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02.18.목요일
딴지조기축구단장 필독
1
토털풋볼은 클럽 팀 아약스에서 제조되고 처음 시전되었지만, 국가대표팀을 통해 돌풍을 일으켰다는 점에서 무척 특이하다. 결국 70년대 이 전술을 완벽하게 구현한 것은 오렌지군단이었다. 따라서 대표팀의 행적을 계속 따라가 볼 수밖에 없다. 헌데 이 시리즈를 연재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지금 78년 아르헨티나 월드컵의 오렌지군단을 이야기하기란 참 곤란하다. 이건 아르헨티나 편에서 중요하게 다뤄져야 하기 때문이다.
꼭 아르헨티나가 결승전에서 네덜란드를 누르고 우승해서가 아니라, 그 우승에 얽힌 아르헨티나만의 비화가 많기 때문이다. 여하튼 네덜란드에도 웃지 못 할 일은 있었다. 요한 크루이프가 78년 월드컵 불참을 선언했기 때문이다. 이유는 단순하면서도 황당했다.
“월드컵은 한 번이면 충분하다.”
운동선수의 신체가 국가의 재산처럼 취급되는 한국이었다면 그는 엄청난 비난을 받았을 것이다. 네덜란드인들은 그렇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크루이프를 월드컵에서 뛰게 하는 게 국가적인 과제가 되어버렸다. 여왕까지 나서서 크루이프를 만류했지만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응? 뭐라고?
크루이프는 다시 자세한 입장을 밝혔다.
“독재자(아르헨티나 대통령 호르헤 비델라)가 개최하는 월드컵엔 참가할 수 없다.”
크루이프의 결정은 정치적으로 올바른 것이었을 진 모르지만, 조국의 대표팀에는 전력공백을 선사했다. 다행스럽게도 대표팀에는 그의 ‘부관’ 요한 니스켄스가 있었다. 니스켄스가 사령관 역할을 훌륭히 대신했고 소용돌이는 건재했다. 하지만 네덜란드는 아르헨티나의 홈 어드밴티지에 밀려 우승하지 못했다. 아르헨티나 편에 앞서 미리 말하자면, 78년 월드컵은 역사상 가장 불공정한 월드컵으로, 거의 대회라고 할 수도 없었다.
준우승도 훌륭한 성적이지만, 이때의 네덜란드는 우승을 놓치기에는 너무 아까운 팀이었다. 오렌지군단은 축구혁명을 맹렬히 주도하고 있었다. 준결승전에서 네덜란드에 패한 이탈리아의 축구영웅 파울로 로씨는 이렇게 말했다.
“커피를 마시듯 간단하게 포지션을 바꿔 돌진해 온다.”
2
78년 월드컵 이후 리누스 미헬스는 대표팀을 떠난다.
왕의 부재(不在)...
네덜란드의 전력은 곤두박질쳤다. 2대회 연속 준우승 팀인 네덜란드는 82년 월드컵 지역예선에서 탈락했다. 84년 유럽 선수권과 86년 멕시코 월드컵에서도 본선 무대를 밟지 못했다. 한마디로 폭삭 주저앉은 것이다. 그렇다면 토털풋볼은 거품이었을까?
문제는 토털풋볼이 전술이라는 데 있었다. 전술로 승리하던 군대는 전술가가 떠나면 강점을 잃게 된다. 게다가 크루이프와 니스켄스 등 ‘미헬스의 아이들’은 미헬스 감독이 아약스 시절부터 십 년 가까이 조련해온 전력이다. 당연히 이때쯤 늙을 수밖에 없다. 늙으면 당연히 대표팀에서 빠지고, 하위리그 팀에서 용돈을 벌며 은퇴를 준비하게 된다.
미헬스도 없고 미헬스의 아이들도 없는 네덜란드 대표팀의 수준은 당연히 미헬스 이전으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수준은 ‘변방의 약체’였다. 오렌지 돌풍은 그 드라마틱한 등장과 대칭을 이루듯 순식간에 몰락했다. 네덜란드는 세대교체에 실패했다. 토털풋볼은 미헬스식의 강도 높은 체력훈련과 전술이해 없이는 구현이 힘들다. 미헬스의 직계 제자들에게 오래 의존하다보니 이들이 물러날 때쯤엔 전력이 텅 비어버린 것이다.
