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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분기점 

 

코로나는 우리에게 더 이상 단순한 질병이 아니다. 삶의 모든 부분을 헤집어 놓았으며, 그로 인해 새로운 삶의 방식이 필요해졌다.

 

포스트 코로나시대. 코로나는 인류사의 새로운 분기점이 되었다.  

 

2. 서울의 30평대 아파트가 기준이 된 세상 

 

코로나와 그 이후의 삶에 대한 예측과 분석이 쏟아지고 있다. 뭐니 뭐니 해도 삶의 가장 큰 고민은 역시 의식주 관련이다. 감염과 확산을 막는 데에 가장 필요한 것은 서로 간의 거리두기. 코로나가 우리에게 내준 첫 번째 과제는 바로 생활공간에 대한 재정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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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한 맥락에서, 포스트 코로나 시대 주거환경 변화에 대한 예측과 전망이 미디어에 쏟아지고 있다. 경제학, 건축학, 도시공학, 수많은 전문가들이 쏟아져 나와 미래의 주거환경에 대하여 논한다. 들으면 들을수록 한 가지 부분이 턱턱 걸린다. 아무래도 TV 속의 저 사람들, 이 방송을 보는 모든 시청자들의 주거형태가 ’30평대 아파트에 사는 4인 가족’이라고 생각하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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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이런 ‘평범한’ 집에서 ‘소박하게’ 살던 사람들이 코로나의 급습으로 주거환경이 어떻게 변해나갈 것인가를 논의하고 있는 이 방송에서, 애초에 나는 시청대상에서 제껴져 있다. 저렇게 방이 많은 집은 드라마 주인공들이나 사는 줄 알았지. 이런 아파트 도면은 지하철 앞에서 받은 물티슈 포장지에서나 본 나로서는 이 전문가들의 대화가 신비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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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에서, 자가격리의 문제점과 어려움에 관한 논의를 이렇게 높고 넓고 쾌적한 곳에서부터 시작한다면, 나는 더 이상 이 고민에 동참할 수가 없는 것이다. 저것이 자가격리의 ‘일반적인’ 혹은 ‘평균적인’ 형태라면, 내가 지금 필요한 것은 포스트 코로나 대비가 아니라 사회 빈곤 계층으로서의 심각한 자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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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잔뜩 우울해지고 비참해지려다가 잠깐 의문을 가져본다. 아니, 나는 여태껏 내가 이렇게 짠내나게 살고 있는 것을 몰랐던 건가. 진짜로 나만 그렇게 살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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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기준으로 아파트 거주자는 대략 30프로 정도다. 고작 3할. 이 중 30평대 이상의 아파트가 얼마나 되는지 모르겠으나, 서울시민의 주거 형태 평균을 '30평대 4인 가족'으로 간주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그것도 지상파 공영방송에서.

 

3. 미디어는 현실을 왜곡한다

 

TV는 현실을 반영한다. ‘나 혼자 사는’ 1인 가구들이나, 결혼하지 않는  ‘미운우리새끼’들은 아주 평범한 라이프 스타일이 되었다. 하지만, TV는 현실을 왜곡한다. 많은 사람들이 ‘나 혼자 사는' 이유는 루프탑에서 일광욕을 즐기고 지하 개인 바에서 와인을 즐기기 위함이 아니다. 학업, 취업, 직업 그 무언가를 위한 생존 기지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결혼을 하지 않는 많은 이유는, 혼자의 삶도 감당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평균이라면 이쪽이 더 가깝다. 경험적으로나 통계적으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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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비는 결코 그들을 조명하지 않는다. 재미없거든. 보지 않거든. 셀럽들이 거실에 앉아 개인화로에 살치살을 구워 먹는 장면은 호기심 돋지만, 노량진 고시생이 좁아터진 원룸에서 밀린 공과금 고지서를 뜯는 장면은 상상만 해도 우울하다. 욜로와 플렉스를 외치며 삶을 누리는 모습에 대리만족을 느끼는 것. 시청자들 채널은 거기에서 멈추고 방송은 그것을 충실히 이행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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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미디어는 고통을 차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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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태풍 마이삭. 울릉도의 모습. 섬이 이 지경이 될 동안, 울릉도의 피해 상황은 제대로 보도되지 않았다. 이에 강제윤 사단법인 섬 연구소 소장이 SNS를 통해 별도로 성명문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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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는 고통을 차별한다. 미디어가 느끼는 고통의 역치는 힘없는 사람들에게 맞춰져 있지 않다. 한여름 지나가는 태풍마저도 이렇다. 고난과 재난에 가장 취약한 건 사회적 약자들이다.

