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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외에도 유럽에는 왕실은 많다. 그리고 20세기 중반 이후로 왕실로 들어가는 평민 배우자의 수는 계속 늘어갔다. 21세기가 된 현재 한 급수가 낮은 대공가를 제외하면 한둘을 제외한 왕가에 편입한 사람들은 모두 평민이다. 

 

당연한 일이다. 유럽의 보수성이 명목과 전통의 형태로나마 신분제를 유지시키는 것이라 해도, 세계 문명의 조류는 신분제 타파를 굳혀가고 있으니까.

 

그럼에도 유럽에는 평민 왕족에 대한 거부감이 꽤 있었다. 지금도 없진 않다(지난 편, 영국의 캐서린 미들턴의 사례를 보면 알 것이다). 하지만 예전에 비해서는 그 거부감이 한참 낮아졌다.

 

이렇게 유럽 전역에서 평민 왕족에 대한 거부감을 한참 낮춰준 대표적인 두 국가의 왕실 사례들이 있다. 그 사례들을 소개하려 한다.    

 

스칸디나비아 3국 중 두 국가인 노르웨이와 스웨덴의 사례이다. 상반된 사례이나 평민 왕족에 대한 거부감을 많이 낮췄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같은 기능을 했다. 스웨덴의 사례부터 들어가 보자.

 

 

희망편, 스웨덴 왕실

 

스웨덴은 모범적 사례이다. 그리고 그 대상은 왕비인 실비아 좀멀라트와 그의 사위인 다니엘 공(빅토리아 왕세녀의 남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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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틸 공작과 평민 출신 이혼녀였던 릴리언은 현 국왕 칼 16세 구스타프가 왕으로 즉위한 지 3년 뒤인 1976년에 왕실의 결혼 승인을 받아 정식 부부가 되었다   

 

위의 스웨덴 왕실 가계도와 아래에 나올 노르웨이 왕실 가계도에서의 인물들의 지칭은 독자들의 이해를 최대한 간편하게 돕고자 본 기사에 나온 호칭을 그대로 썼다. 어떠한 의도가 있는 것이 아니니 아무쪼록 호칭으로 인한 불편함 없이 봐주길 바란다.

 

현 스웨덴 국왕인 칼 16세 구스타프는 왕세손 시절이었던 1972년, 뮌헨 올림픽에서 실비아 좀멀라트를 만나 사랑에 빠졌다. 이건 당시의 왕이자 구스타프의 할아버지인 구스타프 6세 아돌프를 빡치게 했다.

 

당시 스웨덴 왕실의 상황은 안 좋았다. 왕세손의 아버지인 왕세자가 1947년에 사고로 요절해버렸다. 아버지 사망 당시 구스타프 왕세손은 고작 1살이었다. 그리고 왕실 내의 왕위 계승 가능자는 1살의 왕세손과 그 삼촌인 베르틸 공작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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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스타프 6세 (왼) / 젊은 시절 베르틸 공작 커플 (오)

 

문제는 당시에 귀천상혼이라는 법칙이 엄존했다는 점이다. 왕족은 귀족이 아닌 평민과 결혼을 하면 작위를 잃고 평민이 되었다. 인구의 대다수는 평민이다. 당연히 왕위 계승권을 유지하는 왕족은 계속 줄어만 갔다. 그리고 베르틸 공작은 평민 이혼녀와 사귀는 중이었다.

 

왕세손이 미성년으로 즉위 시 섭정을 할 사람은 왕위 계승권이 있는 사람이다. 섭정 후보가 베르틸 공작 하나라는 말이다. 

 

그런데 공작이 자기 애인과 결혼을 하면 귀천상혼에 의해 평민이 되고 따라서 섭정도 불가해진다. 이 상황을 해결하기 위한 베르틸 공작의 선택은 미혼 동거였다.

 

이런 상황을 거쳐 성인이 된 왕세손이 뮌헨에서 평민 애인을 만들었다. 당연히 할아버지인 선왕 구스타프 6세 아돌프는 강력하게 반대했다. 고집은 집안 내력이었을까. 

 

왕세손은 계승권을 판돈으로 걸고, 버티기에 들어갔다. 구스타프 왕세손은 현명했다. 얼마 안 가 할아버지가 사망했고, 1973년에 즉위 왕세손은 칼 16세 구스타프로 즉위했다.