토털풋볼을 되살리려면 첫째 좋은 감독, 둘째 전천후로 움직이되 되도록 개성은 없는 ‘개미떼’가 있어야 했다. 그것도 아니라면 애초에 좋은 선수가 있어야 한다. 개미떼는 장기간의 체력훈련과 지속적인-이런 표현을 써도 되려나- ‘갈굼’이 없이는 조련되기 힘들다. 미헬스는 84년부터 다음 해까지 다시 대표팀을 잠깐 맡지만, 별다른 성과는 없었다. 기본적인 조건이 형성되지 않았던 것이다.
오렌지 돌풍은 하나의 해프닝으로 끝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네덜란드는 80년대 중후반, 기적적으로 세대교체에 성공한다. 마침 재능으로 가득 찬 싱싱한 오렌지가 몇 있었다. 70년대의 토털풋볼을 요한 크루이프, 요한 니스켄스, 렌센브링크, 아리에 한이 떠받쳤다면 80년대엔 마르코 반바스텐, 루드 굴리트, 프랑크 레이카르트, 로날드 쿠만이 있었다.
미헬스는 1986년 대표팀 감독에 취임한다. 왕의 귀환이었다. 그리고 이번 귀환은 진짜였다.
3
축구에는 ‘오렌지 삼총사’라는 말이 있다. 이는 80년 후반 유럽을 풍미한 네덜란드 대표팀의 ‘골 생산 라인’ 삼인방을 뜻하는 말이다. 이 역사적인 트리오를 소개하는 건 필자로서 의무라고 본다. 먼저 마르코 반바스텐.
꽤 훈남으로 늙었다. 오렌지 넥타이가 패션 포인트. 수트 포켓의 스티치 장식은 네덜란드 대표팀 문장이다.
네덜란드에는 “신은 8일째 마르코 반바스텐을 창조했다.”는 말이 있다. 신의 8일째 창조물로 불리는 이유는 그만큼 완벽했기 때문이다. 그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기어이 골을 넣는 득점기계, 무결점 스트라이커였다. 반바스텐은 빠르고 정확하고 에누리 없는 플레이로 어처구니없을 정도의 골 결정력을 자랑했다. ‘스트라이커의 교과서’라는 별명을 얻은 그는 너무 효율적이라 재미가 다소 떨어지는 자신의 플레이스타일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9개의 환상적인 골과 10개의 평범한 골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당연히 10개의 골이다.”
다음은 루트 굴리트.
후훗♡
자메이카의 뮤지션을 연상시키는 외모와는 달리(현재는 많이 준수해졌다.) 지적인 성향과 넓은 인품, 순한 성격으로 지금까지도 네덜란드인들에게 사랑받고 있다. 그런 만큼, 화를 잘 내지 않는 인물이다. 그런데 페예노르트 감독 시절 이적해 온 송종국에게는 ‘왜 네덜란드어를 잘 못 하냐’는 이유로 질책한 적이 있다. 무려 5개 국어(네덜란드어,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이탈리아어)를 능숙하게 구사하는 굴리트에게 송종국의 네덜란드어 실력은 게으름의 결과로 비춰졌던 거다.
굴리트는 진정한 올라운드 플레이어였다. 최전방 공격수에서부터 최후방 수비수까지, 시시각각 모든 포지션을 소화할 수 있었다. 굴리트의 진정 대단한 점은 공격수일 때나 미드필더일 때나 수비수일 때나 세계 최고레벨이었다는 것이다. 전방에서는 강력한 슈팅과 타점 높은 헤딩으로 상대 문전을 위협했다. 미드필드에서는 발군의 스피드와 현란한 패스로 상대팀을 농락했다.
