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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내전(세이난전쟁), 청일전쟁, 러일전쟁, 1차 세계대전, 시베리아 출병 등 전쟁을 통해 군용식량 ‘건면포(乾麺麭)’를 발전시켜왔다. 그러나 이때까지의 건면포는 가로 10cm, 세로 5cm, 두께 1cm의 크기였다. 

 

“건빵 2개로 한 끼를 해결했다.”

 

라는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정도 사이즈면 건빵 2개로 한 끼를 해결할 수 있다. 그리고 '부서지는 것'에 대해 곯머리를 앓아야 했다(거기다 한 입 베어 물면 우수수 떨어지니 말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덤벼든 게 1931년이었다. 

 

1931년 9월 18일, 일본 측 입장에서 '만주사변(滿洲事變)'이라 불리는 ‘중국침략’이 시작됐다. 또 다른 전쟁이 시작되자 일본군은 건면포 개량에 들어간다. 여기서 지금처럼 '한 입에 쏙 들어가는' 건빵이 등장한다. 

 

"더 이상 부서질 걸 걱정하지 마!"

"작은 만큼 주머니에 넣고 다니기도 편하다!"

 

사이즈를 줄이니 먹기에 편했고, 생산하기도 좋았다. 덤으로 별사탕까지 들어갔다. 만주사변 이후부터 오늘날의 건빵과 거의 유사한 형태의 건빵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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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乾パン)‘이란 이름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도 이때다. 공식적인 명칭은 '건면포'였지만, 군인들이나 민간인들 모두 ‘건빵’이라 칭하기 시작했다. (‘군용 비상식량’이었지만, 시중에 풀리면서 민간인도 접할 수 있었다. 시중에 건빵을 푼 이유는 ‘지금 전쟁 중’이라는 걸 일반 국민들에게 자연스레 알려 사회를 통제하기 위해서였다)

 

만주사변 이후로도 건빵은 끊임없이 변화를 시도했다. 당분을 더 넣었고, 계란을 풀고, 쌀가루 함량을 더 늘렸다. 본격적인 야전식량으로 발전해갔다.

 

1937년에 중일전쟁이 발발한다. 그리고 이듬해, 일본 육군은 '육군전시급여규칙'을 개정했는데, 건빵에 대한 규정도 포함되어 있다.

 

“건빵의 주원료는 밀가루이며, 건빵 220g, 별사탕 10g을 무명헝겊 봉투에 담을 것. 보전기간은 7년으로 한다.”

 

아편전쟁으로 시작된 건빵이 90여 년 만에 완성된 것이다. 이후 건빵은 태평양전쟁 때까지 군용식량으로 활약하다가, 1945년 패전과 함께 잠시 사라진다. 이후 1954년 자위대가 건빵을 다시 군용식량으로 채택하면서 부활한다. 

 

한국군은 이 건빵을 어떻게 먹게 된 걸까?

 

눈치 챘겠지만, 한국군 건빵의 역사는 일제강점기와 연관이 깊다. 아니, 대놓고 말하겠다. 일본 때문에 한국군이 건빵을 먹게 됐다고 보는 게 맞다. 조선주차군(朝鮮駐箚軍). 훗날 조선군(朝鮮軍)은 제19, 제20사단을 주축으로 편성됐는데, 이 병력들에게 건빵을 보급해야 했다. 조선 내에 자체적인 건빵 생산업체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한반도는 일본에게 있어 중국 진출을 위한 교두보였기에 많은 군사시설이 자리 잡고 있었다. 보급을 위한 건빵 생산도 당연했을 거다.

 

그러다 일본이 항복을 했고, 일본군과 일본인들은 한반도에서 빠져나간다. 건빵들과 제조시설을 남겨놓은 채 말이다. 일제가 물러난 직후 경기도에 남아 있던 건빵 재고만 1,600섬 규모라고 하니 상당량이 남아있었다고 볼 수 있다. 

 

대한민국 군대가 건빵을 먹기 시작한 건 언제부터일까? 확실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지만, 6.25 때 건빵이 지급되었다(국내에서 건빵이 생산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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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한국전쟁 당시 국군의 전투식량은 건빵이 아니라 ‘주먹밥’이었다는 거다. 

 

일본이 100여 년 전 주먹밥을 벗어나 보겠다고 건빵을 만들었던 걸 생각하면 가슴 아픈 이야기지만, 6.25 전쟁 당시 한국군은 주먹밥으로 허기를 달래야 했다. 분명 일본인이 건빵을 먹는 걸 봤고, 생산시설도 있었다고 (추정)하는데, 어째서 건빵을 보급하지 못했던 걸까?

 

이유는 간단하다. 건빵을 만들 수 있는 기술이 없었기 때문이다. 너무도 당연한 게 일제강점기 시절 한반도에 있던 공장이나 상업시설의 관리자, 기술자 등은 거의 다 일본인들이었다. 한국인들은 잘해봐야 ‘보조’ 정도의 역할이었다. 대단위 건빵 공장을 운영하거나 기술을 배운 인력이 있었을까?

 

아무튼 한국군은 전쟁 와중에 소량이지만 건빵을 생산했고, 이걸 보급했다. 하지만 일본 건빵만 한 품질이 나오지 않아 불평이 나오기도 했다. 생산 업체가 워낙 영세하기 때문에 품질을 담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건빵은 인기 식품이었다. 질이 떨어지긴 해도, 전쟁통에 건빵은 보존기한 걱정 없이 든든한 한 끼를 보장해 주는 식품이었다. 군대에서 뿐만 아니라 민간에서도 인기가 높았고, 선물로도 인기가 높았다. (90년대 군번의 행정병들은 ‘건빵’에 얽힌 추억이 하나씩은 있을 거다. 관공서에서 건빵 한 박스와 A4 한 박스를 교환을 했던 추억 아닌 추억들...)

 

전쟁이 끝이 나고, 건빵은 한국군의 전투식량의 자리를 꿰찼다. 오늘날 우리가 먹는 건빵 하나에 장구한 세월이 쌓여있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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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다 완벽한 건빵을 위해 긴 시간 동안 무수히 많은 이들이 피를 흘려야 했다. 전쟁 한 번 마다 건빵이 한 발자국씩 발전한 걸 보면, 역시 군용물품은 사람의 피를 양분으로 진화하는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