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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왕실 대부분이 집중하는 문제 1번은 군주정의 유지다. 모나코나 리히텐슈타인 같이 작은 나라의 대공가에선 우선순위가 낮지만, 규모와 국력이 일정 이상이고 그래서 왕국인 나라들은 그 규모만큼의 여론을 늘 신경 써야 한다.

하지만 사람을 통제하는 것은 늘 어렵다. 태어나서 왕족인 사람도 그렇고, 결혼해서 왕족이 된 사람도 그렇다. 누군가는 사고를 친다. 혹은 논란거리를 가진 사람이 왕족으로 들어온다.



네덜란드의 사례, 독재 부역자

2001년, 당시 네덜란드의 왕세자였던 빌럼 알렉산더르가 약혼을 발표했다. 상대는 막시마 소레기에타라는 아르헨티나 금융업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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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럼 알렉산더르 국왕과 막시마 소레기에타 왕비


왕실 그루피까지는 아니었지만, 네덜란드 왕세자와 같은 파티에 참석하게 된다는 것을 의식하고는 행사에 갔고, 혹시나 하고 시작한 연애가 잘 되어 약혼까지 간 것이었다. 의회와 여론은 난리가 났다.

네덜란드는 막시마 소레기에타가 평민이며 출생은 사생아라는 평범한 이유로 뒤집어지지 않았다. 막시마의 아버지는 호르헤 소레기에타, 아르헨티나의 비델라 군부 독재정권에서 농무성 장관을 지낸 사람이었다.

장관이었으니 단순한 레벨의 부역자도 아니었는데, 더욱 고약한 것은 호르헤가 장관을 하던 비델라 정권에서 벌인 짓이었다. 일명 ‘더러운 전쟁’이라고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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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르헤 비델라 전 대통령(좌) / 호르헤 소레기에타(우)


호르헤 비델라 대통령은 1976년에 쿠데타로 집권해 1983년까지 버텼다. 이 기간 동안 내내 아르헨티나 국민들을 대상으로 정부에 의한 백색테러가 조직적으로 자행됐다. 살인, 강간, 고문, 정보 조작은 기본이었다.

고문에는 성고문이 들어갔으며, 성고문에는 강제 수간도 있었다고 한다. 갓난 자녀를 강제 입양시키기도 했다. 아이를 빼앗긴 산모 중에는 성고문으로 인해 임신하게 된 사람들도 있었고, 이 산모들 대부분은 아이가 태어난 직후 살해당했다. 한국의 광주와 같은 상황이 7년 동안 아르헨티나 전국에서 일어났다고 보면 맞을 것이다.

호르헤 소레기에타는 이런 짓을 벌인 정부의 공무원이었고, 1979년부터 1981년까지는 장관이었으며, 막시마 소레기에타는 이런 사람의 혼외 자녀였다. 네덜란드가 개방적이고 진보적인 나라라고 하지만 뒤집어지기 충분한 상황이다.

하지만 왕세자 빌럼 알렉산더르의 의지는 확고했다. 왕세자는 예비 장인 호르헤의 결백을 주장하다가 안 먹히자 왕위계승권까지 베팅했다. 예비 왕세자비인 막시마는 좀 더 똑똑했다.

그녀는 아버지의 과거 행적을 규탄하는 발표를 하고, 결혼식과 대관식에 아버지를 불참시키겠다고 약속했다. 빌럼 알렉산더르의 강력한 의지와 막시마의 석고대죄가 먹혀 들어갔는지 의회와 여론이 발을 빼줬다. 두 사람은 다음 해에 결혼했고, 막시마는 약속을 지켰다.

막시마 왕세자비는 왕족이 되기 전까지는 잘 나가는 금융업자였다. 유능한 사람이었으니 아버지 문제가 봉합된 것일 뿐 해결된 것은 아니란 것을 알고 있었다.

막시마는 모범적인 왕족이 되어서, 아버지 문제를 국민들이 눈감아줄 수준의 문제로 낮추기로 했다. 우선 무서운 속도로 네덜란드어를 마스터해서 원어민 수준의 구사력을 갖췄다. 또한, 자신의 전공을 살려서 왕족으로서의 관심 분야를 서민 대상 소액 대출로 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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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시마 왕비와 아버지 호르헤 소레기에타


언론 플레이 전략도 좋았다. 간간이 ‘아버지의 죄를 딸에게 묻는 것은 연좌제’라는 말이 흘러나가게 했고, 호탕한 성격의 금융업 엘리트라는 자신의 매력 포인트를 자주 노출했다. 행사 참석과 연설 등의 공무 수행에 성실했음은 물론이다.

