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핑키핑키


 



 


그랬다. 제목 그대로 난 2007년 대통령선거에서 이명박씨를 뽑았다. 48.7%라는 득표율이 나왔으니 놀러 안가고 투표장 간 사람들 중에 절반이 이명박씨를 뽑았단 이야기인데, 내가 그를 뽑은 것이 고백하고 자시고 할 일이 아니라고 한다면 딱히 틀린 말도 아니다. 하지만 지금 내가 매일 아침 출근하는 곳이 딴지이고, 다스베이더 음악의 벨소리가 울리면 받는 전화가 딴지총수의 전화이고, 쥐덫이 그려진 마우스패드를 쓰며, ‘이의있습니다’ 티셔츠를 입고서, 이명박씨가 혀를 낼름거리는 얍실한 다크포스를 내뿜는 순간을 캡쳐하기 위해 두 눈을 부릅뜨고 모니터를 갈구고 있다면 조금 이야기가 다르다.


 


굳이 ‘넌 저번에 누구 뽑았냐.’ 물어보고 다니는 게 어쩌면 무척이나 어색한 일일 수도 있는 딴지에서 난 진짜로 그렇게 물어보고 다닌 바 있다. 결과는 예상했던 대로였다. 딴지에서 이명박씨에게 표를 던진 사람은 유일하게도 나, 핑키핑키 뿐이였던 것이다.


 



꾸웩~!


 


보통 서른 넘어가면 주변에 정치적 견해가 엇비슷한 사람만 남게 마련이다. 나야 이제 갓 서른 중반을 향해 치닫는 적다면 적은 나이지만, 그래도 정치적인 논쟁 자체가 꽤나 피곤하게 느껴진다. 어차피 나나 상대방이나 쥐뿔 아는 것도 없고, 정리되지도 않았으면서 양아치마냥 주워 담아놓은 건 많아서, 토론이나 논쟁이랍시고 한다는 게, 허접한 세간 살림 꺼내놓고 누가 더 잘사는 지 비교하며 자존심 싸움하는 것과 별반 다를 게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렇다보니 친구들을 만나거나, 동아리 선후배들을 만나는 자리에 나가면 언제나, 늘 이명박씨에게 투표한 사람은 나 뿐이였다. 술을 즐기는 한 친구가 정립한 이론에 따르면 남자들이 모이는 술자리에서는 항상 사회과학적 법칙이 적용되는데, 술자리 초반에는 각자 사는 이야기가, 중반에는 정치/ 경제 등 세상 돌아가는 꼬라지 이야기가, 후반에는 틀림없이 여자와 군대 이야기로 귀결된다는 법칙이 그것이다. 나름 자신의 이론의 당위성을 설파하며 그 이론에 이름까지 붙여두었다. 이른 바 ‘깔대기 효과’다.(깔대기처럼 여자와 군대이야기로 빨려들어감) 때문에 술자리 중반, 세상 돌아가는 꼬라지 이야기가 나오면 빠질 수 없는 안주가 이명박씨인데, 그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하면, 난 현재의 꼬라지에 책임있는 한 사람이기 일쑤였다. 유일하게 혼자이니 늘 편도 없었다.



지난 번 삼겹살테러식 할 때에는 딴지스와 손님분들까지 해서 한 4~50명 모였던 것 같다. 대부분 처음 보는 사람들이다보니 자리 배치에 따라 그저 마주앉은 분들과 대화를 나눌 수 밖에 없는 상황이였는데, 어쩌다 나와 맞은 편 분과 이야기가 그쪽으로 흘러 내가 이명박씨를 뽑았다는 이야기가 나오게 되었다. 그때 저 쪽 멀리있는 테이블에서 소머즈의 귀를 가진 어떤 여자분에게서 태클이 들어왔다.


 


“뭐라구요? 이명박을 뽑았다구요? 말이 돼?”


 



이명박을 뽑았던 게냐?


 


나름 이유가 있었다고 변명할 찰나의 시간은 주변 상황상 주어지지 않았고, 난 그날 처음 인사한 누군가로부터 째려봄을 당했다. 딴지에서 주최한 모임에, 그것도 딴지티셔츠를 구매하고, 게다가 그 티셔츠를 입고 찍은 인증샷이 당선되서 모인 분들이였으니, 이명박씨에 대한 애끓는 심정이야 오죽했으랴. 오늘은 그 못다한 변명을 해볼까 한다.


