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02.05.목요일
아홉친구
요번달에 혹시 어떤 영화를 볼까, 잠시 생각해볼 기회가 있다면, 필자의 추천을 기억해주길 바래. 제목은 <공자-춘추전국시대>(이하 <공자>). 개인적으로 필자는 중국-홍콩 영화들을 무조건 아끼는 편이기 때문에, 혼자만 재미있게 본 거 아닌가하는 자기검열을 거칠 때가 많아. 꽤 예전 일이지만 <무간도> 때도 그랬다니까. 야 이거 죽이는데 하다가… 또 혼자 설레발치는 거 아닌가… 남 눈치를 봐야만 했었지.
<공자>는 그런 망설임이 들지 않아. 음, <공자>는 확실히 볼 가치가 있어. 약간의 사전지식을 갖춘다면 말이야. 지금 쓰려는 글은 그러니까 그 사전지식에 해당해. 영화를 보는 데 미리 공부해가야 할 필요까진 없겠지. 근데 어떤 영화들은, 특정한 지식 없이는 아예 이해조차 되지 않는 경우가 있고, 가령 중국 사람은 누구나 아는 것인데 외국인은 알기 어려운, 그런 문화적 차이를 깔고 있기도 하지. 여기서 말하는 사전지식은 그 정도의 수준이야. 논어 강의가 아니라고.
그래도 사전지식 따위 귀찮다고 하면, 이 글로 만족하길 바래. 이 글만으로도 꽤 재밌을 거야(라고 믿고 싶어).
왜냐하면 <공자>가 볼만한 이유는, 그게 전쟁액션영화라서, 혹은 공자의 사상을 심층적으로 다루었기 때문이 아니라, 바로 중국정부 홍보영화이기 때문이야. 이 영화의 홍보 코드를 이해할 수 있다면, 중국 현실에 대한 이해가 훨씬 깊어질 거라고 믿어. 그래서 <아바타>에 이어, 또다시 조낸 길고 긴 글이 됐음. 스크롤 및 스포일러 압박 주의.
1) 공자는 누규?
생각보다 사람들이 공자에 대해 모르는 것 같아서, 약간만 소개할께. 잘 아시는 분들은 이 문단을 패스해도 됨.
공자는 기원전 551년에 태어나 기원전 479년경에 죽었다고 알려져 있어. 노나라 사람인데, 오늘날의 산둥(山東) 지역에 해당해. 19살에 결혼했고, 20살 때 소소한 관리직을 맡아 연명했지만, 50세 이전까지는 눈에 띌만한 활동이 없어. 그도 그럴 것이 공자의 생애는 그 제자들에 의해 기록되거나 구전되었으니, 젊었을 적의 이야기가 별로 없겠지. 따라서 공자가 누구에게 학문을 배워 대성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아.
51세에 중도재(中都宰)에 임명되면서 공자의 학식과 능력이 비로소 빛을 발하게 돼. 당시의 왕이었던 노정공(魯定公)이 그의 능력을 높이 사서 사공(司空), 대사구(大司寇), 나아가 대리 국상(國相)의 자리까지 고속 승진을 하게 된 거야. 2년 동안에 구청장이 국무총리 됐단 이야기지. 당시 노나라는 삼환(三桓)이라 하여 세 귀족 세력이 으르렁대고 있었고, 정작 왕은 실권이 별로 없었어. 그리고 공자는 이들 귀족에 줄곧 비협조적이었지. 노정공은 공자를 확실한 자기 사람으로 만들어서 귀족 세력을 제어하고 싶었나봐. 실제로 공자의 ‘개혁 드라이브’는 초기에 일정한 성과를 거두는 듯했어. 영화에서도 삼환이 차지하던 성의 성벽을 부수는 장면이 나와.
하지만 결국 공자는 실권자였던 계환자(季桓子)의 미움을 사게 돼. 제나라에서 보내온 무희들의 춤에 군신들이 3일 밤낮을 헤롱거렸다고 하는데, 공자가 이걸 강력 비판했거든. 무희들의 춤이 천자에게만 허용된 형식이었던 것도 공자로선 참아내기 어려웠지. 어쨌든 공자는 이를 계기로 관직을 잃었고, 옆나라였던 위나라로 피신하게 돼. 이게 공자 14년 방랑의 시작이지. 처음엔 위나라와 노나라를 오가다가, 주변 군소국을 쭉 돌게 되고, 이 와중에 굶어죽을 뻔한 위기도 넘기지. 그의 방랑이 끝난 건, 계환자가 죽음에 이르러 아들인 계강자(季康子)가 다시금 공자를 불러주었을 때야. 이때 공자의 나이는 이미 68세였어.
