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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지난 기사 요약

*미국의 레스토랑 서버들 이야기를 한국 실정에 맞게 바꿔보았다

 

근처 음식점에 배달을 시켜먹는다. 알바생이 땀을 뻘뻘 흘리면서 음식을 가져온다. '수고했다' 말로만 하기 뭐하니 돈 천 원을 쥐어준다. 그는 '고맙습니다' 하고 받아 간다. 나는 덕을 베풀 줄 아는 사람인 것 같다. 기분 좋다. 윈윈이다.

 

팁 준 얘기를 SNS에 올리니 사람들이 '좋아요'를 붙이고 자기들도 따라한다. 어느새 동네 사람들 대부분 배달원에게 팁을 주게 됐다.

 

재리에 밝은 음식점 사장이 이렇게 말한다.

 

"니들, 배달 나가서 손님들한테 팁 두둑히 받잖아. 그러니까 시급을 좀 낮출 거야. 그게 공평한 거 아녀?"

 

SNS도 잘 쓰는 사장님은 "이렇게 열심히 일하는 우리 알바생에게 팁을 정당하게 주도록 합시다"라는 글을 올린다. 성실하게 일하는 어린 아이들, 청년들 잘 좀 봐달라는 메시지는 좋은 호응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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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경기가 안 좋아져서 배달 주문이 줄었다. 물가는 올라가서 배달원들의 생활이 여간 힘든 게 아니다. SNS을 통해 사람들에게 하소연한다.

 

"천 원짜리 한장 내밀면서 팁 낸다고 생색내지 말고 제대로 좀 내라"

 

사람들 사이에서 갑론을박이 벌어진다. 천 원짜리 한장은 쌍팔년도 얘기고 지금은 2천 원이라느니, 음식값의 몇 퍼센트를 팁으로 해야 한다는 등.

 

이런 목소리가 오프라인에도 스며들고, 적극적인 캠페인이 이뤄진다.

 

'최저시급도 받지 못하는 우리들, 노동의 정당한 대가를 받아야 하니, 제발 팁 내는 거 아까워하지 마시라'

 

"노동의 정당한 대가"가 구호로 나오는 캠페인에 반대 목소리를 내기가 쉽지 않다. 알바생 월급은 사장이 책임져야 하는 것 아니냐고 발언하면 졸지에 남을 배려하지 않는 나쁜 놈이 되어 버린다. 군소리 않고 남들 하는 만큼, 오히려 그보다 더 팁을 하는 것 같은데, 어째 성에 차지 않는 눈치다.

 

뭔가 잘못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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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팁 문화가 미국에서 어떻게 형성되었고 유지되었는지 짚어보고자 한다.

 

1. 팁의 기원

 

미국은 1776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하면서 만인은 평등하다는 기치 하에 시작된 민주국가다. 당시 미국에서 빈부의 격차는 거의 없거나 수면 위로 크게 드러나지 않았다.

 

1850-60년대가 되니 미국에도 "돈푼 좀 만져본 사람"이 생겨났다. 이들은 휴가 차 왕래한 유럽에서 귀족 문화를 마주한다.

 

이 시기 유럽엔 아직 귀족이 남아있었다. 산업혁명과 함께 봉건제는 근대 민주주의로 대체되었지만, 신분제는 완전히 붕괴되지 않았다. 귀족이 집에 일꾼을 놓고 부리는 것은 흔한 일이었는데, 주인을 감동시킬 정도로 열심히 일한 이에게 정해진 새경 이외에 얼마 더 얹어서 보상을 해주었다. 이것을 '팁'이라 불렀다.

 

유럽에서 돌아온 돈 많은 미국인들이 귀족 흉내를 내기 시작했다. 딱히 내세울 타이틀은 없었지만(수백 년 전통의 가문이라거나), 이들은 "돈"이란 무기로 장착하고 있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팁'이라는 이름으로 돈 몇 푼을 쥐어주며 심부름과 궂은 일을 시켰다. 돈이 많으면 사람들은 굽신거린다는 걸 알아차린 것이다.

