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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정신. 영어로는 Spirit of the age라고 표현하지만 일반적으로는 처음 이 표현이 사용된 독일어로 Zeitgeist라고 표기한다. 한 시대의 지배적인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동향을 총합한 정신적 경향을 의미한다. 해당 시대의 비물질적인 부분이 어떤 경향을 가지고 있었는가를 뜻한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현재 시대정신이 무엇인가에 대해 파악하기 어렵지만 시간이 조금만 지나도 비교적 쉽게 그 당시 시대정신이 무엇이었는가를 파악할 수 있다. 가까운 예를 들어보자. 이명박 대통령이 당선될 무렵 시대정신은 모 카드의 광고 카피처럼 ‘부자 되세요’였다. 너 나 할 것 없이 부자가 되고 싶어했다. 개인적인 부를 추구하는 것이 우리나라 사회를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가치였다.

 

절차적 민주주의가 완성되었다는 선언(이 선언이 사실 혹은 진실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절차적 민주주의가 완성되기를 바라는 사람이건 그렇지 않은 사람이건 대다수의 사람들이 저 말에 공감했다는 것이 중요하다)과 함께 많은 수의 대한민국 국민들이 타인의 삶에 관심을 잃고 각자의 부를 일구는데 몰두했다. 부를 달성하는 수단이나 방법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부를 일구었다는 혹은 부를 일굴 수 있다는 사실만이 중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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쩐의 시대

 

그 시대에 가난한 집에 태어나서 온갖 역경을 극복하고 월급쟁이로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회사의 경영자 자리까지 오르고, 그 후 최첨단 선진 금융 기법을 구사하는 회사를 차려 성공했고 이번엔 정계로 진출해 서울 시장 자리까지 오른, 돈과 권력을 둘 다 거머쥐는데 성공한 이명박의 일대기는 많은 사람들을 매혹하기에 충분한 이야기였다. 자신이 이명박처럼 성공한 사람이 되기를 원했고, 그게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사람은 자신의 자식이 이명박처럼 성공한 사람이 되기를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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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민 작가는 2002년 발간된 책 <경제학 카페>에서 누군가 자신이 대통령이 되어 국민들을 부자로 만들어주겠다는 얘기를 한다면 그 사람은 바보 아니면 사기꾼이라는 말을 했다. 유시민 작가는 언젠가 그런 사람이 나타날 거라고 예측한 것 같지만 그렇다 해도 바로 다음 대통령이 그런 사람이 될 줄은 몰랐을 것이다. 2007년 이명박 후보가 제일 유력한, 아니 이미 대통령 자리를 따놓은 거나 다름없는 사람이 되어있을 때 유시민 작가는 정신적 공황에 빠져있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이명박은 자기 집안의 가훈이 ‘정직’이라고 했다. 이명박이 말하는 ‘정직’은 전두환이 말하는 ‘정의 사회 구현’처럼 현실과는 정 반대로 동떨어져 있는 공허한 말이었다. 하지만 그런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이명박이 정직하기 때문에, 올바르게 산 사람이기 때문에 그를 좋아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마 그의 아들인 이시형 조차도 아버지를 정직했기 때문에 좋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저 그가 맨 주먹 붉은 피로 큰 부를 만들어내는데 성공했다는 사실만이 중요한 것이었다. 이것이 2000년 대 중반 대한민국의 시대정신이었다. (잠시 생각해보니 이시형은 아버지의 인품 때문에 아버지를 좋아했을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든다.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이 언제나 내 상식과 일치하는 것은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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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이 대통령에 당선된 후 많은 사람들이 그가 자신들이 생각한 것과는 조금 다른 사람임을 깨달았다. 많은 사람들이 이명박이 대통령이 되어 자신이 부자가 되도록 만들어 줄 거라고 믿었다. 그가 부도덕하다는 사실에 눈 감고 그가 대통령이 되기를 바라며 그에게 표를 주었다. 이명박이 대통령에 취임한 이후, 많은 사람들이 그가 자신의 부를 일군 것처럼 자기들을 부자로 만들어 줄 거라고 생각한 것이 헛된 믿음이었음을 깨달았다. 자신은 이명박처럼 부자가 될 수 없음을 알게 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부자 되기’라는 시대정신은 파도에 쓸려나가듯 대한민국에서 쓸려나갔다.