그러는 동안 남편은 아내에 대한 비난에 약간 과도할 정도로 강하게 반응했다. 이 반응은 어떻게든 아내와 가정을 지키겠다는 의지로 해석되었다.

비슷한 연배의 다른 나라 왕/왕세자들의 꼬라지와 대비되면서 점수를 따는 상황이 되었다.

바다 건너 영국에선 왕세자가 아내와 거짓 결혼을 했다가 내쫓았다더라, 북쪽 스웨덴에선 왕자비로 성인잡지 모델이 들어왔다더라, 노르웨이 왕세자비는 소싯적에 난교 좀 즐기셨다더라, 엉망진창인 왕가보다는 그래도 저렇게 화목하려고 최선을 다하는 왕가가 낫지 않냐 등등.

그러다 결혼 12년만인 2013년에 남편이 어머니에게 양위 받아 빌럼 알렉산더르 왕이 되었다.

123년 만의 네덜란드 남성 왕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왕실 지지도는 80%를 넘겼다. 굉장히 오랜만의 일이었다.

빌럼 알렉산더르 이전의 네덜란드 왕은 3연속 여왕이었다. 빌헬미나-율리아나-베아트릭스로 이어졌는데, 과장을 약간 보태서 왕가는 빌헬미나 여왕이 세계대전을 두 번이나 겪으며 벌어들인 호감도로 지금까지 먹고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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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헬미나 여왕(좌) / 율리아나 여왕(우)


특히 나치에 대항해 망명정부를 세우고 레지스탕스를 독려하는 라디오를 진행했던 2차대전의 활동은 왕가의 위신을 제대로 세웠다. 왕위를 넘기고 은퇴한 후에도 홍수 피해 지역에 방문하여 위문 활동을 하는 등 진정코 왕다운 왕이었다.

반면 후계자 율리아나 여왕부터는 조금씩 왕가의 위신을 갉아먹었다. 최순실의 네덜란드판 선배인 신앙치료사가 등장해서 왕실을 어지럽히더니, 후계자 베아트릭스 공주의 배우자 클라우스는 나치 유겐트 가입 전력을 들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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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아트릭스 여왕과 클라우스 공


베아트릭스 여왕 또한 남편 문제가 해결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즉위 직후 왕궁을 개축하겠다고 발표했다가 사상 최대의 왕실 비난 여론에 직면했다. 네덜란드의 고질적인 주택 문제가 정점을 찍은 시기에 막대한 세금을 쓰겠다는 소리를 하고 있었으니 왕정 폐지 여론 또한 정점을 찍어주었다.

“주택 문제 해결 없이, 대관식 인정 없다.”는 유명한 시위 구호가 이때 나왔다. 빌럼 알렉산더르 왕세자를 출산하고서야 반왕실 여론이 다소 누그러질 수 있었다.

이렇게 수십 년 동안 왕실 지지도를 꾸준히 말아먹어 왔는데, 막시마가 왕비가 되고 나서는 지지도 80%를 보게 된 것이다.

모든 것이 계획대로 된 것을 확인한 후에야 막시마 왕비는 아버지 호르헤를 왕실 행사에 참석시키기 시작했다. 이제 네덜란드의 여론은 그렇게까지 적대적이지 않았다.

왕비에 어울리게 유능한 사람이고 왕과 같이 있는 게 보기도 좋으니 연좌제 성격의 비난을 하지 말자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

어쩌면 빌럼 알렉산더르 왕의 능력이 발휘된 것일 수도 있다. 어머니와 할머니가 자신이 태어나기 전까지, 증조모가 쌓아둔 업적을 까먹으면서 군주 노릇을 한 것을 모를 리가 없다. 그래서인지 빌럼 알렉산더르 왕은 즉위 후부터 암스테르담 시내 곳곳에서 평상복 차림으로 출몰하여 시민들과 셀카를 찍어주고 가벼운 잡담을 나누는 등 친근한 캐릭터를 만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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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상복 차림으로 쇼핑하고 있는 빌럼 국왕
 

이번 코로나 정국에서는 TV로 대국민 연설을 중계했는데, 2차대전 때의 빌헬미나 여왕 이후 처음 있는 왕의 대국민 연설이다. 벤치마킹한 군주가 증조모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그리하여 실로 오랜만에 모범적인 군주 부부가 네덜란드에 등장했다. 왕은 가족 문제에는 단호하며 국민들에겐 친근하다. 왕비는 학벌 좋고 유능한데 서민 정책에 관심이 많다. 네덜란드 국민에겐 기분이 좋은 일일 것이다.