 

신임 왕은 곧바로 귀천상혼 제도를 폐지해줄 것을 의회에 의뢰했다. 의회는 여기에 더해 계승법을 진보적인 남녀불문 장자 우선 계승으로 개정했다. 왕은 손해를 약간 본 기분이긴 했지만, 어쨌든 1976년에 실비아 좀멀라트와 결혼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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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덴 국왕 부부

 

사소한 반전은 칼 16세 구스타프가 결혼 전후에도 불륜을 밥 먹듯이 하는 바람둥이라는 점이다. 

 

실비아 왕비는 독일 출생으로 독일인 아버지와 브라질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래서 스웨덴어 구사 능력이 아주 약간 떨어진다. 하지만 왕족과 같은 중앙 중의 중앙 정치인에겐 표준어 구사 능력은 당연하면서도 중요하다. 

 

평민이라는 점에 겸손한 스웨덴어 실력이 실비아 왕비에 대한 보수적 여론을 나쁘게 했지만, 남편인 왕이 허구헌날 바람이나 피우고 다닌다는 점 때문에 동정표가 생기면서 실비아는 왕비로서의 역할을 무사히 진행해나갔다.

 

바람기는 유전인지 세 자녀 중 둘째 왕자와 셋째 공주도 사생활 스캔들 가십을 성실히 생산했다. 정점은 둘째 칼 필립 왕자의 아내인 소피아 헬퀴비스트 왕자비의 과거 경력이었다. 

 

어린 시절 소피아 왕자비는 누드모델, 그것도 포르노에 가까운 사진을 찍은 적이 있다. 검색은 스웨덴에 대한 예의로 하지 말기를 권한다. 셋째 마들레이네 공주는 파티걸로 악명이 높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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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필립 왕자 부부 (왼) / 마들레이네 공주 (오)

 

 

왕족의 진중함을 보여주지 못하는 동생들 덕분에 첫째이자 왕위 계승 1위인 빅토리아 왕세녀의 인기는 높아졌다. 그리고 빅토리아 왕세녀는 힘겨운 성장기를 보냈다. 부모가 계승자인 자신보다 동생들을 더 편애했기 때문이다. 

 

어머니 실비아는 3남매 중 외모가 가장 뒤떨어진다는 이유, 아버지 구스타프는 남자인 칼 필립이 더 눈에 찼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 때문에 왕세녀는 어려서부터 거식증과 난독증을 앓았다.

 

힘겨운 인생을 사는 왕세녀의 곁에는 헬스 트레이너를 하고 있는 남자친구, 다니엘 베스틀링이 머물면서 힘을 주었다. 

 

이때 보여준 사랑과 헌신 때문에 다니엘은 국민의 큰 지지를 얻었으며, 왕세녀는 지병을 극복하고 현재는 군사 훈련을 앞장서서 받는 등 모범적인 왕위계승자로서 성장했다. 

 

시간이 흘러 2010년, 두 사람이 결혼을 했다. 이후 다니엘 공은 유럽에서 가장 모범적인 왕족 배우자로 주목 받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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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토리아 공주와 다니엘 공

 

다니엘은 시골 출신의 헬스 트레이너였다. 왕실 그루피도 아니었고, 시골 사람이라 구수한 사투리를 쓰는 데다 패션도 후줄근한 스트릿 패션이었다. ‘그냥 서민’이었다. 

 

영국의 황색 언론이 캐서린/메건을 두들겼듯이, 처음에는 스웨덴의 황색 언론들도 신이 나서 다니엘을 두들겼다. 하지만 연인 시절 다니엘이 왕세녀에게 보여준 헌신, 그리고 다니엘이 국민들에게 보여주는 친근함은 여론을 우호적으로 만들었다.

 

결혼 후엔 왕실에서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그리고 스웨덴 표준어(!)를 비롯한 각종 교양을 가르쳐 지금은 부마로서 합격점을 받았다. 과거의 서민적 친근함과 현재의 지적인 품위 모두가 합격점을 받은 몇 안 되는 경우다. 