 

그렇게 미국의 팁 문화가 시작되었다.

 

 

2. 팁(tip)과 임금(wage)의 차이

 

'내 돈으로 심부름꾼 쓰겠다는데 뭐가 문제란 말인가?'라고 반문할 수도 있겠다. 여기서 '팁(tip)과 '임금(wage)'의 차이점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임금(wage)'은 어떤 노동에 대한 대가가 정해져있다. 한 쪽은 정해진 일에 정해진 돈을 지불하고, 다른 쪽은 그 돈을 받는다. 양측이 떳떳하다.

 

반면, '팁(tip)'은 뒤가 구린 면이 있다. 위에서 밝혔듯 팁은 신분 과시에 바탕을 두고 있다. 돈 내는 사람의 기분에 의해 절대적으로 좌우된다.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돈 주는 사람의 기분이 나쁘면 낭패다. 반대로 대충 일해도 돈 주는 이의 기분이 좋거나 잘 맞춰주면 짭짤한 액수를 손에 쥘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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팁으로는 노동의 사용자와 제공자 간에 일이 틀어질 경우가 많고, 정당하지 않은 일이 생기기도 한다. 고용시장이 왜곡될 위험성이 크다. 고용에 대한 지불을 어떤 형태(임금 혹은 팁)로 할 지에 따라 노동환경도 달라진다.

 

"만민이 평등한 미국이라면서, 팁은 아무리 봐도 평등한지 모르겠다. 합당한 임금을 지불해 노동시장을 안정시키자."

 

19세기 말 미국 사회에는 '팁 반대(anti-tipping)'라는 사회적 공감대가 있었다. 일부 유럽물 좀 먹은 부자들이 팁을 뿌리고 다니는 것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있었고, 팁 문화의 확산이 낳을 부작용을 경계하고 있었다. 팁 문화는 비민주적이고, 미국 건국의 정신에 어긋난다는 얘기다.

 

 

3.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고 했던가

 

이상과 현실의 골은 깊었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일부 지역에서 팁을 금지하는 법안이 나올 정도로 '팁 반대( anti-tipping)'의 목소리는 적지 않은 호응을 얻었다.

 

하지만 팁 문화의 생명력은 끈질겼다. 집요하게 미국사회의 약점을 파고 들면서 굳건하게 자리를 잡았고, 팁 반대(anti-tipping)의 목소리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되었다.

 

팁 문화의 생명력을 설명하는데 흑인 노예제도를 떼어놓을 수 없다. 남북전쟁 이후 노예제도가 공식적으로 끝나고 흑인은 자유의 몸이 된다. 그러나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있었던 극소수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흑인은 이전과 크게 다르지 않은 삶을 살았다.

 

남부 지방의 경우, 굶어죽지 않을 정도로 낮은 비인간적인 임금을 받으면서 그동안 일하던 농장에서 계속 일해야만 했다. 다른 지역의 경우, 이전에도 노예가 아니었기 때문에 노예 해방이 빅뉴스는 아니었지만, 어떻게든 먹고 사는 것은 늘 문제였다. 일자리가 필요했다.

 

영국에서 시작된 산업혁명은 미국에 와서 더 큰 결과물들을 냈고, 미국 사회는 성장을 거듭했다. 19세기 말에는 제조업이 엄청나게 성장했고, 갖가지 서비스업(짐꾼, 요식업, 베이비시터, 이발사, 호텔, 유흥업 등)도 덩달아 성장했다.

 

골드러시(19세기 미국에서 금광이 발견된 지역으로 사람들이 몰려든 현상)를 통해 인구가 서부로 퍼져나가면서 무역, 항만, 운송, 철도, 건설업에도 불이 붙었다. 일자리는 많았고, 흑인들은 궂은 일을 마다하지 않는 노동자원으로서 대기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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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적 노동 시장이 형성된 것까진 좋았지만, 첫 단추가 잘못 끼워졌다. 특별한 기술이 있거나 제조업에 종사하는 이들은 '임금 노동자(waged worker)'였지만, 단순노동이나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이들은 '팁 노동자(tipped worker)'의 형태로 고용되었다.

