이 무엇일까? 여러 가지 답이 있겠지만, 그 중 하나는 든든하고 미더운 '시노기(シノギ)', 즉 '수입원'에 있었다. 아니, 초대 쿠미쵸 야마구치 하루키치의 행태를 보면 야쿠자 조직을 유지하기 위하여 시노기를 하였다기보다 '사업을 더 확실하고 원활하게 운영하기 위하여' 야쿠자 조직을 겸한 것으로 보일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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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카시(항만하역노동자)의 관리・파견업과 흥행업(연예 공연의 기획・주재 등)은 창립 이래 야마구치구미 시노기의 기둥이었다. 2대째 쿠미쵸 야마구치 노보루는 그 노선을 승계, 확장시켰다. 

 

야마구치구미는 폭력을 휘두르고 때로는 힘이 없는 자들을 결집, 대변하면서 고베의 “가오”로 성장하였다. 사회성이 떨어지거나 아예 없는, 거친 놈들을 관리하여 제대로 일을 시키는 한편, 일손에 대한 수요 불안전성을 감수하면서 노동자들의 이익을 지켜주기도 했다. 

 

2대 쿠미쵸 야마구치 노보루는 만 42세라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짧은 삶이었으나 항만노동자와 하청하역업자를 하나로 뭉치는 데에 기여하였고, 이것은 훗날 야마구치구미를 크게 발전시키는 초석이 된다.

 

그러나 '가오'가 된다는 것은 목숨이 노려질 위험도 커진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2대째 쿠미쵸의 서거와 동시에 나타난 건 후일 야마구치구미를 전국 조직으로 만들게 될 타오카 카즈오였다.

 

 

1. 야마구치구미의 초석이 된 카쿠슈토오(鶴酒藤)형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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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대 고베. 항만하역업의 가오라 할 수 있는, 츠루이 쥬타로(鶴井寿太郎)라는 오야붕이 있었다. 그는 츠루이구미(鶴井組)라는 조직을 운영하면서 하역 작업을 도급받고 있었다. 고베항을 오가는 영미계 선박의 절반을 넘는 하역을 맡았던 니켈 앤 라이온스(Nickel & Lyons)를 주된 원사업자로 두고 있었다. 

 

회사가 요코하마에 영업소를 개설함에 따라, 츠루이구미는 요코하마에 간부 사카이 신타로(酒井信太郎)를 부임시켰다. 사카이는 요코하마의 사업을 궤도에 올린 뒤 츠루이구미에서 독립, 사카이구미(酒井組)를 세웠다. 

 

항만 하역업의 세계는 일을 주는 원사업자가 압도적으로 우위에 있고 그 밑에서 하청업자들끼리 일을 빼앗고 빼앗긴다. 1차대전 후 산업화가 더더욱 심화되면서 항만 운수업도 전성기를 맞이하였지만, 그만큼 하청업자 간 경쟁은 격화되었다. 칼이 난무하는 것도 다반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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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상황 아래 1919년, 요코하마항에서 일하던 나카시들이 요코하마나카시동맹회(横浜仲仕同盟会)를 결성, 임금 인상, 대우 개선을 요구하며 쟁의에 돌입하였다(요코하마항대쟁의). 사카이 신타로와 당시 요코하마 항만하역업의 가오였던 후지키 코오타로(藤木幸太郎)는 항만 노동자들을 지지했고, 파업을 깨기 위해 투입된 인력을 곤봉 등으로 물리쳤다. 

 

사카이도 후지키도 그들의 계급으로 따지면 자본가에 더 가깝다. 그럼에도 파업을 지지한 배경에는 요코하마의 항만 노동자 전체가 그들에게 있어서 “우리 젊은이”였다는 것과 열악하기 짝이 없는 노동 조건과 노동 환경, 일용직 노동자 알선 업체에 의한 임금 가로채기(중간 착취)가 심했다는 사정이 있다. 

