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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수 일 시작하고 얼마나 지났을까. 같이 일하던 형님이 날 가만히 지켜보다 물었다.

 

“너, 째비냐??”

 

묘한 뉘앙스로 짐작건대 좋은 말은 분명 아닌 것 같았다. ‘오옹?’ 하는 표정으로 형님을 쳐다보며 되물었다.

 

“째비요? 째비가 뭐예요??”

 

“이 쉐끼 이거, 지가 째비면서 째비가 뭔지도 모르네. 너 같은 놈을 째비라고 하는 겨. 왼손째비.”

 

“아~~ 네……. 왼손잡이예요.”

 

형님은 마저 말을 이었다. 왼손잡이가 대화 주제로 나왔을 때 으레 따라오는 질문과 타박이 이어졌다.

 

“다 왼손으로 하냐???!!”

 

나에겐 익숙한(그렇지만 오랜만에 들어보는) 질문이었다. 대답도 늘 정해져 있다.

 

“아뇨. 숟가락질이랑 글씨는 오른손 쓰고요. 젓가락질부터 나머지는 다 왼손 써요.”

 

“용케 글씨는 오른손으로 쓴다잉? 어릴 때 제대로 안 배우고 뭐 했냐!! 이래서 가정교육이 중요하다니까. 안 그러냐? 하하하.”

 

그런 타박 들을 때마다 정해진 행동도 있다. 머리를 긁적긁적 긁으며, 바보처럼 배시시 웃어 보이는 것. 뭐라 뭐라 대꾸해봐야 말대답으로밖에 안 비칠 테고, 그럼 타박이 더 길어질 게 분명했다. 형님은 배시시 웃는 날 보고는, 못다 한 말이 남았는지 입맛을 쩝쩝 다셨다.

 

나는 그날, 다소 신선한 충격을 받았던 거 같다. 아직도 왼손잡이를 타박하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근데 말이다. 그 충격도 오래가지 않았다. 왜냐고?? 왜냐고오??

 

그 뒤로도 “너 째비냐??”로 시작해서 ‘째비’로 사는 사람이 얼마나 불편한 삶을 살아야 하는지(겪어보지도 않았으면서!!), 특히 목수가 ‘째비’일 때 얼마나 고생스러운지에 관한 장광설을 늘어놓는 노가다 꼰대, 아니 형님들을 너무 자주 봤으니까. 그런 형님들은 마지막에 꼭 이런 말을 덧붙였다.

 

“그러게. 어릴 때 제대로 배웠어야지. 쯧쯧.”

 

나는 그럴 때마다 서른도 넘은 나이에 가정교육이 어쩌고저쩌고 하는 소리나 듣고 앉아있는 나에 대한 자괴감과 환갑도 훌쩍 넘으신 아버지까지 욕보이게 만든 것에 대한 죄스러움과 아무 말이나 막 뱉어버리면 그만인 꼰대, 아니 형님들에 대한 울화가 뒤죽박죽 섞여 목구멍으로 차올랐다. 그렇지만 꾸욱 참았다. 무슨 말을 한다 한들, 그게 무슨 의미일까 싶어서. 그 부질없음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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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러브를 낄 수 없던 아이

 

그때 그 형님들에게 하지 못한 말, 여기서라도 좀 해야겠다. 억울하고 속상해서 넋두리하는 거니까 이해해주시길. 꾸벅.

 

어릴 때 제대로 안 배우고 뭐 했냐고?? 이래서 가정교육이 중요하다고?? 암요, 암요. 왜 안 받았겠습니까. 그놈의 가정교육! 요즘도 가끔 아버지는 왼손으로 젓가락질하는 나를 보며 이렇게 말씀하시는데 말이다.

 

“에휴~ 저놈 저거 그래도 내가 글씨는 오른손으로 쓰게 만들었어. 그나마 다행이지.”

 

어릴 적, 아버진 늘 말씀하셨다. 다른 건 둘째 치고, 연필과 수저만큼은 오른손으로 써야 한다고. 그건 아버지의 오랜 숙원사업이었고, 절반의 성과(?)만 거둔 게 여전히도 못마땅하신 게다.

 

나머지 절반, 그러니까 오른손 젓가락질에 대해 아버지가 포기한 건 내가 중학교에 들어가고도 한참 뒤였다. 그전까지 왼손으로 젓가락질할 거면 밥 먹지 말라는 말을 도대체가 몇 번이나 들었는지, 끝끝내 밥상에서 쫓겨난 건 또 몇 번이었는지 셀 수조차 없다. 그럴 때마다 나도 억울한 마음에 입을 삐죽 내밀곤 했다. 태어나 보니 ‘째비’였고, 때려죽인대도 오른손으론 젓가락질 못 하겠는 걸 도대체 어쩌란 건가 싶어서.

