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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국면 대규모 진료거부 사태에서 의사집단 내 수구강경우파의 존재를 분명히 보았을 것이다. 이들은 어떻게 탄생하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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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을 말하기 위해서는 2000년에 일어난 ‘의약분업 사태’를 다룰 수밖에 없다. 

 

 

의약분업 이전의 의사, 약사 

 

30대 이상의 분들은 그때를 기억할 것이다. 의약분업은 2000년 8월 1일에 본격적으로 시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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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들은 이때 처음으로 대규모 진료거부에 나섰다. 의약분업은 훨씬 이전부터 의사와 약사, 양측 모두 주장하였었다. 물론 각자 이해관계가 다르다 보니 취지와 목표, 범위가 달랐다.

 

1960년대부터 의사들은 엄격한 관리를 받아 처방되어야 할 전문의약품인 항생제와 스테로이드제제들이 의사의 진단과정 없이 약국에서 판매되고 있는 상황에 문제의식을 느꼈다. 이를 바꿀 필요성을 느꼈다. 그래서 전문의약품의 약국 판매 금지를 요청하였다.

 

약사들의 경우, 전문의약품 판매 제동이 걸릴 경우 경제적 손실이 크기 때문에, 의사들의 주장에 대한 반발로 전면적인 의약분업을 주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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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의약분업이 처음으로 명시된 것은 1963년 「약사법」이었는데, 1990년대까지 현실적으로 실현하기 어렵다고 판단이 되어 본격적인 실행이 되지 않고 있었다. 

 

사회적으로 공론화가 안 된 부분도 있지만, 의약품을 판매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경제적 이윤 때문이었다. 통상 의사들이 의약품에 대한 선택권을 가지고 이윤을 창출하는 구조가 형성되어 왔다.

 

정착화된 구조를 단숨에 바꾸기란 쉽지 않았다. 바꾸기 쉽지 않았던 이 구조를 바꾸게 된 계기는 좀 더 뒷부분에서 말하겠다.

 

 

의약분업 과정

 

의약분업 시행의 직접적 근거1994년 개정된 「약사법」이다.

 

1994년약사법이 개정되었고, 개정 「약사법」에는 ‘1999년 7월 7일 이전에 의약분업을 실시한다’는 규정이 포함되었다. 이에 따라 1998년 의약분업추진협의회가 구성되었다. 

 

그러나 이해당사자 간에 논의가 충분히 선행되지 않자 의협(대한의사협회)과 약사회(대한약사회)는 의약분업 시행을 연기해줄 것을 국회에 청원했다. 이에 따라 국회는 이 제도의 시행을 1년간 연기하면서 시민단체와 의협, 약사회가 새로운 의약분업의 모형을 제시하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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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5월 10일 기사

 

1999년 5월 10일 의협과 약사회는 의약분업에 전격 합의했다. 두 단체의 의견이 가장 팽팽히 맞섰던 의사의 처방전 기재방식과 관련해서 처방 약품의 성분을 밝히는 ‘일반명 처방’을 권장하되, 약품의 상품 이름을 적는 ‘상품명 처방’을 함께 사용하기로 합의했다. 상품명 처방의 경우 약사가 환자의 동의를 얻어 동일함량, 동일 성분, 동일제형의 다른 의약품으로 바꿔 조제가 가능할 수 있도록 했다. 

 

이 제도의 시행으로 약사 임의 조제에 적용하던 약국의료보험제도가 폐지되고, 의사의 처방전에 의해 조제 받는 경우에만 건강보험을 적용받게 됐다.

 

그러나 의협과 약사회가 합의한 다음 날인 1999년 5월 11일, 전국의 병원장 800명이 ‘의약분업안’을 수용하지 못하겠다며 결의문을 발표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이들은 의약분업안을 수용하지 않았고 다른 의사들에게도 이 경향은 퍼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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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당시, 의사들의 시위 모습.

 

1999년 개정된 「약사법」에 따라 의약분업이 시행된 2000년 한 해에만, 의사들은 5차례의 진료거부란 단체행동을 했다. 개원의, 대학교수, 전공의, 의대생들이 진료거부에 동참하며 대규모 투쟁을 했다. 