 

게다가 결혼 후에는, 아내를 돋보이도록 하는 현명한 처신을 보여 역대 유럽 여왕의 부군들 중 가장 모범적인 사례 모음집에 들어가게 될 가능성이 크다.

 

장모인 실비아 왕비와 사위인 다니엘 부마가 국민적 지지를 더욱 받는 이유는 스웨덴의 보수적/전통적 가치를 만족시키는 것 이상의 책무를 수행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모범적 행실 외에 스웨덴의 미래 가치 또한 제시한다. 

 

메건 마클이 친환경 의류를 입고 나와 홍보하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스웨덴의 공업은 신소재 개발 쪽으로 나아가고 있는데, 실비아는 이 신소재 산업의 생산품을 의도적으로 공식 행사에 입고 나오는 식으로 제조업의 미래를 홍보하고 있다.

 

스웨덴은 남녀평등에 있어 선진국이라는 자부심이 있는데, 왕세녀를 수행하는 다니엘 공의 모습은 이 가치를 상징하는 아이콘이 된다. 

 

다니엘 공은 또한 왕족 편입 후에 근무하게 된 자선 재단에서 육아 휴직을 신청한 적이 있다. 그러면서 공공에 찍히는 사진은 ‘라떼파파’이다. 아이를 안고 라떼 잔을 들고 다니는, 육아에 적극적인 남편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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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덴에서 흔한 풍경인 라떼파파의 모습

 

신소재 공학남녀평등으로 요약될 수 있는 ‘현대 스웨덴적 가치’이다.

 

물론 스웨덴의 왕실에도 햇빛만 있는 것은 아니다. 비바람도 있다. 앞에서 언급한 빅토리아 왕세녀의 동생들이다. 이들이 생산하는 가십성 스캔들이 잊을 만하면 튀어나온다. 

 

그것이 도가 심해져 왕실의 인기가 떨어지고 존폐 위기가 대두되면, 실비아-빅토리아-다니엘의 모범적 행보가 왕실을 살리는 중이다. 

 

왕은 비록 불륜이나 저지르고 다니지만 할 일은 하고 있고, 왕비는 그런 남편을 견디며 왕실을 지탱하고 있는 데다, 부모에게 사랑 못 받고 자랑 불쌍한 왕세녀는 듬직한 계승자로 자라주었고, 그 배우자는 세계 어디에 내놔도 자랑스러운데 친근감까지 있는 서민적 부마다.

 

게다가 최근 왕실의 정책도 합리적이어서, 빅토리아 왕세녀 동생들의 말썽에도 불구하고 왕실을 지지하는 국민적 기반은 튼튼한 편이다.

 

현재 직계계승자가 아닌 둘째 왕자/셋째 공주의 자녀들은 왕족 직함과 지원을 받지 못하게 되었다, 왕족 수를 최소로 해서 세금을 아끼는 진보적 정책이다. ‘인형의 집’, ‘현실 트루먼 쇼’로서의 기능이 강화된 것이다.

 

스웨덴의 실비아/다니엘의 경우는 여러모로 왕정의 희망편이다.

 

 

절망편, 노르웨이 왕실

 

한편 노르웨이는 과장을 하자면 절망(?)적 사례로 보인다. 그 대상은 왕세자비인 메테-마리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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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현 국왕 하랄 5세와 소냐 왕비의 장남이자 둘째 자녀인 호콘 왕세자, 그의 아내다. 그리고 메테-마리트 왕세자비는 범죄와 연관된 과거를 가졌다. 스웨덴의 소피아 헬퀴비스트 왕자비에서 더 나아간 케이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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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콘 왕세자와 메테-마리트 왕세자비

 

남녀불문 장자 계승제를 다른 나라들보다 일찍 확립한 스웨덴과 달리 노르웨이는 호콘 왕세자가 태어나고 계승 1위가 된 후에야 남녀불문 장자 계승제를 도입했다. 

 

아주 가끔 맏이인 마르타 루이즈 공주를 1위 계승자로 하자는 의견이 나오긴 하지만, 문제는 공주가 샤먼들과 연애를 하고 미신을 신봉하는 사람이라는 점이다. 그래서 호콘 왕세자의 자리는 흔들림이 없지만, 이를 가장 크게 흔들리게 했던 것이 메테-마리트와의 결혼이었다.