 

극히 열악한 노동환경과 개선을 요구하는 파업이 반복되는 일은 누가 봐도 비효율적이다. 그러나 자기 포지션(입장)이 완전히 자본 측 아니면 노동자 측에 고정된 이는 어쩔 수 없이 자기 이익, 그것도 단기적 이익을 추구하기 마련이다. 그런 의미에서 객관적으로는 자본 측에 몸을 담고 있으면서도 항만 노동자를 “우리 젊은이”, “우리 가족”으로 여길 수 있는 야쿠자는 노사 사이에 끼어들어 양자를 적당한 선에서 조화시키는 데 알맞는 존재였다. 

 

사카이 신타로는 요코하마대쟁의를 계기로 쓸모없는 분쟁을 피하며 노사 간 대화를 꾀하기 위하여 알선에 나섰다. '요코하마나카요시회(横浜仲よし会, “나카요시”는 “아이들”의 사이가 좋다는 뜻이 있음)'라는, 배경에 야쿠자가 있다는 게 전혀 드러나지 않는 협조기관을 만들었다. 

 

그때 그는 항만 사업자들을,

 

“일을 하는 자를 소중히 여기면 능률이 올라가잖아. 그렇게 되면 우리도 이익이 많아지지. 이제 한푼을 아끼다가 큰 손실을 보겠어”

 

라고 설득, 아니 사실상 협박하였다. 

 

어쨌거나 회사 측은 아직 자본의 힘을 믿는 바가 컸던지, 나카요시회에 대해 그다지 적극적이지 않았다. 결국 나카요시회는 '요코하마나카시공제회(横浜仲仕共済会)'로 명칭을 변경, 어정쩡한 복리후생 조직이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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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세를 바꾼 계기는 관동대지진이었다. 1923년 도쿄를 중심으로 관동 지방에 말 그대로 '대지진'이 발생했다. 역시 관동에 위치한 요코하마도 도시의 기능을 크게 손실했다. 따라서 요코하마항을 통해 나가고 들어오던 하물 운송을 고베・오사카가 독점하게 되었다. 요코하마항은 하역 업체들에 의한 덤핑, “출혈”급 할인이 횡행하였다. 

 

문제는 거기서 흘러나오는 피는 거의 노동자의 피라는 점이다. 또 다시 요코하마항을 무대로 한 대규모 파업의 기운이 고조되자, 이번에는 자본 측이 항구의 가오한테 노사협조 기관의 설립에 대해 상담하러 왔다. 

 

요코하마의 가오로 성장했던 사카이 신타로에게 다행이라고 할 수 있는 점은 당시 나고야, 오사카, 고베, 즉 전국의 주요 항만 하역을 지배했던 츠루이 쥬타로를 오야붕으로 두었던 것이다.

 

1926년, 사카이는 츠루이 쥬타로를 만나러 고베로 만나러 갔다. 이와 함께 역시 고베에서 항만 하역업을 영위하던 후지와라구미(藤原組)의 거물 오야붕, 후지와라 코오타로(藤原光太郎)에게 찾아가, 하역업체와 오키나카시(항만 하역 노동자)의 결속을 슬로건으로 하는 일종의 친목회를 만들자고 제안, 성사시켰다. 

 

“카쿠슈토오형제회(鶴酒藤兄弟会)”

 

카쿠(鶴, 학, '츠루'로도 읽힘), 슈(酒, 술, '사카', '사케' 등으로 읽힘), 토오(藤, 등, '후지'로도 읽힘), 즉 세 명의 설립자 이름의 머리글자를 합쳐 지어졌다.

 

카쿠슈토오형제회는 노사협조 노선을 내세우고, 전국 항만업자의 나와바리를 설정・유지하며 과당 경쟁 회피, 요금 수준의 협정・유지를 위한 기관으로 기능하였다. 요컨대 항만업체들이 전국 규모로 “담합” 기구를 구축한 셈이다. 지금이야 담합을 나쁜 짓으로 여기지만 원사업자에 의한 도급 대금 후려치기, 그로 인한 노동 환경의 열악함을 생각한다면 '담합을 통한 단결' 쪽이 더 적절할 것이다. 

