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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지난편 댓글에서 다들 터비니아, 터비니아 말하는 덕에 내가 글 쓸 맛이 난다...!? 으응?   

 

딱히 퀴즈를 낸 건 아니지만 정답을 맞춘 사람은 딴지일보 편집부로 박차고 들어가 죽돌 편집장한테 딴지라면 사내라!, 고 하는 것으로 정리하자. 백라면 맛있더라.

 

자, 그럼 계속 가보자.

   

2.

찰스 파슨스(Charles Algernon Parsons)라는 인물이 있다. 집안도 좋았고(귀족집안이다), 아버지는 천문학자로도 유명한 윌리암 파슨스 백작이다. 대대로 천재를 배출한 집안 답게 찰스 파슨스도 천재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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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형이야

 

 

이 사람이 주목한 건 증기기관이었다. 이때까지 증기기관은 증기를 사용해 피스톤을 누르는 왕복식 증기기관이었다. 한 마디로 말해서 피스톤으로 크랭크를 돌리는 방식이다. 이런 증기기관에서 출력을 높이려면 방법은 간단했다. 크고 무거운 피스톤을 여러 개 달기만 하면 된다. 이걸 돌리기 위해 더 많은 보일러를 달아주고, 더 많은 연료를 태우면 된다(그래야 증기를 얻을 테니 말이다). 한 마디로 비효율적이란 의미다. 이 비효율을 극복하고 출력을 높인다 하더라도 가장 큰 문제가 하나 기다리고 있다. 바로, 

 

“진동”

 

이다. 기관이 크고 강해질수록 진동도 심해진다. 이 진동이 배나 기관의 고장을 일으키는 거다. 자, 문제는 19세기 중후반부터 전 세계 해군들은 ‘큰 배’에 대한 집착으로 날을 새던 시기였다는 거다. 다들 큰 배, 더 빠른 배를 원했다. 

 

1860년에 건조된 세계 최초의 대형 장갑함인 HMS 워리어가 14노트를 냈다. 1892년 등장한 영국 해군 최초의 어뢰구축함인 HMS 데어링. 지금으로 치면 고속정 같은 배인데, 이 300톤도 안 되는 배에 최신 왕복식 증기기관을 달아서 27노트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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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MS 워리어는 일케 생겼다.

 

 

이건 극히 예외적인 경우다. 같은 시기 전함들보다 거의 두 배 가까이 빠른 속도다. 

 

큰 배를 빨리 움직이려면 기관이 더 무거워져야 했고, 그 결과 진동과 소음으로 고장의 확률도 올라간다. 이 악순환을 끊어 낼 방법은 없었던 걸까? 이때 등장한 인물이 찰스 파슨스다. 그의 생각은 아주 간단했다.

 

“바람개비 같은 터빈을 증기로 돌리는 방식이라면 피스톤 운동이 기본인 왕복식 증기기관보다 훨씬 회전수가 빨라질 수 있다.”

 

파슨스는 이 터빈 아이디어를 계속 고민하다가 1884년 다단 축류형 터빈을 고안해 특허를 받아낸다. 파슨스는 이 터빈이 가볍고 출력과 효율이 좋으니 발전소나 선박의 추진기관으로 적합하다고 보고, 투자자들을 찾아서 1889년에 아예 터빈 전문 기업을 세운다. 이 기업이 세운 발전소는 연료비를 상당히 아낄 수 있었기 때문에 돈을 제법 벌게 된다.

 

이렇게 돈을 벌게 된 파슨스는 자신의 꿈을 실천에 옮기려 한다. 

 

“증기터빈은 선박의 속도를 비약적으로 향상시킬 수 있다!!”

 

파슨스는 직원 다섯 명짜리 조그만 선박업체를 따로 차린다. 바로 파슨스 마린 스팀 터빈 컴퍼니(Parsons Marine Steam Turbine Company)가 그것이다. 이 회사는 오직 증기터빈으로만 달리는 배를 개발하겠다는 게 설립목적이었다. 