 

반년을 이어온 코로나는 어떨까. 포털에 코로나를 검색하면 무수히 쏟아지는 정보는, 새로운 시대에 부동산과 주식 투자 전망들이다. 간혹가다 집콕 브이로그 같은 것들 정도. 코로나가 할퀴고 있는 진짜 상흔은 미디어의 수면 위에 떠오르지 않는다.

 

 

5. 고통은 왜 외면당하는가

 

세계 여러 도시에는 빈민가가 있다. 뉴욕의 슬럼이나, 예루살렘의 올드시티같은 도시빈민의 대규모 주거구역은 서울에서 잘 눈에 띄지 않는다.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노병이 한강의 눈부신 야경에 눈물을 짓는 발전된 도시. 미디어가 보여준 서울은 그런 감동적인 드라마를 가진 곳이다. 

 

군부독재 시절, 서울의 무허가 빈민촌은 하나 둘 철거되어갔다. 이때 이동한 시민의 숫자가 10만이다. 물론 대책 없는 무작정 밀어내기였다. 집도 절도 없는 이들이 가면 어디로 가겠는가. 그나마 입에 풀칠이라도 하려면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서울 근처에라도 어떻게든 붙어 있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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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실만 솟구친 반지하로, 걸핏하면 수도가 얼어터지는 옥탑방으로, 얇은 합판 사이를 두고 잠을 자는 고시원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눈앞에서 치워두고 외면했을 뿐, 우리 사회의 고통들은 어딘가의 공간으로 흘러 들어가 몸을 웅크리며 고여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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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바이러스는 계층을 모른다. 영화 <기생충>의 박 사장네도 코로나로 전에 없던 불편함을 겪고 살 것이다. 박 사장도 얼어붙은 경기에 회사 운영에 여러 난관과 위기가 닥쳐올 것이며, 본인도 장기화된 재택근무로 좀이 쑤시고 스트레스가 가중될지 모른다. 박 사장의 부인도 답답한 마스크를 쓰고 쇼핑을 해야 하고, 지인들과의 가든 파티는 언제 또다시 열 수 있을지 기약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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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반지하에 사는 사람들이 감내해야 할 것들은 다르다. 불편과 고통은 아래로 쏟아지는 빗물과 같다. 윗동네의 물은 금방 빠지고 마르지만, 아랫동네에는 속절없이 차오를 뿐이다. 폭우에도 휘청이던 기택네 집은 코로나로 어떻게 되었을까. 보이지 않고, 보고 싶어 하지 않았으니 알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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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고통의 직시

 

알다시피 코로나는 바이러스다. 소수의 의지와 기지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연대하지 않고서는 도무지 해결점이 보이지 않는 문제다. 기택네 가족이 안전해지기 전까지 박 사장네 가족은 결코 코로나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보고 싶은 것만 봐서는 답이 없다.

 

코로나 시대, 서울의 30평대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을 방송과 언론에서 기준점처럼 얘기하게 된 세상에서, 나는 더욱 우울하다. 어쩌면 나도 그외의 사람들을 외면하고 싶어 하지 않았는지. 타인의 고통을 회피한 채, 그저 부러운 것들만 바라보며 대리만족하려 하지 않았는지.

 

포스트 코로나 시대. 우리에게 필요한 것, 동시에 미디어에게 요구해야 할 것은 반지하에서 물이 차오르는 장면을 똑바로 바라보는 용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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