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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에서 섬이 제일 많은 나라가 어딘지 아시는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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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시작되는 말로 나는 꽤 오랫동안 필리핀 세부에서 ‘입국 멘트’라는 것을 했다. ‘입국 멘트’는 가이드가 공항에서 관광객을 만나 호텔로 이동할 때 하는 첫 번째 전달 사항을 말한다. 
 

“지구에서 섬이 가장 많은 나라?” 같은 질문의 답을 알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별로 없다. 가끔 정답을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섬의 개수는 통계 방법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에 가이드가 이상하게 이야기해도 반박하기가 쉽지 않다. 이 멘트는 이렇게 이어진다.
 
“인공위성에서 지구를 바라보면 작은 점들이 보여요. 이것들을 세어보면 섬이 가장 많은 나라는 인도네시아가 1등입니다. 물론 북극 가까이 있는 얼음 섬들은 빼고 입니다. 그럼 두 번째로 많은 섬을 가진 나라는 어디일까요? 지금 여러분들이 있는 필리핀이죠. 필리핀은 7,107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섬나라입니다. 면적은 한반도의 1.3배...(어쩌고저쩌고)”

 


필리핀 여행가이드의 팁 멘트

입국 멘트 중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것 중 하나가 “팁 멘트”이다. ‘팁 멘트’는 이렇게 시작한다.

 

“필리핀에서 ‘공용어’로 영어를 쓴다는 거 아시죠? 미국의 영향을 많이 받아서 그래요. “팁 문화”도 미국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필리핀 ‘팁’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매너 팁”이라 부르는 고정된 팁이고, 나머지 하나는 “서비스 팁”이라 부르는 자유로운 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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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남아로 여행 많이 다녀보신 분들은 아시죠? “매너 팁”은 '매너'를 지키기 위해서 무조건 내야 하는 팁입니다. 호텔에서 방을 비우고 나올 때 침대 위에 1~2달러 정도 놓고 나오는 팁 그걸 말하는 거예요."

 

"마사지사나 운전기사, 보트맨들에게 수고했다고 주는 팁을 ‘매너 팁’이라고 합니다. “서비스 팁”은 ‘매너 팁’에 추가해서 더 주고 싶을 때 주는 팁입니다. 이건 손님이 맘에 들면 얼마든지 더 줘도 됩니다...(주저리주저리)”

 
처음 가이드 교육을 받으면 이런 고정 멘트를 최소한 10~20개 정도는 외워야 한다. 이런 ‘멘트’들은 회사마다 족보가 있어서 교과서처럼 대대로 신입 가이드들에게 전해진다. 이 족보에는 여행사와 가이드에게 유리한 내용을 깔아야 해서 사실을 왜곡하는 내용도 상당 부분 포함되어 있다.
 
위 멘트 중 ‘서비스 팁’이라는 건 내가 만들어낸 말이다. 필리핀에서 "매너 팁"은 1달러(US)를 기본으로 하는데, 이것도 안 내려는 사람이 많아 “기본은 좀 내라!”는 의미에서 ‘입국 멘트’에 ‘서비스 팁’이라는 이상한 개념을 내가 만들어 붙였다. “서비스 팁”이라는 단어가 성립하는지도 모르겠다.
 
관광객을 대상으로 하는 ‘팁’ 관련 멘트의 핵심은 이거다.

 

첫째, “팁 좀 내라.”
둘째, “제발 좀 내라”
셋째, “1달러밖에 안 되니 꼭 좀 내라”

 
가이드를 시작한 초기에는 족보가 진리인 줄 알고 달달 외워서 앵무새처럼 떠들기만 했었다. 그런데 필리핀에 좀 살다 보니 ‘매너 팁’이 필리핀 사회에 실제로 존재하는 것인지, 진짜 미국 문화의 영향으로 생긴 것인지 의문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래서 역사 공부와 오래된 한인들의 인터뷰 등을 통해서 나름 답을 찾았다. 그 결과 팁에 관한 여행사 족보의 내용이 많이 왜곡된 사실임을 알게 됐다.
 

언젠가 세부(Cebu, Philippines)의 한국인 커뮤니티에 이런 질문이 올라온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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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부 생활 1년 차인 주부입니다. 세부를 좋아하게 되어 몇 번의 패키지여행과 자유여행 끝에 아이들과 함께 이주했습니다. 아직은 이곳 생활이 재밌고 즐겁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궁금한 점이 있습니다. 저는 식당이나 마사지숍, 세차장 등에서 항상 팁을 주는 편입니다.
 