 

수많은 시행착오와 난관 끝에 파슨스는 1894년 배를 완성하게 된다. 바로 <터비니아>다. 

 

3.

첫 시험항해 때의 속도는 34.5노트. 시속 64km로 달린 거다. 이게 언뜻 감이 안 올 거 같은데, 당시 영국에서 가장 빠른 구축함보다도 10노트 정도 빠르고, 전함과 비교하면 2~3배 정도 더 빠른 속도다. 이 시험결과를 확인한 파슨스는 확신하게 된다. 

 

“이 정도 속도면 누가와도지지 않는다. 게다가 소음과 진동도 거의 없어. 고장 날 이유가 극적으로 줄어드는 거야. 이건 된다. 될 수밖에 없어!”

 

파슨스는 그 길로 영국 해군을 찾아갔다. 물론, 자신의 배 <터비니아>도 같이 들고 간다. 

 

“내가 만든 엔진을 사면 군함의 속도를 최소한 2배 이상 빠르게 만들어 줄 수 있소.”

 

“아니, 그걸 우리가 어떻게 믿고...”

 

“터비니아가 무려 34.5노트로 달린 거 여러분도 보지 않았습니까?”

 

“아니, 그건 45톤짜리 조그만 배고...전함들은 기본 1~2만톤이 넘어가는데...”

 

“아니 속아만 살아왔어요? 그리고 지금부터 당장 전함에 엔진 얹자는 것도 아니고, 처음엔 구축함처럼 작은 배에 실험적으로 달아보다가 차차 사이즈를 키워나가야죠! 제가 옳다는 걸 확인할 수 있을 겁니다.”

 

“......아무리 그래도 이게 완전한 기술도 아니고, 기술적 완성도를 높이려면 투자도 해야 하고...이게 참 난감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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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만들고도 팔지를 못하니 빡친다... 

 

당시 파슨스를 상대했던 영국 해군 장교들은 파슨스의 아이디어에 대해 회의적이었다. 하긴, 군대 납품을 해 본 것도 아니고, 배를 전문적으로 만드는 이도 아니다. 그저, 자기가 생각해 낸 아이디어가 하나 있어서 이걸 배에도 접목한 게 다인 인물이다. 해군은 위험한 다리를 건너기 싫었던 것 같다. 

 

파슨스는 자신의 아이디어가 인정받지 못했다는 사실에 분노했다. 엔진을 만들고 덤으로 배에다가 얹어 시험 항해까지 했고, 그 결과를 다 보여줬는데 여기서 뭘 더 어쩌란 말인가? 군함에 적용하려면 비용이 더 들어갈 거 같고, 시험도 계속 해야 하는데 그 비용이 아까웠던 걸까? 파슨스는 고민 끝에 결론을 하나 내린다. 

 

“이대로 포기할 수 없어!”

 

이때 파슨스의 눈에 들어온 게 빅토리아 여왕 재위 60주년(Diamond Jubilee) 기념 관함식이다. 영국 해군의 주요함정들이 총 집결하는 곳. 게다가 전 세계 사절단들과 왕족들, 귀족들이 다 모이는 장소. 거기다 영국 정부 인사는 물론, 영국의 한다 하는 이들이 다 모이는 곳이다. 

 

“퍼포먼스를 위해서는 이 보다 더 좋은 장소가 없다!”

 

파슨스는 이 관함식에서 자신의 배를 보여주기로 결심했다. 물론, 그렇다고 관함식에 정식으로 초청된 건 아니다. 초대받지 못한 손님. 바로 불청객이다. 