 


때는 2002년, 월드컵 4강신화가 있었고, 미선이효순이 장갑차 사건이 있었던 그 해. 대통령 선거도 있었다. 당시 나에겐 만난지 1년이 갓 넘어가는 동갑내기 여자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는 직장인이였고, 난 예비역 복학생이였다. 당시 총학생회에서 곁다리로 일도 하고, 여성위원회일도 돕고 있었다. 염병은 꽂아보지 못했고, 파이프는 잡았으되 휘두르지는 않은 정도의 (위법하지만 무죄가 아닌가!) 학생운동 경력이 있을 뿐이였지만, 대선에 관한 나의 관심만큼은 매우 충만했다. 연초만 해도 거의 듣보잡이였던 (법원은 명예를 훼손하는 말이라지만, 그 분이라면 껄껄 웃고 넘어가시리라 믿는다.) 노무현이라는 정치인을 알게 되면서, 나에겐 한 가지 큰 과제가 생겼다. 여자친구를 설득하여 노무현 후보에게 투표하게 하는 것이 그 것.


 



 


주변 사람 하나 마음으로, 진심으로 설득해내지 못하면서, 거창하게 시국이 어떻네, 이데올로기가 어떻네 하는 생활 따로, 운동 따로의 가오잡기식 학생운동에 본능적인 거부감을 가져오던 나로서는 가장 가까이 지내고, 가장 많은 대화를 나누는 사람과 정치적 방향을 같이 한다는 것은 꽤나 중요한 문제였다. 무리해서 떼쓸 문제는 아니라는 전제하에 내가 배운 모든 정치학적 지식과 짧은 정치적 식견을 총동원하여 그렇게 설득해 나갔다. 당시 이 과제는, 민정당 시절부터 1번만 찍어오던 부모님에게도 마찬가지로 해당되었는데, 몇 번의 대화가 없었음에도 부모님은 노무현 후보의 열렬한 지지자가 되어 주셨었다. 딱히 부모님을 실망시켜 드린 적 없던 3남매가 똑같이 이야기를 하니 일단 믿고 들어주셨던 게 컸던 것 같다.


 


하지만, 여자친구를 설득하는 건 쉽지 않았다. 여자친구는 유난할 정도로 부모님의 사랑을 많이 받았었고, 부모님 말씀이라면 일단 따르고 보는 게 몸에 배어 있던 터였다. 대학시절 풍물패에 들고 싶었지만, 부모님이 공부에 방해된다고 말씀하셔서 마음을 접었고, 심지어 가톨릭 집안임에도 성당에서 중고등부교사 하던 걸 그만두라 하셔서 그만두기도 했었다. 그런 여자친구의 부모님은 포항과 대구 출신으로 고향 모교의 재경동창회장을 맡기도 하는 등 고향사랑이 남다른 분들이였는데, 정치적 포지션이야 당연하다 할 것도 없이 한나라당이셨다.


 



김영삼도 부산사람 아니다


 


정치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면, 여자친구도 나름의 의견을 많이 이야기했는데, 나와 견해가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한나라당의 지저분한 행태, 당시 이회창 후보에 관한 실망, 변화가 필요한 시점에서의 노무현 후보에게 걸 수 있는 희망. 다 나와 다르지 않았다. 문제는 단 하나. 그 때까지 여자친구는 부모님의 뜻을 거슬러 본 적이 없었다는 점이였다. 대선에 관한 이야기를 아무리 해도, 여자친구의 결론은 변하지 않았다. ‘네 뜻에는 동의하고 나도 그렇게 생각하지만, 부모님께 거짓말을 할 수는 없다. 나에게 크게 실망하실 것이며, 난 그런 부모님을 대하는 게 너무나 곤혹스럽다.’


 


나이가 스물이 넘었으면 성인이고, 투표권을 가진 시민이면 자신의 정치적 선택은 자기가 알아서 해야 되는 것 아니냐는 이야기, 자식의 정치적 선택에 관여하고 압박하는 부모님이 잘못된 거 아니냐는 이야기. 이런 식의 조언을 지금 와 더 들을 필요는 없다. 이미 내가 당시 여자친구에게 다 했던 이야기들이니까. 더 심하게도 이야기했었고, 다투기도 했었다. 하지만, 안되는 건 안되는 거더라.


