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02.03.수요일
산하
내가 다녔던 중학교 (고등학교였는지도 모르겠다. 이거 청년성 치매인가)에는 미술 선생님이 두 분 계셨다. 한 분은 남자, 한 분은 여자 선생님이었는데 그 두분께는 죄송한 말씀이지만 두 분은 학교에서 가장 만만한 선생님으로 수위를 다투셨다. 왁자지껄 떠들다가도 선생님이 슥 훑고 지나가면 예의상으로라도 입을 닫는 것이 암암리에 확립되어 있던 관례였지만 그 두 분께는 그 관례가 적용되지 않았다. "샘 온다 샘....."이라는 말에 허둥대다가 "꺼벙이다 꺼벙이." 라는 정찰 보고가 들어오면 더 큰 목소리로 웃고 떠들어 제꼈던 것이다. 꺼벙이는 남자 선생님의 별명이었다. 여자 선생님의 별명은? 당연히 꺼실이였다.
그놈의 장학사가 방문한다고 해서 시간에 없는 청소를 하느라 유리창에 달라붙어 있는데 갑자기 앙칼진 목소리가 창문을 뒤흔들었다. "어느 놈이야 나와~~~~~" 아주 짧은 순간 아이들은 얼어붙었다. 수학 선생님인가 영어 선생님이가 아니 대체 누가 무슨 짓을 한 거야. 그러나 이들의 호기심 어린 눈망울이 한곳을 향하여 앙칼진 목소리의 주인공을 파악했을 때 분위기는 우수날 대동강 풀리듯 삽시간에 녹아 버리고 말았다. 나도 그랬다. 피식 웃으면서 아주 낮게 뇌까렸던 것이다. "난 또 누구라고 꺼실이 아이가."
꺼실이 선생님의 분노의 이유는 별 다른 게 못되었다. 복도를 지나가는데 창문에 매달려 있던 한 녀석이 그 뒤통수에 대고 "꺼실아~~~"를 정답게 불렀던 것이다. 본인의 별명에 대해 무한한 불만을 갖고 계시던 꺼실이 선생님은 그 즉시 뒤돌아서서 누구냐를 절규했지만 뉘라서 그 호명에 응할 것인가. 아무리 독기를 세워 불러도 아이들은 흥얼거리면서 유리창을 닦았고 귀마개를 한 척 선생님의 채근을 무시했다.
"니가 이 반 반장이쟤? 똑바로 대라 어느 놈이고?"
꺼실이 선생님은 단단히 화가 난 듯 했다. 기어코 자신을 꺼실이라 부른 넘을 골라내어 교무실로 끌고 갈 기세였다. 아마도 다른 선생님이었다면 반장부터 얼굴이 파래졌을 것이다. 물론 반장의 얼굴도 파래지기는 했었다. 웃음을 참느라 말이다. 반장은 가까스로 웃음을 물리치면서 답했다. "지는 못들었는데예."
그러나 아이들은 반장만큼 인내심이 좋지 못했고 폭소를 터뜨렸다. 그리고 그 폭소 뒤에 폭포와 같은 이죽거림이 따라붙었다. 샘이 잘 못들은 깁니더. 아니 누가 샘보고 꺼실이라 캅니꺼. 맞아죽을라고....... 어 샘이 꺼실이라예? 샘 별명 꺼실이 아인데...... 샘이 꺼실이였습니꺼? 내 몰랐네....... 꺼실이 샘의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은 이제 하얀 분노로 덧칠되고 있었다. 입술이 부르르 떨렸고 부르쥔 주먹은 금새라도 로켓 펀치로 날아들 것만 같았다. 아이들은 분위기가 묘하게 되어 가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꺼실이 앞에서 장난기를 거둘 정도로 겁을 먹지는 않았다. 마침내 꺼실이 선생님의 벼락같은 호통이 터져 나왔다.
"2학년 4반 너희들 다 꼼짝 말고 있어. 오늘 죽을 줄 알아."
꺼실이 선생님은 종종걸음으로 교무실 쪽 계단을 내려가셨다. 어 이건 아니었다. 원래 시나리오는 꺼실이답게 처음에는 방방 뜨다가 "정말 꺼실이라 안했지?" 정도로 물어 주시고 "네~~~~~" 대답해 드리면 끝나는 것이었다. 어 그런데 교무실로??? 으악 잘못하면 단체로 엉덩이에 불이 나거나 오리걸음으로 알 좀 배길 일이었다. 갑자기 눈앞이 시험 빵점 맞은 만화 속 꺼벙이처럼 암담해졌다. 이 일을 우짜면 좋노. 처음 꺼실이라 부른 녀석은 곧 적발되었고, 역적으로 몰렸다. "니는 선생보고 꺼실이가 뭐고 대놓고." "아 싸가지없는 쉐이..... 니 땜에 다 죽었다 아이가."
니네 다 죽었어!!
1분 후 쿵쾅거리는 소리와 함께 꺼실이가 기세등등한 남자 선생님 한 분을 모시고 되돌아왔다. 죽었다고 복창하고 있던 우리는 찬물을 끼얹은 듯 불안한 침묵을 지키고 있었는데 교무실 쪽 동정을 살피던 녀석의 한 마디가 다시 우리를 해방시켰다. "야 꺼실이가 꺼벙이 데리고 온다." 뭐이? 학생주임 독사도 아니고, 하다못해 팔힘 좋기로 유명한 학다리도 아니고 꺼벙이라고??? 동료 미술 선생님을 놀린 악동들에게 분기탱천하여 달려오고 있는 건 아...... 꺼실이 선생님이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동원한 선생님은...... 아..... 꺼벙이였던 것이다.