 

야마구치구미의 쿠미쵸 야마구치 하루키치는 2대째를 승계함에 앞서 '카쿠슈토오형제회'의 세 명, 즉 츠루이 쥬타로(카쿠, 鶴), 사카이 신타로(슈, 酒), 후지와라 코오타로(토오, 藤)와 각각 형제의 사카즈키(盃)를 주고받았다. 야마구치구미가 카쿠슈토오형제회에 가입한 것은 자연스러운 흐름이라 할 수 있었다. 아직 20대의 젊은 오야붕이 고베와 요코하마를 대표하는 오야붕과 대등한 형제 사카즈키를 하였다는 것도 놀랍지만, 형제회의 고베지부장으로 임명된 것도 괄목할 만하다. 

 

카쿠슈토오형제회는 전국의 항만하역업자가 하나로 뭉친 조직이었던 만큼 힘이 셌고, 그만큼 힘을 이용하려는 이들도 많았다. 항만업과 아무 상관이 없는데도 “항구에 살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도박꾼이나 토건업자, 매춘업자까지 들어왔고, 가입 안 했는데도 회원이라 자칭하는 자까지 나왔다. 

 

1940년대에 들어 전시체제가 사회 구석구석까지 퍼지면서 형제회는 경찰의 압력에 해체되었다. 그럼에도 항만의 가오들과의 인맥은 굳세게 살아남았고, 2차대전 후 야마구치구미의 항만지배에 강고한 기초가 된다.  

 

 

2. 아사쿠사사건과 야마구치 노보루의 죽음

 

야마구치구미의 역사를 이야기할 때 절대 뺄 수 없는 대목이 바로 연예 기획, 공연 주재 등을 하는 '흥행업자'로서의 면면이다(3회 참조). 초대 야마구치 하루키치가 시작한 사업을 친아들이자 제2대 쿠미쵸인 야마구치 노보루가 승계, 발전시켰다는 점에서는 항만하역업과 마찬가지로 야마구치구미의 “가업”이라 할 수 있다(연예계 역시 '가오'가 중요한 세계).

 

가오가 중시되는 세계에서는 사소한 법이나 도덕보다 가오의 판단과 결론이 실질적인 효력을 갖는 경우가 종종 있다. 번거로운 절차를 생략하고 빨리 타당한 결론에 이르는 효율성이 있는 반면, 문제가 해결되지 않거나 해결되는 과정에서 납득이 되지 않는 경우 명확한 기준이 없는 만큼 해결하기가 더 복잡해진다는 단점이 있다. 때로는 사소한 것으로 보이는 계기가 죽이고 죽는 싸움으로 발전하기도 한다. 마치 조그마한 담배꽁초가 큰 산불을 일으키는 것 같다. 

 

야마구치 노보루를 죽음의 위기에 빠뜨린 아사쿠사사건(浅草事件) 역시 시작은 무척 사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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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로사와 토라조(広沢虎造)

 

1940년 초봄, 국민적 인기를 끌었던 로쿄쿠시(浪曲師, 일본 전통 예능인 로쿄쿠(浪曲)를 부르는 이) 히로사와 토라조(広沢虎造)가 공연을 위해 야마구치(山口)현 시모노세키(下関)를 찾았다. 시모노세키는 흥업계의 거물 오야붕, 호라 키쿠노스케(保良菊之助)가 동생 아사노스케(浅之助)와 함께 카고토라구미(籠寅組) 흥업부를 운영하던 본거지였다(카고토라구미는 도쿄 아사쿠사(浅草)에 사무실을 두며 전국 70곳 남짓 극장에 큰 영향력을 갖고 있었다). 

 

때마침 카고토라구미는 자사 전속의 인기 배우 오오에 미치코(大江美智子)를 주연으로 하는 영화를 기획하고 있었다. 히로사와 토라조는 거물 중 거물에게 인사를 드리러 갔고, 호라 키쿠노스케는 앞선 영화의 카메오 출연을 의뢰했다. '영화에 출연할 로쿄쿠를 하나 불러줬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당시 히로사와 토라조는 요시모토흥업(吉本興行)에서 영화 출연에 관한 매니지먼트를 맡고 있었다. 만약 이때 그가 “한번 내가 요시모토에 이야기해 보겠다" 정도 대답을 했었으면 사태는 또 다른 쪽으로 돌아갔을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의 대답은 “잘 부탁합니다”였다. 승락해버린 것이다.  

