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01.27.수요일
산하
1999년 밀레니엄 망년회가 꼬리에 꼬리를 물던 시절, 왕년의 통신 동호회 또래들이 모였다. 술자리가 싯누렇게 무르익고 혀들이 트위스트를 출 때쯤 한 녀석이 뭔가를 돌렸다. 녀석이 LG인가 삼성인가 하여간 잘나가는 월급쟁이인 걸 익히 알고 있었건만 내 입에서 “너 보험하냐?”가 튀어나왔으니 어지간히 취했다 싶다. 술김에 눈을 박아 보고 싶지도 않아서 대충 사인해서 넘겼는데 그것이 민주노동당 입당원서인 줄을 뒤늦게 깨달은 것은 1년쯤 지나서였다. 꼬박꼬박 정체 모를 곳으로 돈이 빠져나가는데 도대체 이게 뭐냐는 아내의 힐문을 받고서야 어이쿠 이마를 쳤던 것이다.

대학 졸업장을 쥐고 사회 물을 먹고 내쳐 달려온 몇 년 동안 나는 그렇게 무심한 ‘직딩’이었다. 동시에 민주노동당이 무슨 정당인지, 뭘 하자고 하는 정당인지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다만 뭔지 모르는 거라면 당장 끊으라는 아내의 요구에 나는 엄숙하게 대처했다. “냅두지? 내 참정권이야.”
가물가물한 과거에 민중 권력을 이야기하고, ‘민중의 독자적 정치세력화’를 부르짖었던 사람들이 아직 그 깃발을 부여잡고 있다고 대충 통밥을 짚었고, 내 무관심과는 별도로 그들은 내 월급에서 돈 만 원과 가끔 전화 와서 요구하는 특별 당비 얼마 정도는 챙겨갈 가치가 있다고 여긴 것이다.
그래서인가 내 당원 번호는 무척 빨랐다. 혹자의 표현대로라면 중앙위원급 번호였다. 하지만 빠르면 뭐하나. 지역 모임 한 번 안 나간 부실 당우인데. 내 번호가 그렇게 빠르다는 것도 나는 당원증을 버린 뒤에야 알았다. 정치적 지지를 표방한 정당이기는 했으나 꼬치꼬치 뭐하는 곳이냐고 캐묻지도 않았고, 어떤 사람들이 당권을 쥐든 말든 관심을 두어본 적도 없었다. 2002년 내가 인터넷이라는 신천지(이미 구세계가 된지 오래였지만 컴맹인 나에게는 무척이나 경이로왔던)에 빠지기 전까지는 더더욱 그랬다.
그 민주노동당이 10주년을 맞았다고 한다. 또 하나의 사실을 깨달았다. 내가 친구에게서 입당원서를 받아들 때 당은 출생신고 전이었다. 이거 이거 나는 거의 발기인 수준이었던 것이다! 이미 맘도 몸도 떠난 당이지만 10주년이라니 ‘꺾어지는 해’를 맞은 대한민국 원내 정당에게 덕담 한 마디를 빼놓을 수는 없겠다. 민주노동당 10주년을 축하드린다. 10년 묵은 정당이 드문 대한민국의 정당 역사를 감안해 볼 때 장차 몇 주년까지 기념하게 될지는 모르겠으나 10년이란 무시 못할 세월의 금자탑이라 할 것이다.
10주년을 맞아 그 과거를 반추하고 미래의 길을 모색하는 토론회가 열린 모양이다. 그래도 생애 최초로 가입했던 정당이라고 외면하려는 시선을 애써 붙들어 내용을 살폈다. 건성건성 읽어내리다가 그만 이름 석 자에서 덜컥 급정거를 당하고 말았다. 그 큰 이름은 새새세상연구소 소장이라는 직함을 지니신 최규엽 선생이셨다.
"민주노동당 10년의 가장 커다란 오류이자 패배는 2008년 2월 3일의 집단 탈당과 분당"이라는 굵은 글씨를 보면서 나는 적잖이 반가와했다. 드디어 이 축농증같이 갑갑하던 분도 머리가 트이시는구나. 분당 사태에 대해 반성하고 분당의 원인에 대해 자성하며 자리를 박차고 나갈 수 밖에 없었던 사람들에게 말이라도 미안하다고 할지도 모르겠구나..... 하며 말대가리에 물소 뿔 날 기대를 한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이게 웬 걸.