수비 라인으로 빠졌을 때는 리베로 혹은 스위퍼 역할을 했다. 나중에(아마도 이탈리아와 독일 편에서)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리베로나 스위퍼나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리베로 포지션이 가능하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명수비수다. 그런데 원래 수비수도 아닌 선수가 ‘때에 따라’ 리베로 역할을 소화했다는 것은 축구를 오래 지켜본 사람들에게는 정말 입이 떡 벌어질만한 일이다. 이에 더해 굴리트의 플레이는 아름답기로 정평이 나 있다. 이는 건조한 득점기계 반바스텐의 플레이와 묘하게 맞아 떨어져 시너지효과를 일으켰다.
마지막으로 프랑크 레이카르트.
최근 FC 바르셀로나 감독 시절
레이카르트는 반바스텐과 마찬가지로 토털풋볼 족보에서 종갓집에 소속되어 있다. 그는 ‘성지’ 아약스에서 프로생활을 시작했다. 그때 아약스의 감독이 요한 크루이프였다. 이천년 대 들어 침체에 빠진 바르셀로나를 완벽히 부활시키는 등, 현재 세계 명감독 순위 최상위권에 들어가 있다(물론, 반바스텐 역시.).
레이카르트가 공을 뺐고→굴리트가 운반하여→반바스텐이 득점하는 ‘골 생산 라인’은 화려하고 전격적이었으며 효율적이었다. 한마디로, 강력했다. 하지만 삼총사가 있으면 ‘달타냥’도 있는 법. 로날드 쿠만을 빼놓고 얘기하면 그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쿠만은 엄청나게 선이 굵은 ‘괴선수’였다. 그의 장기는 셋. 첫째는 경기를 통렬하게 관통하는 롱패스. 둘째는 어이없을 정도로 멀리서 쏘는 롱 슛. 세 번째는 이름 하여 ‘로케트 프리킥’. 별칭에서 알 수 있듯 일반적인 프리킥이 아니다. 거리와 위치를 불문하고 빨랫줄처럼 뻗어나가 네트에 작렬하는 이 말도 안 되는 프리킥 능력은 상대팀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왜 로케트인지, 보면 알 수 있다. 영상 중간에 롱 슛도 나온다.
‘괴선수’란 표현을 썼다고 재능과 본능이 묘하게 결합된 야수의 이미지를 떠올리면 안 된다. 롱패스와 롱 슛의 달인이라는 건 넓은 시야와 날카로운 판단력을 지녔다는 뜻이다.
쿠만은 대표적인 '바르작스'로, 토털풋볼 2세대 중 가장 혈통이 순수하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아약스에서 요한 크루이프의 지도를 받았다. FC 바르셀로나에서 뛸 때도 크루이프의 지도를 받았다. 본 시리즈 네덜란드 2편에서 자세히 다루었지만, 이 루트는 매우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쿠만 역시 현재 뛰어난 감독으로 인정받고 있다.
참고로 로날드 쿠만의 집안은 축구 명문가다. 아버지 마틴 쿠만은 네덜란드 대표선수였다. 형 에르윈 쿠만도 마찬가지로, 동생 로날드와 오랫동안 국가대표팀 동료가 된다. 에르윈은 은퇴 후 페예노르트 감독을 거쳐 현재 헝가리 대표팀 감독을 맡고 있다. ‘삼부자(夫子) 국가대표’는 쿠만 가문만의 독특한 이력이다.
쿠만의 존재감이 결코 가볍지 않은데, 왜 오렌지 ‘삼’총사일까? 오렌지 삼총사가 뭉쳐 다녔기 때문이다. 에레디비지에(네덜란드 리그) 부동의 명문인 아약스(반바스텐, 레이카르트), PSV 아인트호벤과 페예노르트(굴리트) 출신의 이들은 비슷한 시기에 세리에A의 AC 밀란에 이적한다. 특등품 오렌지 3개를 한 바구니에 쓸어 담은 AC 밀란은 클럽 역사상 최전성기를 맞는다. 밀란은 유럽의 명문팀들을 차례로 정리하며 88년부터 두 시즌 연속 UEFA 챔피언스 리그에서 우승했다.
AC 밀란 유니폼을 입은 오렌지삼총사의 모습.
... 반바스텐은 내꺼?