하지만 공자는 더 이상 정치 일선에 쓰이지 못했어. 73세로 죽기까지 공자는 후학을 가르치는데 힘썼는데, 우리가 오늘날 알고 있는 공자의 가르침은 거의 이때 나온 것으로 보면 될 거야. 제자가 묻고, 공자왈 뭐라고 말씀하시잖아. 그렇게 제자들이 자신들이 들은 가르침을 정리한 것이 지금의 논어며 중용으로 전해진 거야. 공자는 책을 쓰지 않았어. 동서양을 막론하고 모든 성인들은 직접 책을 쓰지 않았다는 공통점이 있지. 성인들은 언어를 신뢰하지 않거든.
2) 중국에서의 공자
공자의 사상은 한나라 때 정치이념으로 채택된 후, 2000년 동안 중국의 핵심 정치 사상의 역할을 해왔어. 그 영향을 받은 우리도 마찬가지였고. 정권과 왕조가 바뀌더라도 유학은 망하지 않았지. 사회주의 사상으로 새롭게 무장한 중화인민공화국의 지도층은, 구습의 상징과도 같은 유학을 결코 가만 둘 수 없었어.
그 클라이막스라고 할만한 문화대혁명 당시, 전통사상과 관련된 모든 학자들은 반동으로 몰려 죽거나 강제노역소로 보내졌어. 유무형의 문화재들도 사라졌지. 공자의 제사를 지내는 석전제례(釋奠祭禮)는 공자의 고향인 산둥 취푸(曲阜)를 비롯한 각지에서 행해졌는데, 그걸 할 줄 아는 사람이 이제는 중국에 없어. 그래서 중국 학자들이 성균관의 석전대제를 보러 오는 거야. (중국 전통 사상과 예술에 종사하던 사람들은 아직도 중국 정부를 믿지 않는 경향이 있어. 여전히 많은 고수들이 재야에 은둔해 있다고 해. 가령 문화대혁명 때 많은 무술가들이 잡혀 죽었는데, 그래서 예부터 전해지던 진짜 무술비급과 전승자들은 모습을 감췄다는군. 고로, 중국 여행 가서 만난 식당 아저씨가 팔극권의 고수일지 모르니 함부로 대하지 마시길. 어째 무협지 얘기하는 기분인데, 대륙에는 진짜 그런 면이 좀 있어)
2009년 5월에 여는 춘기 석전대제. 출처/ 연합뉴스
그리고 개방의 영향으로 서양 문화가 유입되면서, 우리가 그러하듯이 중국 사람들도 많이들 개인주의화 되었고,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는 식의 주장에 동조하는 사람들도 많아. 유무형의 전통이 단절됨과 동시에 중국 사람들은 서양 사상의 유입까지 혼란스럽게 경험하게 되었고, 그 결과 지금의 중국 젊은이들은 우리보다도 유학에 대해 취약한 모습을 보여. 원래 공자의 지위는 이렇지 않았어. 중국에선 황제만이 구슬 달린 면류관을 쓰는데, 그 정도 급으로 민간에서 추앙받아 동상에 면류관을 씌운 인물이 둘 있어. 한 사람이 공자, 또 하나가 관우(關羽)야. 관우는 의(義)의 화신으로 지금까지도 중국집 한켠에 그림을 걸어두고 있지만, 상대적으로 공자는 폐기처분될 구닥다리로 여겨지는 상황이 된 거지.
드라마 <대장금>이 중국에 방영됐을 때, 중국 유학자가 썼던 칼럼이 하나 있었어. 그 사람은 <대장금>을 보고 무지하게 충격을 받았다는 거야. 장금이가 어렸을 적 상궁마마에게 시험을 치르는데, 상궁마마가 물어본 게 두 가지였지. 하나는 양(梁)나라에 맹자(孟子)가 갔을 때의 일화로 ‘선생이 이렇게 왔으니 우리나라에 어떤 이익이 있겠소?’라고 양혜왕이 묻자 맹자가 ‘어찌 이익을 말씀하십니까? 오직 인과 의가 있을 따름입니다’하고 대답한 고사가 있어. 또 하나는 삼국지연의에서, 조조가 한중을 치러 갔을 때 ‘계륵(鷄肋)’을 암호로 삼은 이야기였지.
중국 유학자는 이런 중국 고사들이 외국 TV 드라마에 나올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고, 더군다나 드라마에 나올 정도라면 시청자들이 어렵게 느끼지 않는 내용이어야 하니까, 한국의 대중문화 수준을 새삼 깨닫게 된 거였지. 이 글을 읽는 분들은 위의 내용이 상식 수준에 속하는지 모르겠지만, 중국에선 어림도 없어. 양혜왕이나 계륵의 고사를 안다면 분명히 지식인이야. 개인적 경험으로 말하면, 독일에 온 중국 유학생에게 필자가 ‘와신상담(臥薪嘗膽)’의 뜻을 가르쳐준 적도 있었어. 경험의 편차는 있겠지만 종합적으로 우리가 일반적 상식으로 알고 있는 유학사상의 개념이, 중국에서 결코 일반적이지 않다는 건 분명해.