 

이 소식을 들은 요시모토흥업의 요시모토 세이(吉本せい, NHK 아침 연속드라마 "와로텐카" 주인공의 모델)는 열이 받았고, 야마구치 노보루한테 연락한다. 

 

"토라조가 말도 안 되는 계약을 했다. 카고토라구미의 알선으로 닛카츠(日活, 영화 제작•배급 회사) 영화에 출연할 약속을 했다." 

 

요시모토흥업은 닛카츠와 경쟁 관계에 있던 영화 제작사 '토호(東宝)'와 가까운 관계에 있었다. 소속 연예인이 함부로 다른 영화 제작사의 작품에 출연하면 토호에 대한 체면이 깨지는 것과 같다. 요시모토흥업의 빽인 야마구치구미는 요시모토 세이의 호소를 무시할 수 없었다. 

 

카고토가구미는 야마구치구미 따위가 대등하게 상대하기에는 너무나 강대한 존재였다. 야마구치 노보루가 요시모토 세이한테 상담을 받고 나서 야마구치구미와 카고토라구미 사이에 어떤 이야기가 오갔는지는 알 수 없다(일설에는 일단 카고토라구미가 야마구치구미의 체면을 세워주고 토라조한테서 손을 뗐다고 한다).

 

다만 토라조를 영화에 출연시키려고 하는 카고토라구미와 출연을 막아야 하는 야마구치구미가 날카롭게 대립, 타협점을 못 찾는 상황이 이어지고 있던 것은 사실인 것 같다. 서로 감정이 앞서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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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 8월 2일 낮, 교착상태를 타개하기 위하여 야마구치 노보루가 시코쿠(四国) 키토일가(鬼頭一家) 오야붕, 나카지마 타케오(中島武夫)를 데리고 아사쿠사 진탄(仁丹)빌딩 2층에 있는 나니와야흥업(浪花家興行) 사무실을 찾는다(나니와야는 히로사와 토라조의 매니지먼트를 맡았던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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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자리에 카고토라구미의 젊은 인사가 찾아온다. 카고토라구미의 젊은이는 품에서 권총을 꺼냈고, 야마구치 노보루는 앞에 있던 테이블을 뒤엎고 젊은이를 잡아 계단 아래로 떨어뜨렸다. 야마구치 노보루와 나카지마 타케오는 사무실 밖으로 탈출하려 계단을 달려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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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군도(軍刀, 군인이 허리에 차는 긴 칼) 같이 생긴 긴 칼을 내리쳤다. "야마구치! 죽어라!" 야마구치 노보루는 왼팔로 칼을 막았지만, 피가 솟아나온다. 칼을 손에 든 2명이 습격에 가세한다. 야마구치 노보루와 나카지마 타케오는 맨손으로 칼을 받아 응전한다. 유도의 고수이기도 한 나카지마 타케오가 외친다. "오야붕! 여긴 일단 내가 맡겠어! 빨리 뛰어!" 그는 칼로 무장한 습격단을 잘 막고 있었으나 하카마(일본옷) 차림이었다. 옷자락을 밟아 무너진 그의 등에 카고토라구미 젊은이가 칼을 푹 찔렀다. 

 

한편 야마구치 노보루는 쫓아오는 카고토라구미 조직원의 공격에 응전하며 피신하였다. 하지만 결국 내리친 칼에 맞았다. 배에 칼끝이 푹 찔렸다. 배에 가해진 일격은 그 자리에서 생명을 빼앗아야 마땅하였으나 카고토라구미와 화해하기 위하여 품었던 600엔 어치 돈다발이 겨우 목숨을 살렸다. 

 

야마구치 노보루는 6개월 간의 입원 생활을 마치고 복귀했으나 아사쿠사에서 입은 상처의 영향인지, 1942년 10월 뇌일혈로 사망하였다.

