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대한민국 해군>
관함식(觀艦式)이란 게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대한민국 해군 국제 관함식 (Republic of Korea Navy Fleet Review)이란 타이틀로 10년마다 한 번씩 했는데, 이걸 한다는 자체가 제법 살만하고 제법 해군력이 된다는 의미이다.
애초 이 관함식이란 것 자체가 처음부터 ‘보여주기’ 위한 거다. 형용모순인 거 같은데, 이걸 맨 처음 시작한 인물이 영국의 조지 2세였다. 명목상의 이름은 ‘함대 검열’인데, 간단히 말해서 국가 원수가 해군 함정을 모아놓고 사열한다고 생각하면 된다. 국군의 날 행사 때 장비들 죽 도열해 놓고 행진하는 것 봤을 거다. 그것의 해상 버전이라고 보면 된다.
이 관함식의 대표주자가 바로 영국의 스핏헤드 관함식(Spithead Review)이다. 스핏헤드는 영국 남부의 해역이다. 넓은 만이 형성돼 있고, 외해로부터 파도에서 보호받고, 내만의 수심이 깊어서 대형함이 닻을 내리기도 좋아 영국 관함식의 단골 개최지였다. 해가지지 않는 제국 시절의 영국은 이 해역에다 100여 척의 배를 몰아놓고 관함식을 펼쳤다. 그 자체로 장관이었다.
이렇게 관함식을 연다는 건 보통 자신감이 아니면 안 된다. 당장 전선에 나가거나 경계를 서는 함정들을 제외한 배들이 다 동원되는 것이니,
“이 정도쯤이야...”
라는 자신감도 있어야 하고, 해당 수역에 대한 경계와 타국과의 관계도 생각해야 한다. 관함식을 한다는 건 ‘이 정도 함대를 빼도 상관없다.’라는 정세가 담보돼야 한다. 즉, 평화시에나 할 수 있는 행사란 거다. 아니면, 영국처럼 압도적인 전력이 있는 상황이든가 말이다. 영국이 제국주의 시절 스핏헤드에서 종종 관함식을 열었던 건... 주변국. 그러니까 다른 열강들의 기를 눌러주는 의미도 있었다.
이 스핏헤드 관함식 중에서 특히나 유명했던 것은 1897년 6월에 있었던 빅토리아 여왕 재위 60주년(Diamond Jubilee) 기념 관함식이다.
정치적인 상황이나 규모 면에서 상당히 중요한 관함식이었다(여왕 즉위 60주년이라면 말 다하지 않았겠는가?). 세계 각국의 배들이 즉위 60주년을 축하하기 위해 영국을 방문했었고, 왕세자가 직접 이 행사에 참석했다.
이 당시 영국 해군의 상황을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임무가 없는 모든 영국 군함은 스핏헤드에 집결하라!”
였다. 전 세계의 귀빈들, 정부 관계자들, 왕족들, 오피니언 리더들... 그리고 군 관계자와 같은 해군 관계자들이 두 눈 크게 뜨고 이 관함식을 지켜볼 것이기에 영국 해군은 바짝 긴장해서 자신들의 모든 군함들을 대기시켰다.
관함식의 목적은 두 가지라고 할 수 있다. 하나는 세력 과시, 나머지 하나는 우방국과의 우호증진이다. 까놓고 말해서 세력 과시가 관함식의 최우선 목표라 할 수 있다. 1차 대전 터지기 바로 직전인 1914년 7월 영국의 조지 5세가 기동훈련 관함식이란 걸 했었다. 이때 영국은 대형 전함만도 55척, 순양전함 4척, 순양함 27척, 경순양함 28척, 구축함 78척, 여기에 수많은 어뢰정·소해함·구난함·우편함·병원함 등이 영국 남부 군항인 스핏헤드를 가득 메웠다. 영국은 이때 독일에게 이런 사인을 보낸 거다.
“너희가 지금 세계 2위의 해군력을 건설했다고 덤비는 거 같은데, 어디 한 번 들어와 봐.”
라는 거였다. 영국은 제국주의 시절 이 관함식... 뭐 포츠머스, 토베이 등등에서도 관함식을 했지만, 역시나 영국 하면 스핏헤드다. 이 스핏헤드에서 수평선까지 함대를 빽빽이 채워놓고는,
“우리 쪽수가 이 정도쯤이야.”