삼총사는 밀란을 대표하는 아이돌이 되었다. 오렌지 삼총사(Orange trio, 혹은 Dutch trio)란 그룹명은 밀란의 팬들이 붙여준 것이다. 즉 삼총사는 대표팀의 ‘베스트 3’가 아니라는 얘기다. 쿠만은 결코 <플러스 알파>가 아니다. 그렇다고 삼총사보다 뛰어나다고 할 수도 없다. 넷은 각자 너무나 뛰어난데다가 우열을 가리기 힘들 정도로 스타일이 달랐다.
4
오렌지군단의 멤버구성은 훌륭했다. 하지만 훌륭하다고 가만히 내버려둘 리누스 미헬스가 아니다. 미헬스는 먼저 굴리트 관리에 들어갔다. 74, 78년의 아우라를 다시 회복하는 데 있어 굴리트는 양날의 검이었다. 굴리트가 너무 뛰어난 플레이메이커였기 때문이다.
많은 활동량으로 수비와 공격을 모두 소화하는 선수는 토털풋볼에 필수적이다. 문제는 넘치면 모자람만 못한다고, 굴리트가 너무 뛰어다녔다는 것이다. 이처럼 절대적인 에이스가 있다 보면 동료들이 믿고 맡겨버리는 경향이 있다. 토털풋볼은 책임이 균일하게 분산되어야 한다. 요한 크루이프의 경우 동료들 하나하나의 장점을 극대화시키는 재주를 갖고 있었다. 굴리트는 혼자만 눈에 띄었다.
그 유명한 ‘골 생산 라인’도 문제였다. <레이카르트가 공을 뺏고 굴리트가 연결하여 반바스텐이 득점하는> 공식은 그 자체로 매우 훌륭했지만, 미헬스의 축구철학과는 아귀가 맞지 않았다. 굴리트가 중간지대를 장악함으로써 수비수와 공격수의 역할이 딱 나뉘어져 버리기 때문이다. 게다가 굴리트의 플레이는 미헬스의 기준으로는 ‘쓸데없이’ 화려했다. 미헬스의 축구는 팀 전체의 기동이 화려해야 한다. 개인기의 화려함은 불필요하다.
원래 굴리트는 감독에게 세세한 명령을 받는 것을 싫어하는 자유방임형 선수였다. 성격 탓이라고 말한다면 불공평하다. 굴리트가 워낙 훌륭해 그냥 경기장에 방목하는 편이 더 효과적이었다. 그는 AC 밀란에서 특정한 포지션을 부여받지 않고(!) 알아서 뛰었다. 미헬스는 이 (당시) 현존 최고의 올라운드 플레이어를 딱 이렇게 대했다.
- 이제부터 너는 내가 시키는 것만 한다.
네...
즉 일부러 실력발휘를 100% 할 수 없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 때문에 다른 선수들의 움직임과 기여도가 비약적으로 올라갔다. 말하자면, 굴리트와 다른 선수들의 격차를 줄인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네덜란드는 십 년 전의 위력을 다시 갖추게 된다. 돌풍은 유로 1988에서 다시 점화되었다.
네덜란드는 첫 경기에서 당시 세계 최강으로 통하던 소련에 0:1로 패했지만, 2차전에서 만난 잉글랜드를 3:1로 깨끗이 정리했다. 아일랜드를 상대로는 1:0으로 승리했지만 경기력은 한 점 차 이상이었다. 4강전 상대는 하필이면 앙숙 서독이었다. 축구에서는 클럽팀 간이나 대표팀 간이나 원수관계가 종종 눈에 띄는데, 네덜란드와 서독의 악연은 여기에 반드시 포함된다. 물론 74년 월드컵 결승전 때문이다.
네덜란드의 감독은 14년 전과 마찬가지로 리누스 미헬스. 서독의 감독은 우승을 앗아갔던 ‘카이저’ 베켄바워였다. 데자부였다. 시합의 흐름은 74년과 마찬가지로 네덜란드가 주도했지만 결과만큼은 반대였다. 네덜란드는 ‘베켄바워의 후계자’ 마테우스에게 한 점을 내줬지만 반바스텐과 쿠만의 두 골로 승리, 마침내 복수에 성공했다.
