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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2.16.화요일


파토


 



멋지다, 와이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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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투] 한국판 크리스마스대전 '파랑새'를 1위로 만들어 버리자. 






 


와이낫과 씨앤블루의 표절 시비 및 인디 참칭으로 갑자기 인디씬과 인디의 의미가 주목 받고 있는 걸 보면서, 우원의 머리와 가슴 속에는 오만 가지 개인적인 기억과 감정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


 


믿을랑가 모르겠지만 울나라에 인디뮤직이라는 개념을 맨 처음 끌고 들어온 게 실은 우원이기 때문이다. 1994년경이니 어느덧 16년 전의 일. 당시 하이텔 언더그라운드 뮤직 동호회 시삽이자 배드 테이스트라는 허접밴드를 준비하고 있던 우원은, 나름 빠삭하던 해외의 여건에 비해 국내 록신의 척박함과 밴드활동/음반발매 등의 현실적 어려움등을 피부로 느낄 수 밖에 없는 처지였다.


 


그러다가 문득 생각이 든 게 바로 지역을 기반으로 한 인디레이블이라는 개념. 이미 89초에 걸쳐 시애틀 4인방을 통해 미국에서는 인디뮤직의 저력이 널리 인정받고 있었고 국내에도 그런 사실이 어느 정도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국내음악을 인디레이블이라는 개념으로 발매하고 나아가 음악의 저변을 확충하기 위한 인디뮤직씬을 만든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발상조차 되지 않던 상태.


 


그래서 나름 필을 받고 인디레이블과 인디씬의 가능성에 대해 떠들고 다니기 시작했는데, 1년은 언더그라운드 뮤직동 내에서도 이해 받지 못했고 사실상 찬밥 신세였다. 당시 동호회 회원이던, 이후 인디씬의 시혜를 가장 크게 받았다고 할 한 모 밴드의 리더 모씨는 인디레이블은 소용없고 천재가 나와서 음악판을 뒤집어야 한다며 특히 반대하기도 했는데 이후의 상황을 보면 격세지감이 아닐 수 없다.


 


나름 비슷한 처지에 있던 젊은 음악인들의 공감을 기대했던 우원은 동료들의 이런 반응에 적잖이 놀랐고 이단자 취급을 받는 것에 당혹스럽기도 했다. 근데 웃긴 게, 이렇게 한 1년 떠들고 다니던 95년경이 되자 이상하게도 문화운동 쪽 사람들이 관심을 갖기 시작한 거다.


 


돌이켜보면 당시는 80년대 운동권에 종사하던 분들이 록 담론이니 대중문화 운동으로 눈길을 돌리던 시기였다. 인문사회적 접근으로 유명했던 음악평론가 강헌이나 신현준, 나중에 게이운동가로 변신한 서동진 등 이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문화판에서 이미 많이 활동하고 있었다. 이주변 사람들이 인디레이블론에서 새로운 문화운동의 가능성을 본 것이다.


 


그리하여 우원은 갑작스럽게 여기저기 불려 다니기 시작했다. 95년 오늘예감이라는 문화 계간지에 관련 글을 기고한 것을 시작으로 각종 문화잡지는 물론 서울대 학보에서까지 원고청탁을 받지 않나, 96년에는 크리스찬 아카데미의 대중음악 포럼에서 발제도 하고 나아가 연대 사회학과 대학원에서 그룹 넥모의 신모 씨와 강연도 했으니, 참 어린 나이에 갑자기 먼 일인가 싶었다.


 


덩달아 밴드도 좀 돼서 국내 웬만한 록 밴드는 다 나온 페스티벌에도 여러 차례 참여하는 등, 지금 생각해 보면 나름은 영광의 시절이었다고 하겠다.


 


이렇게 시작된 인디레이블 활동은 결국 홍대앞의 클럽들, 밴드들과 연계하고 운동권 출신의 여러 사람들이 주동하면서 일종의 시민문화운동적 성격을 띠게 된다. ‘개방적 클럽 연대’(개클련)라는 이름 하에 중앙일보 매거진 X(당시는 조중동이라는 개념이 없던 때)와 한겨레 등의 전폭적인 문화적 지원을 받으며 잘나가던 96~97년의 인디뮤직 운동.