다만, 아르헨티나 국민들은 기분이 좀 나쁘다.

네덜란드 왕의 장인을 독재 부역자로 만들 수가 없는 탓에 호르헤가 독재청산 재판에서 무죄를 받았기 때문이다. 정권이 끝나기 전에 장관에서 퇴임해서라나 뭐라나. 호르헤 소레기에타는 자식 한 명 잘 둔 덕을 톡톡히 보고 2017년에 편히 죽었다.



벨기에의 사례, 사기꾼이자 학살자

왕가의 치부가 강력하기로는 벨기에 왕가를 따라갈 동네가 많지 않다. 네덜란드의 막시마 왕비의 경우는 핏자국이 진하긴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외척 개인의 인척이 문제인 레벨이다. 반면, 벨기에 왕실은 그리 멀지 않은 조상이 쳤던 사고가 가장 크고 치명적인 오점이다.

네덜란드가 신나게 인도네시아의 고혈을 빨아먹던 제국주의 시대로 가보자. 네덜란드가 싫어서 독립한 벨기에는 제국주의 대열에 끼기에는 많이 모자란 나라였다.

영토가 작고 인구가 적으면서 경제력이 좋은 것은 네덜란드와 같았지만, 식민지 선발주자로서의 이점에다가 강한 해군도 보유했던 네덜란드와 달리 벨기에 제국주의에 유리한 것이 별로 없었다.

게다가 벨기에는 원래 하나로 묶일 수 없는 남북 두 지역이 어쩌다 한 나라가 된 경우였다. 분리주의 수준의 지역감정 때문에 국가 통합도 어렵다. 벨기에인이라는 정체성도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당연히 이 지역을 대표하는 왕이나 대공도 없었다.

그래서 벨기에는 독일에서 명망 있는 가문을 초빙해 벨기에 왕가로 추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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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기에 초대 국왕, 레오폴드 1세


추대된 왕은 유능해서 신생 입헌군주국의 국제 위상을 안정화시키는 빡센 일을 해냈다. 대신 작은 나라 콤플렉스가 생겨버렸다. 우리도 제국주의 해서 식민지 만들고 부강한 나라가 되고 싶어! 이 콤플렉스는 아들인 2대 왕, 레오폴드 2세에게 전해졌다.

그리고 레오폴드 2세는 단번에 네덜란드 레벨의 제국주의로 점프할 수 있는 비책을 찾아냈다. 그건 바로 사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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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폴드 2세
 

무대는 콩고 강 이남의 광대한 땅이다. 현재 콩고라는 국호를 쓰는 두 나라 중에서 콩고민주공화국, 일명 DR콩고, 애칭 닥터 콩고가 있는 지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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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고민주공화국 영토


레오폴드 2세는 이 땅을 돈과 정치력으로 구매해서 식민지로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문명화되지 않은 아프리카인들에 대한 인도주의적인 식민지 사업을 벌이겠으니 투자를 해달라고 광고를 했다. 당연히 사기였다.

일단 표면적인 논리도 말은 안 된다. ‘문명화’라는 개념은 철저히 유럽 중심의 시각이었다. 하지만 그런 거 알 리가 없는 당시 유럽과 미국에게는 멋진 이상주의였다.

그렇게 서구 사회의 유력자들이 대량으로 레오폴드 2세의 낚시에 걸렸다. 벨기에 정부를 비롯한 여러 귀족과 자본가들은 투자계약서를 대충 보고 서명을 해주었다.

당시 콩고는 강력한 통일 왕국이었던 콩고 왕국이 해체되고, 네덜란드와 포르투갈의 식민 세력이 이런저런 사정 때문에 물러난 후, 고만고만한 소왕국과 소부족체들이 난립하던 혼란기였다.

지쳐있던 현지의 왕들과 추장들은, 강력한 정치적 통합 권위를 제공해 콩고를 다시 위대하게 만들어주겠다는 레오폴드 2세의 이상론이 괜찮아 보였다. 현지 유력자들은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는 조약에 일단 서명을 해주었다.

그렇게 1884년, 레오폴드 2세는 벨기에 영토의 75배에 달하는 콩고 강 이남의 영토를 꿀꺽했다. 심지어 벨기에령도 아닌, 레오폴드 2세 개인의 영지였다. 그 이름 하여 ‘콩고 자유국’이었다. 이름만 자유지 왕 개인의 사유물이었다.