 

화폐가 발명된 이후 아주 먼 옛날이나 지금이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이 부자가 되기를 바라지만 최소한 한반도에서는 그런 욕망이 ‘시대정신’으로 구체화되어 누구나 부자가 되기를 바라는 자신의 욕망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는 때는 그때에도 그리고 그 이후에도 없었다. 그런 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그 욕망이 시대정신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말을 노골적으로 입에 담는 것이 얼마나 자신을 이상한 사람으로 보이게 함을 깨닫지 못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썰물이 오기 전에는 누가 옷을 입었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구별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한발 떨어져야 보인다

 

시대정신은 그 당시의 사람들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모두가 광기에 휩싸여 강박적으로 부자가 되기를 바라고 다짐하고 선언했지만 그게 얼마나 이상한 현상인지를 지적한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지금 와서 보면 그때의 시대정신이 ‘부자 되세요’였다는 것도, 윤리고 도덕이고 다 필요 없고 부자만 된다면 된다고 하던 사람들이 얼마나 정신이 나갔었는지도, 그렇게 다 내던지고 부자가 되고 싶어 했지만 부자가 된 사람은 거의 없다는 사실도 일목요연하지만 그때는 대부분 깨닫지 못했다. 자신들이 혹은 자신들이 살고 있는 사회의, 나라의 시대정신이 그렇다는 것을.

 

왜 그런가. 시대정신은 너무 거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시대정신은 그 시대를 관통하는 경향이다.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이런 것이 한눈에 보일 리가 없다. 하지만 아무도 시대정신을 파악할 수 없는가 하면 또 그렇지는 않다.

 

시대정신이란 그 시대에 여러 가지 형태로 반복, 지속적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 <재테크에 미쳐라>라는 책이 베스트셀러가 된 것도 ‘부자 되세요’라는 광고 카피가 히트를 친 것도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샐러리맨 신화를 쓰고 큰 부자가 되고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정당의 대통령 후보까지 된 이명박의 성공기도 전부 그 시대의 사회적 현상이었고 눈 밝은 이들에게는 하나의 일관된 흐름으로 보일 수 있었다. 심지어 유시민 작가 같은 사람은 그런 사람이 시대정신의 총아처럼 나타날 수 있음을 예측까지 하지 않았던가.

 

또한 그 시대에서 불과 10년도 지나기 전부터 많은 사람들이 그때의 시대정신을 나타내는 단어가 ‘부자 되기’였음을 깨닫지 않았던가. 단지 시대정신은 거대한 흐름이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시대로부터 어느 정도 거리를 두기 전까지는 시대정신을 상징하는 단어를 빈번하게 자신의 입에 올리면서도 시대정신을 깨닫지 못하는 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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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은 욕망을 먹고 자란다

 

많은 사람들이 실제로 가난에서 벗어나 부자가 될 수 있었던 7-80년대가 아니라 이미 우리나라 사회가 어느 정도 공고한 체제가 되어 가난한 사람이 부자가 되기 어려워진 2000년대의 시대정신이 ‘부자 되기’라는 사실은 아이러니하지만 한편으로는 당연하게도 느껴진다.

 

시대정신은 그 시대에 많은 사람들이 자신에게 가장 결핍되었다고 느끼는 것이 선택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6-70년대의 시대정신이 ‘잘 살아보세’였다면 80년대의 시대정신은 ‘정의 사회 구현’이었고 90년대의 시대정신은 ‘세계화’였다. 이 단어들은 권력자가 선택한 단어지만, 그 단어를 선택한 사람의 원래 뜻과 관계없이 예리하게 그 시대의 결핍을 드러냈다.

 

보릿고개로 상징되는 절대적인 빈곤에서 벗어나기를 원하는 사람들의 바람, 절대 빈곤에서 막 벗어났지만 오랜 독재에 지친 사람들이 원했던 정의라는 가치, 자신들의 이루어 낸 것들이 좀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인정받기를 원했던 욕망이 시대정신의 뼈대를 이뤘다.

 

권력자가 본의든 아니든 저런 단어를 선택한 것 또한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권력이란 사람들의 욕망에 민감해야 손에 거머쥘 수 있는 것이다. 대다수의 사람이 원하지 않는데 권력을 가질 수는 없다. 본능적이건 이성적인 판단이건 자신이 권력을 거머쥐고자 하는 사회의 사람들이 가진 욕망에 가장 민감한 사람이 권력을 거머쥘 수 있다.

 

박근혜가 말한 ‘적폐 청산’이나 ‘비정상의 정상화’같은 말도 마찬가지다. 그 말이 가리키는 개혁과 변화의 대상이 자신이 될 줄은 몰랐겠지만 박근혜의 탄핵부터 몇 년 간 저 두 가지는 우리나라를 관통하는 시대정신 중 하나였음은 분명하다. 권력이 사람들의 결핍이 만든 진공을 채울 수 있는 힘을 의미하고, 권력을 향한 권력자의 안테나는 그 어떤 안테나보다 감도가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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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의 욕망

 