 


그러나 우원은 개클련이 한참 잘되던 97년 중순에 미련 없이 그 조직에서 발을 뗐고, 99년 딴지에 다시 조인할 때까지 칩거와 방랑의 생활을 하게 된다.


 


?


 


, 지금부터가 본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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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의 인디씬은 화려했지만 실은 자생적인 힘을 전혀 갖지 못한 거품일 뿐이었다. 인디씬이 자생력을 갖는 방법은 뭘까? 그건 음악 산업의 일부로서 자리잡고 성장해 가는 거다. 오직 이 방법 밖에 없고 이것이 담보되지 않은 상태에서 나머지 다른 화려한 수식어들은 전부 겉치레에 불과하다.


 


삼척동자도 알만한 당연한 이야기 아니냐.


 


하지만 그때 그 자리에 모여있던 집행부와 운영위의 대부분은, 실제 음악으로 생계를 꾸려 나가야 할 입장이던 우원과는 달리, 다들 인디음악을 문화운동의 각도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서 연대나 홍대 출신의 정말 실력 없는 학생 초보팀 몇몇을 아이콘으로 만들어 다양한 공연에 출연시키기도 했다. 이슈를 만들고 뉴스가 되는 것에 주안점을 뒀던게 아닌가 한다.


 



 


그런 전반적인 분위기 속에서 생각이 많이 달랐던 우원은 실력 있는 중견 프로밴드들을 무대에 끌어들이고 사업적인 마인드를 갖춰야 한다고 여러 차례 주장했으나 진지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미 80년대 중 후반부터 활동하던 뛰어난 록 밴드들, 시나위 백두산 부활만큼의 지명도는 갖지 못했지만 그에 준하는 경력과 실력을 갖춘 많은 팀들은 이 새로운 인디씬에는 낄 자리가 없었다. 그들의 오랜 경험과 프로페셔널한 마인드는 인디 운동의 참신한 명분과 화려한 이벤트 앞에서 이미 낡은 것으로 치부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홍대앞 길거리와 신촌역 앞에서 벌인 야외 페스티벌만해도 몇 번이었으며, 거의 매주 등장하는 굵직굵직한 언론의 관련 기사들과 찬사, 대안적 문화 운동으로서의 집중도와 대중적 이벤트가 가진 가치들


 


그러나 우원은 그 속에서 이미 쇠락의 그림자를 볼 수 밖에 없었다. 이 바람이 한번 지나가고 나면 남는 것은 거의 없을 것이다. 밴드가 음악하면서 최소한의 생계를 유지하도록 산업적인 틀을 짜는 것에 총력하지 않는다면, 그리하여 저변을 넓히고 음반 판매량과 유료 관객과 나아가 투자를 끌어들이지 못한다면, 솔까말 문화운동가들의 이력서에 들어갈 경력 몇 줄 이상의 실질적인 목표를 잡아 나가지 않는다면, 얼마 못가 약빨이 떨어질 게 뻔했기 때문이다.


 


아 물론 그 모든 노력과 참여한 분들을 죄다 폄하하려는 게 아니다. 그저 당시의 인디운동에는 태생적인 한계가 있었다는 것, 음악생산자가 주체가 아니었다는 사실과 너무 젋은 사람들이 모여서 현실적인 사고나 능력(돈...)이 따르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하는 거다. 


 


와중에 주류 음악계의 눈총도 따가웠다. 기획사들이야 원래 장사꾼이니 그렇다쳐도, 당시 높은 지명도를 갖고 영향력을 행사했던 몇몇 아티스트들에게 우원이 직접 인디씬의 명분을 알렸던 적도 있지만 돌아온 것은 무관심뿐이었다.


 


특히 그 중 한 사람인 모씨가 어느 날 아침 내게 걸어온 전화 한 통, 그 냉소적인 첫 마디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너 뜰 생각이나 해 임마


 


 


...머 설명하기도 불쾌한 벼라별 일이 그런 와중에 있었고, 어린 나이에 과분한 일을 해 보려다가 모인 사람들의 진정성에 대한 의심 속에서 빠져 나온 우원의 실망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리고 인디뮤직 운동은 예상대로 얼마 못 가 서서히 사라져갔다.