그리고 콩고는 지옥이 되었다.

제국주의 식민지의 특성 중 하나는 몇몇 수출용 생산품에 몰빵하여 내수 경제를 박살내는 플랜테이션 산업이다. 콩고 지역의 특산물은 상아와 고무다.

레오폴드 2세는 이 두 산물의 생산과 무역을 독점했고, 콩고는 상아와 고무 생산 외에는 산업이 전무한 지역으로 변해버렸다.

모든 노동자들에게는 일일 의무 생산량이 주어졌다. 이 생산량을 채우지 못하면 어린아이라 하더라도 손목을 절단했다. 즉 아동노동을 넘어서 아동강제노동은 기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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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몫의 고무를 재취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살해당한 딸의 잘린 손과 발을 바라보는 아버지. 딸은 다섯 살 어린이였다.


그리고 의무생산량은 연좌제로 적용되었다. 가족 구성원 중 누군가가 생산량을 채우지 못하면 다른 가족이 어떻게든 채워야 했고, 못 채우면 같이 손목이 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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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개처형, 감금, 뇌물, 강간, 학살, 거주지 추방, 심지어 강제 매춘을 위한 인신매매 등의 범죄도 레오폴드 2세의 콩고 자유국 정부에 의해 자행되었다. 이 범죄를 수행할 병력은 현지와 주변국의 용병으로 조달했다.

콩고 자유국에서 학살과 기아 등으로 사망한 숫자는 정확하진 않지만 수백만 단위다. 과장을 보태고 난민과 불구자의 숫자까지 합한 경우엔 천만을 넘어간다.

벨기에 정부를 비롯한 투자자들은 이를 막을 수 있었다. 그들이 투자한 목적은 콩고 땅에 유럽식 문명 질서가 들어서 콩고인들이 행복해지고 콩고의 자연을 탐사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속내는 착취 경제였을 수 있으나, 최소한 저 정도의 잔혹함을 상상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레오폴드 2세는 투자자들이 자료를 요구할 때마다 조작된 자료를 제공했다. 현지 선교사의 고발이 나오면, 언론을 매수하거나 ‘아니 어떻게 그런 일이 내 영토에서!’라고 외치며 놀란 척을 했다.

24년 동안 레오폴드 2세는 신나게 콩고인들의 손목을 자르며 고무와 상아를 뽑아냈다. 그 돈으로는 벨기에에 자신을 기리는 으리으리한 대형 건축물을 여럿 지었다. 조지프 콘래드의 소설 ‘어둠의 심연(혹은 암흑의 핵심)’과 영화 ‘레전드 오브 타잔’이 이 시대의 콩고를 배경으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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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폴드 2세가 지은 건출물 중 일부 / 생캉트네르 공원(위), 안트베르펜 중앙 철도역(아래)
 

하지만 레오폴드 2세의 만행은 결국 드러나게 되었다. 서구사회는 1900년대가 되었을 때 레오폴드 2세가 어떤 인간인지, 콩고에서 뭘 하고 있는지를 알게 되었다. 현지에서 지옥을 목도한 선교사들의 줄기찬 고발이 만든 성과였다.

식민주의의 대장인 영국마저 끔찍함에 치를 떨었다. 결국 벨기에 정부는 1908년 레오폴드 2세로부터 콩고 자유국 영토를 몰수했다.

그나마도 주요 서류는 왕이 태워버린 후였다. 레오폴드 2세는 곧 사망하고 국민들은 장례식 행렬서 왕의 관에 침을 뱉는 등 다양한 모욕으로 왕을 보냈다.

레오폴드 2세로 인해 콩고의 경제는 박살 나 현재까지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용병과 주민들의 갈등은 형태를 바꿔 콩고 내전의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그의 그림자는 콩고에서는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그리고 레오폴드 2세는 근대의 학살자 중 사망자 숫자로 히틀러와 3~4위를 놓고 경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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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세계 학살자 순위/ 1.마오쩌둥(중국) 2.스탈린(소련) 3.히틀러(독일3제국) 4.레오폴드2세(벨기에) 5.도조 히데키(일본)
 

반면, 벨기에는 콩고에서의 잔혹한 수탈을 거의 교육하지 않았다. 레오폴드 2세 사후 ‘거대한 망각’이라 불리는 사회적 현상이 등장해 현재까지 이어졌기 때문이다.

오히려 벨기에-콩고판 식민지근대화론도 등장했다. 정부 각료 및 왕족이 가끔 망언도 했다. “레오폴드 2세는 콩고 땅에 한 번도 간 적이 없는데 어떻게 착취를 했다는 거임?”