“2007년 대선에서 민중들이 민주노동당을 버린 것이 아니었다. 보수로 돌아선 민심이라는 불리한 객관적 조건, 민주노동당의 무능력과 분열상에 경고를 보낸 것이지 '또 권영길‘이라 패배한 것이 아니었다”
대선 당시에 이명박 후보와 권영길 후보를 이틀 간격으로 만났었다. 대선특집 방송을 위해서였다. 이명박 후보 쪽은 자료가 참으로 많았다. 방송꺼리도 많았다. 몰랐던 사실도 부지기수였고 그가 무슨 말을 할 때 귀를 쫑긋 세울 정도로 호기심이 일었다. 하지만 권영길 후보쪽은 그 반대였다. 농담 삼아 이런 말이 오가는 판이었다.
“그냥 5년 전 자료화면으로 편집할까요?”
“응 없으면 10년 전 자료 뒤져봐 그럼 대충 다 있을 거야. 촬영 가지 말고 놀자 킥킥”
출연했던 네 후보 가운데 그 집이며 가족이며 개인사며 각종 자료 등등이 권영길 후보처럼 지겹게(?) 공개된 사람은 없었다. 뭘 찍어도 그 나물에 그 밥이었던 것이다.

권영길 후보의 지난한 과거와 빛나는 개인사를 폄훼하고자 하는 맘은 추호도 없다. 문제는 개인 권영길이 아니라 명색 진보정당 주제에 정책적으로도, 또 후보의 참신성으로도 차별성을 부각시키지 못한 채 대통령 선거라는 기회를 사장시킨 세력이 내세운 대표선수가 권영길 후보였다는 비극일 뿐이다. 97년과 2002년과 달리 추가된 게 있다면 그 무슨 “코리아 연방 공화국” 뭐시깽이인가 하는 구호였을 뿐인 진보정당과 그 삼수생 후보......
“코리아 연방 공화국”이 부처의 깨달음이라도 되는 양 후보의 어깨띠에, 후보 부인의 손 플래카드에 바지런히 들이밀던 세력의 대표격인 최규엽 소장님께서 “패배는 그 때문이 아니라 분열 때문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건 가히 아무데나 기소장 들이밀고 설치는 대한민국 검찰과 비슷한 지적 수준이거나, 전여옥 의원급으로 도타운 안면 근육을 보유하셨다고 생각할 수 밖에 없다. 어느 쪽에 가까울까. 검찰? 전여옥 의원?
그놈의 분열 탓하는 버릇은 유서도 깊고 이력도 났다. 하지만 이건 좀 너무하지 않은가. 허구헌날 바람을 피우고 마누라 안방에서 자는데 대놓고 건넌방에 여자 데려다 놓고 재미보 면서 그거 뭐라하면 가정에 분란 일으킨다고 지랄 지랄하던 인간이, 참다 참다 못 참고 집나간 마누라더러 왜 집 나갔냐고 눈 부라리고 가정의 평화를 위해 돌아오라고 으름장 놓는다면, 그걸 어찌 제대로 된 인간이라 하랴.
언감생심 내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눈물바람까지는 바라지도 않더라도, 무명지 끊어 혈서로 맹세하는 엽기까지는 가지 않더라도, “내 그때는 잘못했고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하마.” 정도로 머리는 긁적거려 줘야 집나간 마누라도 들어올까 말까를 고민해 볼 거 아닌가.
노회찬 심상정 의원이 “출세주의” 때문에 나갔는가? 단순히 ‘당권 투쟁’에 지니까 불뚝밸 나서 나간 것인가? 최규엽 소장님께서는 보다 솔직하실 필요가 있다. 솔직할수록 떳떳하고, 사람들 사이에 거리감을 없애고, 조직의 신임을 받을 수 있다는 교시 잊으셨는가?
그리고 겸손도 늘리셔야 할 것 같다. 제 잘못은 쏙 빼고 남에게만 으르대는 오만은 그 누구의 가르침과는 매우 거리가 멀다 할 것이다. 그리고 용기도 좀 기르셔야겠다. 당 간부가 당원 정보를 보고서로 만들어 북한으로 올려부치는 ‘비자주적인’ 행각을 벌일 때 설사 그와 정치적 의사를 같이 하더라도, “니가 자주파냐. 어떻게 이런 비자주적인 행동을 할 수 있느냐?”고 꾸짖고 읍참마속 정도는 할 용기가 있어야 소장이고 대장이고 빛날 수 있지 않겠나.