 



 


대선은 다가오고 있었지만, 난 어느 순간부터 마음을 접었다. 그냥 진심을 다했고, 정성을 다했으니 됐다고 생각했고, 주변에 투표를 귀찮아서 안할 것 같은 선후배들을 만날 때마다 독려하는데만 열중했다.


 


그리고, 대선 전날 밤. 여론조사는 비등하게 나가는 듯 했지만, 난 점점 더 안 될 것 같다는 예감에 사로잡혀갔다. 어디 우리 역사에서 그런 식으로 소위 주류를 눌러 본 적이 있었던가. 민주주의의 역사라는 것도 크건 작건 어쨌거나 싸움의 역사였고, 승리의 역사일 진데, 우리는 얼마나 일천한 승리의 역사, 민주주의의 역사인가.


 


자신감이 한 없이 바닥으로 고꾸라지던 대선 전날 밤. 난 더 기가 막힌 뉴스를 보게 되었다. 지금은 한나라당에서 당대표 자리를 꿰차고 있는 정몽준씨가 뭐 그리 삐쳤는 지 술쳐먹고 ‘나 때려칠 래.’하고 지지철회를 선언했다는 이야기가 TV에서 긴급 속보로 쏟아지고 있었다. 아,,, 헛웃음 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몇 시간 후, 정몽준씨 집 앞에서 꼭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난 그렇게 보였다.) 문전박대 당하는 노무현 후보의 모습이 나왔다. 당시 열렬한 노무현 지지자들이야 연설만 들어도 눈물을 쏟는다고 했지만, 내 체질은 그렇지 않았다. 손발이 오그라드는 느낌? 하지만 그 날은, 나도 그냥 그렇게 눈물을 쏟았다. 분하고 원통해서.


 



당시 정몽준씨의 면담거부 이유 : "나 잔다."


 


자정을 넘긴 시간, 여자친구에게 전화를 걸었고. 푸지게 울었다. 그리고 물었다.


 


“너도 뉴스 봤지?”
“어...”
“네가 보기에도 안 될 것 같지?”
“어.......”


 


난 이야기했다. 그냥 난 너와 같은 사람에게 투표하고 싶다고. 특히 이 사람이라면 꼭 그렇게 하고 싶다고. 여자친구는 한참을 고민하고 말했다. 네가 원하는 대로 내일 노무현을 찍겠다고. 그리고, 영원히 그 사실만큼은 부모님께 거짓말을 하겠다고. 하지만 여자친구는 그렇게 부모님께 거짓말을 한 마음의 짐을 덜고 싶으니, 내가 노무현이라는 사람이기에 그러는 거라면, 다음 번 투표할 때는 우리 부모님이 원하는 사람을 찍을 수 있겠냐고 물었다.


 


난 흔쾌히 동의했다. 떨어질 것이 확실하다고 생각했지만, 여한은 없을 것 같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노무현에게 던지는 한 표와 같은 무게를 가진 표가 다시 있을까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오케이


 


그리고, 다음날 저녁6시. 엄기영 앵커가 노무현의 승리를 예고하는 출구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내 평생에 기뻐서 발을 굴러 점프를 한 적이 세 번 있는데, 한 번은 ARS로 대학본고사 합격을 들었을 때, 그리고 내가 기획한 불우청소년돕기 자선콘서트의 출연자를 섭외하지 못해 고생하던 중 방송국PD로 있는 선배가 자신이 힘써서 섭외해 준 가수들의 명단을 전화로 불러 줬을 때, 그리고 2002년 대선 출구조사 발표를 들었을 때다.


 


제일 먼저 여자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로 들려오는 목소리는 참 살벌했다. 집안 분위기 엉망이고, 아버지는 술 드시러 나갔다고 했다. 부모님의 실망감이 대단하여, 차마 부모님하고 대화를 나누기도 거북스럽다고 했다. 그리고는 말했다. “너 다음 번에 내가 찍으라는 사람 찍어!” 기쁨에 들뜬 나는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았다. “당연하지!”


 


취임 이후 5년간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조선일보의 날 선 사설이 실릴 때마다, (거의 매일이였단 말이다.) 여자친구의 부모님은 집안에서 살벌한 독설을 내 뱉으셨고, 효심 충만한 여자친구는 그 때마다 죄송스러운 마음을, 나에게 “너 다음 번에 내가 찍으라는 사람 찍어!”라고 말함으로서 풀었다.


 



나 떨고 있니?


