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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가다와 계절

 

내가 좋아하는 계절은 따~악 요즘이다. 김신지 작가가 쓴 『좋아하는 걸 좋아하는 게 취미』의 표현을 빌리자면 ‘테라스의 계절’이라고 부를 수 있는 지금 말이다. 책에서는 ‘테라스의 계절’을 “잎사귀 틈새로 비치는 햇살을 올려다보며, 나무 그림자를 따라 조금씩 의자를 옮기며 앉아 있어도 좋은 날씨.”라고 소개한다. 그렇다고 딱 봄, 가을이라고 단정할 순 없고, 4월이나 9월이라고 말하기도 좀 어렵다. 그냥, ‘테라스의 계절’이 오면 공기부터 다르다. 어느 날 출근길에 문득, 혹은 퇴근하고 슈퍼 가는 골목에서 갑자기, 설레는 공기가 코끝을 스친다. 왔구나, ‘테라스의 계절’이.

 

그런 때가 오면 조급해진다. ‘테라스의 계절’은 찰나다. 바쁘다는 핑계로 미적거리면 금세 지나가 버린다. 반년을 다시 기다려야 한다. 해서, 내가 낼 수 있는 최대한의 시간을 내서 양껏 즐기려 노력한다. 주로는 주말에 책 한 권 챙겨 들고(그럴 때 노트북 가져가 글 쓰는 건 반칙이다.) 교외의 한적한 카페로 간다. 커피를 주문하고 바람이 살랑살랑 부는 테라스로 나간다. 반쯤 누운 듯 비스듬히 앉아 책을 읽는 둥 마는 둥, 살짝 졸기도 한다. 그때의 그 나른한 쉼표가, 난 참 좋다.

 

장황하게 계절 얘기를 먼저 꺼내든 건, 노가다꾼의 여름 이야기 좀 해볼까 싶어서다. 지긋지긋했던 여름을 떠나보내며, 다시는 안 만났으면 하는 바람을 담아 띄우는 편지라고 해두자.

 

도대체 어느 정도이기에 다시는 안 만났으면 좋겠냐고? 본격적인 얘긴 차차하고, 나를 포함한 모든 노가다꾼에게 이런 질문 한 번 던져보시라. 여름에 일할래, 겨울에 일할래? 아마도 열에 아홉은 그나마 겨울이 낫다고 답할 거다. 밖에서 일해야 하는 노가다꾼에게 겨울도 힘들긴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름보단 차라리 겨울이 낫다. 겨울엔 어떻게든 더 껴입으면 된다. 정 추우면 장작불이라도 피우면 된다. 결정적으로, 겨울에도 일하다 보면 몸에서 열이 난다. 버텨볼 만 하단 얘기다. 여름엔, 한마디로 답이 없다. 더 벗을 수도, 에어컨을 켤 수도 없다.

 

DJ DOC는 <여름 이야기>라는 노래에서 “지나간 그 여름 바닷가에서 꿈처럼 눈부신 그녈 만났지♩ 믿을 수가 없어 아름다운 그녀 내겐 너무 행운이었어♪”라며 사랑을 읊조렸다만, 노가다꾼의 여름 이야기엔 낭만도 뭣도 없다. 과장 조금 보태 죽음의 문턱에서 오로지 버텨내는 것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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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시사인>

 

체감온도 45°에서 일한다는 건

 

올여름은 전조도 없었다. 다들 아는 것처럼 6월부터 장마가 길게 이어졌다. 그러더니 갑자기 폭염이 시작됐다. 서서히 더워졌으면 마음의 준비라도 했을 텐데, 그럴 시간도 없이 30°를 훌쩍 넘는 날씨가 연일 계속됐다. 우리 지역은 최고 36°까지 치솟았다. 36°만으로도 충분히 ‘미친’ 날씨지만, 이게 끝이 아니다. 노가다판에선 체감온도를 통상 +10°로 잡는다. 과학적인 근거가 있는 건 아니고, 형님들한테 들은 얘기다.

 

“마감하는 사람 몇몇 제외하고 대부분은 허허벌판에서 일하잖냐. 하늘에서 내리꽂는 직사광선에다가 콘크리트 바닥에서 튕겨 나오는 반사열까지, 온몸으로 받아내야 하는 겨 우리는! 그뿐이냐? X나게 뛰어다니다 보면 몸에서 열이 뿜어져 나오잖어. 그러니까 오늘 같은 날, 우리는 체감온도 45°에서 일하는 거나 마찬가지여~”

 

체감온도 45°를 넘나드는 폭염 속에서 고된 육체노동을 한다는 건 이런 거다. 우선, 햇볕이 뜨거운 게 아니라 따갑다. 이때부턴 ‘햇살’이 아니다. ‘태양 X발놈’이 되는 거다. 슬라브(1층 기준 천장, 2층 기준 바닥을 현장에선 슬라브라 한다. 평판을 뜻하는 영어 Slab에서 파생)에서 일이라도 할라치면 발바닥이 뜨끔뜨끔하다. 어느 영화에서처럼, 두꺼운 안전화가 녹아내려 바닥에 쩍쩍 달라붙을 것 같은 느낌이다.