 

아버지 하루키치가 돌아간 지 아직 4년 밖에 지나지 않은 해였다. 야마구치구미는 내부적으로는 사업을 이끌던 초대에 더하여 조직 본체를 성장시켜 온 2대 째도 잃어버렸다. 외부적으로는 온 나라가 전시 통제체제로 돌입하고 있는 상황. 군과 특별한 관계를 맺지 않은 야마구치구미에 있어서는 더더욱 살아 남기 어려운 정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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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구치구미는 차기 쿠미쵸(두목)를 찾지 못한 채 모리카와 모리노스케(森川盛之助) 샤테이가시라(舎弟頭, 쿠미쵸의 동생 중 우두머리)를 중심으로 한 집단지도체제에 들어간다. 

 

 

3. 타오카 카즈오(田岡一雄)의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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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구치 노보루 쿠미쵸가 죽은 이듬해, 야마구치구미의 한 와카슈(若衆, 젊은이)가 고치(高知) 교도소에서 출소하였다. 훗날 3대째 쿠미쵸를 계승하여 야마구치구미를 전국 최대의 야쿠자 조직으로 키울 타오카 카즈오(田岡一雄)였다. 황기(皇紀, 일본 신화상 초대 천황인 진무천황(神武天皇)이 즉위한 해를 기점으로 한 연호) 2600년을 맞아 8년의 징역형이 감경되어 예정보다 일찍 출소한 것이다. 

 

타오카는 1913년 토쿠시마(徳島)현 미요시군(三好郡)의 가난한 소작농 가정에 태어났다. 출생 시 이미 아버지는 사망해있었고, 형, 누나는 집을 떠나있었다. 초등학교에 들어가자 어머니가 과로로 사망, 고베에 사는 외삼촌이 그를 떠맡았다.

 

고베에서의 삶은 고독했다. 외삼촌은 술을 마시고서는 그를 때렸고, 외숙모도 그를 괴롭혔다. 1927년 고등소학교(현재 중학교에 상응)를 졸업하고 카와사키조선소(川崎造船所)에 입사하였다. 선반공 연수생으로 일을 하다 몸이 불편한 동료를 괴롭히는 현장주임을 구타하여 회사를 그만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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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山口組三代目(야마구치구미 삼대째)> 中

 

백수 생활을 하던 어느 날 그는 고등소학교 동창, 야마구치 히데오와 마주쳤다. 야마구치구미 초대 쿠미쵸 야마구치 하루키치의 아들이자 2대 노보루의 친동생이다. 타오카 카즈오의 형편을 안쓰럽게 여긴 그는 야마구치구미가 운영하는 오키나카시(沖仲仕, 항만하역노동자)가 모여 집단생활을 하는 곤조베야(権蔵部屋)에 타오카를 들어가게 해줬다. 최하층 노동자의 생활 환경이었으나 비바람을 맞지 않고 세 끼니 꼬박꼬박 먹을 수 있는 매일은 그에게는 몹시 인간적인 삶이었을 것이다.

 

그는 야쿠자는 아니었으나 미나토자(湊座), 키쿠수이칸(菊水館), 타이쇼칸(大正館) 등 고베 소재 극장의 경비를 하면서 야쿠자와 사귀게 되었고 싸움의 실력이 뛰어났던지 “쿠마(クマ, 곰)”라는 별명을 얻었다(일설에는 싸울 때에 손가락으로 상대방의 눈을 찔렀기에 이런 별명이 붙여졌다고 한다). 

 

1930년. 미나토자 극장에서 경비 일을 하던 중이었다. 극장 주인의 태도에 열받아 공연 중인 무대에 난입, 소동을 일으켰다. 야마구치구미가 조직 차원에서 극장 질서를 지키는 일을 맡고 있는데 연극이 한창 중인 무대를 난장판으로 만들었다.

 

야마구치 노보루는 타오카 카즈오를 불렀다. 웬만하면 손가락을 자를 정도의 '오토시마에(落とし前, 실수나 불상사의 뒤처리)'는 각오할 판이다. 