 


우원이 관련되었던 당시의 이런 일들이 전혀 성과가 없었던 건 아닐 거다. 몇몇 스타 밴드들이 탄생했고 인디레이블, 인디뮤직, 인디밴드라는 말들이 알려졌으니 말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때에 비한다면 좋아진 면들이 있을 것이고 지금도 이를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대중음악판의 저변을 넓히는 일에는 별다른 결과를 내지 못했고, 대부분의 밴드들이 기초생활을 위한 수입도 올리지 못하는 상황도 개선되지 않았다.


 



 


그래서 방랑을 청산하고(실제로는 나우폐인으로 방콕이었지만) 99년 본지에 글을 쓰기 시작하고 2000년 초부터 상근하면서도, 사내에서 우원의 인디뮤직 경력은 입에 담지 않았고 음악팀으로 자원하지도 않았다. 창피했고 또 되돌아 보기도 싫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한 6개월 다른 글만 쓰다가 당시 딴지에 잠시 있었던 김규항씨가 우원의 과거를 기억해 내는 바람에 결국 음악섹션 딴따라딴지의 팀장이 되어 음악판 개혁과 표절 및 립싱크 퇴치 등등을 다시 떠들게 된 거다.


 


이게 인디/대중음악과 관련된 우원의 과거의 삶이다. 그러나 세월은 지났고 세상도 변했다. 음악판의 문제보다 더 큰 문제가 생겨버렸고 양심적인 이들이 죽거나 감옥에 가거나 재갈이 물려졌다. 그래서 딴따라 출신인 우원마저도 그 싸움에 뛰어들 수 밖에 없는 현실이다.


 


게다가, 이미 소덕으로 커밍아웃한 것처럼 우원은 요즘 나오는 엔터테인먼트 팀들 좋아한다. 소시를 필두로 원걸 카라 티아라 투NE원 투피엠 등등 다 좋아하고 예전의 비슷한 부류에 비해 실력이나 음악적으로 정말 많이 늘었다. 이런 프로페셔널 뮤직 엔터테인먼트라면 어디 내놔도 꿀릴 것 없고 솔직히 뿌듯한 맘조차 있다.


 


대중음악에 대해서만큼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첨예한 필봉을 휘둘렀던 우원이 이렇게 유해져 있는 걸 보면, 늙은 것이기도 하겠지만 이 친구들도 그만큼 발전한 게 맞다. 그렇게 이쪽 관련해서는 그냥 조용히 살려고 했다.


 


근데 말이다


 


씨엔블루, 니들이 인디라고…?


 


인디 아티스트들이 어떻게 지금까지 버텨 왔는지, 인디의 모토와 정신이 먼지, 개인적으로는 햇빛 하나 안 들어오던 지하실에서 5년을 버티고 있던 16년 전의 내 머리 속에서 그 발상이 어떻게 생겨난 건지,


 


알 턱이 없는 너희들이?


 



 


우원이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인디레이블의 발상자로서 공로를 인정받으려 한 적도 없고,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활동이 두 세 군데서 같이 시작된 것도 사실이고 (홍대앞 펑크클럽 드럭이 대표적), 무엇보다 꿈이 컸던 만큼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는 느낌 땜에 쪽 팔려서라도 잘 안 꺼내는 주제다.


 


하지만 이제 그 실패를 넘어 아예 역으로, 인디라는 말이 상업적으로, 있어 보일려고 이용까지 당한다면 더 이상 입다물고 있을 수는 없을 터.


 


다 좋다. 열심히 엔터테인먼트 만들어서 해외진출하고 돈도 많이 벌고 국위선양도 맘껏 하라는 거다. 버라이어티 나와서 재롱 부리고 웃고 떠들란 말이다. 그런 거는 다 즐겁게 봐 주고 같이 웃고 마냥 귀여워해 주겠단 말이다.


 


허나 니들이 함부로 손대지 말아야 하는 곳은 건들지 말라는 거다.


 


인디란 말이 성스러워서?


 


아니, 그 반대다. 땀냄새에 소주 냄새에, 얼기설기 붙인 계란판의 석유 냄새 가득한 지하 연습실 따위가 성스러울 게 머가 있겠냐. 무거운 기타 앰프 싸들고 간들 밥값도 차비도 안 나오는 공연이 성스러울 턱이 있냐. 녹음도 몬하고 앨범은 생각도 몬하고 그저 어쩌다 이름 알고 찾아오는 열 몇 명 관객이 고마워서 땀 뻘뻘 흘리며 오늘도 달려보는 그 초라함이 개뿔이 성스럽냐.