지금 중국 지도부들이 비록 젊다고 해도 50세는 넘은 인물들이야. 사회주의 사상이 강경했던 시기를 다들 겪었지. 환경이 바뀌었다고 해도, 엄연히 중국 지도부는 그 윗대의 지도부를 계승한 사람들이고, 따라서 예전의 강령을 완전히 들어엎을 순 없어. 후진타오는 장쩌민 밑에서 큰 사람이고, 장쩌민을 봐준 건 덩샤오핑이고… 그렇게 이어진단 말이야. 더군다나 사회주의가 진리다, 이 말에는 결코 도전이 용납되지 않지. <공자>같은 영화가 그러니까 아무 간섭 없이 자유롭게 만들어질 순 없는 거야. 국민들도 잘 모르고, 중국 지도층에서 새삼 유학사상을 복원할 리도 없는데, 공자의 정신을 다시금 배우자는 따위의 내용이 중국에서 영화화된다… 좀 이상하잖아.
혹자는 영화 하나 만드는 게 뭐 대수냐고 생각할지 모르겠어. 사실 필자도 그렇게 생각해. 하지만 사회주의 정권의 아주 오랜 특징이 있어. 사회주의 정권의 탄생 이래로 영화는 프로퍼갠더, 즉 인민에 대한 사상적 선전 수단으로 콕 집어져 왔다는 거야. 레닌은 ‘영화산업의 국영화법령’ 에서 "영화는 대중선동의 가장 중요한 수단이기 때문에 모든 예술장르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예술"이라고 평가하기도 했지.
이런 말이 교조주의적으로 되풀이되면서, 오늘날 TV가 영화보다 훨씬 강력한 매체가 되었음에도, 사회주의 정부는 TV드라마를 그럭저럭 놔두면서도 영화에는 시시콜콜 간섭하는 기현상이 이어지고 있어. 중국에서 이 역할을 하는 게 국가광파전시전영총국, 줄여서 광전국(廣電局)이라고 부르는 기관이야. 중국의 모든 드라마와 영화는 광전국의 검열을 받는데, 가령 소프트한 수준의 베드신이, 드라마에선 돼도 영화에선 안돼. 이해 가시겠지.
이런 사정을 감안해서 보면, <공자>라는 영화가 중국 전역에서 개봉한다는 사실에서, 중국 정부의 용인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 배경이 미리 짐작되는 거야. 더군다나 윤발이 형이 공자 역으로 나온다는 거 보니, 아 이건 용인 정도가 아니라 작심하고 밀어주는 영화구나, 외국에 팔아먹으려는 영화구나 정도로 짐작이 가능해.
이 다음부터는 스포일러야. 직접 보고서 판단하고 싶은 분은 여기서 스톱하면 돼.
마지막으로 영화 볼 사람에게 일러두겠는데, 혹시 예고편을 봤는지 모르겠어. 공자가 노나라 관직에 있을 때 싸움이 있었던 건 사실이지만, 국가의 흥망을 건 전쟁은 아니었어. 또 아무리 상업영화라지만, 공자가 사람 죽이는 전쟁에 끼어들어 제갈공명 같은 병법을 짜낼 사람도 아니지. 예고편 보고서 뭔가 스펙터클한 전쟁 액션을 기대했다면 실망할 거야. <공자>는 그런 영화가 아니야. 그럼 이제 영화 내용으로 이어갈게.
3) 전반부 : 공자의 실제 정치와 좌절
영화는 늙은 공자가 나지막이 옛일을 회상하는 걸로 시작해.
“꿈에서 주공(周公)을 뵌 지 오래로구나…” 이 말은 논어에 나오는 말이야(甚矣吾衰也 久矣吾不復夢見周公). <공자>의 상당 대사는 논어에서 취하고 있는데, 영화 자막에선 원문을 쓰지 않았기 때문에, 아마도 많이들 모르고 지나가지 않을까 싶어. 이 부분은 많이 아쉬워. 영화 <공자>에 대한 평가와 별도로, 논어의 원문을 영화 대사로 어떻게 처리했는가가 꽤나 재미있거든. 하지만 논어와 중국어를 모르면 이 재미를 느낄 방법이 없기 때문에, 한국 관객으로선 그냥 패스 되는 거지.
근데 그 다음 대사가 이상했어. “내가 추구한 예와 악의 이상은 이제 후세에게 남겨줄 수밖에”라는 내용인데, 대본이 없어서 정확한 대사는 찾지 못했어. 문맥으로 이해하삼.
