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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량진 삼분지계

 

본격적인 경매가 시작되면, 가장 먼저 분주해지는 사람들이 있다. ‘주재’들이다. 이들은 산지의 출하주를 대신해 노량진에 주재(駐在) 하며 경매에 참여하는 '주재하주'다. 즉 출하주의 대리인인 셈이다. 주재의 임무는 오직 하나. 가져온 상품을 가능한 좋은 가격에 파는 것이다. 밤새 싣고 온 수산물들이 더 싱싱하고 더 탐스럽게 보이도록 진열에 각을 잡는다. 그 진지함이 작품의 매무새를 가다듬는 큐레이터 못지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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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닥을 메우고 있는 작품들 앞에, 갤러리들이 하나 둘 모여든다. 모자에 번호를 단 중도매인들이다. 새로운 물건이 깔릴 때마다 사방에서 날카로운 눈빛들이 날아와 박힌다. 각자의 목표 매물을 예의 주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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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중도매인이 다가가 갑오징어 대가리를 톡- 때린다. 영문모르고 얻어맞은 오징어는 하얗게 질렸다가 다시 원래 낯빛으로 돌아온다. 아직 신경이 생생하게 살아있다는 증거다. 민어 턱 밑을 유심히 들여다본다. 거무튀튀하지 않고 선홍색을 띠는 아가미가 물이 좋은 녀석이다. 아구는 내장이 그 선도를 측정하는 척도가 된다. 탱탱한 간이 배 밖으로 나와있는 놈이 상품이다. 중도매인들은 바닥에 깔린 물건들의 상태, 물량을 보고 최종 예상금액과 목표금액을 머릿속에 정리한다. 경매에 돌입하기 직전, 마지막 초읽기 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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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의 목적도 하나다. 상품을 가능한 좋은 가격에 사는 것. 주재와 중도매인 모두 밤새 '좋은 가격'을 쫓는다. 다만 서로 과녁이 다를 뿐. 경매는 그 접점을 찾아 쉼 없이 공을 주고받는 과정이다. 버스럭- 버스럭- 박스가 부딪히며 내는 마찰음 위로 묵직한 긴장감이 흐른다. 양 진영이 각자의 패를 만지작거리며 결전을 준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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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이어 경매차량이 경쾌한 후진음을 내며 미끄러져 들어온다. 곧 벌어질 대전의 심판되시겠다. 차량에는 수협모자를 쓴 사람 둘이 서있다. 왼쪽의 남자가 마이크를 들고 목을 가다듬는다. 경매사다. 경매 전체를 진행하는 MC. 경매사는 당일 상장된 물건에 대하여 중도매인들의 응찰을 받아낸다. 옆에 선 이는 기장. 보조 경매사다. 입찰 결과를 전광판에 입력해 실시간으로 중계하는 역할을 한다. 경매팀의 마지막 멤버는 감정사. 진열된 상품 사이를 다니며 경매사에게 물건의 상태를 전달하고 현재 경매 중인 상품의 위치를 잡아준다. 과열된 현장의 질서를 잡아주는 파수꾼이다.

 

생선은 물을 떠난 순간부터 가치를 빠르게 잃어간다. 경매팀에겐 그래서 속도와 정확성이 생명이다. "왈라- 왈라- 2만 2만" 일정한 운율을 타고 빠르게 터져 나오는 경매사의 '호창(呼唱)'은 흡사 작두 탄 주문 같다. 경매사, 기장, 감정사 이렇게 세명이 한 조를 이룬 4개의 팀이 하루 평균 100톤이 넘는 노량진의 물동량을 감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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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건을 파는 주재, 물건을 사는 중도매인, 그리고 그것을 중개하는 경매팀 이렇게 삼각편대가 노량진의 새벽을 누빈다.

 

아구찌 전쟁

 

일하는 자에겐 누구나 특별한 순간이 있다. 절치부심하던 계약을 성사시킨 영업사원의 뿌듯함이나, 오늘따라 기가 막히게 뽑혀 나온 육수를 맛보는 곰탕집 주방장의 흐뭇함 같은. 비록 그 찰나의 순간들이 인생을 바꿔놓는 힘센 변곡점이 아닐지라도, 먹고사는 일이 마냥 고달프게만 느껴지게 하지 않는. 직업인으로서의 성취감 같은 것 말이다.  

 

노량진 중도매인에게도 그런 순간이 있다. 당일 최고의 선도와 품질의 물건을 선점하는 것. 상인들은 그것을 '아구찌를 잡았다'고 한다. 아구찌는 '당일 최고의 물건'이라는 뜻이다. 다른 말로는 '아사이찌'. 일본에서 건너온 업장 용어로 추정된다.

