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01.28.목요일
딴지 조기축구단장
필독

오렌지군단이 왔다.
1
1974년 서독월드컵에서 네덜란드는 우루과이, 스웨덴, 불가리아와 그룹 3에 배정되었다. 우루과이와 스웨덴의 무난한 2차 라운드 진출이 예상되었다. 강호 둘, 약체 둘로 편성된 무난한 조 구성이었다. 토털풋볼로 무장된 네덜란드 때문에 실제로는 죽음의 조였지만...
돌풍은 첫 경기부터 시작된다. 네덜란드는 우승후보 우루과이를 2:0으로 완파해버린다. 우루과이 선수 훌리오 몬테로가 후반전 퇴장당한 것을 보면, 우루과이가 얼마나 몰렸는지를 알 수 있다. 축구에서 반칙은 대체로 매너나 성격과는 관계가 없다. 반칙은 주로 상대팀이 펼치는 경기를 쫓아가지 못했을 때 나오게 마련이다.
한편 이 경기에서 두 골을 몰아친 네덜란드의 요니 렙은 즉시 축구팬들의 관심을 받는다. - 혹시 주목해야할 스트라이커가 아닐까? 사람들은 아직 토털풋볼의 특징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누가 득점을 하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던 것이다. 돌풍은 스웨덴과 0:0으로 비기면서 밋밋해지는 듯 했다. 하지만 네덜란드는 3차전에서 만난 불가리아를 경기불능 상태에 빠뜨리며 4:1로 대파해버렸다. 1실점은 자살골이었으니, 불가리아가 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팀 전원이 시시가각 포지션을 바꿔가며 상대를 압박, 무너뜨리는 전술은 즉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그렇다면 기존의 축구를 훨씬 초과하는 활동량을 통한 전원공격, 전원수비의 토털풋볼은 그 효과만큼이나 체력을 손해 보는 게 아닐까. 이에 대해 요한 크루이프는 이렇게 말했다.
“토털풋볼은 기술보다는 머리를 쓰는 축구다.”
기술과 전술은 다르다. 전술은 바둑알처럼 어떤 선수가 언제 어디에 있는가의 문제다. 기술은 그 바둑알이 어떻게 흔들릴까이다. 토털풋볼은 그라운드를 바둑판으로 본다. 그리고 바둑에서는, 바둑알의 위치가 중요할 뿐이다. 크루이프는 계속 말한다.
“한 선수의 단점을 옆에 있는 선수가 보완해야 한다. ... 핵심은 선수 사이의 공간을 촘촘하게 유지하는 것이다. 이 공간이 촘촘하면 우리 선수는 공을 잡기 위해 10을 뛰지만 상대 선수는 30을 뛰어야 한다. 우리 선수의 체력을 유지하면서 상대 체력을 소진시키는 전략이다. 선수 전원이 경기 흐름을 파악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결국 지능적인 체력전이란 얘기다. 그런데 크루이프는 이런 말도 빼놓지 않았다.
“아름답게 이겨야 한다.”
실제로 네덜란드팀이 시전하는 유기적 소용돌이는 관객의 입장에서는 극히 아름다웠던 것이다. 선수는 하나의 입자다. 이 입자들이 모여 큰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따라서 아름답게 이겨야 한다는 크루이프의 말은 그의 미적 취향과는 상관없는 말이다. 이는 토털풋볼을 제대로 구현해야 한다는 말과 같은 뜻이다.
그러나 축구팬들과 전문가들은 네덜란드의 실체를 반신반의했다. 초반에 돌풍을 일으키는 깜짝 팀은 대회마다 있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2차 라운드 1차전. 이전까지는 전력 차이가 2단계 이상은 나던 대형 강호 아르헨티나를 무려 4:0으로 짓밟자 센세이션은 혁명의 수준으로 치달았다.