전공자도 아닌 입장에서 설명하려니, 꿈에서 변모씨가 인문학 서적 더 읽으라고 할지 몰라 식은땀이 나는데, 어쨌든 말해볼게. 공자가 예(禮)와 악(樂)을 중시한 건 맞아. 이 두 가지를 진지하게 설명하려면 논문 몇 편이 필요하겠지. 거칠게 말하면 예는 ‘인간과 인간, 사회와의 관계 설정’이고, 악은 ‘인간 내면을 자유롭게 하는 예술’로 설명하겠어.
공자가 일평생 예절을 따진 건 분명 사실이야. 하지만 공자의 이상이 예와 악의 구현 자체에 있느냐고 하면, 그건 아니라고 봐. 공자 스스로도 말한 적이 있어. “사람이 어질지 못하면 예는 뭐에 쓰는가? 또 악은 뭐하러 하나?(人而不仁 如禮何 人而不仁 如樂何)”
또 ‘예기(禮記)’ 예운(禮運)편에 보면, 옛 성현들이 이뤄낸 대동(大同)의 세상에 견주어, 지금 세상은 대도(大道)가 사라져 겨우 예로써 이를 바로잡는 소강(小康, 그럭저럭 살만한)의 세상이라며 공자가 탄식하는 내용도 있어.
그러니까 공자가 추구하는 이상은 인(仁)이라야지 예와 악을 처음에 둘 순 없다는 얘기야. 물론 공자가 말하는 예와 악의 경지도 간단한 건 아냐. 하지만 영화 첫머리에 나올만한 소위 ‘모두발언’으로는 문제가 있다고 볼 수 있지. 이 문제가 원래 대사에서 유래된 건지, 자막 문제인지는 잘 모르겠어. 지금으로선 원문 대본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이 없어서 말이야.
어쨌든 중국 본토에서 나온 공자 이야기라 상당히 기대감을 가졌던 필자로선, 이 첫머리에서 실망했다는 얘기야. 굳이 좋게 해석해서 혹시 ‘문명의 계승’을 얘기하려는 거였나 싶기도 했고. 이 부분은 후반부에 좀 나오니 여기선 패스.
전반부의 주요 줄거리는 공자가 노정공에게 발탁돼 중용되면서 삼환(三桓)의 세력을 견제하고자 하는 이야기야. 여기서 맞수인 계환자(季桓子, 계손사라고도 함)가 나오는데, 이분 카리스마가 장난 아니더군. 정치에 닳고 닳은 모양새가 <영원한 제국>에서 최종원이 맡은 심환지를 보는 듯 했어. 영화에서는 공자의 개혁 드라이브에 대해 계환자가 ‘물러날 때 물러나고 나갈 때 나가는’, 한마디로 공자 머리 꼭대기서 노는 모습을 보여줘. 사서에서는 공자가 세 성의 성벽을 무너뜨리는 정책을 취할 때 맹손씨의 반대로 도중에 중단되는 걸로 나오지만, 영화에선 이 또한 계환자의 속셈인 걸로 묘사되지.
이 구도를 간략하게 보면, 왕인 노정공은 나라를 바로 세우려는 의지를 갖고 있어. 공자는 그 의지를 받드는 지식인이지. 그에 대항하는 세력은 부와 권력을 가진 삼환들이고. 공자의 개혁이 실패로 끝난 건 물론 삼환의 저항 때문이겠지만, 노정공의 의지가 얼마나 셌느냐도 중요한 문제일 거야. 결국 공자가 노나라를 떠나게 된 결정적 계기는, 제나라 무희들의 춤에 군신이 사흘 동안이나 미쳐 놀았다는 사건 때문이거든. 노정공도 계환자랑 같이 놀았다는 거 아냐 그럼. 별로 명석한 인물은 아니었나봐.
영화가 이 사실을 왜곡하지는 않아. 문제는 항상 뉘앙스지.
따지고 보면 노나라를 망친 데엔 노정공의 의지 박약이 삼환의 존재만큼이나 중요한 작용을 했을 텐데, <공자>에서는 계환자를 크게 부각시키면서 상대적으로 노정공의 책임을 적게 취급한단 말이야. 공자가 떠나는 것도 계환자가 옥결(玉結)을 하사하는 술책 때문으로 묘사하는데 이건 정말 영화의 상상력이지.
그러니까 왕이 이런 이미지 풍기면 안되는 거야
이런 이미지도 안되는 건 마찬가지고
왜 이런 뉘앙스를 풍기는지 답은 간단해. 중국 영화에선, 극중의 최고 지도자가 결코 악하게 그려지지 않거든. 사회가 잘못된 건 왕의 책임이 아니라 그 밑의 탐관오리 때문이라는 거지.
