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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차 카와나카지마 전투, 한번 진이 무너지면 그대로 당하기에 딱인 난감한 상황(전편 기사 참고-링크). 먼저 손을 쓴 건 신겐이었다. 신겐의 참모였던(존재 자체가 환상일 수 있지만) 야마모토 간스케(山本勘助)가 작전을 내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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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천과 지> 中 (이하 동일)

 

“딱따구리 전법을 사용해야 합니다.”

“딱따구리?”

“딱따구리가 벌레를 잡을 때 어떻게 잡습니까? 구멍을 파서 벌레를 낚아챈다? 아닙니다. 딱따구리는 구멍의 반대쪽으로 두들겨 벌레를 놀라게 합니다. 그럼 벌레가 스스로 기어 나옵니다. 이걸 낚아채는 겁니다.”

“음...”

“우리 군의 군세는 2만. 이 중 1만 2천을 사이죠산(妻女山)으로 밀어 올립니다. 그러면 우에스기 군이 놀라 병력을 치쿠마가와(千曲川) 강 건너편의 카와나카지마로 퇴각시킬 겁니다. 우리가 미리 진을 치고 있다가 떠밀려온 적을 급습합니다. 앞뒤로 우에스기 군을 협격하면 그대로 전멸시킬 수 있습니다.”

 

세간에서 '딱따구리 전법(啄木鳥の戦法)'이라 불리는 전술의 탄생이다. 뭔가 대단해 보이지만, 사실 기원전 333년에 알렉산더 대왕이 이수스 전투에서 사용했던 전술을 변형한 것이다. 

 

지금까지도 활용되고 있는 ‘망치와 모루 전술’이기도 하다. 

 

“아무리 강한 쇠도 모루에 대고 망치로 두들겨대면 꺾인다.”

 

1차 걸프전 때도 사용된 망치와 모루 전술은 대규모 병력의 회전 때에 한번 씩 언급되는 전술이다 (군대의 전술전략은 상당히 보수적이다. 사람의 목숨이 걸려 있는 문제이기에 검증된 걸 상황에 맞게 변형해서 사용하곤 한다).

 

야마모토 간스케는 카와나카지마에서 겐신을 죽이기 위한 덫을 던졌다. 신겐과 그의 숙장(宿將)들은 이 작전을 쌍수 들고 환영했다. 

 

다케다 4천왕인 바바 노부후사(馬場信房), 역시 다케다 4천왕이자 다케다 신겐의 애인(?)으로 추정되는 코우사카 마사노부(高坂昌信, 카스가 토라츠나(春日虎綱)라고 불리기도 함)가 별동대를 지휘하기로 결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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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전투를 배경으로 한 영화인 <천과 지>를 보면, 겐신과 신겐이 전투 직전까지 치열하게 수싸움을 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겐신이 예상을 깨고 가이쓰 성(海津城)이 내려다보이는 사이죠산에 진을 친 걸 보고 신겐이 한마디 던진다.

 

“겐신은 내가 카와나카지마에 도착하기 전에 헛심을 쓰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성을 쳐서 함락시키는 것은 겐신이 노리는 것이 아니다. 겐신이 노리는 것은 단 한 가지, 나의 목이다.”

 

영화의 대사지만, 상황을 적확하게 표현했다. 겐신의 목표는 신겐이었다. 신겐에 대한 겐신의 증오는 뿌리가 깊었다. 

 

문제는 이때부터다. 지루한 대치 끝에 나온 신겐 군의 묘수는 악수가 돼버렸다. 

 

신겐이 별동대 1만 2천을 밀어올린 그때, 겐신은 역으로 모든 병력을 이끌고 신겐의 본진으로 내려왔다. 짙은 안개에 몸을 숨긴 채 조용히 산을 내려온 것이었다. 신겐에겐 '아닌 밤중에 홍두깨'였다. (전날 겐신은 다케다 군의 정찰병을 모두 잡아 죽인 다음 본진이 있던 곳에 병사 100명을 남겨둔 다음 종이 깃발과 35군데에 화톳불을 피워서 마치 본진이 그대로 있는 듯 위장했다. 전쟁기술은 예나 지금이나 거의 변한 게 없는 것 같다) 

 

“겐신을 산에서 쫓아내면 우리가 받아친다. 병력은 우리가 더 많다. 앞은 8천 본대가 버티고, 뒤는 바바와 코사카의 별동대 1만 2천이 밀고 내려온다. 겐신은 앞뒤로 협공을 당해 전멸할 것이다.”

 

신겐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전투에 있어서만은 겐신의 감각이 신겐의 그것을 뛰어넘었다. 

 

'천재'

 

전장에서의 우에스기 겐신의 감각. 그것도 야전에서의 감각은 당대 누구도 쫓아가지 못했다. 겐신은 신겐이 병력을 나눠 별동대를 투입할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

 

예민한 관찰력이다. 다케다 신겐의 본진에서 밥 짓는 연기가 올라왔는데, 평소보다 연기의 숫자가 많았다. 전투 중에 취사를 할 수 없기에 주먹밥을 미리 싸놓기 위해 밥을 많이 지은 것이다. 이걸 겐신은 놓치지 않았다.