 

그러나 야마구치 노보루가 내린 처분은 반대였다. 그는 타오카 카즈오에게 “네가 쿠마냐?”고 물어보더니 꼬붕인 후루카와 마츠타로(古川松太郎)에게 타오카를 의탁, 산시타 수행(三下修行, 도박장 운영자인 카시모토(貸元), 현장 책임자인 다이카시(代貸), 도박장에서 잡용을 하는 데카타(出方)라는 3가지 밑에 있다는 뜻으로 말하자면 “도박꾼 연수생”)을 시켰다. 

 

야쿠자 타오카 카즈오의 탄생이다. 

 

야마구치 노보루가 왜 조직의 시노기(수입원)를 위태롭게 했던 타오카 카즈오에 대해 왜 온정적 조치를 취했는지는 확실히 알 수가 없다. 다만 타오카 카즈오의 야쿠자로서의 잠재력을 높이 평가하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추측은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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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山口組三代目(야마구치구미 삼대째)> 中

 

스모선수 타카라가와 습격 사건(1932년, 본 연재 제3회 참조)에서 타오카 카즈오가 보인 행동력과 전투력, 그리고 조직에 대한 충성심은 괄목할 만했다.

 

타이쇼운수 파업에서는 조직원이 노동자한테 죽임당하자 바로 일본도(日本刀, 일본 장도)를 들고 해운조합 본부를 습격하였다. 야마구치 노보루는 야마구치구미와 조합 차원의 싸움으로 발전시키지 않도록 보복을 금지하였기에 이때도 엄벌에 처해질 뻔했으나 결국 “사투(私鬪, 개인 간 싸움)”로 처리되었다(본 연재 제5회 참조). 과격하기 짝이 없는 행태지만 행동원리가 오로지 의리, 오야붕의 가오(체면)를 철저히 지킨다는 것에 있기에 야마구치 노보루도 너그럽게 봐준 것이 아닐까.

 

1936년, 해원조합을 습격한 후 1년의 징역을 마친 그는 야마구치 노보루의 사카즈키를 받아(꼬붕이 되어) 정식으로 야마구치구미 와카슈(若衆, 젊은이)가 된다. 

 

그리고 이듬해, 야마구치구미의 장래를 좌우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당시 야마구치구미에서는 “오오나가(일설에는 다이쵸) 삼형제(大長三兄弟)”라고 불리던 핵심 인사가 위세를 떨치고 있었다. 행실이 나빴던 둘째, 마사키치(政吉)가 야마구치구미로부터 하몬(破門, 조직에서 추방함)당한다. 이후 후쿠하라 유곽(福原遊廓)에서 야마구치구미 조직원을 폭행하였고, 타오카 카즈오는 철제 주전자를 들고 달려가서 오오나가 마사키치의 머리를 깨뜨린다. 

 

친형이 습격당했다는 소식을 접한 오오나가 하치로(大長八郎)는 타오카 카즈오에게 보복하러 찾아갔다가 일본도를 들고 기다리던 타오카에게 반격당하여 사망했다. 둘은 야마구치구미에서 한솥의 밥을 먹고 친한 친구이기도 하였다. 야마구치 노보루한테 사카즈키를 받아 야쿠자이기도 했으나 어렸을 때부터 자기를 감싸고 챙겨 준 친형에 대한 정을 우선한 오오나가 하치로와 의지할 수 있는 데가 야마구치구미 밖에 없던 타오카 카즈오. 둘의 행동 원리는 마냥 대조적이다. 

 

얼핏 보면 타오카 카즈오의 행태는 한 조각의 인간성도 찾기 어려운 잔학 그 자체다. 그렇지만 노래 “카라지시보탕(唐獅子牡丹)” 가사에서 알 수 있듯이 적어도 당시 야쿠자 사회는 “의리와 정을 저울에 올리면 의리가 더 무거운 사나이의 세계”였다. 오오나가 삼형제의 맏형이자 야마구치구미 와카가시라(조직 내 넘버투)이던 오오나가 카즈오(大長一男)는 사건의 책임을 지고 조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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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山口組三代目(야마구치구미 삼대째)> 中

 

전쟁이 세상을 휩쓸던 1930년~1940년대엔 정치, 경제, 사회 온갖 분야가 전쟁에 총동원되었다. 야쿠자도 예외가 아니었다. 특히 군부와 거리를 두고 2대 사망 후 쿠미쵸를 뽑지 못하고 있는 야마구치구미에 있어서는 고난의 시대였다.