 

이번(2020년) 진료거부 사태에서 의대생들이 휴학계를 제출하고 의사 국가고시를 거부했듯, 당시(2000년) 의대생들은 자퇴서를 제출하고, 전국 의대 본과 4학년 중 62명을 제외한 모든 인원이 의사 국가고시를 거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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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6월 전국 41개 의과대학 의약분업 비상대책위원회와 의대생 6,000여 명이 전국 의대생 동맹휴업 결의대회를 하고 있는 모습 / 출처-<K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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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9월 21일 기사

 

이에 대해 약대생들은 ‘의료계 폐업철회 투쟁’으로 맞섰다. 2000년 당시에도 정책에 대한 각 직업군의 투쟁이 학생들로까지 확대되었다. 정부는 협상을 진행함과 동시에 강하게 밀어붙였다. 

 

김재정 당시 대한의사협회장은 집단 휴업 지시를 내리고 전공의들의 폐업을 지시해 170개 병원의 업무를 방해했다는 혐의로 구속됐다. 김 전 회장은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이외에도 전국 3,000여 명의 의사가 경찰로부터 출석요구서를 받았다. 

 

당시 (김대중)정부의 강력한 대처와 이번 진료거부 사태에서 문재인 정부를 비교하며 답답함을 느끼는 이들도 있을 텐데, 2000년과 현재의 결정적 차이는 ‘코로나 국면’의 유무라는 것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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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동 국무총리 의약분업관련 당정회의 주재 전경(2000년) / 출처-국가기록원

 

의약분업 파동은 12월 초 「약사법」 개정안에 의협, 약사회, 정부가 합의함으로써 6개월 만에 막을 내렸다. 

 

새로운 「약사법」 개정안에 모든 주사제를 의약분업 대상에서 제외하겠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약사회의 반발을 사기도 했다. 이 일련의 과정 속에서 환자의 불편이 있었고, 의사와 약사 등 전문직 계층이 보여준 집단 이기주의에 국민의 따가운 비판이 이어지기도 했다.  

 

이것이 간단하게(?) 설명한 의약분업의 과정이다. 

 

 

의약분업에 영향을 미친 ‘한약분쟁’

 

앞부분에서 통상 의사들이 의약품에 대한 선택권을 가지고 이윤을 창출하는 구조가 정착화되어 있었고, 공고히 정착화된 구조였다고 했다. 그리고 그 구조가 바뀌게 된 이유에 대해 뒷부분에서 이야기하겠다고 하였다.

 

의약분업에 대한 법률적 명시1963년에 처음으로 되긴 했지만, 이뤄지지 않고 있었고, 그런 상태로 3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보니 당연히 그 구조를 바꾸기란 쉽지 않았다. 

 

그 구조를 바꾸게 된 직접적 근거는 1994년 개정된 약사법인데, 이 약사법에 얽히고 얽힌 재미있는 사건이 있다. 이 사건 속에서 약사들은 누구보다 절실하게 자신들의 이권을 위해 노력했다.

 

이름하야 ‘한약분쟁’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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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보건의료계 밥그릇 싸움의 시초가 의약분업 사태에서 의사들의 진료거부 사태로 알고 있을 것이다.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전초전 역할을 한 밥그릇 싸움이 있었다. 1993년에 촉발된 ‘한약분쟁’이다. 

 

-한약분쟁 스토리 

 

이 스토리를 말하자면, 1977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박정희 정권인 1977년부터(의료보험법 자체는 1963년 제정. 1977년 전까지는 시범사업으로만 운영) 국민들을 상대로 제대로 의료보험이 시작되었다. 

 

1977년, 500명 이상의 사업장을 대상으로 한 직장의료보험제도를 시작으로, 적용대상을 점차 넓혀가다 드디어 1989년에 전국민 의료보험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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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의료보험 89년 전국민 혜택 / 출처-<매일경제>

 

의료보험이 점차 확대되면서 의료기관에 비해 질병의 치료/관리 서비스에서 당연히 밀릴 수밖에 없는 약국들은 가격경쟁에서조차 의료기관에 밀리는 상황이 되었다. 국민들은 이전보다 쉽게 병원을 갈 수 있었고, 그로 인한 반작용으로 약사들은 그 전과 비교하여 상당한 경영난을 맞이했다.

 

1980년대 전체 약국수가 감소하기 시작했고, 활동하는 약사의 수도 감소했다. 많은 약사들이 경영난을 겪었다. 그리하여 약사들은 이 위기를 타개할 방법을 시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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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 약 . 조 . 제 .