 

(하긴, 스핏헤드 관함식 때 민간인이 함부로 배를 몰고 들어간다는 게 더 이상하다. 영국 해군의 정예들이 모여 있는 장소이고, 내외 귀빈들이 빼곡히 모여 앉아 사열을 받는데...한치의 흐트러짐도 없어야 하지 않겠는가? 관함식 배치도와 진행도를 세밀하게 작성해서 진행하는 게 관함식이 아닌가. 여기에 함부로 들어갔다간 무슨 일이 터질지 아무도 모른다)

 

4.

관함식에서 사열을 받는 함정들은 모두 군함이다. 이들은 자체적으로 무장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들 외곽에는 경비를 보는 구축함들이 따로 대기하고 있다. 즉, 관함식 안으로 들어간 순간 ‘각오’를 해야 한다는 거다. 그런데 파슨스는 이 사이를 헤집고 들어가겠다고 결심한 거다. 

 

영국해군이 전력을 기울여 방어하고 있는 스핏헤드에 45톤짜리 터비니아 호가 치고 들어간다. 그리곤 온갖 재주를 다 부렸다. 외곽을 경호하던 구축함들이 있었지만, 구축함들의 속도를 월등히 앞선 터비니아는 함대 한가운데를 뚫고 들어가 관함식을 난장판으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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쩌리들아, 안녕

 

구축함들이 모두 달려들어 터비니아를 쫓았지만, 터비니아는 아랑곳 하지 않고 관함식에 초청 된 수많은 귀빈들에게 자신의 모습을 마음껏 뽐냈다. 구축함이 아무리 빨라봤자 25~28노트인데, 터비니아는 가뿐히 30노트를 넘어가지 않는가? 터비니아는 미친 듯 스핏헤드 곳곳을 휘젓고 다녔다. 그리곤 유유히 사라졌다. 

 

자, 문제는 그 다음이다. 파슨스와 터비니아는 어떻게 됐을까? 만약 한국이었다면, 아마 파슨스는 꽤 큰 곤욕을 치뤘겠지만 영국은 달랐다. 괜히 대영제국이 아니었던 거다. 

 

“파슨스씨, 당신이 만든 터빈...그거 우리가 채용하겠습니다.”

 

전 세계 열강을 불러 모아 영국 해군이 건재하다는 걸, 딴 생각 품지 말라고 정중히 협박을 하는 자리에서 터져 나온 망신살 보다는 미래를 봤던 거다. 

 

“터빈 엔진을 장착한 2척의 구축함을 만드는 걸로 시작합니다. 바이퍼와 코브라 두 척의 구축함을 주문하겠습니다. 이걸로 터빈 엔진의 실용성을 확인해 봅시다. 이게 잘 되면 전함까지 그렇게 만들어 봅시다.”

 

영국 해군은 터빈의 가능성을 즉각 인정했고, 그길로 바로 터빈 엔진을 장착한 구축함 2척을 만들게 된다. 그리고 파슨스의 아이디어를 거절했던 영국해군 장교를 좌천했다. 미래를 보지 못했던 안목에 대한 질책성 인사였다.

 

(그가 제대로 된 결정을 내렸다면, 스핏헤드의 관함식이 난장판이 되지는 않았을테니까)

 

이렇게 터빈 엔진을 사용해 본 영국해군은 대만족을 했고, 1905년! 

 

“향후 건조될 해군의 모든 전투함은 증기터빈 기관을 장착한다!” 

 

고 선언했을 정도다. 이후 이 증기터빈 기술은 그 유명한 드레드노트를 기점으로 세계 각국에 판매됐고, 이후 새로 건조되는 거의 모든 전투함들이 증기터빈을 얹게 된다.

 

(이 증기터빈 기술은 지금도 쓰이는데, 원자력 기관이 대표적인 예다. 원자로의 열로 증기를 만들어 내는 게 기본이라서. 우리가 아는 원자력 항공모함, 원자력 잠수함, 원자력 발전소 등등은 증기터빈 기술로 움직이고 있는거다)

 

과학자가 한 번 화가 나면, 세상을 이렇게 뒤집어 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