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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콜롬비아인의 희생이 기억된 적 있었는가

 

‘100년의 고독’으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마르께스(Garcia Marquez)는 라틴아메리카 유일의 한국전 참전국 콜롬비아 작가다. 참전국 작가라서일까? 그는 지역의 다른 그 어느 작가들보다도 한국전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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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께스와 그의 소설 <대령에게 편지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가 1954년 12월에 출판한 중편 대작 ‘대령에게 편지하는 사람은 없었다(El Coronel no tiene quien le escribia)’는 노벨상 수상작에 버금가는 작품으로 인정받고 있다. 이 소설은 그가 주요 일간지 신문기자로 활동하던 당시 한국전 참전용사의 삶을 취재하여 완성한 작품이다. 

 

주인공 대령은 완고한 성격의 참전용사로서 50년 전 정부가 약속한 연금 소식을 기다리며 배고픔과 고통을 인내한다. 마르께스는 소설을 통해 현실정치에 대한 비판, 참전용사들의 소외뿐만 아니라 훈장까지 저당 잡혀야만 하는 이들의 비참한 현실을 폭로한다. 그리고 인정하고 싶지 않은 50년 전 정부의 거짓 약속에 대해 오늘날 진실을 묻는다.

 

로물로, 아르끼메데스, 벤하민, 이디아스 그리고 라미레스 삼형제.... 이들 역시 정부의 편지를 기다리다 고독하게 삶을 마감한 한국전 참전용사들이다.  그리고 아시아의 공산군이 왜 자신들의 적이어야만 하는지 알지도 못한 채, 그저 조국을 위해 총을 겨누었던 어린 소년병들이었다. 또한 이들은 70년의 세월을 뒤돌아보며 조국이 자신들에게는 고독과 망각만을 강요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한국전 참전 콜롬비아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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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에 참전한 콜롬비아 병사들 

  

2020년 올해는 한국전쟁이 발발한지 70년이 되는 해다. 콜롬비아 참전용사들에게 한국은 폐허 속에 기적을 일구어낸 자랑스러운 나라였지만 우리에게 이들은 단 한번도 기억 속에 머물러 본 적 없는 타인들일 뿐이다. 전쟁을 경험한 적 없는 나에게 한국전쟁은 교육과 사진 속에 갇혀진 역사에 불과했다. 그러나 현지에서 만난 고령의 오를란도와 에르난도 참전용사들의 아리랑 가락 속에 한국전쟁은 연표 속에 진열된 역사가 아닌 숨을 쉬고 있는 현재임을 알게 해주었다.   

 

 

참전부대 “바따욘 콜롬비아”은 이렇게 탄생했다

 

1950년 콜롬비아의 보수 정권은 라틴아메리카 지역에서 유일하게 한국전 참전을 결정했다. 그리고 한국전 파병 부대 “바따욘 콜롬비아(Batallón Colombia)”를 창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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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따욘 콜롬비아(Batallón Colombia)

 

1951년 5월 21일, 1,086명의 병사들은 한국행을 위해 미 군함 아이켄 빅토리(Aiken Victory)호가 대기하고 있는 태평양 연안 부에나 벤뚜라(Buena Ventura)항에 도착했다. 이들은 정부가 제시한 자유 세계의 민주주의 수호라는 대외명분 아래 이름조차 생소한 머나먼 타국의 자유 수호를 위해 미군 순양함에 몸을 실었다. 

 

참전병들은 군사훈련으로 단련되었거나 전쟁 수행능력을 갖춘 청년들은 아니었다. 로물로와 아르끼메데스 일병은 자발적인 의지로 파병부대에 합류한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이들은 각 지역수비대에서 병역 의무를 수행하던 병사들로서 상관의 명령에 따라 전출되었다. 라미레스 삼형제는 친구의 권유와 모험심으로 군 입대를 앞당겨 파병부대에 합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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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 참전병 라미레스 삼형제와 아버지(엘 띠엠뽀, 1951년 5월 21일)    

 

이디아스와 벤하민 이병은 애국심과 군의 전문화에는 관심이 없었다. 병사들은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는 정치적 폭력 사태 진압에 동원되어 늘 과도한 업무에 시달려야 했다(당시 많은 나라가 그랬지만, 콜롬비아는 정치적으로 혼란 시기였다). 이들에게 한국행은 국내를 탈출할 수 있는 기회였다. 파병부대를 지휘한 알바로(Alvaro Valenvia Tovar)장군과 일부 장교들은 자국의 평화가 담보되어 있지 않은 상황에서 왜 자신들이 세계평화를 수호해야 하는지 반문하였다.  