 

약사들은 한약조제를 시작했다. 시간이 갈수록, 약사들의 한약조제는 점점 보편화 되었다. 한의사들은 이에 집단 반발을 하였고, 약사들과 갈등이 시작되었다. 약사들도 자신들의 목숨줄이 걸려있는 문제였기 때문에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양측은 오랜 기간 갈등을 겪었다. 그러다 1990년대 초 한의사와 약사들은 한약 처방조제권을 둘러싸고 본격적인 ‘한약분쟁’을 촉발했다. 

 

한약분쟁은 전국 한의대 학생들의 유급 시위와 한의원 진료거부, 약국 폐업 등이 이어지면서 사회문제로 떠올랐고, 결국 시민단체의 중재로 ‘한방의약분업을 전제로 한약사 제도를 신설한다’는 데 합의하면서 한약분쟁은 일단락되었다. 

 

그 전부터 퍼지던 ‘진료는 의사에게 약은 약사에게’라는 논리는 1990년대 들어서면서 이미 많이 쓰이는 논리였는데, 이 논리를 한의사들이 약사들의 한약조제를 막기 위한 명분으로 쓰며 한약사 제도를 도입했다.

 

허나, 모두들 알다시피 한의학계는 양의학계와 같은 전면적 의약분업이 아니다. 그래서 한의사들은 거의 타격을 받지 않으며 자신들의 이권을 지킬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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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방의약분업’1994년에 「약사법」 개정으로 이뤄졌다. 한약사 제도가 도입됨에 따라 한의과대학과 약학대학이 모두 설치된 종합대학의 약학대학 내에 한약학과를 설치하기로 하였다.

 

그 이후, 1996년 경희대·원광대, 1998년 우석대에 각각 정원 40명의 한약학과가 설치됐으며, 한약학과 숫자와 정원은 현재까지 그대로다.

 

‘한방의약분업’을 명시하기 위한 그 1994년 개정 「약사법」에서 ‘1999년 7월 7일 이전에 의약분업을 실시한다’는 규정이 포함된 것이다. 

 

 

한약분쟁 당시 약사들의 상황

 

한약분쟁이 의약분업의 본격적인 시행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보기에는 좀 어려우나 시기적으로 영향은 미쳤다고 보인다(일부 전문가들은 영향은 있었으나, 본 기사에서 다뤄지는 것보다 미미했다고 본다)

 

한약분쟁으로 인해 ‘한방의약분업’을 명시한 1994년에 「약사법」을 개정하면서 당시에 사회적 담론으로 형성되어 있던 개혁과제인 의약분업에 대한 내용을 같이 넣었다. 

 

당시 상황을 생각해보자. 

 

한약 처방조제권은 한의사에게 다시 갔다. 의약분업이 이뤄지지 않는다면 약사들은 다시 심각한 경영난에 빠질 것이다. 때문에 약사들은 자신들의 살길을 위해 누구보다 절박하게 전면적인 의약분업을 실행하기 위해 매달렸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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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도 약사들의 이 상황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물론 의약분업에 대한 담론은 1990년대 초에 이미 많이 형성되어있었기 때문에, 어떻게든 의약분업이 시행은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때문에 한약분쟁이 의약분업의 시행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보기 어려울 수 있으나 시기적으로 영향은 미친 것으로 보인다고 한 것이다.  

 

모든 역사적 사건들은 단지 한 가지 이유로만 발생하지 않는다. 보건의료의 거대한 사건 중 하나인 의약분업 또한 마찬가지이다. 한약분쟁이 일어나고 있던 시점, 의약분업에 더 결정적 역할을 했던 거대한 흐름이 하나 더 있었다.

 

<계속>

 

 

독자와 밀담

 

지난 편에서 마지막에 2000년 개정된 의료법에 대해 청와대 국민청원에 올라온 글로 기사를 마무리했었다. 원래는 이번 편에서 그 부분도 다루려고 하였으나, 그 부분까지 다루려면 기사가 너무 길어져 지루해질 것 같다고 판단을 하였다. 저번 편을 마치며 괜히 어그로 끌려고 한 것은 아니었던 점을 밝혀둔다. 그 부분은 [의사파업 이야기 4편]에서 다루게 될 것이다.

 

다음 편에서는 의사집단 내 수구강경우파 탄생 배경에 대해서 이어나가며, 지금도 지속적으로 젊은 수구강경우파 의사들을 탄생시키고 있는 의사집단 내 논리의 모순성에 대해 다루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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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지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