시대정신은 중요하다. 인권이나 자유, 평등, 민주주의 같은 말처럼 왜 중요한 지를 설명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시대정신은 다른 말들과 달리 어떤 가치를 담고 있는 말이 아니다. 그저 그 시대를 사는 사람들이 어떤 가치를 추구하면서 살았는지를 말해준다. 시대정신은 가치중립적인 말이다. 시대정신이란 말에는 긍정적 혹은 부정적인 뜻을 담고 있지 않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시대정신이라고 하면 긍정적인 뜻을 담고 있다고 막연히 생각한다. 시대정신이라는 말에 거창하고 이상적인 가치가 담겨있는 것처럼 느낀다. 하지만 2000년 대 중후반 ‘부자 되기’라는 시대정신에서 어떤 이상적 가치를 찾을 수 있는가? ‘물질만능주의’와 ‘천박함’ 외에 어떤 가치를 찾아볼 수 있나?

 

어떤 시대의 정신은 숭고한 반면에 어떤 시대의 정신은 저열하다. 시대정신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그저 그때 살던 대다수의 사람들이 중요하게 생각하고 추구하는 가치일 뿐이다. 그래서 시대정신은 중요하다. 우리가 어떻게 살 것인지, 우리가 사는 사회가 어떤 가치를 추구할 것인지 그래서 우리 전체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 것인지를 결정짓기 때문이다.

 

위에서 이야기 한 바처럼 시대정신은 알기 어렵다. 하지만 아는 것이 불가능한 것도 아니며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알아낼 필요도 있다. 문제 해결은 문제를 인식하는 데서 출발한다. 문제를 인식하지 못하면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가 사는 시대의 시대정신에 문제가 있다면 그래서 그것을 바꾸는데 조금이라도 영향을 미치고 싶다면 우선 시대정신이 무언가를 알아야만 가능하다. 시대정신 따위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하면 그대로 살아도 좋다. 시대정신 따위 아무래도 좋다는 것 또한 시대정신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시대정신이 중요하고 보다 나은 시대정신을 만들어가고 싶은 사람이라면 우선 시대정신이 뭔지를 파악할 필요가 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 대한민국의 시대정신은 무엇일까.

 

우선 우리나라 사회에서 반복적으로 벌어지는 논쟁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보는 데에서 시대정신을 파악할 수 있다. 박근혜가 대통령으로 재직하던 시절 많은 사람들은 ‘금수저’와 ‘흙수저’라는 말을 사용했다. 부모에게 많은 것을 받은 ‘금수저’가 경쟁에서 앞서나갈 수 있었고, 그렇지 못한 ‘흙수저’가 ‘금수저’와 경쟁해 이기는 것은 어려웠다. 불평등과 불공정은 점점 고착되는 것처럼 보였다. 그 와중에 정유라의 입시와 관련된 논란이 대한민국을 강타했다.

 

박근혜 뒤에 숨어 나라를 좌지우지하던 최순실은  자신의 딸인 정유라를 좋은 대학에 입학시키기 위해 삼성으로부터 뇌물로 말을 받았고 아시안게임에 메달을 딸 수 있도록 만들었으며 대학 총장을 불러 자신의 딸을 이화여대에 입학할 수 있도록 했고, 입학 후에도 학사관리와 관련해 온갖 특혜를 받도록 했다. 정유라의 입시와 학교생활에 필요한 모든 사람과 제도가 오로지 정유라 한 사람을 위해 움직였다. 이것을 알게 된 이화여대생들은 학교 측을 상대로 데모를 했지만 학교에서는 반성은커녕 공권력을 등에 업고 진압하려 들다 실패했다. 그 후 문재인은 ‘기회의 평등, 과정의 공정, 결과의 정의’를 내세워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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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한겨레>

 

문재인이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 ‘평창 올림픽 여자 아이스하키 국가대표 선정’과 관련된 논쟁, 조국 법무부 장관 임명 이후 조국 부인과 자녀들에게 주어진 특혜와 관련된 논쟁, 추미애 장관의 아들의 휴가와 관련된 논쟁 등이 우리 사회를 강타했다. 이것이 수구기득권 층에서 만들어낸 논쟁이라고 해도 인화성이 없는 주제였다면 불이 붙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많은 이들이 이 모든 것은 공정의 문제라며 문재인 정부를 비판했다. 공정을 내세워 당선된 문재인 대통령과 그 정부 인사들이 실은 누구보다 불공정한 인사들이라고 진보, 보수를 가리지 않고 목소리를 높였다. 특히 청년세대가 분노하고 있다는 얘기가 많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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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news1>

 

특히 90년대 생들이 공정 문제에 민감하다는 사실, 왜 그들이 공정 문제에 민감하게 되었는지 이유를 분석하는 기사나 책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 현상만 놓고 보면 2020년대 대한민국의 시대정신은 ‘공정’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과연 그런가? 지금의 시대정신을 ‘공정’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아닌 것 같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