 

소집된 참전병 중 200명은 부대에서 이탈하여 귀가하였다. 이러한 공백은 예비역을 소집하여 대체하였고 일부는 농촌 지역 청년들로 채워 나갔다. 참전부대 “바따욘 콜롬비아”는 회사원, 상인, 농부, 그리고 학생 등 여러 지역으로부터 다양한 직업을 가진 모험가들이 하나의 유니폼 아래 서로 섞여 있었다. 

 

커피 재배지 안티오키아에 살던 16살의 라미레스는 동양에서 돈을 벌 수 있다는 광고와 새로운 세상에 대한 모험심으로 학교를 자퇴하였다. 그리고 17살과 19살 형을 따라 군복을 입었다. 가난에 시달리며 늘 먹을 것이 부족했던 15살 소년 호르헤는 전쟁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미군이 배불리 먹을 수 있는 음식을 준다는 말에 이끌려 동네 친구들과 함께 군복을 입었다. 

 

참전용사들은 전쟁이 왜 일어났는지, 그리고 한국은 어디이며 무엇인지조차 알지 못했다. 이들은 군에서 실시한 교육을 통해 공산주의와 맞서 싸우는 것이 임무라는 것을 기억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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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전 해군참전용사회장 빅또르(왼) / 참전 당시 착용했던 로날도 일병의 군화(오) 

 

참전용사들은 부산에 도착할 때까지 26일 동안 미 육군 빅토르(Victor A.) 대령의 지휘 아래 정신강화 훈련을 받았다. 훈련은 반공주의 교육 이외엔 국제정세를 비롯한 한국 문제에 대한 정보는 없었다. 동시에 실전경험이 없던 병사들은 미군으로부터 새로운 군 장비 및 무기사용법을 전수받았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참전 병사들은 미국식 군사모델에 익숙해져 갔다. 이것은 후에  미군의 콜롬비아군에 대한 지배권 장악에 중요한 토대가 되었다. 

 

 

정권 안정을 위해 한국전쟁을 이용한 콜롬비아 보수 정권

 

1951년부터 1953년 7월 6일까지 총 4개 연대의 5천 명 이상의 콜롬비아 병사들이 한국전쟁에 참전하였다. 1차와 2차 연대는 전쟁절정기에 최전선에서 북한군과 중공군을 상대로 격전을 벌어야 했다. 3차와 4차 연대는 휴전기에 파병되었으며 이들에게는 이전보다 많은 액수의 달러가 지급되었다. 증언에 의하면 1차와 2차 파병부대는 장교와 하사관을 포함하여 대부분 (콜롬비아)자유당 지지 세력으로 구성되었으며 3차와 4차 부대는 대부분이 (콜롬비아)보수당 지지 세력으로 조직되었다.

  

표면적으로 참전부대 구성원은 자유와 보수 세력이 동일한 수준으로 분포되어 있었다. 그러나 내용을 살펴보면 실전경험이 없던 자유당 지지 병사들은 최전선에 배치되었다. 지역주의가 강한 콜롬비아에서 참전용사들은 출신 지역을 통해 자신의 정치적 정체성을 노출하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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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BATALLÓN COLOMBIA>

 

당시 군부는 병사들의 출신 지역을 토대로 정치 성향을 쉽게 구분 할 수 있는 명단을 작성하였다. 이러한 사실을 통해 콜롬비아의 한국전 참전은 국내 자유당 지지 세력의 약화를 시도한 보수 정권의 정치적 전략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반정부 무장조직의 활동이 전개되는 상황에서 보수 정부는 그 무엇보다도 자유당 세력의 약화를 통한 정치적 안정이 시급한 과제였다.   

 

 

한국전쟁은 콜롬비아에 어떤 영향을 미쳤나

 

참전의 배경을 경제적 이익 추구라는 실리론 만으로 설명한다면, 콜롬비아의 한국전 참전의 진정한 의미를 파악할 수 있는 공간은 축소된다. 