라며 다른 열강들의 기를 죽이는 모습은... 진짜 영국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국제정치학적으로 보면, 1897년 6월의 관함식은 영국 해군에게는, 그리고 영국에게는 중요한 분기점이 된다. 우리에겐 <강대국의 흥망>으로 잘 알려진 폴 케네디 교수가 쓴 <영국 해군 지배력의 역사>를 보면, 이 관함식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1897년 6월 26일 세계가 보아 온 것 중 가장 강력한 해군 부대가 빅토리아 여왕의 즉위 60주년을 축하하기 위해 스핏헤드에 집결했다. 21척의 1급 전함과 54척의 순양함을 포함하여 165척 이상의 영국 함정들이 영국 해군의 전투력과 막강한 규모를 과시하였다.”
이 당시 영국 해군의 전투력과 위용은 어마어마했다. 영국의 주요 전함은 62척이었는데, 이 당시 영국을 제외한 나머지 열강들. 그러니까 프랑스, 독일, 러시아, 미국 등의 주요 전함은 모두 합해 96척이다.
“영국은 열강 전체가 보유한 주요 전함의 39.2%를 보유하고 있다.”
엄청난 양이 아닌가? 전 세계 전함의 40%를 차지하고 있는 거였다. 그러나 폴 케네디 교수는 이 관함식의 영국 패권 몰락의 시작점이라 말했다. 이유는 간단한데,
“14년 전인 1883년만 하더라도 영국의 주요 전함은 38척이었다. 나머지 열강들의 전함은 40척이었으니, 영국이 전체 열강들의 전함 보유량의 절반 가까이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격차가 좁혀졌다.”
(이 말에 동의할 수밖에 없는 게, 영국은 19세기 중후반에 전 세계 해군 함정 순톤수의 70%를 점유한 적이 있을 정도로 압도적인 물량을 보여줬었다. 그런데 이 물량의 힘이 흔들리기 시작한 거다)
영국은 이 어마어마한 해군력을 바탕으로 전 세계 다섯 개의 열쇠를 잠그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다섯 개의 열쇠란 도버해협, 지브롤타, 희망봉, 알렉산드리아, 싱가포르다. 이게 우습게 들릴 수 있는데, 도버해협을 차단하면 당장 러시아가 대서양으로 나올 수 있는 발틱해와 독일이 대서양으로 나오는 북해를 차단할 수 있다. 지브롤타? 지중해에 있는 나라들이 대서양을 나오지 못하게 할 수 있다. 알렉산드리아는 수에즈 운하를 막아선다. 희망봉은 대서양과 인도양의 교류를 막을 수 있고, 싱가포르는 태평양과 인도양을 막아버린다. 영국은 이 전략적 요충지 5개를 꽉 틀어쥐고 한때 전 세계를 호령하고 있었던 거다. 제국주의 시절 영국이 전 세계 이곳저곳에 뿌려 둔 해군기지들은 냉정하게 말하자면 이 다섯 개의 열쇠를 지키거나 보강하기 위한 존재들이다. 이렇게 보면... 영국이 참... 지금 미군이 어디에 기지를 건설하고, 누구랑 친하게 지내는지를 알면 패권이 어떻게 흐르는지 보일 거다.
폴 케네디 교수의 말을 종합해 보자면, 영국은 1897년 관함식에서 패권의 위기를 느끼고 마지막으로 ‘허세’를 보이기 위해 가지고 있는 모든 함선을 끌고 와 열강들에게 세를 과시했던 거다.
이 시기 독일의 빌헬름 2세는 마한의 책 ‘해양력이 역사에 미치는 영향’에 빠져서 해군력 증가를 위한 방법론을 고민할 때였다. 스핏헤드 관함식이 있던 달인 1897년 6월 국가해군청 장관 자리에 알프레드 폰 티피츠를 임명했다. 티피츠는 1년 뒤인 1898년 ‘1차 함대법’을 만들어서 1904년까지 기함 1척과 전함 16척, 근해 장갑함 8척, 대형 순양함 9척 및 소형 순양함 26척을 갖겠다는 선언을 하게 된다. 1897년은 영국에게 있어선 ‘마지막 좋은 시절’이었는지도 모른다.
여기까지 보면, 1897년 스핏헤드에서 있었던 관함식이 얼마나 중요한 행사였는지를 대충 짐작할 수 있을 거다. 영국은 그야말로 나라의 체면과 위신을 걸고, 자신들의 영혼까지 탈탈 털어 함대를 보여주려 했었다. 그 무엇보다 중요했던 관함식. 그런데 이 관함식이 한 명의 ‘불청객’ 때문에 난장판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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