그건 예전 패키지로 여행 왔을 때 가이드들이 ‘팁 문화’를 이야기하면서 1달러라도 꼭 팁을 줘야 한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지금까지 가이드가 했던 말을 굳게 믿고 1달러 팁을 실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좀 살다 보니 여기 현지인들은 식당이나 마사지숍 또는 세차장 같은 곳에서 팁을 안 주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저도 팁을 안 주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지난주에 세차장에서 팁을 안 주고 그냥 나왔더니 직원들이 저를 보면서 한참 이야기를 하더군요. 기분이 찜찜했습니다. 그래서 물어봅니다. 다들 팁 주시나요? 궁금합니다. “

 

이 글에 달린 답글은 두 종류였다.
 

“ㅋㅋㅋ 당했네, 당했어! 가이드에게 당했어...", "바~~ 보", ”필리핀에 팁 문화 같은 거 없습니다. 카지노나 Ktv면 몰라도 필리핀에 매너 팁이 어딨어...ㅋㅋ“, ”처음이라 몰라서 그럴 수도 있죠. 다음부터는 주지 마세요. 님 같은 사람들 때문에 한국인을 호구로 봐요."
 

위와 같은 종류의 답이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그 사이사이에 이런 답들도 있었다.
 

“1달러 때문에 갈등하지 마세요. 주든 말든 아무도 신경 안 써요.”, “주시는 게 좋아요. 안 주면 사람들이 ‘인색한 코리안’으로 생각할 거예요.”, “필리핀 사람들 불쌍하잖아요. 베푼다는 기분으로 좀 주는 것도 괜찮을 듯”, “현지인 중에도 주는 사람도 있어요.”
 


필리핀의 팁 문화는 미국과 다르다

필리핀에는 미국처럼 식사비의 비율로 따지는 ‘레스토랑 팁’ 같은 건 없다. 미국의 팁은 서버(Server)들의 생존 문제가 걸린 급료에 가깝지만, 필리핀에서는 그 정도로 강제성 있는 '팁'은 없다. 하지만 자율적인 '팁'은 있다. 가이드들은 그걸 ‘매너 팁’이라 부른다. 나는 이런 자율적인 ‘매너 팁’은 전 세계 어디에나 있을 것이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유럽 손님 몇몇을 만난 후 그것도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가끔 유럽 쪽 손님들이 한국 여행사를 통해서 '옵션 투어'(호핑, 다이빙, 마사지 등)를 신청할 때가 있다. 이럴 경우 한국 가이드가 인솔하기 때문에 행사가 끝날 즈음에 '매너 팁'을 걷는다. 그럴 때 유럽 쪽 손님 중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반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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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이드) : “Tip, Please” (팁 주세요.)


유럽 관광객: “Why?” (왜? 내가 팁을 내야 해?)
 

나(가이드) : “American style!” (여기는 미국식이야.)
 

유럽 관광객: “What?” (난 미국인이 아니야! 여기는 미국도 아니고!)
 

나(가이드) : “1 dollar” (야! 원 달러도 없냐? 그냥 좀 주라.).
 

유럽 관광객: “Crazy!!” (못 줘!!)
 

나(가이드) : What?!!! (이게 어따대고 ‘크레이지’래 세부 왔으면 세부 법을 따라라 무식한 놈아!!)
 

처음에는 유럽 관광객은 대부분 배낭여행족이라 가난해서 그런 줄 알았다. 그런데 이런 일을 몇 번 겪다 보니 지금은 ‘유럽 사람’도 한국인과 마찬가지로 '매너 팁'에는 익숙하지 않다고 생각하게 됐다.
 
그럼 미국식도 유럽식도 아닌 필리핀의 이 이상한 "팁 문화"는 어디서 왔을까? 특히  가이드들이 "매너 팁"이라고 부르는 이 "팁 문화"의 정체는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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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은 “빈부격차”가 심한 나라다. 모든 나라는 빈부 차가 있겠지만 후진국일수록 그 격차는 심하다. 필리핀은 한때 아시아에서 꽤나 잘 나가는 나라였지만 독재와 부족한 공동체 의식, 낮은 교육 수준, 상류층의 부정부패 등으로 사회 시스템이 급격히 무너지면서 쇠락의 길을 걸었다. 그 결과 지금은 정치적으로는 매우 부패하고, 사회적으로는 매우 위험하며,  경제적으로는 매우 가난한 나라가 되었다.
 
