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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를 그만두니 10 전과 똑같은 상황이 벌어졌다한 가지 다른 점은 먹여살려야 가족이 생겼다는 것이다. 아내가 차려준 밥상에 이유식을 시작한 아들녀석과 , 그리고 오래 전에 은퇴한 아부지까지 경제력 없는 삼 대가 식탁에 모여 앉아 밥을 먹었다. 3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보니 기가 차고 코가 찼다퇴직금도, 모아둔 돈도 없는데 도대체 어떻게 해야할지 감도 안잡혔다.

 

막연히 공부를 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새로운 길이 열리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그런데 공부를 하려면 학비와 먹고사니즘을 먼저 해결해야 했다. 미래를 위해 돈이 필요했지만 모아둔 돈도, 물려받은 돈도 없었다. 공부를 하려면 돈을 벌어야 했다. 생각이 빙빙 돌았다회사를 다닐 때도 못했는데, 애 딸린 백수가 공부를 한다니불가능한 같았다. 공부도 때가 있다는 엄마 말이 무슨 말이었는지 그제야 알아 들었다. 그렇게 대책없는 세월을 보내던 전화를 받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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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artup

 

자동차용 PC 개발하면서 가까워진 개발총괄 본부장님이었다그는 젊고 똑똑하고 학벌도 좋은 데다가 키도 크고 외모도 수려해서 사람들이 좋아하고 따르는 엄친아였다자동차 PC제조사는 경영난에 폐업을 했고 그도 백수가 됐지만 사람들을 추스려 개발회사를 차리려는 중이라고 했다. 이번에는 태블릿 형태로 PC 개발하여 차에서 아니라 휴대용으로도 사용할 있는 모바일 PC 개발할 거라고 했다. 서울에서 시작하려고 하는데, 나보고 합류할 있겠냐는 것이었다. 이번 프로젝트는 대기업도 관심을 가지고 있고, 몇몇 유통사가 이미 투자를 하기로 했으니 당장 굶지는 않을 거라고 했다.

 

. 사람이 죽으라는 법은 없구나.’

 

생각해보겠다고 하고 전화를 끊었지만, 이미 마음은 출근 중이었다. 그렇다. 사내는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건다고 했다개발 프로젝트는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그리고 디자인 영역으로 나누어 진행되었다화면 사이즈와 배터리 사이즈, 포트 종류와 개수 제품의 사양이 결정되고 그에 따라 디자인을 뽑아내고 동시에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개발하기로 했다. 디자인 목업(실제 크기와 외관을 똑같이 만들어 디자인을 검증하는 모형) 만들어 사이즈와 휴대성, 그리고 사용 편의성을 검증하고 기구설계를 통해 제품의 조립구조를 검토했다.

 

실제로 작동하는 워킹목업(제품의 외형과 내부의 부품이 조립되어 실제 동작이 가능하도록 제작하는 것) 만들었다워킹목업이 나온 ,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손주가 있었다면 손주 손을 붙잡고 펄쩍펄쩍 정도였을 거다. 워킹목업을 들고 본격적인 양산을 위한 투자를 받으러 다녔다. 몇몇 회사들이 관심을 보였고 본격적인 양산을 준비하기로 했다.

 

년도 안되어 이룬 성과에 샌프란시스코로 갈까, 라스베가스 전시회를 갈까 김칫국을 들이키던 어느날, 아이패드의 출시가 발표 되었다. 아이폰이 스마트폰 열풍을 일으키고 있었지만, 이번엔 태블릿이라 사뭇 느낌이 달랐다.

 

아이패드를 구해 분석을 시작했다. 단차없이 알루미늄으로 휘감은 제품의 완성도, 빠릿한 소프트웨어와 수려한 UI디자인. 우리 제품은 이미 오징어로 보이기에 충분했다.

