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 기사 추천 기사 연재 기사 마빡 리스트

 

 

 

0.jpg

 

워싱턴DC 근교 북버지니아에 위치한 '토마스 제퍼슨 과학 고등학교(Thomas Jefferson High School for Science and Technology, 이하 'TJ')가 지역뉴스를 타고 있다. (참고로 TJ는 교육열이 높기로 유명한 버지니아 주의 페어팩스 카운티'에 있다) 

 

왜? <US News and World Report>에서 발표한 '미국 최고의 고등학교' 랭킹(링크)에서 전국 공립 고등학교 중 1위를 차지해서?

 

아니다. 이곳 사람들은 거기에 별 관심 없다. 1위한 적은 몇 번 있었고, 10년 이상 전국 5위권에 들어왔다. 

 

USNews_rankings.jpg

 

그럼 미국 최고의 (공립) 고등학교에 어떤 문제가 있어 지역뉴스를 타는 것일까?

 

이는 지난 6월 있었던 TJ의 2020년 합격자 발표로부터 시작된다. 학교 측은 합격자를 특성(성별, 인종, 이전학교 출신)별로 분류했는데, 이 때 제시한 표에 흑인 학생의 수가 별표(*)로 표시되어 있었다. 

 

표.jpg

합격자 분류(링크)

 

인종표.jpg

그 중에서 문제가 된 부분

 

페어팩스 교육구에서는 통계자료를 만들 때, 개인의 정보나 식별이 가능한 정보가 포함되고, 그 숫자가 한 자리일 경우, 정확한 수치 대신 별표(*)로 표시한다. '어느 중학교 출신이 몇 명 합격'이라고 공개하는데, 그 숫자가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라면 개인의 정보가 노출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표의 하단에 따로 적혀있다. 

 

**This category includes numbers that are too small for reporting (TS).

This category includes students who numbered 10 or fewer

**이 카테고리는 보고하기엔 너무 적은 수를 포함한다

이 카테고리는 10인 혹은 그 이하 학생을 포함한다

 

그런데 <블루 버지니아>라는 곳에서 자료를 제대로 읽어보지도 않고 기사를 냈다. '인종불평등을 뿌리 뽑자고 온 나라가 나선 이 시점에 전국 1위 고등학교에서 흑인 학생을 단 한 명도 합격시키지 않다니 이게 웬말이냐'라고 하면서, 사실과 다른 내용과 도발적인 헤드라인으로 사람들을 선동했다. 

 

Untitled-2.jpg

<블루 버지니아>(링크)

 

며칠 만에 사실관계를 정정하긴 했지만, 헤드라인은 그대로 유지했다.

 

3.jpg

이렇게 업데이트되었다

 

이에 버지니아 교육부 장관과 몇몇 정치인들이 7월에 비밀회동을 했다. 여기서 '2020년은 BLM(Black Lives Matter)의 해인이고, 이 문제를 더 이상 묵과할 수 없다. 버지니아의 영재교육기관의 인종불평등을 해결할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다'는 말이 나왔다. 

 

이 '특단의 조치'란, 입학시험을 폐지하고 어느 정도 자격이 되는 학생 중 입학생을 제비뽑기로 정하자는 것이었다. 

 

웬 뽑기? 여기에는 또 다른 배경이 있다. 

 

 

아시안은 공부를 너무 잘하니까

 

잠깐, 위에 나왔던 TJ 입학생 분류를 다시 한 번 보자.

 

인종표.jpg

 

총 입학생 수 486명 중 아시안이 355명으로, 무려 73%를 차지한다. 그에 반해 백인은 17.7%, 히스패닉은 3.3%다. 

 

2000년대 초반만 해도 TJ의 아시안 비율은 20%대였다. 이 비율이 20년 동안 슬금슬금 올라서 2018년엔 70%을 넘었다. 반대로 백인의 비율은 꾸준히 떨어져서 금년은 17.7%다.

 

문제는 이런 추세를 달갑지 않게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다. 내가 이 학교와 개인적인 인연이 있어서 지난 10년간 사정을 아는데, 그동안 아시안 학생의 비율을 줄이려고 별의별 짓을 다했다.