 

말 나온 김에 왼손잡이로 태어나 억울했던 구구절절한 사연 좀 얘기해야겠다. 당장 목수 일할 때 그렇다. 형님들 말이 영 틀린 건 아니다. 세상 모든 일이 그렇듯, 목수 일도 오른손잡이 기준이다. 우선, 모든 연장이 오른손잡이용이다. 그러니까 나는, 오른손잡이용 연장을 왼손으로 든 채, 어정쩡한 자세로 이용할 수밖에 없는 거다.

 

특히, 스킬(현장에서 휴대용 원형톱을 부르는 말. ‘Skil’이라는 독일의 전공공구 회사에서 원형톱을 만들어 판매하기 시작했고, 그게 대명사처럼 굳어진 경우다. 비슷한 예로 스카치테이프나 대일밴드가 있다) 쓸 때가 최악이다. 스킬로 나무를 자르면 엄청난 양의 톱밥이 뿜어져 나온다. 그 톱밥이 오른손잡이 입장에서 보자면 바깥쪽으로 뿜어져 나가는 거지만, 내 입장에서 보자면 안으로 뿜어져 들어오는 거다. 해서, 난 스킬 쓸 때마다 톱밥으로 샤워를 하곤 한다. 흑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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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공할 때도 마찬가지다. 이 또한 오른손잡이 기준이다. 초짜한테 알려줄 때도 매우 당연하게 오른손잡이 기준으로 알려준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시노(30cm 정도 쇠막대기로 끝이 가늘고 약간 구부러져 있다) 때문에 애를 많이 먹었다. 참고로, 시노는 망치와 더불어 형틀목수가 제일 많이 쓰는 연장이다. 해서, 다른 연장은 몰라도 망치와 시노만큼은 꼭 옆구리에 차고 다닌다.

 

그럼 시노는 언제 쓰느냐. 만능 연장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다양하게 쓰인다. 지렛대로도 쓰고, 구멍 뚫을 때도 쓴다. 심지어 급할 땐 시누 대가리로 못도 박는다. 그밖에도 시노의 활용도는 무궁무진하다. 물론, 제일 중요한 역할은 반생이(현장에서 쓰는 굵은 철사. 보통 6반생[직경 4.8mm]과 10반생[직경 3.2mm]을 쓴다. 일본어 ばんせん[반쎈]에서 파생) 묶을 때다. 막대기로 선물 상자 매듭을 묶는다고 상상하면 쉽다.

 

이놈의 시노질이 문제였다. 시노로 반생이 묶는 게, 나에겐 세상 무엇보다 어렵게 느껴졌다. 초짜 시절, 형님들한테 얼마나 깨졌나 모른다.

 

“야!! 야야!! 이게 안 되냐? 다시 해봐.”

 

“아니, 그게 아니라, 저는 왼손으로 해야 하니까, 헷갈려서요. 한 번만 다시 보여주세요.”

 

“그러니까 잘 보라고!! 천천히 보여줄 테니까. 이렇게!! 응? 이렇게 꼬아서 이쪽으로!! 응?? 이렇게 빼서!!! 이쪽으로 돌리면 된다고!! 이 쉬운 게 왜 안 된다는 거야!!”

 

머리에서 쥐가 날 것 같았다. 형님이 왼쪽으로 시노를 돌리면 난 오른쪽으로 돌리고, 형님이 오른쪽으로 꼬면 난 왼쪽으로 꼬아야 하고. 에-휴-. 내가 더 죽을 맛이었던 건, 상황에 따라 반생이 묶는 방법이 천차만별이어서다. 한 가지 방법만으로도 머리에서 쥐가 날 것 같은데, 여러 가지 방법을 한꺼번에, 그것도 거꾸로 외우려니, 그게 쉽겠냐고요. 남들 낮잠 자는 점심시간마다 홀로 현장에 들어가 시노를 이리 꼬고 저리 꼬아가며 얼마나 연습했던지. 지금이야 눈 감고도 시노를 휙휙 돌리지만, 그때는 정말 울고 싶었다.

 

진짜로 엉엉 울었던 기억도 있다. 초딩 때다. 친구들과 야구하러 운동장에 모였는데, 집 좀 산다는 녀석이 글러브를 가지고 나왔다. 껴보고 싶었지만, 낄 수 없었다. 난 왼손으로 공을 던져야 하는데, 녀석이 가져온 글러브는 당연히 왼손에 끼는 오른손잡이용이었으니까. 왼손에 글러브 끼고, 오른손으로 공 던지는 녀석이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른다. 그날, 집에 가자마자 엄마한테 글러브 사달라고 엉엉 울며 매달렸던 기억이 지금도 선하다.

 

그 밖에도 ‘째비’여서 겪어야 했던 웃지 못할 사연이 차고도 넘친다. 일일이 나열할 수 없을 뿐. 지금도 난 식당에 가면 제일 왼쪽 구석에 앉는다. 내 왼쪽에 사람이 앉으면 그 사람의 숟가락질과 내 젓가락질이 부딪히게 된다. 그렇게 부딪히면(굳이 따지고 들자면 누구의 잘못도 아니지만), 누구라도 나를 흘겨볼 게 분명하니까.