아르헨티나를 상대로 골을 기록하고 있는 요한 크루이프.
아르헨티나 선수들이 경기 전까지 세 골을 기록 중이었던 요니 렙을 막으려고 하자, 크루이프는 자기가 공격수로 변신해 두 골을 넣었다. 숨겨진 ‘진짜 공격수’ 니스켄스도 한 골을 기록했다. 수비수였던 크롤도 득점을 올렸다.
사회주의 축구의 선봉 격인 동독은 니스켄스와 렌센브링크의 골로 2:0으로 완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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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라운드 마지막 상대는 지난 대회 우승팀이었던 브라질이었다. 브라질은 1958년부터 70년까지, 12년 간 세 번이나 우승했다. 때는 브라질 축구의 전성기였고 이 전성기는 당분간 계속될 전망이었다. 그러나 브라질은 토털풋볼에 가장 드라마틱하게 지고 말았다. 선수 각자가 발군의 개인기로 무장한 브라질은 한 명의 사령관(요한 크루이프)이 지휘하는 개미들에게 0:2로 완패했다.
네덜란드-브라질 전 하이라이트 영상
한명 한명은 잘 조직된 다수를 이길 수가 없는 것이다. 일례로 브라질의 명수비수 페헤이라는 네덜란드의 파상공세를 막다가 결국 반칙, 퇴장 당했다. 결국 이 네덜란드-브라질 전은 현대축구의 판도가 바뀌는 과정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상징적인 경기가 되었다.
결승에 오르기까지 네덜란드의 성적은 6경기 14득점 1실점. 그 1실점도 자살골이었으니, 그야말로 완벽에 가까운 전적이었다. 이는 아리에 한이 시전한 오프사이드 트랩이 얼마나 효과적이었는지도 보여준다. 결승 상대는 개최국 서독이었는데, 이때는 분위기가 반전되어 대부분이 네덜란드의 우승을 점치게 되었다. 우루과이와 아르헨티나, 브라질이 차례로 당했는데 서독이라고 별 수가 있겠느냐는 거였다.
그러나 서독엔 별 수가 있었다.

독일 대표팀 문장
첫째, 홈이다. 개최국은 무조건 유리할 수밖에 없다.
둘째, 여섯 번의 경기에서 강호들을 격파해온 네덜란드의 경기스타일을 면밀히 관찰할 수 있었다. 서독도 네덜란드를 결승전 이전에 만났으면 무작정 말렸을 가능성이 크다. 이 점에서 서독은 운이 좋았다. 그래서 서독은 네덜란드 팀이 경기를 푸는 방식을 이해해 버렸다.
가장 중요한 세 번째. 단지 토털풋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이해한다고 74년의 네덜란드 대표팀을 이기기는 힘들다. 하지만 서독의 네덜란드의 여섯 경기를 면밀히 분석한 헬무트 쇤 감독은 ‘오렌지 파해법’의 핵심을 이해하는 데 성공했다. 바로 요한 크루이프였다.
토털풋볼의 유기적 소용돌이는 그 핵인 요한 크루이프에 의해 발생한다. 그렇다면 크루이프를 잡으면 된다. 그러면 소용돌이를 망가뜨릴 수 있다. 그러나 이 천재를 어떻게 잡는단 말인가? 마침 서독에는 사상 최악의 ‘진공청소기’ 베르티 포그츠가 있었다.