 

동일한 국제적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각국의 외교정책이 다른 이유는 그 원인이 국내정치와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콜롬비아 역사에서 1946년부터 1953년을 정치적 폭력 사태 시기로 분류한다. 그러니까 한국전 발발 당시 콜롬비아는 일련의 정치적 폭력 사태로 인해 사회가 극도로 혼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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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딴 (Jorge Eliecér Gaitán)

 

1946년 대선에서 보수당은 16년 만에 정권을 장악했다. 당시 자유당 후보 가이딴(Jorge Eliecér Gaitán)은 대중의 절대적 지지를 받은 당선이 유력하였다. 변호사로 활동하던 가이딴은 바나나 재배지역에서 발생한 농민대량학살을 목격한 이후 정치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급진자유세력(급진개혁세력)의 중심이 되었다. 

 

가이딴이 이끄는 급진자유세력은 급속히 성장하여, 보수당은 물론이고 자유당 내 온건파에게도 위협이 되었다. 결국, 자유당 내 온건파는 또 다른 대선 후보를 내세움으로써 자유당은 분열하였다. 

 

콜롬비아의 양당 엘리트들은 정당의 패권이 바뀌면 정치적 불안이 고조될 때, 상호 정치적 제휴를 통해 위기를 극복해왔다. 이것은 콜롬비아 양당제의 주요 특징이다. 양당 엘리트들은 자신을 위협하는 세력이 등장하면 강한 동질성을 유지했다. 콜롬비아의 자유와 보수 양당은 제3당의 출현을 제압하면서 특권계급의 이익을 보호하는 기능을 담당했던 것이다.

 

자유당 분열 이후, 가이딴은 민중 세력을 규합하여 보수 정권에 맞섰으나, 성과를 얻지 못했다. 민중 세력은 혁명좌파국민연합을 형성하여 공산당과 협력관계를 도모했다. 민중 세력은 도시를 중심으로 지지기반이 확산되었고, 보수당 정치 존립의 위협 세력이 되었다. 이러한 상황아래 1948년 4월 19일 수도 보고타에서 가이딴 암살 사건이 발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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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살된 가이딴 

 

가이딴의 사망은 소수 엘리트에 의해 독점되고 있는 부와 권력에 대한 민중의 상대적 박탈감이 폭력으로 표출되는 계기가 되었다. 도시뿐만 아니라 농촌 지역에서도 멕시코 혁명 이후 라틴아메리카 최대 농민 세력이 동원되는 시위가 지속되었다. 

 

≫용어설명

멕시코 혁명: 멕시코 혁명(에스파냐어: Revolución mexicana)은 1910년 멕시코에서 장기집권하던 포르피리오 디아스에 대항하여 프란시스코 I. 마데로가 반란을 일으키면서 시작된 무장 투쟁이다. 멕시코 혁명은 사회주의, 자유주의, 아나키즘, 인민주의, 토지 균분론 운동 등 다양한 사상이 활동하였다.

 

보수 정권은 불안정한 상황을 고려하여 폭력적 방법을 통해 권력 강화를 시도하였다. 지식인들은 이러한 보수독재체제에 반발하였다. 그리고 이들의 지원으로 동부평원지대에서는 조직적인 반정부 무장집단의 활동이 전개되었다. 가이딴 암살 사건은 콜롬비아 게릴라 형성에 기원이 되었다. 

 

보수 정부는 점차 테러에 의한 공포정치를 통해 자유당 세력을 복종시키려 했다. 이러한 탄압정치 아래 1949년 실시된 대선에서 자유당은 불참을 선언하였다. 결국 보수당의 고메스(Laureano Gómez)는 단독으로 출마하여 정권을 장악했다. 그리고 1950년 혼란 정국 상황아래 한국전 참전을 결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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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롬비아 전 대통령 라우레아노 고메즈

 

보수 정권은 자유세계의 민주주의 수호라는 대외명분 아래 참전의 당위성을 부여했다. 고메스는 한국전쟁을 국내정치 상황과 동일시하며 반공주의를 통치이념으로 활용하였다. 반공주의는 기존 질서에 대립하는 모든 진보이념의 출현을 제어할 수 있는 도구가 되었다. 

 

또한 고메스는 신예 전투 장비가 동원된 한국전쟁의 경험은 콜롬비아군의 전문화 및 국내 반정부 무장조직을 효과적으로 진압할 수 있는 기회로 인식되었다. 실제로 콜롬비아군의 한국전 경험은 국내 게릴라전에서 효과를 나타냈다. 

 

차경미 (부산외국어대학교 중남미지역원 교수)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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