 

왼손잡이의 삶이란 그런 거다. 괜히 억울하고 섭섭한 삶. 입술이 삐죽 나오는 상황을, 살아가는 내내 겪어야 하는 삶. 그러니, 타박 좀 그만해주세요.

 

다름을 존중하는 세상

 

언젠가 누군가 이렇게 물었다.

 

“당신은 어떤 세상을 꿈꾸세요? 어떤 세상에서 살고 싶으세요?”

 

한참 고민한 끝에 내가 했던 대답은 이거였다.

 

“다름을 존중하는 세상이요.”

 

내가 말해놓고도 퍽 근사하게 느껴져 두고두고 써먹었던 기억이 난다. 정말로 그런 세상이 온다면 국가, 종교, 인종, 성별, 이념 등등을 문제로 서로의 마음을 후비거나 총칼 들고 전쟁할 일 없을 텐데 말이다. 그냥, 너랑 나랑 다르다고 생각하면, 나와는 다른 너의 모습도 존중해 줄 수 있다면 우리 모두 행복할 수 있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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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getty image>

 

다름을 존중하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고 말하던 무렵의 나는, 그 ‘다름’ 때문에 스트레스가 많았었다. 그 당시 난 이런저런 이유로 비건(채소, 과일, 해초 따위의 식물성 음식 이외에는 아무것도 먹지 않는 철저하고 완전한 채식주의자)의 삶을 살고 있었다. 굳건한 의지로 시작한 건 아니었다. 해서, 나로 인해 불편해지는 상황을 만들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가령, 주변 누구에게 채식을 권한다거나 유난 떨지 않았단 얘기다. 그냥 혼자 조용히 고기를 먹지 않았고, 다른 누군가와 고기를 먹어야 하는 회식 자리 등에선 기꺼이 고기도 먹었다. 내일부터 다시 안 먹으면 그만이라는 심정으로.

 

그랬음에도 불구하고 비건으로 산다는 건 참 쉽지 않았다. “그럼, 식물은 안 불쌍해?”로 시작하는 시비조의 질문과 어떻게든 논리적으로 나를 찍어 눌러 고기를 먹이고야 말겠다는 불굴의 오지라퍼들이 힘을 쭉쭉 빠지게 만들었다.(참고삼아, “그럼, 식물은 안 불쌍해?”에 대한 대답은 김우열 작가가 쓴 『채식의 유혹』에 잘 나온다. 채식에 관심 있거나, 채식하는 사람들의 삶이 궁금하다면 일독을 권한다. 가볍고 유쾌하게 읽을 수 있다.)

 

그렇게 2~3년쯤 버티다가 이런저런 핑계로 그만뒀다. 지금은? 비건으로 살아가는 사람을 부러워하면서, 나도 그렇게 살면 좋겠다 정도의 마음만 갖고 살아간다. 아무튼, 그런 시절이 있었다.

 

요즘, 그 시절이 문득문득 떠오른다. 그 시절에 했던 고민들, 마음속에서 품었던 질문들이 말이다. 서른도 훌쩍 넘은 나이에 왼손잡이라는 이유로 타박 받는 게 은근히 스트레스였던 모양이다.

 

왜 우리는 다름을 존중해주지 못할까. 왜 자꾸 다른 걸 틀리다고 말할까. 왼손잡이로 투정 부리는 게 미안할 만큼, 여전히 우리 주변엔 차별받는 사람이 많다. 단지 다르다는 이유로 말이다.

 

최근엔 이태원 발 코로나 때 깜짝 놀랐다. 그들에게 가해지는 무차별적인 욕설과 비난의 댓글을 보면서. 그들이 비판받아야 하는 건 엄중한 시기에 클럽에 갔다는 점이다. 딱 거기까지다. 그들이 성소수자라는 건 아무 문제 안 된다. 근데 그 당시 댓글들은 정말 가관이었다. “성소수자가 클럽을?? 아이구!! 사회의 악 같으니라고.” 하는 혐오의 시선이 가득했다.

 

늘 그렇듯, 구구절절 말이 많았다. (나도 꼰대가 되어가나 보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옛날 노래 하나 들으면서 마무리하자. 패닉의 <왼손잡이>. 참고로 이 노래를 작곡한 이적은 “우리를 왼손잡이 정도로 대해주세요.”라고 했던 성소수자들의 발언에 영감받아 이 노래를 만들었단다.

 

나를 봐 내 작은 모습을

너는 언제든지 웃을 수 있니

너라도 날 보고 한 번쯤

그냥 모른척해 줄 순 없겠니

 

하지만 때론 세상이 뒤집어진다고

나 같은 아이 한둘이 어지럽힌다고

모두 다 똑같은 손을 들어야 한다고

그런 눈으로 욕 하지마

 

난 아무것도 망치지 않아 난 왼손잡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