 

처음에는 입학시험 문제를 어렵게 냈다. 아시안이 덜 들어오려나 싶었지만, 문제가 어려우니 아시안은 더 잘하고 백인은 상대적으로 쳐졌다. 다음엔 아시안 학생들이 영어를 못할 것이라고 생각해 수학의 배점을 줄이고 영어시험, 에세이 테스트 등을 더 늘였다. 물론 아시안은 기가 막히게 준비를 잘해갔다. 안되겠다 싶어 중학교 교사 추천서나 교외활동의 비중을 늘이도록 바꿨지만, 아시안이 못할 리 없다. 

 

어떻게 해도 안되니 입학시험 대신 뽑기(lottery system)를 하자는 것이다. 

 

이런 현상이 TJ에서만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경쟁이 심하고 특별한 입학시험 혹은 기타 학업성취도를 바탕으로 한 선발과정이 있는 경우, 아시안 학생들이 다른 인종에 비해 월등히 잘한다. 따라서 인위적으로 아시안의 비율을 줄이려는 시도는 그동안 계속 있어왔다. 

 

뉴욕의 1, 2위 학교인 타운센드 해리스 고등학교(Townsend Harris High School)나 스튜이버선트 고등학교(Stuyvesant High School)를 비롯, 상위 랭킹 고교 중 시험을 따로 쳐서 들어가는 학교들도 비슷한 내흥을 겪었다(뉴욕시는 DC지역과 여러 면에서 달라서 단순비교는 어렵지만). 스튜이버선트 고등학교(75%가 아시안)를 제외한 다른 학교들은 아시안의 비율이 그렇게 높지 않다(대략 백인 비율과 비슷하거나 조금 높은 수준). 

 

street-2805643_1280.jpg

 

고등학교만의 문제는 아니다. 아이비리그를 위시한 미국의 명문대는 절대 점수만 가지고 학생을 뽑지 않는다. 아시안의 비율이 기형적으로 높아지기 때문이다. 하버드에서 아시안 지원자를 역차별했다는 소송이 나와 떠들썩할 정도다. (2019년 10월, 법원이 '입학사정 과정이 "완벽"하지는 않으나, 아시안만을 차별했다는 결정적인 증거는 없다'는 이유로 하버드 편을 들어주었다. 앞으로 비슷한 소송이 다른 명문 학교에도 걸릴 것으로 본다)

 

캘리포니아의 경우, 종합적 평가에 의한 입학사정을 해도 아시안 학생의 비율이 워낙 높아져(캘리포니아의 아시안 인구가 워낙 커서 그렇기도 한데), 소수집단 우대정책(affirmative actions. 원래는 백인을 견제하고 유색인종을 보호하는 정책이지만, 이 경우는 아시안을 견제하고 비아시안을 보호하는 쪽으로 논의가 되었음)을 재논의해야 한다는 등 논의가 있었고, 많은 아시안의 분노를 샀다. 

 

여기까지 읽은 아시안 입장에서는 헷갈릴 수도 있다. 인종불평등이니 하면서 유색인종에게 기회를 더 주어야 한다 어쩐다 하는데, 우리는 유색인종이 아닌가? 

 

요즘 미국에서는 유색인종을 가리킬 때 'colored(유색의)'란 말 대신, 'minority(소수)'라는 말을 많이 쓴다. 그런데 아시안은 보호받아야 할 약자라는 의미의 'minority'에 끼지 못한다.

 

인구수는 minority지만, 여러 사회경제적인 지표로 볼 때 다른 인종에 비해서 월등히 앞서나가기 때문이다. 미국의 노동통계국의 보고서(링크)만 봐도 그렇다. 아시안은 다른 인종에 비해 높은 학력, 높은 관리자, 전문직 종사자 비율, 낮은 실업률, 높은 근로소득 등의 특징을 보인다. 

 

Untitled-1.jpg

 

아시안이 똑똑하고 능력이 좋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시험 잘보는 기술, 성적이 좋은 것, 좋은 학교에 가는 것이 뭐 그리 대단하냐고 비아냥거릴 수도 있다. 학부모들이 아이들을 경쟁에 내몰아서 이런 결과는 낸다는 비판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시안의 학력 평균이 타인종보다 앞서왔고, 지금은 월등한 수준에 이르렀다. 현대 사회에서는 교육을 잘 받은 집단이 그렇지 않은 집단에 비해 여러모로 앞서게 된다. 위에 언급한 미국 노동통계국에 의하면, 평균 노동소득(투자소득이나 상속 같이 불로소득 말고)을 비교할 때, 아시안의 소득을 100이라고 했을때, 백인은 81, 흑인은 59, 라티노는 58이다. 