 


그리고 2007년 대선 당일. 새벽같이 일어나 투표장으로 향했다. 그날 보다 더 빨리 투표장에 간 적은 없었다. 그 때의 마음은 그저 ‘매도 먼저 맞는 게 낫지.’였다. 하지만, 맞을 때는 먼저 맞으나 나중에 맞으나 아픈 건 마찬가지 아닌가. 기표도구에 인주를 묻히고, 이명박 기표란에 조준하고 고개를 돌리고 찍었다. 내가 그를 찍는 모습을 차마 내 눈으로 보기 어려웠다. 그렇게 투표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담배를 반 갑은 피웠던 것 같다. 어차피 번민은 없었다. 확고하게 마음을 다잡고 간 투표장이였으니까. 하지만 정말이지 기분은 참 더러웠다.


 


그 때의 일을 친구들에게 이야기할 때면, 난 ‘꼭 영혼을 판 기분이였어.’라고 말했다. 그러면 친구들은 그런 것도 미처 생각 못했냐는 듯 말하곤 했다. “어차피 기표소에 들어가면 누가 보지도 않는 거 그냥 다른 사람 찍지 그랬냐.”고. 물론 그 생각을 아예 안했던 건 아니다. 여자친구도 그걸 걱정했는지, “너 이명박 찍는 거 폰카로 찍어와.”하며 증거를 요구하기도 했다. 기표소에서 폰카를 찍으면 무효표가 된다는 걸 모르고 한 이야기다. 아무런 증거도 남길 수 없는 기표소. 큰 유혹이였다. 하지만 그로 인해 약속을 지키고 안 지키고는 온전히 나의 몫으로 남겨져 버린 게 문제였다. 상황을 코미디로 만들 수도 없고, 지나가는 에피소드로 격하시켜 벗어날 수도 없는, 진지한 양심의 문제가 되어버린 것이다.


 



진지하고 싶지 않았다


 


2007년 대선을 앞두고, 난 어쩔 수 없이 노무현을 고민할 수 밖에 없었다. 그의 집권 5년간 그를 계속해서 지지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2007년 즈음에 난 반노라 할 수는 없어도, ‘비노’에 가깝게 다가가 있었다. 참여하지 않으면서 임금에게 모든 책임을 돌리고, 뒷짐지고 나 앉아 그저 모든 것을 위에서 잘해주기만을 바라는 그 놈에 ‘선량한 백성의 근성’이 되살아 났던 게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난 그 비판을 부인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런 그 때의 마음이 이명박을 찍어버리는 결정을 하는데 도움을 준 것은 아니였다. 오히려 그랬다면, 기권을 하거나 다른 후보를 찍었을지 모른다.


 


이명박을 찍고 안 찍고의 문제가, 나에겐 2002년의 나를, 2007년의 내가 올곧이 받아 안을 것이냐, 그렇지 않을 것이냐의 문제가 되어버렸던 것이다. 2002년에 징징 짜대던 내 모습을 간단히 부정해 버린다면, 당시의 약속도 별 것 아닌 에피소드가 될 것이고 5년이란 시간이 흘러 그런 약속 따위 부정한다고 해서 양심에 거리낄 건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2007년에 나의 판단은 그렇게 내려지지 않았다. 2002년에 난 진지했고, 5년 후의 나의 선택을 담보하면서까지 그렇게 꼭 그가 당선되길 바랬던 그 마음도 진짜였다. 그리고, 또 다시 그런 상황에 놓여진다면 같은 선택을 할 것인가의 질문에 대한 2007년 나의 대답은, "Yes"였다. 그런 대통령을 가져본 국민으로 난 계속 남고 싶으니까. 그래서 난 그렇게 약속을 지켰다.


 


영혼을 건 계약을 했던 그 여자친구는 어느덧 내 아내가 되었고, 두 달 후면 태어날 아이를 임신해있다. 신혼여행 이후로 한 번도 여행이란 걸 가보지 못했는데, 아이를 낳고 몸조리가 끝나면, 첫 번째 우리의 가족여행지는 봉하마을이 될 것 같다. 가서 맘으로나마 이야기 해야겠다. 약속을 지켰다고. 그런 약속을 할 수 있게 해주어서 고맙다고.


 



대선출마 연설


 


 


영상편집 및 모바일 및 PC수리 및 네트웍설비 및 출세목적 총수님 커피 담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