이 인간이 포그츠
수비수 포그츠는 양날의 검 같은 선수였다. 그는 감독이 점찍어준 상대선수를 시합에서 확실히 지워버리는 마크맨이었다. 하지만 자신도 동시에 지워지는 동귀어진형이었다. 공에는 별 관심이 없는데다가 공을 제대로 다루지도 못했다. 아마 포그츠만큼 볼 컨트롤이 엉망인 축구선수는 흔치 않을 것이다. 결과는 확실한데, 그게 팀에 독이 될지 득이 될지 모르는 신기한 선수였던 것이다.
하지만 포그츠 한 명이 ‘소용돌이의 핵’과 동귀어진을 한다면? 손해는 당연히 네덜란드가 본다. 이리하여 포그츠는 쇤 감독으로부터 크루이프 봉쇄명령을 받는다.
3
크루이프는 어떤 준비를 했을까? 유니폼을 조금 손봤다. 당시 네덜란드 팀의 스폰서가 독일의 국민기업 아디다스였다. 그는 아디다스를 상징하는 세 개의 선 중 하나를 지워 두 줄로 만들었다. 굳이 이런 행동을 한 이유는 일단 크루이프가 괴짜이기 때문이고, 네덜란드가 독일에 맺힌 게 많았기 때문이다.

아디다스를 입고 만난 요한 크루이프와 '카이저' 베켄바워. 이선과 삼선을 비교해보자.
2차 대전 시기 나치는 많은 국가를 괴롭혔지만, 그 중 네덜란드는 특히 심한 피해를 입었다. <안네의 일기>의 안네 프랑크도 네덜란드인이다. 국토가 초토화되어 네덜란드 국민들은 전후에도 많은 고생을 해야 했다. 전 한국 대표팀 감독 딕 아드보카트는 1947년생인데, 그는 한국에 있던 시절 어린 시절의 가난과 배고픔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다. 이는 비단 아드보카트만의 개인사가 아니라, 그때를 살았던 모든 네덜란드인의 이야기이다.
크루이프의 도발은 독일인들이 가슴속에 묵혀놓은 억울한 감정을 자극했다. 전쟁에 대한 죄책감, 그리고 패전했기 때문에 죄책감을 느껴야 한다는 억울함이 교차하는 독일인들에게 절대반성, 무조건 참회의 무한반복은 무척 지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나치의 악몽을 유난히 잘 기억하는 네덜란드인들은, 티를 낼 순 없지만 사실 좀 미울 수밖에 없다.
‘두 줄’ 아디다스 사건으로 결승전엔 묘한 긴장감이 흐를 수밖에 없었다. 경기 전 네덜란드의 우위가 점쳐졌고, 실제로도 시합은 네덜란드에게 유리하게 진행되었다. 경기 시작 후 크루이프가 날카로운 드리블로 서독 문전을 위협했다. 이때 회네스가 무리한 태클로 페널티킥을 내주고 말았다.

바로 이 장면
페널티킥 성공으로 네덜란드는 1:0으로 앞서나간다. 초장부터 크루이프를 놓친 포그츠는 위축되지 않았다. 포그츠는 이후 종료휘슬이 울릴 때까지 크루이프를 악마처럼 따라붙는다. 공의 움직임은 아예 무시했다. 그는 이 경기에서 볼 리프팅을 단 3회밖에 하지 않았다.

오직 크루이프만을 괴롭힐 뿐...
태풍의 핵이 봉쇄되자 사령관 역할을 니스켄스가 맡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오렌지 태풍’의 위력이 반감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결국 페널티킥에 의해 동점골을, ‘폭격기’ 게르트 뮐러에게 결승골을 내주면서 네덜란드는 1:2로 패배하고 만다.
안타까운 것은 서독의 면밀한 대비와 포그츠의 물귀신작전에도 불구하고 오렌지군단의 플레이가 더 뛰어났다는 사실이다. 크루이프도 포그츠에 심하게 물리긴 했지만 그래도 독일축구의 ‘카이저’ 베켄바워보다 유려한 플레이를 했다. 하지만 축구는 골이 들어가야 이긴다. 결정적인 순간을 만들어 결정적으로 슛을 해도 골이 안 들어가면 진다. 한마디로 네덜란드는 골운이 없었다. 승패에 많은 요인이 있었지만 결정적인 이유는 단순하게도 운이었다.
크루이프는 경기 후 억울함을 이렇게 표현했다.
“아무리 뛰어난 슈퍼스타(자기 자신) 위에도 챔피언이 존재한다.”
한편 포그츠는 이렇게 말했다.
“볼 리프팅을 3번 밖에 하지 않았는데 챔피언이 되었다.”
베켄바워는 크루이프의 실력을 솔직히 인정했다.
“그는 나보다 훨씬 좋은 선수였다. 하지만 월드컵은 결국 내가 차지했다.”