이건 일본보다도 못하다. 일본은 다음 내각에서 입을 씻어서 그렇지 식민 지배를 사과한 내각도 있었고, 황가 인사들이 레벨은 낮으나마 사과를 하려는 액션을 취하기는 했다.

반면 벨기에 정부가 처음으로 식민지배를 사과한 것은 한참 늦은 2002년이었고, 그나마도 레오폴드 2세의 얘기는 빼놨다. 왕가는 사과다운 사과는커녕 제대로 인정도 하지 않고 있었다. 반성도 교육도 없으니 벨기에 국민들이 일본 국민보다 더욱 과거사에 무지한 것은 당연한 결과다.

하지만 금년 조지 플로이드 사망 사건으로 인해 인종차별 역사에 대한 세계적인 각성이 일어나면서, 벨기에 여론이 레오폴드 2세를 제대로 ‘인지’하기 시작했다.

그전까지는 ‘콩고를 식민지로 만들어서 착취 좀 했지만, 대형건축물을 여럿 지은 업적이 있는 왕’, 요약하면 ‘크게 자랑스럽지는 않은 왕’ 정도였다.

DR콩고, 즉 콩고민주공화국이 독립한 해가 1960년이니, 60년이 지나서야 벨기에 국민들이 처음으로 정신을 차린 것이다. 전국에 있는 레오폴드 2세의 동상을 모조리 철거하자는 청원이 각지에서 제기되었다.

결국 지난 6월 30일, 필리프 현 국왕이 벨기에 왕가로서는 최초로 식민 지배를 사과했다. 레오폴드 2세의 이름은 빠졌지만, 명백히 그 시기를 벨기에 정부 시기와 구별해서 언급했다.

이토록 벨기에는 나쁜 의미로 많이 보수적이다. JTBC의 예능 프로 ‘사서고생’에 출연한 박준형 씨는 벨기에 촬영 중에 브뤼셀 대로 한복판에서 현지 남성들에게 인종차별 가해를 당했다.



 

3년 전 필진 K리S 역시 해당 방송 내용을 언급하며 벨기에의 인종차별을 부끄럽게 고백한 글을 여기 딴지일보 지면에 실은 바 있다.(당시 기사 링크)

벨기에는 왕족 구성을 봐도 다른 유럽 왕가들보다 보수적 색채가 더 짙다. 필리프 왕의 배우자 마틸드 왕비는 같은 세대 왕족 중에서는 거의 유일한 귀족 출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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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프 벨기에 현 국왕과 마틸드 왕비
 

유럽의 다른 입헌군주정 국가들은 평민 왕족들을 실험하고 나름의 성과를 얻고 있는 가운데 홀로 튄다. 필리프 왕 또한 선대에 비해 지역감정 해소, 국민과의 거리 축소 등의 분야에서 소홀하다는 평가다.

그렇다고 선대의 왕들도 딱히 모범적인 군주는 아니었다. 할아버지인 전전 전대 왕 레오폴드 3세는 나치에게 매우 쉽게 항복한데다, 왕비가 사고사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장남의 가정교사와 재혼하는 등의 실망스러운 행보에 권위가 흔들리다가 물러났다.

왕비의 사망 사고도 레오폴드 3세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가다가 벌어진 것이었다. 아버지 전대 왕 알베르 2세는 사생아 스캔들에 시달리다가 물러났다. 이 스캔들을 취재해 폭로한 세력이 분리주의 진영이라는 루머는 지금도 꾸준하다.

벨기에는 한 나라로 묶일 수 없었던 남부와 북부의 지역감정이 심각해, 분리주의 정당이 현재에도 의회에 진입하는 나라다. 그런데 현임 왕은 궁 안에 있기를 좋아하면서 국민들과 거리를 둔다. 평민 배우자를 고려해본 흔적도 별로 없다.

과거사의 오점은 최대한 잊으려고 애를 써왔다. 그나마 마틸드 왕비가 최초의 벨기에 출신 왕비이며 그 대외 활동이 빈부격차 해소와 의료 서비스 확대 등 적절한 아젠다에 몰려 있는 것이 유일한 위안이다.



다음 편
 

끔찍한 얘기가 많았던 회차를 뒤로하고, 다음엔 마음 따뜻해지는 왕실을 구경하러 가자. 레오폴드 2세를 강력하게 비난한 조상을 둔 덴마크 왕실과, 조국 민주화에 큰 공을 세운 스페인 왕실의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