대개들 중국 역사극을 본 기억이 없을텐데, 사실상 유일무이하게 인기 있었던 <포청천>을 예로 들어볼게. <포청천>에서 황제는 늘 잘못이 없어. 잘못된 정보를 들었을 뿐이지 의지 자체는 순수하단 말이지. 진짜 원흉은 황제 주위의 실세인데, 예컨대 포청천이 진실을 밝혀놓고 보니 주모자는 승상인데, 그 밑에 놈이 자결하든가 해서 결국 승상은 체포 못하고 끝나는… 그런 에피소드들이 꽤 있어. <포청천>은 대만 드라마니까 중국 본토의 경향과 거리가 있겠는데, 중국인들이 익숙해져 있는 역사 인식을 맛보기엔 무리가 없을 거야.
중국 역사극도 마찬가지야. 문제는 이 구도, 그러니까 황제는 괜찮은데 밑에 놈들이 원흉이라는 식의 구도가 무엇을 의미하느냐야. 역사는 현실의 해석이지. 즉 현재에 대입시켜보면, 지도층의 사상이 잘못된 게 아니라 그 밑에 있는 공무원들이 제 배만 불리고 있다는, 아주 그럴듯한(그렇다고 꼭 거짓말도 아닌) 생각에 미치게 되는 거야.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오늘날 중국 본토의 여러 사회 문제들은 사회주의 사상의 결함 때문이 아니요, 또한 중앙 지도부의 의지 박약 때문도 아니라, 욕심에 물든 관리들과 기업가가 부정한 짓을 저지르고 있어 그 이상이 실현되지 않기 때문이라는 답에 자연스럽게 이른다는 거지.
삼환의 세 성을 부수려는 시도가 중지된 후 공자가 노정공에게 간언하는 장면은 이 구도의 하이라이트야. <공자>는 공자의 시점을 따라가고 있기 때문에, 관객들로 하여금 공자의 심정에 동화되도록 하고 있어. 결국 현실 정세에 부딪쳐 좌절하는 공자의 울분에 관객들은 동조하지. 그리고 그 화살은? 당연히 계환자에게 돌아가도록 장치돼 있어. 괜히 계환자의 카리스마를 부각시킨 게 아니거든.
케이블 채널에서도 <한무제>같은 중국 역사물을 틀고 있던데(마침 <한무제>의 총감독이 바로 <공자>의 감독인 후메이(胡?)야) 위에서 말한 구도가 어떻게 적용되는지 여실히 볼 수 있을 거야. 그래도 여기까지는 기존의 역사물 구도를 그냥 따라갔다고 봐줄 여지가 있지. 후반부를 보면 그 해답이 더 확실해져. 이렇게 현실에 좌절했다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가 이제 그려지거든.
그리고 전쟁 장면에 대해 언급을 안했는데, 사실 별로 할 필요가 없어. 그건 그냥 눈요기고 상업성을 위해 일부러 집어넣은 듯한 장면들이야. 제나라와 노나라 왕의 회동 때 공자가 따라가서 땅을 수복했다는 얘기는 사실이지만, 거기에 전차 5백 대가 있는 듯한 술수를 썼다는 건 허구거든. 또 공산유가 내란을 일으켰을 때 공자가 직접 군사를 부릴 리도 없고, 그런 직책도 아니었어. 화공을 썼는지 알게 뭐람.
오히려 눈에 띄었던 건 전차 5백 대 에피소드 때 나온 제자의 이름이야. 자막에 ‘조점’이라고 썼던데, 한자 자막에는 엄연히 증점(曾點)이라고 나오거든. 이 사람은 무려 증자(曾子)의 아버지되는 사람이라고. 우리 유학자들이 보면 호통칠 지도 모르겠어. 근데 한자 자막도 공자의 아들 공리(孔鯉) 이름을 잘못 써가지고 중국서 욕먹었다고 하니, 너무 나무라지는 마셨으면 좋겠네.
4) 후반부 : 공자의 방랑과 귀환
공자는 옥결을 준 계환자의 술책에 의해 노정공의 뜻을 오해하고 집을 떠나게 돼. 이 장면에서 가족과 슬프게 헤어지는데… 사실 그 전에도 부인을 아끼는 공자의 모습이 그려지기도 했지. 이건 서양 관객을 위한 서비스라고 봐. 공자가 부인을 아꼈다고? 그건 현재의 관점을 구태여 대입시킨 결과야. 중국인도 우리도 알고 있지만, 그 당시는 여자를 사람 취급도 안했다고. 논어 양화(陽貨)편에는 이런 말이 있어. “여자와 소인은 다루기 어렵다. 가까우면 불손하게 굴고 멀리하면 원망한다(唯女子與小人 爲難養也 近之則不孫 遠之則怨).” 공자가 여자에게 어떻게 대했는지야 구체적으로 모르지만, 최소한 요즘 상상하는 가족적 분위기는 아니었을 거야.