결승전에서 동료들에게 동시에 지시를 내리고 있는 크루이프와 베켄바워
비록 우승하지 못했지만, 아름다우면서도 강력한 1974년의 오렌지 군단은 축구의 전설로 남아있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팀을 선정해야 한다면 그건 1974년의 네덜란드 대표팀이 될 수밖에 없다.
“세계는 지금도 1974년의 네덜란드를 꿈꾸고 있다. 하지만 그 팀은 지금은 재현할 수 없는 축구의 유토피아다.”
아데마 마우링요(전 브라질 대표)
“확실히 이번 팀은 좋았지만, 1974년의 팀과 비교할 수는 없다.”
데니스 베르캄프(전 네덜란드 대표팀 공격수), 1998년 대표팀에 대한 언급
“축구에 혁명은 없다. 만약에 있다고 하면 그것은 유일하게 1974년의 네덜란드 대표팀 뿐이다.”
발레리 로바노프스키(전 디나모 키예프 감독, 2002년 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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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적인 팀이 우승하지 못한 것은 분명 불행한 일이다. 그러나 혁명이 실패한 것은 아니었다. 월드컵이 끝나자마자 유럽과 남미의 클럽 팀들이 토털풋볼을 열렬히 복제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네덜란드 1편에서 설명했듯, 토털풋볼은 반세기에 걸친 흑역사 끝에, 천재들의 운 좋은 만남에 의해 등장한 결과물이다. 본대로 흉내 낸다고 되는 게 아니란 얘기다.
토털풋볼은 그 완성자인 리누스 미헬스에 의해 전도될 수밖에 없었다. 수많은 구단이 리누스 미헬스를 원했다. 미헬스는 FC 바르셀로나를 선택했다. 그런데 혼자 간 게 아니라 아약스와 대표팀에서 데리고 있던 요한 크루이프와 니스켄스를 불러온다.
미헬스와 두 제자의 언행을 보면 바르셀로나에 뼈를 묻기로 작심을 한 듯 보인다. 특히 요한 크루이프는 레알 마드리드로부터 환상적인 조건의 이적을 제안 받았는데, 거절한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독재자(프란시스코 프랑코)와 관련된 구단에서는 뛸 수 없다.”
전후사정은 스페인 편에서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이 말은 프랑코가 곧 공공의 적인 바르셀로나 팬들 사이에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게다가 ‘미헬스와 제자들’이 온 후 원수 레알 마드리드와의 첫 경기에서 바르셀로나는 무려 5:0의 압도적인 승리를 거둔다.
바르셀로나는 토털풋볼을 수혈받자 전력이 급상승해 73-74시즌에서 리그 우승을 한다. 1960년 이후 첫 우승이었다. 에이스 요한 크루이프는 팀의 아이콘이 되었다. 그는 적을 낮잡아보는 듯한 차가운 표정과 냉소적인 말버릇으로 오랫동안 정권에 억압당해온 까딸루냐인들을 열광시켰다.