 


인디는 단 하나 외에는 아무것도 가진 게 없다. 그건 바로 진정성이다. 마 원한다면 그 진정성의 머리에 담뱃재를 떨어도, 침을 뱉어도 좋다. 그러나 그걸 훔쳐서 팔아먹는 꼴만은 두고 볼 수 없다.


 


거기까지는 가면 안 되는 거였다. 그래서 니들은 거기에 책임을 져야 한다.


 


글고 기왕 이렇게 된 거 파랑새 진짜 함 밀어 보자. 십몇년 전에 개지랄을 떨어도 안 만들어지던 그 계기가 이런 식으로 조성될지도 모를 일 아니냐.


 


우원이 왜 요즘 댄스 엔터테인먼트 음악 좋아하는지 솔직히 말해 볼까나? 놀랍게도 이 음악들에 내가 밴드하던 시절의 락 포스들이 녹아 있기 때문이다. ? 지금 이 작곡가들이 다 그 시절 음악의 자양분을 먹고 자란 세대이기 때문일 거다.


 


아브라카다브라의 맛있는 도입 리프와 기막힌 드럼 그루브를 싸구려 댄스가요만 알던 넘이 만들 수 있나? 소녀시대 곡들에 수시로 등장하는 훵키 리프와 라틴 퓨전의 맛깔남, 카라의 ‘Wanna Pull Out the Sword’ 헤비록 버전 등등 요즘 엔터테인먼트 음악에 녹아 있는 수많은 이런 요소들은 결코 90년대의 싸구려 뽕댄스를 바탕으로 한 게 아니다.


 


우원은 지금 이 작곡가들이 예전에 좋아하고 연주하던 음악들을 댄스에 섞어서 조금씩 주류로 끌어올리고 있다고 본다. ‘소원을 말해봐아브라카다브라같은 대박 히트곡들도 잘 생각해 보면 예전의 국내댄스에 비해 훨씬 어렵고 복잡한 음악들이다. 이게 통하는 것은 오로지 소녀시대와 브아걸이라는 대중적 매개체를 통해 전달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걸 밴드와 신인급 여성 솔로들에서 이 현상이 두드러진다.


 


그리고 이런 일련의 활동들이 록이나 훵크 등 다양한 음악 쟝르에 대한 대중적인 거부감을 없애는데 크게 일조하고 있다. 우원이 아무리 공인된 소덕이라고 해도 이런 음악적 공감대와 기대도 없이 무조건 추종하지는 않는 거다. 그 동안 살아온 흔적이 있지 제길.


 


그렇다면, 이제 왜 인디라고 안될 것인가?


 


더 이상 그리 낯선 음악도 아니고 어렵지도 않고, 거부감을 일으키는 문화적, 음악적 장벽들은 어느새 대부분 제거되어 있다. 그렇기 땜에 아이돌 밴드가 인디 밴드 음악을 표절하는 사태까지 생겨나는 지금이다.


 


너무도 오랫동안 기다리고 또 포기했던 기회, 인디뮤직을 버젓한 산업으로 성장시켜 울나라 대중음악의 자양분으로 발전시킬, 그 절호의 기회가 지금 오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니 일단 파랑새부터 왕창 밀자꾸나. 그러면서 세상에 인디씬의 존재를 다시 알리고 새로이 조명 받게 하면 된다. 대중들로 하여금 그 중에 다른 보석들도 하나씩 추려서 즐길 수 있도록 여건을 만들어 갈 수도 있다. 암튼 지금 이 상황은 우리 인디씬이 그간 얼마나 열심히 해 왔고 음악적으로 세련되었고 또 좋은 음악들이 많이 나왔는지 만천하에 보여주는 계기로 삼기에는 충분하다.


 


다른 거 다 떠나서 이거 얼마나 쿨한 일이냐. 가카 치하에서 도무지 쿨함이라곤 찾기 힘든 요즘, 음악팬들이 대동단결해서 한번 벌여 볼만한 일 아니냐?


 


이거 어케 생각하는지, 지금부터 한마디씩 해 바라


 


파랑새 띄워주기도 열심히 한 트위터 : patoworl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