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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전히 혼자 감당해야만 하는 시간

 

노가다꾼이어서 좋은 점은 '쉬고 싶은 날 쉴 수 있다'는 거다. 

 

쉬고 싶은 날이란 주로 이런 날이다. 허리가 너무 쑤셔서 일어날 엄두를 못 내는 날, 손목이 너무 아파 내가 과연 오늘 망치를 들 수 있을까 싶은 날, 피로가 온몸을 짓눌러 이불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가기 싫은 날 등. 변명 삼아 얘기하자면 그만큼 노가다라는 게 육체적으로 고되다. 

 

이불 속에서 핸드폰을 슥 열어 문자를 보낸다. 

 

“반장님, 저 오늘 하루 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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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곤 다시 눈을 감는다. ‘오랜만에 늦잠 좀 자볼까 룰루랄라’하면서.

 

보통은 이걸로 끝이다. 쉬는 이유를 추궁한다거나 다음날 출근했을 때 어제 결근한 걸로 타박을 받는 일 같은 건 없다. 어쨌거나 이곳 또한 조직사회다 보니 아예 눈치를 안 볼 순 없지만, 일반 회사 같은 엄격한 규율이나 강제성은 없다. 그게 노가다판 관행이다. 하루하루 일당 받는 일용직이기 때문. 내가 쉼으로써 손해보는 건 오직 ‘나’ 한 사람이니까. 

 

나 하나 빠진대서 공사에 차질이 생긴다거나 막대한 피해 보는 일, 없다. 어떤 공정팀이건 적게는 10~20명, 많게는 30~40명이 움직인다. 한두 사람 빠진다고 표시 안 난다. 반장 입장에서도 그 정도는 늘 염두에 둔다. 오히려 팀의 모든 인부가 출근하는 날이 드물다. 한 달에 두어 번 정도? 그런 날이면 반장이 이렇게 말한다. 

 

“오늘은 웬일로 전원 출근이네? 다들 볼일이 없나 봐? 하하하.”

 

여기까지가 노가다꾼이 쉬는 첫 번째 이유다. 말하자면 자발적 '데마'라고 해야 할까? 하하. 

*데마: 일거리가 없어 쉬는 걸 노가다판에서는 '데마 맞는다'고 표현한다. 비슷한 뜻의 일본어 てまち(手待ち, 데마찌, 작업 시간 중 일거리가 없어 손 놓은 상태)에서 파생됨.

 

노가다꾼이 쉬는 두 번째 이유는 '날씨'다. 아주 덥거나 추운 날에도 현장 문은 열린다. 최대 37℃, 영하11℃에서도 일해봤다. 하지만 비가 오거나 눈이 내리면 여지 없다. 

 

세 번째는 현장 상황 때문이다. 크게 보자면 한 현장이 끝나고 다음 현장이 바로 이어지지 않을 때. 보름에서 많게는 한두 달 데마 맞기도 한다. 작게는 한 현장 안에서 데마 맞을 때다. 어떤 공정팀이든 앞서가는 공정팀이 마무리 하고 빠져줘야 투입될 수 있다. 형틀목수팀을 예로 들자면 앞서가는 철근팀이 마무리 해줘야 일할 수 있다. 공정 간 일정이 안 맞을 때 짧게는 1~2일, 길게는 3~4일 씩 데마 맞기도 한다. 

 

서두가 길었다. 이번 편은 '데마 맞은 날 풍경'이다. 

 

위에서 주저리주저리 떠든 것처럼 노가다꾼 휴일은 갑작스러운 경우가 많다. 자발적인 데마도 보통은 즉흥적이다. “피곤하니까 내일은 쉬어야지~” 생각하고 쉬는 게 아니다. 새벽에 일어나려고 보니 피곤해서(실은 늘 피곤하지만) “오늘 그냥 제껴.” 할 때가 많다. 

 

그렇다보니 예정된 약속이랄 게 없다. 확률적으로 평일에 쉬는 경우가 많다 보니 딱히 만날 사람도 없다. 온전히 혼자 감당해야만 하는 시간이다.

 

해서, 대부분은 잠자거나 TV 보면서 뒹굴뒹굴 하루를 보낸다. 그러는 너는 어떻게 보내느냐고 물으신다면 흠흠, 진짜 시작한다.

 

 

HongE STUDIO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보기와 다르게 난 출근율이 제법 좋다. 따라서 데마 맞은 날이라고 하면 주로 비 내리는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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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난 카페에 산다. 카페가 집이다. 아니, 집이 카페다. 뭔 헛소리냐 하면, 이렇게 상상하면 쉽다. 

 

오래된 동네 가면 작은 구멍가게가 있다. 그런 가게 가서 “계세요?” 하면 안쪽에서 미닫이문을 드르륵 열고, 방에서 주인 아주머니가 신발 신고 나온다. “뭐? 담배 드려유?” 하면서. 

 

말하자면 이런 구조의 집이다. 그리고 가게로 구분할 수 있는 공간을 직접 인테리어해서 카페처럼 꾸몄다. 왜 그런 쓸데없는 짓 했을까? 집 짓는 목수이기 이전에 글 짓는 글쟁이니까 글 쓸 공간이 필요했다. 집에서 글 쓰면 어쩐지 노는 기분이 들어서 기자 하던 때부터 글은 꼭 카페에서 썼다. 오랜 습관이다. 