 

투자자들은 다시 생각해보자고 했다. 아이패드는 아이패드고, 우리는 윈도우 PC라며 어떻게든 프로젝트를 성사시켜보려고 애썼지만, 어느 인터넷에 올라온 아이패드를 자동차에 매립하는 영상이 투자자들의 마음을 완전히 돌려버렸다우리의 전의를 완전히 꺾어버렸다. 태블릿PC 프로젝트를 접기로 했다.

 

스마트폰은 거의 모든 분야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스마트폰은 시장을 흔들었고 지배했다. 다른 제품을 위한 자리는 없었다. 케이스나 보조 배터리를 만드는 정도를 제외하고는 전자제품을 만드는 것은 지푸라기를 들고 불속에 뛰어드는 것처럼 보였다만들 제품이 없으니 디자인 프로젝트도 사라졌다. 디자이너도 하나 사라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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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블릿PC개발을 접고 나니 회사는 동아리방이 되어버렸다. 출근을 해도 일이 없어 개점휴업상태였다. 먼저 투자했던 투자자들에게서 투자금 반환소송이 들어왔다. 급여가 정리되지 않으니 사람들이 하나 둘 떠났다그래도 대표님 옆에 남았다. 나를 알아봐주는 사람과 배를 탔으니 그래야한다고 생각했다.

 

투자금 반환소송때문에 경찰서에 가서 피고인 조사를 받았다. 돌아오는 길에 노느니 뭐라도 해보자고 위로했다무작정 앱기획을 시작했다. 애플에서 배포한 ‘유저인터페이스 가이드’라는 문서를 받아 번역해가며 맨땅에 헤딩하는 심정으로 앱기획을 시작했다. 기획서가 맞는 건지 틀린 건지도 몰랐다. 디자이너를 수소문해서 같이 공부하며 GUI디자인을 시작했다.

 

이미 친구와 함께 앱개발을 하고 있는 친구를 찾아 갔다우리는 디자인을 할 테니 너희는 코딩을 하여라. 그래서 떡을 같이 나눠 먹자.’ 협업을 제안했다 손발을 맞춰보다가 그냥 회사를 합치기로 했다. 우리쪽과 그쪽 대표 사람이 공동으로 대표를 맡기로 했다. 그렇게 기획과 디자인과 개발을 모두 갖춘, 당시로서는 보기드문 앱개발 조직을 만든 셈이 되었다터치 인터페이스를 이용한 악기나 연락처 검색같이 간단한 아이디어를 실현하는 앱들을 출시했다.

 

당시의 앱스토어는 워낙 초기시장으로 UI규칙, 디자인 제한사항 어떤 것도 확실하게 정립되지 않은 혼돈의 카오스였다. 몇몇 부지런한 개발자들이 개인적으로 간단한 캐쥬얼 게임이나 생활 도구같은 앱들로 스토어를 채워가는 상황이어서 조금만 발빠르게 규모를 갖추면 두각을 나타낼 있을 것이라는 계산이었다.

 

개발자 모임에서 우리가 조금씩 알려지면서 우리에게 개발의뢰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덕분에 각자 월급도 조금씩 받을 있게 됐다소프트웨어 분야는 생소했지만 놀라웠다. 목업이나 금형이 없어도 상품 개발이 가능했고 재고를 쌓아두지 않아도 무한정 판매할 있었다. 심지어 업데이트 만으로 제품의 개선이 가능했다.

 

TV프로그램에 우리 앱이 소개되었고 상도 받았다. 좋은 일도 해보자며 실종 어린이 찾기 앱을 만들었는데 부끄럽게도 관계기관으로부터 표창까지 받았다. 우리가 잘난 착각하기 좋은 일들이었다.