 

현재 호콘 왕세자 다음의 계승 예정자는 호콘과 메테-마리트의 장녀인 잉그리드 공주다. 잉그리드 공주가 첫째 자녀는 아닌데, 이복오빠인 마리우스는 호콘 왕세자의 친아들이 아니기 때문에 계승권이 없다. 마리우스는 메테-마리트가 결혼 전에 싱글맘으로 낳은 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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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콘 왕세자 가족사진 속 잉그리드 공주와 친남동생 스베레 왕자(왼) / 마리우스 (오) 

 

메테-마리트 왕세자비의 성장기는 험난했다. 

 

요약하면, 어릴 때 이혼한 부모, 고등학교 1년 유급, 마약 중독, 리얼리티 쇼에 출연해서 막 나가는 관종짓을 한 경력, 마약조직 보스와 동거하며 그와의 사이에서 마리우스 출생 등에 당시 난교 마약 파티에 참석한 적도 있다. 

 

이런 메테-마리트와 결혼하겠다고 고집을 부리며 호콘 왕세자는 왕궁을 가출해 그녀와 동거에 들어가기까지 했다.

 

당연히 의회는 난리가 났다. 여론도 난리가 났다. 왕실 지지율은 50% 아래로 곤두박질치고 왕실 폐지 시위도 등장했다.

 

반면 하랄 5세는 아들을 지지했다. 자신도 청년 시절에 평민인 소냐와 결혼하기 위해 9년 동안 부왕에게 맞선 적이 있었다. 노르웨이에서 귀천상혼 제도가 폐지된 것도 소냐 왕비가 원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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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웨이 국왕 하랄 5세와 소냐 왕비

 

결국, 메테-마리트가 직접 대국민 인터뷰에 나와 눈물을 흘리고 나서야 여론이 약간이나마 반전되어, 2001년에야 간신히 호콘 왕세자의 결혼 건이 의회를 통과했다. 

 

(한 가지 웃긴 점은 평민 배우자와 힘겹게 결혼한 왕/왕세자 부자가 현재는 모두 쇼윈도 부부라는 의혹이 강하게 제기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노르웨이 왕실은 이후로도 메테-마리트로부터 촉발된 비난여론 때문에 몸살을 겪었다. 첫째 마르타 루이즈 공주가 미신을 신봉하고, 둘째 호콘 왕세자가 저런 사람을 왕세자비로 맞은 건 죄다 소냐 왕비가 평민이어서라는 무쓸모한 의견까지 나올 정도였다.

 

그리고 메테-마리트 왕세자비는 잊을 만하면 새로운 논란거리 가십을 생산했다.

 

노르웨이에서는 대리모가 불법이다. 그런데 2012년, 왕실 직원 중에 동성 부부가 인도에서 대리모를 구해 자녀를 얻은 사건이 불거졌다. 

 

알고 보니 이를 도와준 사람이 왕세자비인 메테-마리트였다. 작년인 2019년에는 성범죄자 제프리 엡스타인과의 가까운 관계가 논란거리로 추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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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프리 엡스타인 

 

 

그래서 왕세자비로서의 평판은 낮다. 이는 시어머니인 소냐 왕비와는 대조적이다.

 

소냐 왕비는 학구적이어서 다양한 예술 분야를 공부하면서 문화 분야의 국가 정책에 힘을 실어주는 등 ‘노르웨이적 가치를 제시하는’ 왕족의 책무를 성실히 수행하고 있다.

 

반면, 메테-마리트 왕세자비는 결혼 전에도 공부를 거의 하지 않았고, 결혼 후에 진학한 학교는 있지만, 모조리 졸업을 못 했다. 당연히 연설 등 행사용 토템의 능력은 낮은 편이다. 

 

이러니 노르웨이의 전통적 가치도, 미래 가치도 대변하지 못한다. 한 마디로 ‘어디 내놔도 부끄러운 왕족’이 되었다. 그나마 현재는 희귀병인 폐섬유증 진단을 받아 투병에 들어가면서 ‘우리가 그동안 너무 욕했나’ 류의 죄책감 여론이 생겨 비난 여론이 조금 상쇄되었다.