솔직 겸손 용감.. 또 뭐더라? 아차 그래 좀 소박하고 성실하게 사람들을 설득할 자세는 갖추시는 것이 좋으리라. 생각하기도 끔찍한 해당 행위를 저지른 자들을 징계도 못 하겠다, 조사도 못 하겠다 뻗대어 결국 사람들을 밖으로 내몰았던 처지에 목 뻣뻣이 들고서 “돌아오라 빤스 끈 줄여 놨다”고 외친다면 이건 소박맞아 마땅한 소박이요 실성한 성실 아니겠는가 말이다.
하아 이거 최규엽 소장님께 품성론 강의를 하게 될 줄은 몰랐다. 하지만 토론회에서의 최규엽 소장님의 모습은 품성론에 대한 복습이 필요해 보였다. 오죽하면 20년쯤 전에 공부하던 내용을 이렇게 끄집어내서 말씀드릴까. 솔직해지시라. 용감해지시라. 소박해지시라 겸허해지시라. 그리고 성실하시라. 후배들한테 골백번도 더 훈계하셨을 터에 왜 그렇게 체화가 더디신지 아흔 아홉 번 알다가 한 번 모를 일이다.
김민웅 교수가 쓴소리를 하셨다는 기사를 읽었다. 민주노동당은 2D라고 말이다. 3D, 4D가 판치는 세상에 2D에 머물러 있다는 말씀이겠거니와 내 귀에는 그것이 쓴소리로 들리지 않았다. 민주노동당을 2D에 비한 것은 너무도 인자하시며 관대하신 발상이었기 때문이다.
지난 번 망년회에서 만난 내 친구처럼 아직도 민주노동당이 노회찬 당인 줄 알고 돈 꼬박꼬박 내고 있는 착한 백성들 말고, 각 지역구 바닥에서 사회의 진보를 위해 묵묵히 일하는 민주노동당의 진성당원들 말고,
자주 깃발은 하늘같이 모시어도 하는 행동은 로봇같이 비자주적인 상층부, 피땀 흘려 함께 일군 당을 깰지언정 ‘본사’ (북한)에 대한 뜨거운 사랑으로 ‘네이버에 나온 정보’ 좀 알려 주었을 뿐인 동지를 해칠 수는 없다고 선언했던 광신자들의 민주노동당에게는 2D라는 평가도 아깝다. 적어도 그들의 민주노동당은 변사가 출연하는 무성 흑백 영화에서 한 치도 벗어나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미 백골만 남은 변사가 간혹 쉰소리로 외칠 뿐이다. “이 땅은 미제의 식민지였던 거디었다.~~~~~” “단결만이 살 길이라는 거디었다~~~” “우리는 마침내 승리할 거디었다~~~~~”
이번 연말 정산에는 진보신당으로부터 받은 서류를 부쳤지만 나는 진보신당 당우로서 얘기한다기보다는 비상식에 적대하며 비이성에 항의하고픈 일반 시민의 입장에서 민주노동당 산하 새세상 연구소장님의 발언에 대해 항의한다.
자칭 진보정당의 원로라면, 거기서 지도급 위치에 있는 분이라면 이런 억지를 부리셔서는 안된다. 뻔뻔하다고까지는 차마 말 못하겠지만 이렇게 두꺼우셔서는 안된다. 팔이 안으로 굽는다면 팔을 꺾는 고통을 감수하는 반성을 한 연후에야 남에게 반성을 요구할 권리가 생길 것이다.
“탈당 사태, 분당이 가장 큰 패배”라고 하셨던가. 그 사태를 부른 가장 큰 책임은 바로 최규엽 소장님 이하 눈에 보이는 것을 없다고 우겼던 민주노동당 지도부에게로 돌아간다. 출세주의도 아니고 분열주의도 아닌 종북주의 탓이었다. 북한의 사상을 자신의 이념으로 수용했으면서도 “북한에 대해 아는 게 뭐 있냐?”는 거짓말을 눈 하나 깜짝 않고 하던 가증스러움 때문이었다. 그러고도 단결하자? 돌아오라? 어디 물귀신이라도 내림받으셨는가?
민주노동당 10주년을 축하한다. 그리고 이제는 좀 바뀌기를 바란다. 변사 해고하고 토키는 갖추고 2D 영화 정도는 틀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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