 

서비스업은 제조업과 달리 노동의 가치를 달러로 매기는 것이 애매했다. '호텔에 마차가 도착하면 손님을 로비로 안내하고, 여행가방을 객실까지 옮겨주는 일', 이 일을 하는 일꾼에 대한 적당한 급료는 얼마일까? 서비스 부문에서는 서비스의 질이 중요한데, 경영자, 고용주들은 그것의 가치를 제대로 매기는 대신 "니들이 알아서 잘 하고 팁 받아 그걸로 먹고 살아"라는 식으로 나와버렸다.

 

배우지도, 직업 훈련을 받지도 못한 대부분의 흑인이 비숙련 단순노동이나 서비스업으로 투입되었다. 갑작스레 서비스 업종에 밀려들어온 흑인들은 눈 깜짝할 사이에 자의반 타의반 팁 노동자(tipped workers)가 되었다.

 

위에서 얘기했듯, 19세기 중반 유럽에서 밀려들어온 팁 문화에 반감을 가진 미국인들은 많았지만, 이는 대체로 '백인들끼리 팁을 주고 받는 것'에 대한 반감이었다. 백인이 흑인에게 일을 시키고 팁을 주는 것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반감이 적었다. 레스토랑 서버가 백인이라면 같은 백인끼리 팁을 주고 받는 관계가 되는 게 영 어색했는데, 흑인이라면 덜 어색했다는 것.

 

어찌되었든 흑인이 팁만 갖고 생활하는 계층으로 굳어지면서, 백인들은 이들에게 노동의 댓가를 적절히 지불해야한다는 목소리를 냈다.

 

문제는 근본적인 고민과 대책 없이, "그러니까 이 불쌍한 사람들에게 팁 주는 거 아끼지 말란 말야"라는 목소리만 크게 냈다는 얘기다. 노예 해방에 찬성했던 의식 있는 백인들도, '피부색에 상관 없이 인간의 존엄성은 같다'는 명제보다는, '불쌍한 흑인들에게 너무 못되게 굴면 안되고, 도와줘야 된다'는 의식이 강했다.

 

똑같은 일을 해도, 백인은 정해진 급료를 받고, 흑인은 고개를 숙이고 손을 벌려야 돈을 받을 수 있는 비인간적인 노동환경. 지금 관점으로는 엄청난 차별적인 구조인데, 흑인들은 일단은 먹고 살아야 했기에 편입되었다. 사실 팁을 받는 입장에서는 딱히 반감을 드러낼 이유가 없다. 불과 50년 전 만 해도 노예 신분이었던 흑인이다. 백인 주인님의 비위를 잘 맞추지 못하면, 채찍질은 기본이요, 계속되는 폭행의 위험에서 불안에 떨었다. 지금은 최소 그런 걱정은 안 하고, 밥도 먹고 살 수 있었다.

 

팁 제도는 자본주의의 걸음마를 걷고 있던 미국에서 "신의 한 수"가 된다. 갑자기 늘어난 흑인 노동력을 효과적으로 결집하고 통제할 수단이 된 것이다. 이것을 가능하게 한 세력은 당시의 자본가들이다. 창조경제가 이런 것일까? 지성인인 척 하는 사람들 위에는 돈 세는 사람들이 있다. 미국만의 이야기가 아닐 수도 있음을 명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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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글은 완결편으로, 20세기를 거치면서 흑인 백인의 구도를 넘어서서, 다양한 방향으로 계층화가 심화되어가는 미국 사회에서 팁이 어떻게 변질되었고, 미국인의 삶에 얼마나 깊이 뿌리내렸는지 살펴보겠다.

 

 

소리는 어디에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