 

“신겐이 움직인다.”

 

탁월한 감각의 소유자인 겐신은 직관과 임기응변을 더했고, 누구보다 임기응변을 받쳐줄 ‘속도’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다. 겐신은 찰나의 틈을 찾아냈고,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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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겐의 본대 병력이 8천 명, 겐신은 1만 3천 명. 신겐이 겐신보다 7천이나 많았지만, 오전 7시 기준으로는 겐신이 더 많았다. 겐신이 전체병력에선 밀리지만, 필요한 시간, 필요한 장소에 더 많은 병력을 투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천재들의 특징이랄까?).

 

“채찍 소리를 삼가고 밤 강을 건넜으나.”

 

에도 시대 후기의 대표적인 문필가였던 라이 산요(頼山陽)는 이 당시를 이렇게 표현했다. 말 그대로다. 겐신은 발소리를 죽여가며 다케다 신겐에게 다가가고 있었다(영화 <천과 지>를 보면, 우에스기 겐신은 카와나카지마 근처에 짙은 안개가 끼는 것에 대해 부하에게 묻는 장면이 나온다. 이 안개를 배경 삼아 겐신이 치고 내려갈 것을 암시하는 장면이다).

 

별동대는 어떻게 됐을까? 군대를 갔다 온 이들이라면 예측 가능할 것이다. 사단병력(1만 2천의 병력이었으니 1개 사단 규모다)이 야간 행군, 그것도 기도비닉(은밀하게 움직인다는 뜻의 군대용어)을 유지하며 산을 우회한다는 건 보통 일이 아니다. 산을 타고 넘는 것도 문제지만, 이걸 적에게 들키지 않고 움직인다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오늘날과 같이 전기가 있는 것도 아니고, 오로지 사람의 눈에 의지해야 했다. 횃불을 든다면 적에게 발각될 것이고, 1만 2천의 병사들이 조금만 떠들어도 적의 귀에 들어갈 테니 야간행군, 그것도 산지에서의 야간행군은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많은 부담을 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겐의 별동대는 새벽 무렵에 겐신의 본진이 있는 사이죠산에 도착한다. 그러나 펄럭이는 깃발과 타다 만 화톳불 더미가 있을 뿐이었다. 하룻밤의 야간행군이 헛수고로 끝이 났다.

 

헛수고에서 끝이 났다면 다행이었겠지만, 다케다 신겐 군에게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던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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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했다.”

 

바바 노부후사(馬場信房), 코사카 마사노부(高坂昌信)의 눈앞에는 우에스기 겐신과 다케다 신겐의 전투가 펼쳐지고 있었다.

 

수적 우세를 자랑하던 다케다 신겐이었지만, 9월 10일 오전의 상황은 다케다 신겐의 열세였다. 우에스기 겐신을 상대로 '수적'으로 열세한 상황. 게다가 ‘기습’이었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겐신의 머릿속을 가득 채운 건 ‘신겐의 목’이었을 거다. 어차피 전체 병력에서는 밀리는 상황, 기습적으로 신겐의 본진에 난입한 건 단 하나의 전력적 목표인 '신겐의 목'을 위해서였다. 다케다 가문은 신겐이란 구심점이 사라지는 순간 사분오열 찢겨져 나갈 게 뻔했다. 다케다 가문이 전국을 호령할 수 있었던 건 신겐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신겐만 사라진다면 겐신은 아랫배를 찍어 누르던 통증을 제거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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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력을 휘몰고 내려온 겐신은 카와나카지마의 평원에 도착하자마자 ‘차륜전법(車懸りの戦法)’을 구사했다. 차륜진은 각 부대가 시간 차 없이 교대로 적을 타격하는 전술로, 말 그대로 병력을 투입해 쉴 새 없이 몰아치는 전술로 추측된다. (‘사선진(斜線陣)’의 변형이 아닐까 추측해 본다. 기본적으로 차륜진이란 진형이 존재 유무에 대해선 아직도 많은 설이 오간다) 

 

다케다 신겐 일생일대의 위기였다. 공성전이라면 모를까 야전에서 전투의 신 우에스기 겐신을 맞이했으니 말이다. 

 

(우에스기 겐신이 공성전에는 약하다는 평이 많지만, 이 부분은 한 번 생각해 봐야 할 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공성전’은 시간과의 싸움이다. 조총은 일찍부터 사용했지만, 대형화포나 공성무기를 공성전에 대단위로 투입한 적이 없는 당시의 전투양상을 보면, 공격 측에서 성을 공격하는 방법은 ‘해자(垓字)’를 메워 식량 유입을 막고 물길을 끊는 것. 그 다음 원군의 지원을 막아서는 게 고작이다. 이게 싫다면 해자를 막고 피를 흘리며 성벽을 제압해 나갈 수밖에 없다. 히데요시처럼 모략을 써서 성을 넘겨받는 것과는 거리가 먼 상황에서는 공성전은 시간과의 지루한 싸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