가난한 나라에도 부자는 존재한다. 필리핀 부자들에게는 종교의 영향을 받은 것 같은  독특한  문화가 있다. 좋게 표현하면 ‘기부'라 할 것이고, 다르게 표현하면 “적선(積善)"이라 할 수 있는 행동이다
(“적선(積善)”은 좋은 말이지만 어감에 '동냥, 구걸'이라는 내용이 내포되어 있기에 '기부'와 구분했다). 어쨌든, 이들에게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조금씩 베푸는 문화가 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내가 처음 세부에 방을 얻어 살던 곳은 매우 가난하고 위험하여 소문이 안 좋은 동네였다. 동네 사람 절반은 마약중독자고 절반은 ‘게이’며 총기 사고도 빈번히 발생한다고 알려진 그런 동네였다.

물론 나는 이 사실을 이사를 하고 난 뒤에야 알게 됐다. 처음 방을 보러 갔을 때 내가 들어갈 옆방에는 아주 예쁜 일본인 아가씨가 살고 있었다. 젊은 일본 여자도 혼자 사는데 내가 못 살 이유가 없겠다 싶어 나는 바로 이사를 결정했다.
 
내가 그 동네에 산다는 소식이 회사에 전해지자 하루는 부장이 나를 불러서 이런 이야기를 했다.


“야! 돈이 그렇게 없냐? 작년에 그 동네에서 외국인이 몇 명이나 죽어 나갔는지 알아? 돈 빌려줄 테니까 얼른 다른 집 알아봐!”
 

그때야 나는 내가 아주 위험한 일을 했다는 걸 알게 됐다. 그래도 나는 이사하지 않고  그 집에서 1년을 넘게 살았다. 실제로 살아보니 그 동네는 소문처럼 그런 곳은 아니었다.
 
그 집에서 독특한 경험을 몇 가지를 했는데 그중 하나가 크리스마스 파티이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오자 집주인 부부는 넓지 않은 마당에 크리스마스트리를 세우고 성탄을 축복했다. 크리스마스이브가 되자 아침부터 큰 파티를 준비했고 해질 녘이 되니 온 동네의 어린이들이 다 몰려와서 파티에 참석했다.

아이들은 준비된 음식을 먹고 게임을 하고 선물까지 받아서 돌아갔다. 어린이를 위한 1차 파티가 끝나고 늦은 저녁 시간이 되자 온 동네 게이들과 그 친구들이 모여들었다. 나도 어떻게 하다 보니 이 2차 파티에 참석하게 됐다. 이때 집주인에게 물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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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 “왜, 당신 집에서 동네 파티를 하나요?”


집주인: “크리스마스니까.”


나 : “매년 이렇게 파티를 해요?”


집주인: “그럼 매년 하지..”


나 : “아하!! 그런데 이 파티 비용은 누가 내죠?”


집주인: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며) “내가 내지.”


나 : “이 많은 음식과 선물을 당신 혼자 준비한다고?”


집주인: “당연하지 우리 집에서 하는 파티인데...”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집주인은 크리스마스 파티를 여는 것을 매우 중요한 의무로 여기는 것 같았다. 그는 동네의 소외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크리스마스 파티라는 방식으로 일정량의 기부 또는 적선(積善)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필리핀은 아시아에서는 특이하게도 가톨릭이 국교화 되어 있는 나라이다. 16세기 스페인에 식민 지배를 받을 때 받아들인 가톨릭이 지금까지 자리를 잡고 전해 내려오고 있다. 다른 종교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국민의 대부분이 가톨릭을 모태신앙으로 가지고 있어서 좀처럼 다른 종교가 번창하기는 어렵다.
 
나는 필리핀의 “팁 문화”가 이런 가톨릭의 종교적 관습에서부터 시작됐다고 생각한다. 그들에게 ‘팁’과 ‘크리스마스 파티’는 같은 맥락이라는 뜻이다.