네덜란드-서독전, 반바스텐의 한 방 장면
결승전 상대는 첫 경기에서 패배를 안겼던 소련이었다. 그동안 미헬스는 굴리트를 중원에서 이탈시키는 ‘만행’을 저질렀다. 기본적으로 부여한 포지션은 센터포워드였지만(그나마도 쿠만을 뒤에 배치시켜 역할을 분담시켰다.) 주로 오른쪽에서 뛰게 한 것이다. 이는 지금 크리스티아누 호나우두를 라이트 윙으로 출전시키는 것과 비슷한 결정이었다.
그런데 결승전에서는 굴리트를 반바스텐과 함께 공격 투톱으로 내세워버렸다. 미드필드에서 아예 빼버린 것이다. 그런가하면 쿠만을 레이카르트와 함께 최후방으로 보내버렸다. 황당할 만큼 과감한 용병술이었지만, 이게 먹혔다. 미드필드의 두 축이 전후방으로 빠져버리자 남은 선수들은 개미떼가 되어 전원공격, 전원수비로 공백을 메웠다. 굴리트는 자신의 역량을 공격에 집중했고, 뒤에서는 쿠만이 언제든지 특유의 장타를 때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상대에게 숨쉴 틈을 주지 앟는 미헬스식 공격축구였다.
네덜란드는 최강팀 소련을 압도하며 2:0으로 완승했다. 투톱 굴리트와 반바스텐이 한 골씩을 넣었는데, 반바스텐의 전설적인 두 번째 골은 축구팬이라면 꼭 감상해볼 가치가 있다.
'어떻게든 넣는' 반바스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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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로 1988 우승으로 축구혁명국 네덜란드는 마침내 응분의 보상을 얻는다. 문자 그대로 '할 만큼 한' 미헬스는 네덜란드 대표팀을 떠난다(분데스리가의 바이에르 04 레버쿠젠으로 갔다. 여기서 차범근을 지도하게 되는데, 이 이야기는 기회 있을 때 하겠다.). 다시 왕의 부재. 이후 네덜란드 대표팀의 위력은, 80년대 초만큼 큰 폭은 아니지만, 역시 떨어지고 만다.
네덜란드 축구는 대표팀이건 에레디비지에건, 미헬스의 영향력 아래 있다. 미헬스의 제자들이 지도자가 되어 축구판을 이끌고 있는 현재도 마찬가지다. 아직까지도 네덜란드는 명감독 공장이다. 전술적으로나 인재 생산의 측면에서나, 미헬스는 축구의 형태를 크게 바꿔놓았다.
우리는 (폭력성의 발산과 해소라는 측면에서) 지구를 오염시키고 또한 정화시키는 축구를 이야기할 때, 반드시 오렌지군단을 논해야 한다. 그러다보면 혁명의 발원지 AFC 아약스를 빼놓을 수 없다. 결국 리누스 미헬스라는 원류를 만나게 된다.
미헬스는 2005년 벨기에의 한 병원에서 심장수술을 받은 후 사망했다. 그는 위대한 지도자였다. 하지만 여기서 우린 말조심을 해야 한다. 김구 선생이나 간디도 ‘위대한 지도자’이기 때문이다. 축구는 선도 악도 아니기에 미헬스는 사실 가치중립적인 인물이다. 따라서 엄정하게는 ‘가장 성공한 축구감독’ 정도의 말이 적당할 것이다.
그는 축구를 더 격한 활동으로 바꿔놓았다. 관중(그리고 시청자)은 승패뿐 아니라 경기 자체의 영향도 받는다. 미헬스 때문에 늘어난 인류의 아드레날린 분출량은 얼마나 될까? 얼마나 많은 남성호르몬이 그 때문에 낭비되었을까? 나는 그가 지구인의 평균수명에 단 1초라도 영향을 끼쳤을 거라 믿는다.
미헬스는 축구라는 싸움판에 투여된 흥분제다. 나는 폭력에 반대하지만, 한편으론 영상과 이미지 등을 통해 폭력을 소비하는 인간이다. 이번 편에서 왕이라는 표현으로 그를 예우한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네덜란드 편은 다음 회에서 끝난다. 미리 말해두지만 다음 회의 분량은 짧을 예정이다. 어서 마무리 짓고 다음 편으로 넘어가자. 이탈리아 어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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