 

실시간’, ‘소통 같은 단어가 해의 키워드로 떠오르며 SNS 서비스들이 주목받기 시작했고 모바일 혁명은 사람들의 생활을 바꿔갔다. 새없이 다양한 이슈에 사건사고가 터지는 우리나라의 사회상황과 맞물려 수많은 정치인과 소셜테이너가 SNS 등판했다당시 가장 주목받던 SNS 글자 수를 제한하고 이미지 첨부가 불편한 점에 착안, 사진을 중심에 두는 새로운 개념의 서비스를 기획했다. 몇몇 비슷한 컨셉의 서비스가 있어 시장성이 있네 없네 토론이 있었으나, 덜컥 투자제안이 들어오는 바람에 밀고 나가기로 했다.

 

당시의 모바일 혁명은 마치 인터넷 초기의 닷컴 붐을 다시 보는 누가 수십억 투자를 받았다고, 누가 수백억에 회사를 팔았다는 기사가 하루가 멀다하고 쏟아져 나왔다. 잘나가는 회사라면 한 두 개는 가지고 있어야하는 분위기가 되었다. 점점 회사들이 우리에게 개발 외주를 맡겨오기 시작했다. 외주를 쳐내려면 사람이 필요했다. 직원을 채용하면서 회사의 몸집이 불어났다.

 

우선은 돈이 벌리는 외주 개발에 모두가 매달렸다. 돈을 벌면서 생존확률을 높이고 우리 프로젝트를 개발하자는 나름 투트랙 전략이었지만 외주에 치어 정작 우리 서비스는 진행을 못하고 있었다개발이 늘어지는 것이 찜찜했지만 어떤가. 우리는 이미 반쯤은 성공한 것이라 생각했는데하루가 멀다하고 찾아오는 기자와 손님들을 보면서 우리는 서비스만 론칭하면한 방에세상을 놀라게 것이라는 근거없는 자신감에 가득 차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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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산이고 망상이었다웹서비스를 호령하던 진짜 강자들이 모바일로 진출해왔다. 우리는 아직 칼도 뽑지 않았는데 (뽑을 칼도 없었...), 무림 고수들의 신대륙 정복전이 시작됐다. 사용자들의 선택을 받은 서비스들은 무섭게 성장했고 시간을 놓친 우리는 초조해졌다외주를 끊고(똥개가 똥을 ...) 우리 서비스 개발에 몰두하자고 했다.

 

마음은 급한데 몸집은 무거워졌고 쉽게 풀릴 알았던 서비스 개발은 이런저런 이유로 발목이 잡혔다. 기대감은 불안감으로 바뀌었고 위기감이 자신감을 흔들었다대표님은 기획팀을 쪼아댔고, 기획팀은 개발팀을, 개발팀은 디자인팀을 비난하고 흔들어댔다. 졸지에 동네북이 된 디자인팀을 커버하느라 적잖은 충돌에 휘말렸다.

 

회의는 매번 논쟁이 되었다. 열정으로 포장된 날선 감정들은 거리낌없이 서로를 상처냈다힘들다고 울고불고, 쌈박질에, 왕따에, 음모와 배신, 종교분쟁과 러브어페어까지 사람 사이에 일어날만한 짜증스런 일들이 앞을 다투어 터져나왔다. 사람들 감정이 다치니 상황은 점점 어려워졌다. 원래 사람 일이 그런 거려니 싶다가도 도저히 이해 안되는 일들이 답답해 강신주 선생의 책을 많이도 읽었다.

 

우여곡절 끝에 서비스를 론칭했다. 와중에 이걸 해내다니 기적은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이리라. 힘들었던 만큼 시장이 우리 서비스를 알아봐 줄거라 생각했다시장에선 우리 서비스가 사랑받게 것이고, 이를 계기로 소원해지고 감정이 상했던 사람들이 다시 마음의 여유를 되찾아 자신을 돌아보고 서로에게 사과하고 다시 화합하기는 개뿔.