 

전쟁과 야쿠자는 어떠한 관계에 있었으며, 야마구치구미가 어떻게 살아남았고 변화해갔을까. 다음에 우리가 짚어 볼 대목이다. 

 

 

 

【오늘의 야쿠자 용어 (6)~몽몽(紋紋)】

 

야쿠자 사회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습관으로 문신이 있죠. 요새 주로 젊은 사람들 사이에서 인기인 이른바 '타투' 말고, 딱 봐도 바로 "아, 이 분은 야쿠자구나" 알아볼 그거. 에도시대, 18세기 중반 쯤에 형성됐다고 하는데 일본말로 "이레즈미(刺青, 入れ墨)", "호리모노(彫り物)"라고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때로는 일본식 문신이라는 뜻으로 "와보리(和彫り)"라 하기도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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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전통적 일본식 문신을 가리키는 전문용어로 "몽몽(紋紋)"이라는 것도 있어요. 그 말 자체는 원래 "무늬", "(그림 등으로 그려진) 모양" 정도의 의미이기 때문에 "몸에 그려진 그림"이라는 뜻으로 문신을 몽몽이라 부르기 시작한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해요. 일설에는 쿠리카라몽몽(倶利伽羅紋紋)이라고 쿠리카라용왕(倶利伽羅竜王, 부동명왕(不動明王)의 변화신(変化身))을 모티프로 한 문신이 있는 바, 그것을 줄여 몽몽이라 부르다 문신 일반을 가리키게 됐다는 이야기도 있답니다.

 

몽몽으로 그리는 소재(모티프)는 하도 다양한데 특히 인기 있는 것에 보탄(牡丹, 모란), 카라지시(唐獅子, 사자)가 있죠("카라지시보탄(唐獅子牡丹)"이라는 제목의 야쿠자 영화의 레전드급 작품도 있습니다). 인기의 유무를 불문하고 몽몽은 소재(모티프)마다 관련된 전설이나 이야기, 상징, 철학 등이 있죠.

 

한냐(般若, 반야. 원래 불교용어인데 문신 모티프로는 전통연예인 노오(能)에서 이용되는 반야의 가면을 가리킴)는 "사기(邪気, 나쁜 기운)"를 내쫓는 액막이, 하늘을 날아다니는 용이나 폭포를 거슬러 오르는 잉어 같은 것은 출세를 뜻한다고 하죠(물론 모티브에 담는 의미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지만요). 영화 "진기나키 타타카이(仁義なき戦い, 의리없는 전쟁)"의 주인공 히로노 쇼죠(広能昌三, 수가와라 분타(菅原文太)의 등에는 잉어가 그려져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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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신을 하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 즉 손으로 직접 그리는 "테보리(手彫り, 손으로 새기기)"와 기계로 그리는 "키카이보리(機械彫り)"가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彫", 즉 '새길 조'가 들어 있습니다. 바늘로 피부에 그림을 "새기는" 거죠. 아픈 겁니다. 

 

테보리의 경우 등 전체를 채우는 데 반년에서 일년, 온몸에 다 새기는 데는 2년에서 3년 정도 걸린답니다. 그간 바늘로 계속 찔리는 아픔은 물론 시술을 받았을 때마다 발열을 수반하는 격통을 견뎌야 합니다. 몽몽이 주위에 위협적 아니면 위압적으로 비치는 이유는 그림 자체의 박력도 있겠지만 "이만큼의 고통을 견뎌냈음"을 암시하기 때문인지 모르겠네요.

 

그런데 역대 거물급 오야붕 중 문신을 안 한 분도 꽤 많습니다. 야마구치구미 3대 쿠미쵸 타오카 카즈오 오야붕도 그랬는데 문신을 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 “젊었을 때는 돈이 없어서 못했고, 돈이 생기고 나서는 관심이 없어졌었다”고 이야기한 바 있다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