FC 바르셀로나의 유니폼을 입은 요한 크루이프
더욱이 크루이프는 74년에 태어난 아들의 이름을 까딸루냐어 이름인 요르디(Jordi)로 지었다. 까딸루냐의 수호성인 ‘성 요르디’의 이름을 딴 것이었다. 이러다보니 바르셀로나에서 크루이프는 거의 신의 반열에 올랐다.
감독과 선수, 팀이 모두 성공하자 하나의 모델이 탄생했다. 선수육성으로 유명한 아약스에서 성장한 후 바르셀로나에서 성공하는 루트가 열린 것이다. 이게 유행이 되어 유럽 축구의 판도에 영향력을 끼치게 되자 바르셀로나와 아약스가 합쳐진 ‘바르작스(Barjax)’라는 신조어가 생겼다. 아약스를 거쳐 바르셀로나 선수가 된 이를 말하는 단어다.
이후 [아약스→바르셀로나]는 토털풋볼 전도의 대표적인 루트가 되었다. 꼭 아약스뿐만이 아니다. 네덜란드의 선수육성은 원래 수준급이다. 1 토털풋볼 감독에게 발굴, 2 네덜란드 클럽을 거쳐 3 빅리그로 진출한 박지성과 이영표도 넓은 의미로 보면 바르작스에 해당한다.
네덜란드 출신 토털풋볼 감독들은 인재를 발견하면 정성껏 키워 제자로 만들고, 제자를 데리고 다니다 육성이 끝나면 방생하는 경향이 있다. 히딩크는 호주대표팀을 맡은 후 호주의 주요 선수들을 똑같은 방식으로 육성했다. 아드보카트의 경우 이호와 김동진을 데려갔다. 이러한 특이한 풍토는 리누스 미헬스의 방식을 계승한 것이다.
아약스가 토털풋볼의 고향이라면 바르셀로나는 2차 진원지며, 현대축구의 주요 성지다. 따라서 축구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클럽 중 하나다. 스타가 많은 강팀이기만 하다면 지금과 같은 풍부한 아우라를 갖진 못했을 것이다.

FC 바르셀로나의 로고
요한 크루이프는 훗날 현역에서 은퇴하고 감독이 되었을 때 아약스의 사령탑을 맡았다. 그리고 자신이 키운 선수들을 데리고 와 바르셀로나 감독이 된다. 미헬스의 수제자답다. 이러한 패턴은 세계 곳곳으로 범위가 확대되고 있다. 네덜란드엔 명감독이 즐비한데, 이들은 대부분 미헬스의 직, 간접적인 제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축구에 관한 방송과 글을 보면 세계축구의 지속적인 평준화 경향(쉽게 말하면 강호와 약체의 실력차가 줄어드는 것)에 대한 이야기가 많다. 평준화엔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그 중 하나는 네덜란드의 ‘축구수출’이다. 한국의 경우만 해도 히딩크 이전과 이후가 확연히 다르다. 사람이 오가는 것만으로는 수출이라 할 수 없다. 이들이 특유의 패턴으로 시스템을 이식하고 다니기에, 네덜란드는 ‘축구수출국’이 된 것이다. (한 가지 더. 네덜란드인들의 외국어능력도 축구수출에 한 몫을 했다.)
5
다시 1974년으로 돌아가면, 크루이프는 월드컵에서의 패배를 설욕하는 데 성공했다. 독일의 ‘카이저’ 베켄바워는 그 해에 월드컵뿐만 아니라 챔피언스리그, 당시 세계 최고의 리그였던 분데스리가를 모두 제패하는 대기록을 달성했다. 당연히 발롱 도르(유럽최우수선수) 타이틀은 자신의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슈퍼스타’ 크루이프가 발롱 도르로 선정되고 말았다. 어이가 없어진 베켄바워는 이렇게 한탄했다.
“더 이상 무엇을 해야 한단 말인가.”
이는 크루이프가 얼마나 많은 주목과 인기의 대상이었는지를 보여준다. 그는 혁명의 중심에 있었기 때문이다.

난 슈퍼스타니까...
다음 편에서는 오렌지색 혁명의 불씨가 어떻게 꺼지고 다시 살아나는지를 이야기할 것이다. 크루이프의 돌발행동과 오렌지군단의 계속된 불운, 부활을 알리는 <왕의 귀환> 등. 지면이 허락된다면 토털풋볼의 2세대 전사들인 ‘오렌지 삼총사’도 등장할 예정이다. 그럼, 다음 시간에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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