 

론칭은 우리만의 이벤트였다. 세상을 놀라게 한 방’도 시장의 관심도 없었다. ( 당연한 일인데 그때는 다들 세상이 무너지는 알았다.) 다들 지치고 불안했고 팀웍은 무너졌으며 회사 통장은 버적버적 말라갔다돌이켜보면, 바로 지점이 스타트업 회사라면 절대 피할 없다는 바로 유명한 죽음의 계곡, 데스밸리였던 하다.

 

설립자들이 솔선수범해서 허리띠를 졸라야한다며 급여가 무기한 삭제됐다. 삭감이 아니라 그냥 삭제였다기약 없는 무급생활이 이어지니 없이 사는 데 익숙한 필자도 기간이 힘들었다필자에게 마케팅을 맡으라고 했다. 상황을 반전시켜 추가 투자라도 끌어오려면 사용자를 확보하여 서비스 가치를 증명해야 했다.

 

유머러스한 사진과 문장으로 서비스 콘셉을 소개하는 시내버스 이미지 광고를 제안했다. ‘선영아 사랑해처럼 시민들이 자주 보는 곳에 웃음을 유발할만한 광고를 집행하면 주목받을 있을 같았기 때문이다그러나, 유머코드가 안맞았는지 광고기획이 효과없을 거라며 핀잔을 들었다. 온라인 이벤트 같은 것을 기획하라고 했다. 얼마 업체가 버스광고로 재미를 보고는 버스광고가 유행처럼 번졌다. 아쉬웠다.( 말하고 열받았다고 읽는다.)

 

다른 대안을 찾았다팟캐스트가 새로운 매체로 떠오르고 있어 젊은 청취자들이 즐겨 듣는 팟캐스트를 골라 협찬하는 것으로 서비스를 홍보하기로 했다. 방송이 업로드 되는 날엔 신규 가입자가 늘어났다. 방송의 팬층이 두터워지면서 사람들이 우리 서비스를 조금씩 인지하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광고비가 부족했다. 아쉽게도 달만에 광고를 중단했다. (그 중에 한 달은 서비스였다.) 아무도 모르는 일이 되었지만 앱을 팟캐스트에 광고한 세계최초의 사례였다고 맘대로 생각하고 있다.

 

스타트업 지원 프로그램에 선발되어 미국에서 열리는 전시에 참여하게 되었다. 글로벌 서비스로 발돋움 있는 좋은 기회라고 했다. 현지 투자자도 만나기로 했고, 잘하면 투자를 유치할 수도 있다고 했다. 엑셀러레이터 미팅을 위해 선발대를 미국에 보내고 2 후에 후발대가 합류해서 전시를 진행할 거라고 했다. 전시부스에서 나눠줄 홍보물과 기념품을 디자인팀과 준비했다. 저렴하면서도 특이하고 효과적인 기념품을 고민하다가 보자기에 서비스 로고를 새겨 준비했다. 보자기를 두르거나 감거나, 혹은 보따리를 싸서 전시장을 돌아다니면 서비스 인지도가 올라기지 않을까 하는 계산이었다. (그리고 보았다. 출장팀이 USB메모리를 따로 주문하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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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이 모자라 설립자들의 개인 카드로 출장갈 직원들의 항공권을 결제했다필자도 미국 출장을 함께 가자고 했다솔직히 말하면 번도 미국에 가 본 적이 없던 필자도 미국, 가보고 싶었다. 하지만 서비스가 아직 불안한 상태인데 투자자를 만나야 하는 일이라면, 개발자가 현장에서 만일의 사태에 즉시 대비하는 것이 훨씬 낫다고 생각했다. 개발자들도 자기가 개발한 제품이 행사에 전시되는 것을 보면, 나름 자부심도 심어줄 있고 회사 분위기도 덩달아 좋아질 것이라 생각했다. 무너진 팀웍을 살리는데 도움이 될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필자는 디자인팀과 남아있을 테니 개발자를 데려가시라." 했다. 그 말을 하면서 필자는 스스로에게진짜 멋진 결정이었어!’ 하며 혼자 뿌듯해 했다. 회사에선 탐탁치 않아하는 눈치였지만, 필자생각대로 하기로 했다출장자로 개발자 명을 뽑았고 달여 출장을 다녀왔다. 내로라하는 회사들과 여러 번의 미팅이 있었고, 관심있어 하는 몇이 있었다고 했다. 투자의향서가 올거라고 했다. 기다림의 시간이 흘렀지만 끝내 투자의향서는 없었다. 급한 마음에 첫술에 배불릴 생각을 했던 것은 아니었던가 싶다.