공자 사모님은 실제론 이런 표정이지 않았을까
공자는 자신의 뜻을 알아줄 정치 지도자를 찾아 유랑을 하게 되는데, 이 목적이 영화에선 그리 잘 밝혀지지 않아. 오히려 반대로, 어쩔 수 없이 조국을 등졌을 뿐 돌아가고 싶다는 뉘앙스가 강하지. 위나라의 남자(南子)를 만나는 장면에서도 그래. 기록에 의하면 공자가 이 여인을 만난 건 사실이지만, 이 여자 때문에 위나라를 떠난 건 아니거든. 공자는 유랑 중 여러 번 위나라를 오락가락 했어. 위나라 왕인 위령공(魏?公)의 정치 철학과 맞지 않았으니까 계속 머물지 않았던 거지.
이후의 이야기는 공자가 겪는 고초에 맞춰져 있어. 기록에 의하면 송나라에선 구금되기도 했고, 정나라에선 ‘상갓집 개 같다’는 소리도 들었으며, 채나라로 가는 도중엔 굶어죽을 위험에도 처했다고 해. 이 무렵 공자는 60세가 넘었어. 무지 힘들었겠지.
이것만으로 부족했는지 영화에선 두 제자의 죽음을 삽입해 공자의 슬픔을 더해. 안회(顔回, 보통 안연(顔淵)이라고 하며 공자의 수제자)가 얼음물에 빠져 죽는 장면은 슬프고도 장엄한 느낌이었어. 책을 건져내려는 안회의 모습은 ‘문명의 계승’을 근심했던 공자의 사상과도 맥이 닿아있는 느낌이었고. 또 자로(子路)가 죽음을 앞두고서 스승의 가르침을 잊지 않았던 장면도 나름 감동적이긴 했어.
문제는 뭐, 이럴 땐 아는 게 탈이지만, 이게 개뻥이라는 거거든. 이들이 죽은 건 공자가 노나라에 돌아온 후고, 공자가 70세 넘어 일어난 일이야. 더욱이 자로가 죽은 뒤 7일 후 공자가 죽었다는 ‘공자세가’의 기록이 있기 때문에, 이들의 죽음이 공자의 유랑 중 삽입된 건 다분히 의도적인 영화적 장치인 거지. 공자의 고초와 슬픔을 과장시키려는.
그렇게 해서 얻는 결론은, 이렇게 어마어마한 고초와 슬픔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공자는 결국 노나라에 돌아와 눈물을 흘린다는 거야. 이제야 고향에 돌아왔다고.
잠시 시대 상황을 생각해볼게. 춘추전국시대는 주나라의 세력이 쇠하고 각지의 제후들이 권력을 다투는 시기였어. 나라끼리 서로 견제하지만 그렇다고 꼭 외국도 아닌 요상한 관계지. 공자는 예절 전문가였으니까, 필요하면 어디서든 와서 예법을 묻기도 했는데, 제나라의 경우가 그랬어. 그런 걸 보면 지방색이 있고 문자가 서로 다르다고 하지만 각 나라의 문화나 예절이 아주 상이한 것도 아니었어.
하지만 <공자>에서 묘사된 나라들은 그렇지 않아. 노나라의 풍경과 바로 옆인 위나라의 광경은 아주 달라. 황토색이 주인 노나라에 비해 위나라는 에메랄드 빛이 물든 엘프의 나라랄까. 제나라의 경우도 붉은색을 강조해서 차별성을 띠고 말이야. 원래 공자의 유랑은 자기의 뜻을 알아줄 제후를 찾는 목적이었겠지만, <공자>를 보면 그렇게 인식되기보다는 ‘험난한 외국 여정’처럼 보이게 되지. 그러니까 자연스럽게 노나라로 돌아온 게 ‘이제야 안식을 찾았다’는 느낌으로 연결이 되는 거야. 근데 앞서도 언급했지만, 공자의 유랑 초기엔 노나라에 머문 적도 많았기 때문에, <공자>의 묘사는 사실과 어긋난 거야. 의도적인 노림수지.
이국적인 색채로 표현된 남자(南子). 물론 남자는 여자다.
이제 다시 전반부의 이야기를 되살려보면, ‘현실 정치에 좌절하는 지식인’의 구도가 기존 중국 역사물에서도 흔하게 보던 것이었다고 하면, 후반부에 이어지는 결론, 즉 ‘지식인은 결국 조국으로 돌아와야 한다’는 주장은 훨씬 의도적인 주제 부각이라고 할 수 있어. 기록과 어긋난 장치가 너무 많기 때문이지.
중국 지식인들 중에는 외국에서 유학하거나 또 시민권을 딴 사람들이 많아.