즉, 필리핀 부자들에게는 “내가 조금 더 있으니, 이 정도는 줄 수 있지!”라는 생각이 있고, 가난한 사람들은 “나는 가난하니 받는 게 당연해”라고 생각한다는 뜻이다. 필리핀 사람들은 적선(積善)을 받아들이는 걸 부끄러워 하지 않는다.

필리핀에 조금만 살아보면 ‘팁’은 있는 사람들이 없는 사람들에게 베푸는 일종의 적선(積善)에 가깝다는 걸 쉽게 알 수 있다. 미국의 ‘팁’처럼 노동력의 대가인 급료의 의미가 아니라는 뜻이다. 이런 필리핀 “팁”의 본질을 알면 한국인 커뮤니티에 올랐던 주부의 의문은 쉽게 풀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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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인에게 적선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한국인 사모님이 직접 운전을 해서 세차장에 갔다. 필리핀 세차장 직원들의 월급은 잘 잡아도 6천 페소 한화로 약 15만 원 정도이다. 이 돈은 필리핀에서도 적은 임금이다. 즉 가난한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당연히 세차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눈에는 한국 사모님이 부자로 보였을 것이다. 

이렇게 부자인 사람이 세차가 끝나자 팁 한 푼 없이 차 문을 쾅!! 닫고 휭~ 가버렸다. 그들의 눈에 이 장면이 어떻게 보였겠는가? 당연히 “인색한 코리안"으로 보였을 것이다. "부자면서 50페소(1천 원) 한 장을 안 주고 가네..."  모여서 이런 소리들을 했을 것이 분명하다.
 
그럼 현지인 부자들은 팁을 잘 줄까? 잘 준다. 나는 세차장에서 250페소짜리 세차를 하면서 100페소 팁을 주는 장면도 여러 번 봤다. 물론 부자들 중에도 팁을 안 주는 사람이 있겠지만, 자신이 부자라고 생각하거나 부자로 보이고 싶은 사람은 대부분 팁을 준다.

현지인 입장에서 ‘팁’을 준다는 건 베푼다는 뜻이고 우월하다는 뜻이다. 부자들은 그걸 본능적으로 알기 때문에 웬만하면 팁을 주려고 한다. 그렇다면 세차장에 아주 좋은 차를 '기사'가 끌고 왔다면 어떻게 될까? 기사는 당연히 팁을 안 준다. 기사는 부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필리핀에서는 부자로 보이는 사람이 팁을 주지 않으면, 서비스를 제공한 사람들이 확실히 섭섭해한다. 그렇기 때문에 외국인은 필리핀에서 팁 관련해서 기분 나쁜 일을 당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필리핀 사람들은 외국인은 모두 부자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솔직히 자기들 한 달 월급을 한 끼 식사비로 쓰는 사람들을 보면서 부자가 아니라고 생각하기가 더 어려울 것이다. 이래서 필리핀 꼬마들은 거지가 아니어도 외국인만 보면 “원 달러”를 외치고 웨이터나 마사지사, 운전기사, 보트맨들은 일이 끝나면 외국인을 애처롭게 바라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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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의 레스토랑에는 '팁'이 따로 책정되어 있지는 않지만 “팁 박스"라는 게 있다. '팁 박스'는 손님이 자율적으로 팁을 내는 일종의 ‘매너’ 박스이다. 필리핀에도 손님이 테이블 위에 팁을 놓고 갈 때가 있다. 그럴 때 서버(Server)가 “팁 박스에 넣어 주세요.”라고 하거나 직접 가져다가 팁 박스에 넣는 것을 볼 수 있다. 물론 보는 사람이 없다면 자기 주머니에 슬쩍하기도 할 것이다. 

필리핀에는 이렇게 자율적인 팁은 있을지언정 ‘매너 팁’ 같은 고정된 '팁 문화'라는 것은 없다. 그럼 여기서 의문이 생긴다.

그렇다면 왜? 가이드들은 그렇게 목청 높여 "미국식 팁 문화"를 강조하며 관광객들에게 '매너 팁'을 내놓으라고 강요할까?

 

<계속>

 

 

Profile
"Sometimes I think I'm fighting for a life I ain't got time to live"
- Dallas Buyers Club, 2013.
가끔은 살려고 애쓰다가 정작 삶을 누릴 시간이 없는 거 같다.
-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