 

문제는 법이 바뀌어 카페에서 담배를 피울 수 없게 된 때부터다. 애연가인 동시에 담배 없인 글 쓸 수 없는 나에겐 청천벽력이었다. 물론 그 뒤로도 카페에서 글을 쓰긴 했다만, 담배 피우러 밖에 왔다 갔다 하느라 흐름이 끊겼다. 그때 다짐했었던 거 같다.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나만의 작업실을 카페처럼 꾸밀 테다! 그 공간에서 담배를 마구마구 피우면서 글 쓰겠노라!!!

 

그런 사연으로 카페 같은 집, 집 같은 카페에서 살게 됐다. 간판을 내걸진 않았지만, 내 마음속 작업실 이름은 ‘HongE STUDIO’다. (‘홍이’는 친구들이 불러주는 애칭)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이면 빗소리에 잠에서 깬다. 보통 8시나 9시 쯤? 간단히 씻고 외출복으로 갈아입는다. 다음 HongE STUDIO로 출근한다. '출근'이라고 해봐야 문 하나 열고 나가는 거지만 말이다. 

 

취미는 커피와 요리다. 출근하면 커피부터 내린다. 처음엔 가정용 에스프레소 머신으로 내리다가 영 맛이 안 나 모카포트로 바꿨다. 커피 내리는 사이, 블루투스 스피커로 브금(BGM. background music)을 깐다. 비 오는 날은 역시 재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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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잔 들고 자리에 앉으면 우선, 인센스 스틱에 불을 붙인다. 인센스 스틱은 절에서 피우는 향 같은 거다. 인도 사람들이 명상이나 요가 할 때 마음 안정시키기 위해 피우는 거란다. 난 그냥 담배+홀아비 냄새 때문에 켠다. 마음도 좀 차분해지는 것 같고. 

 

모든 준비가 끝나면 글을 쓰기 시작한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담배 피우면서 가만히 앉아 생각한다. '지금부터 글 써야지' 생각한다고 바로 써지는 건 아니므로. 

 

11시 쯤, 출출함이 느껴지면 간단한 요리를 해 먹는다. 마늘로 향 낸 오일 파스타나 샐러드 듬뿍 얹은 냉(冷)파스타 같은 거, 곧잘 한다. 가끔 지인 초대해 스테이크를 구워주기도 한다. 개인적으로 소고기와 해산물을 안 좋아해 돼지 목살이나 닭다리살을 구워준다. 레드와인 곁들여서. 

 

예기치 않은 손님이 찾아올 때도 있다. 가게가 통유리로 되어 있어 진짜 카페로 착각한 손님들이다. 

 

“여기 엄청 예쁘다. 카페 맞죠? 음식도 팔아요?” 

“하하. 여기는 그냥 개인 작업실이어서요. 따로 커피나 음식을 팔진 않아요. 죄송합니다.” 

 

괜히 우쭐해진다. 목수로서, 또 공간 디자이너로서 인정받은 것 같은 느낌이랄까.

 

어쨌든, 글이라는 것도 종일 쓸 수는 없는 노릇이어서 오후엔 대청소를 하거나, 목욕탕에 가거나, 세차 하거나, 셀프빨래방에 이불을 모조리 들고 간다. 이따금 책장을 전부 뒤집어 다시 정리할 때도 있다. 무언가 깨끗하게 하거나 정리하는 순간을 좋아한다. 정리하면서, 복잡한 생각도 같이 정리한다. 

 

읽으려고 사두었다가 차일피일 미뤘던 책을 잔뜩 쌓아두고 왕창 읽을 때도 있다. 장르는 가리지 않는 편이다. 만화책, 에세이, 소설, 인문학 서적부터 도시재생이나 건축, 인테리어 관련 실용서적도 즐겨 읽는다. 최근에는 로컬이나 공간, 청년을 키워드로 하는 책도 찾아 읽는 편이다. 낮잠도 한두 시간 꼭 잔다. 그렇게 바삐 보내다 보면 어느새 해가 진다.

 

하하하. 다 쓰고 보니 완전 재수 없다. 실은, 저렇게 흡족하게 하루 보내는 날은 많지 않다. 고백한다. 나의 바람을 담은 일종의 판타지였다고. 

 

보통은 여느 노가다꾼과 비슷한 하루를 보낸다. 온몸이 피로에 정복된 상태로 아침을 연다. 커피와 담배로 겨우 몸을 일으키지만, 이내 다시 눕는다. 그리고는 아무것도 안 한다. '아무것도 안 하고 있지만 더 격렬하게 아무것도 안 하겠다'는 굳은 의지를 꾹꾹 눌러 담아 가만히 누워 있는다. 그러다가 겨우 밥 챙겨 먹고, 겨우 글 쓴다. 지금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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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들은 늘 이렇게 말한다. 

 

“넌 집에서 혼자 혼자 참 잘 논다. 안 답답하냐? 집에만 있으면? 쯧쯧.”

 

가끔은 그래서 외로운데, 어쩌겠나. 집에서 조용하게 혼자 보내는 시간이 세상에서 제일 즐거운데. 

 

이상, 평범하기 그지없는 집돌이의 데마 맞은 날 풍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