 

 

의도치 않게 같은 역할을 한 두 왕실

 

결국 스웨덴의 다니엘 공이 보여준 모범적 모습과 노르웨이의 메테-마리트 왕세자비가 보여준 좌충우돌의 난장판은 비록 9년의 시간 차가 있지만, 본질적으로 같은 기능을 했다. 평민 왕족에 대한 거부감이 낮아진 것이다. 

 

스웨덴의 경우는 평민 출신이지만 모범적으로 귀족 출신의 왕족보다 왕실의 역할을 더 잘 수행함으로써 거부감을 낮췄다. 

 

노르웨이의 경우는 다른 유럽 국가의 왕족과 국민들이 노르웨이의 왕실을 보며 자신들의 평민 왕족에 대한 상대적 만족감이 높아짐으로써, 유럽 전역에서 평민 왕족에 대한 거부감을 낮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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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반되는 사례가 본질적으로는 같은 기능을 하게 되었다. 물론 그렇다고 신분제 정서에 입각해 비난을 하는 보수적 여론이 없어지진 않았지만, 예전보다는 한참 낮아졌다는 말이다.

 

이따금 정치인 중에는 그 자신의 능력보다는 출신 성분의 상징성 때문에 그 자리에 있는 것이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람이 있다. 

 

민주주의 국가로서 모든 국민이 평등하고 왕실은 지배하지 않고 군림하는 상징일 뿐이라면, 논리상 모든 국민과 비국민(그러니까 외국인)은 왕실의 일원이 될 자격이 있다. 

 

실비아 왕비에서 부마 다니엘 공, 소냐 왕비에서 메테-마리트 왕세자비로 이어지는 계보는 반드시 나와야 했던 혁명의 아이콘이다. 

 

이런 계보가 세계에서 가장 진보적이라는 북유럽 스칸디나비아반도에서 이어지고 있었기에 다른 나라의 왕실에서도 평민 출신 왕족의 편입이 더 쉬워졌다. 왕족으로서 능력은 논외다.

 

암튼, 전혀 다른, 극상반되는 두 경우가 같은 결과를 야기하는 이 사례들을 보며, 인간사 알 듯 모를 듯 참 재미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스웨덴 실비아 왕비, 그리고 다음 편

 

다음 편에서는 네덜란드와 벨기에의 왕실에 대해서 다룰 것이다. 두 왕실은 ‘전범 혹은 인권 범죄와 연관된‘는 분야라는 같은 문제를 겪으며 상반된 대응을 했다.

 

간단하게 짚자면, 네덜란드 현 왕비의 아버지는 아르헨티나의 군사 독재 학살의 부역자였고, 제국주의 시대의 벨기에 왕은 히틀러 수준의 학살자였다. 

 

이러한 문제가 스웨덴 실비아 왕비에게도 있었다. 실비아 왕비의 아버지는 간접적이지만 나치 부역자였다. 이는 영국의 전 전대 왕 에드워드 8세(에드워드 8세는 나치 독일을 지지했었다)와는 차원이 다르다. 

 

영국의 경우엔 후임인 동생 조지 6세가 런던 대공습 때 런던을 떠나지 않고 국민들을 위무한 활동과 후계자인 엘리자베스 2세가 장교로 2차대전에 참전하는 결정을 통해 나치와의 연관성을 완벽히 털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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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 시절 엘리자베스 2세와 아버지 조지 6세

 

반면 실비아 왕비의 반응은 관련 보도를 ‘인격 살인’으로 비난하는 등의 강력 대응이었다. 일견 이해는 간다. 아버지의 죄를 자신에게 전가하지 말라는 연좌제 비판의 맥락이니까 말이다. 하지만 인격 살인이라는 워딩은 좀 많이 나간 느낌이다.

 

하지만 스웨덴 왕 칼 16세 구스타프의 바람이 불행인지 다행인지, 스웨덴에서는 왕의 불륜 때문에 실비아 왕비에 대해 동정 여론이 많다. 때문에 조용하던 왕비가 이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인격 살인 운운해도 크게 문제 삼지 않으며 연좌제 비판도 크게 힘을 못 얻는 분위기이다.

 

기사를 마무리하며, 다음 편의 네덜란드, 벨기에 편도 흥미로운 내용이 많으니 기대해주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