 

아사이찌는 한자에 따라 아침에 가장 먼저 하는 일(朝一), 또는 아침에 여는 장(朝市)이란 뜻이다. 허나 아구찌라는 단어는 정체불명이다. 굳이 한자를 추측하면 開口(アグチ-아구치)인데 입을 연다든가, 외부를 향해 열어두는 것 정도로 해석할 수 있다. 부자연스럽지만 열다를 뜻하는 '아쿠(開)'에 가격을 뜻하는 '치(値)'붙일 수도 있겠으나 일본인의 한자감각으론 어색하다. 시장 상인들도 유래를 모르고 일본인이 들어도 이상한, 노량진 세계의 재미난 단어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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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A급의 상품인 만큼, 아구찌는 당일 품목 최고가에 가격이 형성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아구찌를 노리는 자들은 단가보다 품질에 우선순위를 두고 호가를 넣는다. 호텔 일식당이나 스시 오마카세 업장에 물건을 넣는 중도매인들에겐 아구찌 선점이 그날의 지상과제다.

 

그들뿐만 아니다. 중도매인들마다 매입 전략이 다르지만, 경매대 앞에선 상인이라면 누구나 본인의 역량 안에서 최대한의 아구찌를 잡고 싶어 한다. 품질 좋은 물건을 공급하는 것은 거래처와의 신뢰이자, 수산인으로서의 자존심이기 때문이다. 노량진 경매는 아구찌를 잡기 위한 전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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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구찌는 중도매인들에게만 중요한 것이 아니다. 물건을 상장시킨 주재들에게도 아구찌는 당일 성과의 중요한 기준점이 된다. 가져온 물건 중 아구찌가 최고가를 넉넉히 잡아줘야 나머지 물건들도 여유 있게 낙찰될 수 있다. 경매전 물건을 진열할 때 크고 아름다운 아구찌들을 중도매인들이 도열하는 단상 바로 앞에 놓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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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매사도 아구찌 순서가 오면 목청을 한껏 올린다. 아구찌가 첫 가격을 잘 끊어줘야 경매가 유찰되지 않고 수월하게 진행되기 때문이다. 아구찌의 경매 순서는 대체로 앞쪽이다. 비싼 걸 팔다가 싼 걸 팔면 괜찮지만, 싼 걸 팔다가 비싼 걸 팔면 아무래도 따라붙는 손이 더디게 된다. 아구찌는 경매사에게도 전략적으로 중요한 매물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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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은 눈보다 빠르다

 

노량진 경매의 응찰 방식은 두 가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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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는 단말기를 통한 전자식 경매다. 주로 종류와 물량이 많은 패류나 두족류 경매에서 사용된다. 원하는 물건 입찰 시, 원하는 가격을 찍어누른다. 많은 물건과 다수의 중도매인이 참가하는 대규모 경매에서 효율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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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하나는 전통적 방식인 수화식 경매. 맞다. 순식간에 지나가는 그들만의 암호 같은 손짓, 그거다. 활어같이 비교적 물량과 종류가 적은 경매에서 사용한다. 한때 모든 경매에 전자식 응찰을 도입하기도 했지만, 몇몇 품목은 다시 수화식으로 돌아왔다. 가격경쟁이 치열한 품목에서는 아무래도 손에 익은 방식이 더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패는 역시 손으로 쪼아야 제맛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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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각한 표정으로 경매에 임하던 59번 중도매인이 무리에서 몸을 뺀다. 표정이 밝다. 아구찌 골뱅이를 잡은 것이다.

 

이 시간은 전쟁이죠. 전쟁. 시장 사람들이 설렁설렁해 보여도 눈치가 엄청 빨라요. 경매사의 말투나 호흡만으로도 다른 사람이 지금 얼마에 손들고 있는지 알 수 있어요.

 

방금 저 경매사같은 경우는 호가를 두어 번 정도 외치는 습관이 있거든요.  "3만! 3만!" 이렇게. 제가 방금 골뱅이 한 상자를 양칠(2만 7천 원)에 손들고 있었는데, 경매사의 호창이 "3만, 3만, 3만."으로 미세하게 늘어지는 거 들었어요? 누군가 저와 같은 가격에 들어와있어서 호흡이 바뀐 거죠. 그 순간을 누가 먼저 포착하고 호가를 올리느냐 그 차이에요. 눈치싸움이 살벌하죠.

 

3편에서 계속

 

 

[쿠키기사]  알아두면 쓸데없는 신비한 노량진월드 : 경매수화 편

 

1. 기본 숫자

 

수화는 경매의 언어다. 재밌는 것은 시장마다 위판장마다, 조금씩 그 모양과 방식이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마치 방언처럼. 드문 경우지만 상인이 일터를 옮기면 그곳의 수화를 새롭게 익혀야 하는 것이다. 노량진의 수화는 이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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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10단위 표현법

 

손을 흔든다. 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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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를 든 손을 한번 흔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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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을 내밀면 27. 즉 2만 7천원에 응찰하는 것이다. 

 

3. 주의 하나

 

혹시 새벽 노량진에 방문해서 경매의 치열함을 관전하고 싶다면, 손만 펄떡일 뿐 아무리 봐도 알기 힘드니 그냥 전광판을 잘 보고 있는게 정신건강에 이롭다. 중도매인의 수화 사인은 경매사만 알아야 하는 보안 정보이기도 하다.  

 

4. 주의 둘

 

호기심에 혹은 분위기에 취해 손을 들면 큰일난다. 무면허 입찰로 경매를 방해하지 말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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