 

그렇다고 미국에서 아시안이 주류가 되었을까? 물론 아니다. 아직도 아시안은 백인과 흑인 사이에 끼어서 편견과 싸우고 있다. IT, 과학기술, 의료 등에서는 앞서고 있지만, 법, 경영 등 여러 분야에서는 갈 길이 멀다(이민 3세 이후 세대가 되어야 승부해볼 만하다고 본다).

 

미국이 백인만이 주류가 되는 나라여서는 안된다는 데에는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고 있다(일부 트럼프 지지자는 제외). 하지만, 수치상으로, 아시안이 백인의 파이를 계속 갉아먹다가 이제는 그 위로 올라가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시작하자, 그게 달갑지 않은 것이다. 아시안, 너무 나대지 말라는 분위기가 알게 모르게 있다. 

 

불행히 아시안은 보호를 받아야 할 유색인종의 그룹에 끼지 못하는데, 일부 백인에 의해 미국의 주류가 되지도 못하는 애매한 입장에 있다. 

 

 

백인을 더 뽑으려 한다

 

다시 TJ학교 얘기로 돌아가서, 제비뽑기(lottery system) 방안이 받아들여진다고 해도 원래 취지인 다양성, 흑인, 라티노 학생의 비율이 월등히 올라갈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첫째, 애초에 뽑힐 대상이 되기 위해서는 '최저 학력 기준'을 넘어야 한다. 그런데 흑인, 라티노 학생 중 그걸 넘는 학생 자체가 아시안, 백인에 비해 많이 떨어진다.

 

둘째, 무작위 추첨이 아니라, 지역별로 할당량을 정해서 뽑는다(페어팩스 학군이 워낙 큰 탓에 한 학군인데도 여러 지역으로 나눌 수 있다). 그런데 발제된 내용에 의하면, 지역을 할당할 때 그 안에 흑인, 라티노 비율이 높아지도록 따로 설정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결국 아시안을 줄이는 대신 백인 학생들을 채워넣겠다는 속셈인 것이다. 

 

homework-2521144_1280.jpg

 

처음엔 '인종평등'을 말하며 흑인, 라티노 학생들에게 기회를 주자고 하더니만, 따로 속셈이 있었던 것이다.

 

이에 따라 TJ의 전현직 아시안 학부모들을 중심으로 반발이 있었다. TJ를 목표로 삼았던 학생이나 학부모 역시 반대 입장을 내었다. 아시안 뿐만 아니라 똑똑한 자녀를 둔 이민자 가정(자녀가 TJ에 승부를 걸 수 있다고 생각하는)도 반대 입장을 내었다. 

 

하지만 반대 여론은 동력을 얻지 못하고 있다. 결사적으로 반대하는 입장도 아니고, 무엇보다 숫자가 적다. 한편 찬성 여론은 금년의 BLM의 목소리를 타고 뜨겁게 오르고 있다. 

 

tj.jpg

 

9월 23일, 온라인에서 공청회(Town Hall Meeting)가 있었다(링크). 페어팩스 학군의 Superintendent(교육감 정도로 보면 됨)와 실무자들이 얘기하는 것을 보니 추첨제로 굳어질 것 같은 분위기다.

 

공청회를 지켜보면서 상당히 실망했다. 그들은 현재 시스템이 너무나 불공정(unfair)하고, 불균형(unequal)하며, 혜택이 일부 그룹에게만 집중되고 있으니(아시안이라고 지목하진 않았지만 '일부' 그룹이 누구인지 다 안다), 개혁이 불가피하다는 주장을 폈다. 하지만 추첨제로 가면 이 문제가 어떻게 해결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얼버무렸다. 

 

예를 들어, 앞으로 인종분포가 어떻게 될 것인가 예측을 해놓았는데(흑인 학생수는 6명에서 20명 정도, 백인 학생은 7-80명에서 250명 근처, 아시안 학생 수는 350명에서 120-150명 정도로 떨어질 것), 이런 자세한 얘기는 쏙 빼놓고, 앞으로 “균형적으로” 될 것이라고만 말했다.

 

 

 

인종 문제를 떠나서, 이번 이슈는 엘리트 교육과 보편적 교육 사이에서 균형점을 찾아야 하느냐에 대한 화두를 던져준다. 이것은 TJ라는 학교가 어떤 성격을 가져야 하느냐에 대한 도전이다. 