 

그렇게 더운 날은 숨도 잘 안 쉬어진다. 사무실에서 일하는 회사원들은 체감적으로 더 잘 알 거다. 오전 내내 시원한 에어컨 밑에서 일하다 점심 먹으러 밖으로 나왔을 때 숨이 컥컥 막히는 느낌말이다. 그 느낌이, 종일 이어진다고 생각하면 된다. 그런 가운데 무거운 자재를 셀 수 없이 나르고, 망치질을 수백수천 번 하다 보면 자연스레 ‘개’가 된다. 혓바닥을 쭈욱 내밀고 ‘헥헥’ 거리는.

 

그런 날은 땀도 상상하는 것 이상이다. 어느 정도냐. ‘땀’이라는 명사를 주어로 놨을 때 표현할 수 있는 서술어가 몇 가지 있다. 가령 송골송골 ‘맺혔다’든가, 주룩주룩 ‘흘렀다’든가, 혹은 왕창 ‘쏟았다’ 등등. 노가다꾼의 땀은 그 정도 표현으로는 부족하다. 난 같이 일하는 동생에게 이렇게 말했다.

 

“야! 이렇게 팬티까지 다 젖는데, 고개를 조금만 숙여도 땀이 툭툭툭 바닥으로 떨어지는데, 끝도 없이 흘러내리는 땀 때문에 도저히 눈을 뜰 수가 없는데, 이 정도면 땀을 쌌다고 표현해야 하는 거 아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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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가다꾼에게 선크림이란

 

노가다꾼이 여름을 싫어하는 제일 큰 이유는 물론 일하기 힘들어서인데, 그 밖에도 몇 가지 이유가 더 있다.

 

첫째로는 위험하다. 난 제법 젊고 건강한 편임에도 불구하고 한여름 허리 숙이고 망치질하다 일어나면 머리가 핑핑 돈다. 나이 많고 고혈압 있는 노가다꾼들은 오죽할까 싶다. 실제로 여름엔 어지럼증으로 추락하는 사고가 왕왕 터진다. 탈수로 쓰러지는 사람은 비일비재하다. 그렇게 쓰려져 심정지로 영원히 눈 감은 사람도 있단다.

 

불쾌지수 올라가는 것도 문제다. 평소라면 그냥 지나칠 수 있는 사소한 문제도 한여름엔 싸움으로 번진다. 고성과 욕설, 주먹다짐이 일상인 노가다꾼들이 불쾌지수까지 올라갔으니, ‘손대면 토~옥 하고 터질 것만 같은 그대~♪’가 되는 거다.

 

얼굴 타는 것도 문제라면 문제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까무잡잡한 얼굴이 제법 잘 어울려서(섹시해 보인다나 뭐라나, 야성미가 넘친다고도 하고……. 에휴~ 난 잘 모르겠다~), 타면 타는 대로 그냥 놔둔다. 일반적으로는 넥워머(neck warmer)로 얼굴을 꽁꽁 싸맨다. 안 그래도 숨이 턱턱 막히는 날씨에 넥워머까지 두르고 있으면, 그게 진짜 지옥이다. 나도 처음엔 넥워머를 했었다만, 이건 도저히 아니다 싶어 벗어던졌다.

 

어느 날인가는 땀을 삐질삐질 흘리면서도 꿋꿋하게 넥워머를 두르고 있는 형님이 신기해 물었다.

 

“아니, 형님! 안 답답해요?”

 

“야! 안 답답할 리가 있냐? 죽겄다 진짜. 넥워머 안에 땀 차지, 습하지, 죙일 찜질방에 들어앉아 있는 기분이다. 아휴!!”

 

“그럼 벗어요! 답답하다면서 뭐하러 하고 있어요~”

 

“주말에 애들 데리고 마트도 가고, 외식도 하러 가잖어~ 쌔카만 얼굴로 애들 데리고 다니려니까 좀 그렇더라고~”

 

나처럼 넥워머는 답답해서 싫고, 그렇다고 살 타기도 싫은 노가다꾼들이 종종 선크림을 바르기도 한다. 이건 내가 장담할 수 있다. 아~무 의미 없다. 같이 일하던 형님이 증명해줬다. 그 형님은 매일 아침에 한 번, 점심에 한 번 선크림을 덕지덕지 발랐더랬다. 가부키 화장한 사람처럼 아주아주 두껍게. 심지어 못 주머니에 선크림을 넣고 다니면서까지 수시로 발랐다. 나도 그 효과가 궁금해 여름 내내 지켜봤다. 여름의 끝자락, 내 얼굴색과 1도 다르지 않은(참고로 난 선크림을 단 한 번도 바르지 않았다.) 새카만 얼굴로 날 바라보던 형님이 이렇게 말했다.

 

“에휴 X벌. 선크림 값만 수십만 원 깨졌네. 내가 내년부터 선크림 바르나 봐라!!!”

 

“푸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그럴 줄 알았다니까요.”

 

그렇게 악으로 깡으로 버텨가며, 때때로 시답잖은 농담으로 서로를 위로해가며 망치질하는 사이 어느새 아침저녁으로 제법 쌀쌀해졌다. 그렇다. 드디어 끝났다, 여름.

 

추신, 전국의 노가다 형님들에게 전합니다!! 올여름도 고생 많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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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SB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