우리도 그런 사람들 많으니까 당연하지. 또 중국에서 사업으로 부를 쌓은 후에 외국에서 사는 사람들도 있어. 영화는 그런 사람들에 대해 한마디 하는 거야. 일단 지금의 중국에 문제가 있는 건 인정하지만, 그건 사회주의 사상이나 지도부의 문제가 아니다, 어디에나 있는 부정부패 때문이라고 전제하고 나서, 후반부에 그 결론을 내려주는 거야. ‘그러나 조국에 돌아와야만 진짜 평화를 누릴 수 있다. 공자를 봐라’라고 말이야. 이 결론을 의도하지 않고서, 구태여 공자의 생애를 조작할 필요가 있었을까 생각해보면, 다른 답이 나오지를 않거든. 여기에 ‘계환자조차도 뉘우치고 당신의 귀국을 기다리고 있다’는 부연설명을 떠올리면 더욱 그렇지. 공자가 제갈공명도 아닌데, 제나라와의 전투에 임박해 계환자가 왜 공자를 보고 싶어 하겠냐고.
그리고 영화는 서둘러 끝나. 공자가 어떤 인물인가를 장황하게 설명하는 자막과 함께 말이야. 여하튼 공자가 훌륭한 인물이란 설명인데, 영화적 장치로 보면 결국 노나라로 돌아와 위대한 교육의 업적을 이루었다는 것이니, 위에서 언급한 의도적 주장과 맞아 떨어지는 효과인 거야. 조국으로 돌아와서 제대로 됐다 이거지. 영화 속 공자는 ‘나를 오해하는 것도 이 책들을 통해서일 것이다’라고 하던데, 공자의 생을 이렇게 이용하는 걸 직접 봤으면 어떻게 생각할까도 싶어.
공자가 그토록 추구했던 인의 세상이나 문명의 계승은, 진(秦)이 천하를 통일한 후 분서갱유함으로써 단절의 시기를 맞게 돼. 그거야말로 공자의 진짜 비극적인 모습이지. 자막에서 공자의 위대함을 설명하기보단 이런 역사를 이야기해주었다면, 좀더 공자의 비극적 인물상이 강조되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어. 하지만 사회주의 예술에서 중요한 건 슬로건이지 삶의 비극성은 아니지, 아무렴.
5) 증거들
<공자>에 대한 필자의 결론은 그래. 공자의 생애를 의도적으로 재구성하여, 중국 현실에 대한 관객의 관점을 의도적으로 이끌어가고 있다는 것. 그 의도의 내용은 중국 현실 정치의 정당성이며, 중국을 멀리하는 지식인들은 어여 빨리 조국으로 돌아와 평화를 찾으라는 것.
그 증거를 이제 영화 외부에서 찾아볼게. 사실 너무 많아서 다 못쓸 것 같아.
감독 후메이(胡?)는 장이모우, 첸카이거 등과 같은 ‘제5세대’ 감독이야. 중국 제5세대 감독들은 한때 중국 현실을 비판적으로 보는 작품들을 만들어 해외 영화제에서 각광받았지만, 이제는 전향(?)하여 중국 정부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지. 후메이의 경우엔 문제가 될만한 작품을 만들지는 않았고, 1984년부터 국내활동을 하고 있었어. 중요한 건 현재 직책. 후메이는 현임 전인대 대표위원이고, 베이징시 정협위원, 중국 TV예술가협회 부주석, 전국문학예술계연합회 위원, 중국영화집단 국가지정 제1급 감독을 겸임하고 있어. 우왕 굿.
이분은 앞서 말한 중국 광전국(廣電局)의 통강(童剛) 국장이야.
베이징의 첫 시사회때 나와서 몸소 북을 쳐 주셨지. 우리로 치면 최시중쯤 되려나.
공자의 후손인 공덕무(孔德懋) 여사를 모셔와서, 윤발이 형이 큰절을 올리기도 했어.
베이징을 시작으로 상하이, 광저우, 청두, 산동, 홍콩, 최근엔 대만까지 가서 대대적인 홍보를 했어.
<아바타>가 현재 중국에서 1억 달러 수익을 넘어선 가운데(역대 최고 수익), 중국 광전국에서는 1월 23일부터 <아바타>의 2D 상영을 중지하도록 했어. 3D와 아이맥스만 남겨두었지. 광전국 부국장인 장홍산(張宏森)은 “강제 조치는 아니다”고 해명하며 “다만 2D판이 수익의 1/3밖에 안 나기 때문에 그런 것”이라고 말했대. 참고로 <공자>의 개봉일은 1월 22일이었어. 이 점에 대해 장홍산은 “우연일 뿐”이라고 했다는군. 결론은 알아서 내시길. (원문기사
)
필자가 중국 기사를 본지 꽤 오래 되었는데, <공자>에 대한 날선 비평문은 찾기 힘들었어. 예전에 ‘우루무치’ 관련 기사 때와 비슷해. 중국 사람들 관점은 필자랑 많이 다른 게 아닐까 싶어. 평소에 인문학 책 열심히 읽지 않는 사람이니까 뭐.