아무리 애들이 떠들고 설쳐도 "조용히 좀 해라"고 말할 뿐이고, 단 한 번도 몽둥이를 들어 본 적이 없는, 너무 화가 난 나머지 아이들을 때리려다가 부들부들 떨고 말았다는 심약한 교사. 아이들에게 카리스마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꺼벙이 선생님이 꺼실이 선생님의 봉욕을 응징하고자 달려온 것이다. 아니나다를까 아이들은 또 한 번 왁자지껄 웃으며 능글능글 꺼벙이와 꺼실이의 분노를 피해 나갔다.
"샘 진짜로 아닌데예. 아무도 안그랬십니더."
"샘이 진짜로 들었다 카는데 이노무 쉐이들."
"미치고 팔짝 뛰겠습니더. 하나님에 맹세코 아무도 안그랬십니더. 잘 못들은 깁니더."
"니 교회 나가나?"
"지난 주부터 나갑니더. 인자 열심히 나갈 끼라예."
"참말로 아무도 안그랬나? "
"와 샘... 믿어 주이소. 누가 샘보고 꺼실이라 캅니꺼. "
"선생보고 꺼벙이 꺼실이라 카면 안된다."
"푸하하하하하 예~~~~~~~~"
결국 그 흔한 엎드려 뻗쳐 한 번 시키지 않고, 오른속에 나름 폼나게 들고 있던 몽둥이를 제대로 휘둘러 보지도 않고 꺼벙이 선생님은 아직 분이 덜 풀린 꺼실이 선생님을 모시고 사라졌고 우리는 통쾌하게 웃어 댔었다. 꺼실이 진짜 웃긴다. 데리고 온 선생이 하필 꺼벙이란 말이냐....... 하지만 교무실 청소하던 녀석들은 다른 얘기를 했다. 꺼실이 선생님이 교무실에 갔을 때 힉생 주임 이하 매 타작에 능하고 애들 고통 주는 정도는 엿가락 꼬듯 할만한 선생님들이 즐비하게 계셨다. 꺼실이 선생님이 자신이 당한 일을 호소했을 때 엉덩이를 방석에서 뗀 선생님들이 하나 둘이 아니었다고 했다. 그분들이 떴다면 우리 반은 어깨동무해서 오리걸음으로 운동장 다섯 바퀴는 돌아야 했으리라. 그런데 그를 만류한 이가 꺼벙이 선생님이라고 했다. "놔 두이소 내가 가서 혼내겠습니다. "
같은 미술 선생님이 당한 데 대한 분노였을까. 그는 어울리지 않는 몽둥이 하나를 들고 기세등등 달려 왔지만 끝내 혼찌검을 내기는 커녕 유야무야 훈계만 하고 꺼실이 선생님을 달래며 물러났다. 역시 꺼벙한 것이었나? 일정 정도 사실이기는 하나 완전한 사실은 아니었다. 한 녀석의 해석이 그를 뒷받침했다. "꺼벙이가 우리 봐 준 기다. 일이 커질 거 같으니까네 자기가 온 기다. 꺼벙이 샘 딴 샘들이 애들 줘 패고 기합 주는 거 디게 안좋아한다 아이가."
4차원같은 발상과 시의적절하지 못한 발언의 전담자였던, 그러나 한없이 착하기만 했던 미술 선생님은 그대로 꺼벙이의 현신이었다. 군것질하느라 이발비를 다 날리고 10원어치만 머리를 깎아 달라고 해서 머리에 땜통 자국이 났던 꺼벙이...... 방학 숙제를 하지 않고 '전기숙제기'를 사러 온 서울 시내를 헤매던 꺼벙이, 무하마드 알리가 스핑크스에게 타이틀을 뺐기자 자신이 무하마드 알리를 이겨야 하는데 꿈이 사라졌다며 펑펑 우는 꺼벙이.... 허구헌날 빵점을 받고 아버지에게 두들겨 맞아 혹이 선인장같이 열려도 항상 웃음을 잃지 않던 꺼벙이라는 별명은 교사로서 아이들을 휘어잡지는 못했지만 아이들이 매 맞는 걸 보는 것조차 싫어했던 미술 선생님에게 잘 어울리는 별명이었다.
꺼벙이와 꺼실이...... 두 미술 선생님을 뜻하지 않게 떠올린 것은 꺼벙이와 꺼실이를 세상에 내놓았던 작가 길창덕 선생님의 부음을 접했기 때문이다. 꺼벙이 만화를 뒤늦게 발견하고 소년중앙 과월호를 찾아 온 동네를 뒤집고 서울 외갓집까지 쑥대밭을 만들었던 유년 시절의 추억 또한 간만에 마음 속에서 햇빛을 보았다. 잘 생기지도 않았고 모범생도 아니며 허구헌날 두들겨 맞기가 일쑤였던 꺼벙이, 그래서 더 아이들에게 인기있었던 꺼벙이의 아버지이며, 우리 나라에 이런 곳이 있다는 지리 공부를 처음으로 시켜 주었던 "선달이 여행기"의 저자이고, "신판 보물섬"을 통해 유쾌한 모험을 들려 주었던 만화가 길창덕 선생님의 명복을 빈다.
양갱처럼 부드럽고 달콤한, 숨겨놓았던 오징어 뒷다리처럼 구수하고 짭짤했던 유년 시절의 추억. 그를 내 손에 쥐어 주셨던 분 중의 한 분이 또 저 세상으로 가셨다....... 이렇게 나이가 들어가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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