 

돈은 바닥났고, 외주도 끊어졌다회사의 분위기는 엉망진창이었고 사람들은 서로의 탓을 했다. 투자자가 참석한 회의에서 필자의 해임안 상정의견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미국출장 등에서 지시를 따르지 않아 조직운영이 힘들다는 것이 이유라 했다. 귀를 의심했다. 기가 막히고 화가 났다.

 

설립자들의 회의가 소집되었다. 부당하다고 느꼈던 일들, 그럼에도 참았던 일들을 짚고 오해를 풀고 싶었다오랜 앙금을 털고 싶었지만, 회의는 전혀 다른 이야기로 시작되었다회사를 계속 유지하느냐 마느냐 하는 이야기였다. 투자금은 이미 바닥이 났고, 빚도 많이 있다고 했다.

 

갈 길이 너무 먼데, 이대로 버티기엔 무너진 팀웍이 가망없어 보인다고 했다. 설립자들이 돈을 갹출할 없다면 다음 달도 힘들다고 했다. 하지만 이미 급여없이 살아왔는데 당장 어디서 돈이 나겠는가. 그러면 차라리 여기서 접자는 이야기가 빙빙돌아 나왔다. 대신 그동안의 쌓인 빚은 설립자들이 나눠서 책임져야 한다고 했다.

 

지난 일들을 정리하고 새로이 마음을 다져보자는 회의가 아니었다. 빚을 나누는데 많이 신경을 쓰는 같았다. 그날의 회의는 서로 감정만 상한채 마무리 되었다그리곤 추석 연휴를 앞두고 직원들에게 회사해산이 통보됐다전직원이 모이는 자리같은 것은 없었다.

 

손발을 맞춰왔던 디자인팀에게 만큼은 갑작스런 해산에 미안한 마음을 전하고 싶었다. 마지막일지도 모르니 팀원들에게 같이 저녁식사나 하자고 했다. 하지만 디자인팀은 이미 대표님과 선약이 있다고 했다. 그럼 같이하면 되겠다고 했다. 그러나 필자의 참석은 거부되었다. 직원들과 회식을 하고 싶으면 다음 따로 하라고 했다. 어이가 없어 그냥 놓아버렸다.

 

우울한 추석 연휴를 보냈고 회사에 출근한 사람은 필자 밖에 없었다대표들은 대표직을 사임하고 떠났다 사람은 친구들과 사업을 준비한다고 했다. 사람은 함께하던 개발자들과 디자이너들을 데리고 다시 회사를 만들었다고 했다. 관리자로서 직원들 편에 서려고 애써왔다고 생각했는데, 아끼던 디자인팀에게서도 아무런 연락이 없어 서글펐다.

 

그렇게 자신 만만했던, 죽고 못살던 조직의 마지막 모습이 고작 정도 밖에 안되는지 서글펐다알고 지내던 대표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우리 회사 이야기를 들었다고 했다. "네가 해산하자고 고집부리는 바람에 회사를 해산했다던데 어찌된 일이냐?" 물었다그제서야 대충 그림이 그려졌다. 필자만 몰랐던, 필자의 배역이 악역이었나보다 싶었다변명할 기회같은 것은 없었다.

 

혹시나 나도 모르게 잘못했던 일이 있었던 것은 아닌지 백번을 되짚었지만 아무리해도 답은 찾아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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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