평론: <공자> 좋든 나쁘든, 주윤발 연기에 박수 / 천천신보 2/3
(실제로 중국 언론 반응이 그런지 찾아보려는 분들은 ☞ 요기 로 들어가면 돼.) |
비판적인 글이 전무한 건 아냐. 근데 개인 블로그로 돼 있더라고.
한한(韓寒)이란 소설가 겸 카레이서는 블로그에서 “결론적으로 내가 말하고 싶은 건, <공자> 이 영화는 만든 취지나, 상업 이윤, 예술적 추구, 영화적 실험, 교육 계몽, 참신성, 감동, 시청각, 킬링타임, 역사기록 어느 면에서 봐도 전혀 존재할 필요가 없는, 완전히 지워버려도 될 영화라는 것”이라고 썼어. (원문)
그런데 일반적으로 중국 관객들은 중장년층의 호감도에 비해, 80~90년대 생들의 반응이 시큰둥했다고 해. 춘추전국이며 옛날 사람 이름이며 당최 모르겠더라는 거야, 이거지. 위의 한한도 82년 생이라니까 그래서일지 몰라.
(원문 )
공자의 75대 손이 된다는 콩지엔(孔健)이란 사람은 <공자>의 내용에 상업성이 지나치다며 자신이 몇 년째 계획하고 있는 공자 드라마를 통해 진짜배기를 보여주겠다고도 했어. (원문)
6) 길었다, 인제 끝내자
여기까지 봐주신 것만도 감사. 사실 이렇게 길게 쓸 줄을 몰랐어.
조금 욕심이 들었어. 사실 이 글 쓰기 전에 다른 매체에 <공자> 리뷰를 써주었거든… 근데 분량이 짧아서 말이지. 이 글에서도 처음엔 공자의 사상이 원래 무언지, 공자와 자로와의 관계 같은 부분을 설명하고 싶었는데, 그건 유학에 관심있는 사람 몫이겠다 싶어서 뺐고, 그것보단 <공자>를 통해서 볼 수 있는 중국 현실을 얘기해주고 싶었어. 영화 얘기가 아니라 사실상 중국 통신이란 소리야. 그러다 보니 길어지게 됐어.
길어지게 된 다른 이유가 하나 더 생각나네. 오늘(2월 4일자) 몇몇 매체에서 영화 소개가 게재됐는데, 이건 보도자료만 갖고 그냥 쓴 건지, 얼토당토않은 내용도 있더라고. 배급사가 메이저급이 아니라서, 좀 잘됐으면 하는 마음은 필자도 갖고 있는데, 그렇다고 4대강 땅파기 사업을 친환경이라고 할 수는 없는 거 아냐.
진지하게 얘기하는데, <공자>가 못볼 정도로 형편없는 영화는 아냐. 다만 이 영화가 한국 땅에서 갖는 진짜 의의는, 액션이나 공자 사상 소개에 있는 게 아니라, ‘한 나라의 정치 사상이 의도적으로 예술작품에 적용되는 사례’, 여기에 있어. 이거 자체는 폄하가 아냐. 이 분야의 최고봉은 히틀러 시절의 괴벨스라고 할 수 있겠는데, 지금까지도 그때의 다큐멘터리는 걸작으로 칭송된다니까. 그런 점 감안해서 영화 봐주길 바라겠어. 중소 영화사도 좀 먹고 살아야지. 요즘은 제작도 배급도 상영도 전부 CJ 독점이라 영화판이 옛날 같지 않어.
진짜 끝낼 게. 읽느라 수고하셨습니다.
*아래는 노컷뉴스에 게재했던 박스기사야. 그냥 참고하라구.
<공자>의 이야기들과 실제 기록 비교
- <사기>에서 공자는 키가 구척 육촌이라 ‘꺽다리’로 불렸다 한다. 주윤발의 키가 크기 때문에 외모에선 합격.
|
검색어 제한 안내
입력하신 검색어는 검색이 금지된 단어입니다.
딴지 내 게시판은 아래 법령 및 내부 규정에 따라 검색기능을 제한하고 있어 양해 부탁드립니다.
1. 전기통신사업법 제 22조의 5제1항에따라 불법촬영물 등을 기재(유통)시 삭제, 접속차단 등 유통 방지에 필요한 조치가 취해집니다.
2. 성폭력처벌법 제14조, 청소년성처벌법 제11조에 따라 불법촬영물 등을 기재(유통)시 형사 처벌을 받을 수 있습니다.
3. 『아동·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 제11조에 따라 아동·청소년이용 음란물을 제작·배포 소지한 자는 법적인 처벌을 받으실 수 있습니다.
4. 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 및 시행령에 따라 청소년 보호 조치를 취합니다.
5. 저작권법 제103조에 따라 권리주장자의 요구가 있을 시 복제·전송의 중단 조치가 취해집니다.
6. 내부 규정에 따라 제한 조치를 취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