 

버지니아 교육부 장관 Atif Qarni는 TJ 입학을 위해 따로 공부하고 준비하는 것을 프로 운동선수들의 스테로이드 불법 도핑에 비유하면서 '비겁한 부정행위'라고 했다. TJ는 그런 준비를 전혀 하지 않은 학생들을 대상으로, 가능성만 보고 뽑아서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한다. 모든 입학시험은 평소 실력으로 치뤄져야 하지 추가적인 준비를 하는 것은 반칙이라는 관점이다. 한국인은 이해할 수 없는 입장이지만, 간혹 미국에서는 공감대를 얻기도 한다. 

 

엘리트 체육과 사회체육에 대한 토론과 비슷한 맥락이다. 사회의 바람직한 성장을 위해서는 균형된 발전이 필요하다. 세계 수준의 경쟁력을 가진 운동선수를 길러내는 체육교육과 일반국민의 건강증진을 위한 체육교육, 이 두 가지가 균형있게 발달해야 하듯, 엘리트 교육과 보편 교육은 같이 발전해야 한다. 

 

입시에 문제가 있다고 해서 추첨으로 학생을 선발하겠다는 것은 후자를 위해 전자를 포기하겠다는 것이라 아쉬울 뿐이다. 앞으로 TJ는 특별한 학교(미국의 몇 천 개 공립 고등학교 중 1위를 하는 학교이니 '특별'하다고 해도 될 것 같다)에서 평범한 학교가 될 것이다. 

 

TJ의 시설이 좋다고 해서, 교사진 상당수가 석박사에 대학 강의 경험자라서 '특별'한 것이 아니다(이런 학교가 일반적인 것은 아니지만, 미국 각 주에 최소 한두 개는 있다). 학생의 수준 또한 받쳐주었기 때문에 미국 공립학교에서의 엘리트 교육에 대한 전국적인 기준이 되었던 것이다. 

 

불행히도 버지니아 교육청과 일부 정치인들은, TJ가 전국적 랭킹에서 상위를 차지한다는 것에 관심이 없다. 그저 아시안이 많아지고 백인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것을 민망해 하는 눈치다. TJ가 그동안 이루어낸 모범적인 결과물에 대해서는 외면하고 말이다.

 

개인적으로 이런 식으로 엘리트 교육을 포기할 것이 아니라, '다양화'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뉴욕, 보스톤 지역과 비교해서, 이 지역이 우수한 학생수와 부모의 자녀교육에 대한 관심도가 결코 떨어지지 않는데, 전국적인 랭킹을 자랑하는 학교의 수는 그리 많지 않다. 이 지역에서 제2, 제3의 TJ가 나와야 한다는 입장이다. 뉴욕시가 역사적으로 보여주었던 방향이기도 하다

 

(부모의 관심도를 무조건 나쁘게 보면 안된다. 일반적으로 미국의 공교육의 질이 떨어지는 이유는 부모가 자녀교육에 대해 크게 관심을 보여주지 못해서다. 미국의 많은 학교, 학군에서 어떤 식으로든 부모를 자녀교육에 참여하도록 하는데 진행이 잘 안된다. 아시안의 경우 아무리 힘들게 살아도 자식의 교육 만큼은 제대로 해주고자 하는 의지가 있어서 그런지 아시안이 많은 지역은 공립학교가 평균 이상이 되는 경우가 많다) 

 

덧붙여, 나는 BLM의 정신을 절대적으로 지지한다는 것을 확실히 해둔다. 이 글이 흑인들에게 기회주는 것을 반대하는 것처럼 읽힐까봐 신경이 쓰인다. 

 

엘리트 교육과 보편적 교육, 두 가지 측면에서 볼 때, 실제 흑인들의 교육문제는 후자가 더 심각하다고 본다. 그들의 평균이 다른 인종보다 현저히 떨어지고 그로 인해 고교 졸업후 사회의 노동계층으로 편입될 때 시작점부터 달라지는 것이 문제다. 그 문제에 접근하는 것은 쉽지 않으니 전자를 건드려서, 엘리트 고등학교에 몇 명이라도 더 입학시킬려고 악을 쓰고 있는데(물론 그렇게 악 쓰는 자들이 진정 흑인들을 위해서 그러는 것이 아니긴 하지만), 본질적인 접근이 아니다.

 

 

 

소리는 어디에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